15가구 자녀 2~3명에 장학금 연 100만~200만원씩 지원 장학재단 만들어 아이들 자랄 때까지 약속 지킬 것
▲ photo 허재성 영상미디어 기자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지 꼭 10년이 되었다. 기자는 최근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제2연평해전 전사자인 한상국 중사의 부인 김종선씨 소식을 들었다. 지인은 “김종선씨가 을지학원 홍석보 이사장의 후원으로 뉴질랜드에 유학 중”이라는 얘기를 전했다.
제2연평해전(2002년 6월 29일), 천안함 폭침(2010년 3월 26일), 해군 링스헬기 추락사고(2010년 4월 15일), 공군정찰기 추락사고(2010년 11월 12일). 최근에 일어난 북한 도발 및 군 관련 사고들이다. 제2연평해전에서 윤영하·한상국·조천형·황도현·서후원·박동혁 6인이 전사했고, 이해영 원사 등 19명이 부상했다. 천안함 폭침 당시 46명이 순국했고 한주호 준위가 순직했다. 진도 앞바다에서 링스헬기 추락사고로 해군 4명이 순국했고, 전북 임실에서 공군정찰기 사고로 2명이 순직했다.
이들 사망자와 부상자는 누군가의 아들이고 남편이다. 또한 누군가의 아버지다. 그럼 그 누군가는 지금 어떻게 되었나. 세상은 유가족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아버지를 잃은 자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누가 돌보고 있는지를.
이들 유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후원하는 모임이 있다. ‘대한민국 수호천사 유자녀를 사랑하는 모임’(이하 천사모). ‘대한민국 수호천사’는 곧 순국 장병을 가리킨다. 천사모 회장은 비봉중고등학교 재단법인인 일지학원 이사장 홍석보(51)씨.
호국보훈의 달이 시작되는 6월 1일 서울 중심가의 커피숍에서 홍석보 이사장을 만났다. 비봉중고는 경기 화성시 비봉면에 있으며 유도 명문학교로 유명하다. 비봉중고의 재단이 일지교육재단. 비봉중은 홍 이사장이 태어나던 해인 1960년 조부인 일지 홍건표에 의해 설립되었다. 비봉중고등학교 교정에는 특별한 설립자의 동상이 보인다. 설립자 홍건표와 2대 이사장 홍성무. 홍석보 이사장은 3대째 학교 운영을 맡고 있다.
- 순국장병 유자녀를 돕는 데는 뭔가 사연이 있다고 보는데요.
이 질문에 그는 조부인 홍건표 일지교육재단 설립자와 얽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설립자 홍건표는 비봉이 고향. 유도가 9단으로 중고유도연맹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비봉중고가 유도 명문으로 자리잡게 된 데는 설립자의 유도 사랑이 큰 영향을 미쳤다.
“조부께서는 광복 후 반공청년단 용산지구단장을 지냈고 6·25전쟁 후 서울에서 버스사업으로 큰돈을 버셨지요. 서울 용산구 원효로 집 옆에 미군 막사를 이용해 만든 유도장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 유도장에 고아, 거지, 부랑자, 깡패들을 불러모아 밥을 먹였어요. 어린 시절 저는 밥만 먹으면 그 유도장에 가서 살았죠. 재미있는 형들이 거기에 많았으니까요.”
- 할아버지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았나요.
“조부께서 장손인 제게 나라사랑과 공산당의 실체에 대해 끊임없이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학교의 교훈은 설립자의 사상과 가치를 그대로 드러낸다. 비봉중고의 교훈은 이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나라를 사랑하고 서로 도와 내 고장을 일으키자’.
이것을 한자어로 바꾸면 애국(愛國)·협동(協同)·애향(愛鄕).
다시 홍 이사장의 말을 들어보자.
“초등학교 졸업하고서는 방학 때마다 비봉에 가서 지냈죠. 어렸을 때는 그 교훈이 촌스럽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커가면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죠. 어려서부터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게 자연스럽게 제 행동의 뿌리가 되었던 것 같습니다.”
선친도 유도 8단이었다. 선친은 대학졸업 후 간부후보생을 거쳐 장교가 되었다. 선친은 대령으로 예편했는데 육사 유도교관과 체육처장을 지냈다.
- 조부의 영향이 전부였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께서는 육군대위 시절 4년간 베트남전에 참전하셨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아버지가 집안에 안 계셨죠. 제 밑으로 여동생만 3명이 있어 집안에 남자는 나 혼자라는 생각을 하고 살았습니다. 잠을 자기 전, 항상 문단속은 내가 해야 했죠. 그때 아버지가 집에 없다는 게 어떤 것인지를 느꼈습니다.”
- 그런 경험은 흔히 있는 일인데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베트남전서 다쳐서 일시 귀국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와 김포공항에 나갔습니다. 그때는 환송객들이 청사 발코니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다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탄 미군 군용기가 활주로에 착륙했죠. 가장 먼저 전사자들의 관(棺)이 줄지어 나왔습니다. 어머니와 나는 그걸 보았습니다. 조금 뒤 비행기 트랩 위에 아버지가 나타나셨습니다. 목발을 짚고 한쪽 발은 깁스를 한 상태였죠.”
- 그때 많이 우셨겠군요.
“아버지는 아주 천천히 트랩을 내려오셨습니다. 저는 어렸지만 그 모습에 가슴이 너무 아팠습니다. 그런데 울지도 못했습니다. 할아버지가 남자는 울면 안된다고 해서. 어머니는 아버지 모습이 나타났을 때부터 집에 갈 때까지 우셨죠.”
- 아버님은 얼마나 한국에 계셨나요.
“몇 달 동안 집에서 같이 지내다가 부상이 완쾌돼 원대 복귀해야 했습니다. (베트남에) 가실 때는 정말 서운하고 또 불안했습니다. 아버지는 다리를 다쳐 고립되어 있었는데 미군 상사가 극적으로 구출해 주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베트남으로 돌아가실 때 어머니는 정말 많이 우셨습니다. 그런 사지(死地)로 남편을 다시 보내는데 아내로서 마음이 어떠셨겠어요.”
이렇게 말하곤 그는 잠시 시선을 돌렸다. 조금 뒤 말을 다시 이었다.
“이라크 파병이나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언론을 통해 볼 때마다 그때 어머니 마음이 어땠을까 하는 데 생각이 미칩니다. 또한 순직한 장병들의 부인들을 보면 어머니 마음이 간접적으로 느껴집니다. 비록 우리 아버지는 부상만 당했는데도 말이죠.”
그는 1993년 일지교육재단 이사장에 취임했다. 33세 때였다. 부친이 53세로 갑자기 별세하는 바람에 자리를 이어받았다. 처음 몇 년간은 정신없이 학교 일을 배웠다. 3년이 지난 후 그는 장학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부친의 아호(정재)를 따서 정재장학회를 설립했다. 정재장학회는 유도선수, 군경자녀 등을 대상으로 장학사업을 벌였다.
- 결정적으로 유가족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언제였습니까.
▲ 설립자 홍건표(앉은이)와 2대 이사장 홍성무 동상. photo 일지교육재단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이 일어난 직후였죠. 김대중 대통령부터 쉬쉬하는 분위기였고, 월드컵 열기에 묻혀가면서 이런저런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유가족을 도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전까지는 유자녀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조천형 중사의 딸을 후원하기 시작한 겁니다.”
이 말은 비슷한 경험이나 감정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남의 처지를 헤아리기 어렵다는 뜻이다. 조부의 애국심과 부친의 베트남전 부상이 그에게 무의식으로 작용했다.
제2연평해전 전사자 6인 중 결혼한 사람은 조천형 중사와 한상국 중사였다. 조 중사는 2002년 당시 딸이 막 태어난 직후였고, 한상국 중사는 아이가 없었다. 제2연평해전 당시 부상당했던 갑판장 이해영 원사는 현재 천사모 총무 역할을 맡았다.
2002년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이 원사의 아들(건호)은 현재 뉴질랜드에 유학 중이다. 뉴질랜드 크라이스트처치에는 일지교육재단이 2005년 설립한 캔터베리 스포츠경영대학(Canterbury Sports & Management College·CSM)’이 있다. 홍 이사장은 유자녀들이 뉴질랜드 유학을 원할 경우 학비·기숙사비를 지원한다.
- ‘대한민국 수호천사 유자녀를 사랑하는 모임’을 만들게 된 계기는 무엇입니까.
“천안함 폭침이 일어났을 때 한주호 준위를 포함해 47명이 순직했잖아요. 유자녀를 도우려고 보니 제 혼자 힘으로는 안되겠다 싶었습니다. 그때 친구들 20명에게 100만원씩 내게 하고 제가 1000만원을 내서 3000만원을 만들었죠. 1년에 3000만원이면 되겠다 싶었습니다.”
2010년 10월 7일 학교 개교 기념일에 ‘천사모’ 발족식을 열고 제1회 장학금 수여식이 있었다. 천사모 회원으로는 정태경 여주대 총장 등 20명이 참여했다. 이날 총 30명의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다.
- 장학금 지급 기준은 어떻게 되나요.
“5살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매년 100만원 지원하고 대학교에 진학하면 매년 200만원을 지원합니다. 만일 뉴질랜드의 우리 학교(CSM)에 유학하겠다고 하면 학비와 기숙사비를 대주고 있지요. 한주호 준위 딸은 대학생이라 200만원을 받았습니다.”
- 후원을 통해 무엇을 기대합니까.
“그 애들은 아버지라는 언덕과 울타리가 없이 자라야 합니다. 아이들이 상처를 입지 않고 홀로서기 하는 데 도움이 되길 기대합니다. 아버지가 그냥 교통사고로 죽은 게 아니고 나라를 위해 희생한 거잖아요. 그런 사람들의 자녀가 잘되는 게 좋은 나라가 되는 것 아닌가요?”
- ‘천사모’가 지원해야 하는 대상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현재 대상은 15가구에 각각 자녀가 2~3명씩이에요. 워낙 어린애들이 많아서 주다 말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장학재단을 법인화하려고 합니다.”
- 장학재단을 만들려면 큰돈이 들어가야 하는데요.
“제가 조부로부터 물려받은 땅의 일부를 재단에 출연할 겁니다. 그 땅에 묘목을 심으면 10년 뒤에는 그게 돈이 되니까 재단 운영에 도움이 될 겁니다. 사람의 운명이 1년 뒤를 모르잖아요. 만일 내가 죽어도 그 애들이 클 때까지 25년 이상 지속되려면 그렇게 해야죠. 아이들과의 약속은 지켜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