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영화 [어바웃 시네마] 2018+02-22>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 물의 로맨스와 물의 에로스
아동진 영화 평론가
괴생명체가 등장하는 영화의 상당수는 그 '괴물'로 인해 안락했던 공동체가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을 그린다. 이야기의 끝에서 영웅에 의해 괴물은 퇴치되고 공동체는 평화를 되찾는다. 하지만 어떤 작품들은 정반대의 구도에 토대한다. 폭력적인 것은 타락한 세상이고 박해받는 것은 순수한 괴생명체다.
유사한 설정도 감독이 다르면 출연진에서 결말까지 방향이 완전히 달라지기도 한다. '이티'의 스티븐 스필버그는 소년 배우 헨리 토마스를 캐스팅해 괴생명체를 고향으로 안전하게 떠나보내는 우정의 이야기를 따뜻하게 풀어내며 성장담에 방점을 찍는다. '킹콩'의 피터 잭슨은 나오미 왓츠를 캐스팅해 미녀와 야수 스타일의 이야기를 거대한 활극에 섞어 다룬 끝에 괴생명체를 제거함으로써 비극적이면서도 낭만적인 여운을 극대화한다.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사랑의 모양'의 기예르모 델 토로는 샐리 호킨스를 캐스팅해 괴생명체와의 감정적 교감에 집중하는 연애담을 펼치다가 둘 중 누구도 죽거나 서로 헤어지지 않고 떠나온 곳으로 함께 돌아가는 복락원의 구두점을 찍는다.
1930년대 스페인 내전을 바탕에 깔아둔 '판의 미로'와 '악마의 등뼈'에서 보듯, 기예르모 델 토로의 작품세계는 판타지 요소가 강하면서도 그 배경의 시공간적 설정이 매우 구체적이다. 신작 '셰이프 오브 워터'에선 1962년의 미국 볼티모어가 배경이 되는데, 쿠바 미사일 위기로 미국과 소련 간의 핵전쟁 공포가 극에 달한 상태에서 항공우주연구센터가 주무대로 등장한다. 비현실적인 판타지 장르의 영화를 만들면서도 델 토로는 왜 전쟁과 관련된 역사 속의 구체적 시공간을 굳이 선택하는 걸까. 그건 폭력의 카오스가 팽배한 현실이 오히려 동화를 강력하게 요청하는 토양이 되기 때문이다.
항공우주연구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엘라이저(샐리 호킨스)는 어느날 수조에 갇힌 채 실험실로 끌려들어온 괴생명체(더그 존스)를 발견한다. 괴생명체와 소통하다가 사랑을 느끼게 된 엘라이저는 센터의 보안책임자 스트릭랜드(마이클 셰넌)로부터 고통받던 그를 탈출시키려 한다. 이웃집 화가 자일스(리처드 젠킨스)와 믿음직한 동료 젤다(옥타비아 스펜서)가 엘라이저의 탈출 계획에 힘을 합친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대중적인 화법을 지녔지만, 보는 방향에 따라 달리 다가오는 다채로운 면모를 지닌 작품이기도 하다. 일례로 이 영화는 색깔을 통해서도 흥미로운 독법이 가능하다. 녹색은 극중 세계를 지배하는 색깔이다. 항공우주연구센터 상당 부분이 녹색으로 채색되어 있을 뿐 아니라, 엘라이저의 집을 포함한 여타 공간들 역시 녹색이 주조를 이룬다. 그런 녹색은 (자일스의 예전 직장 상사의 말처럼) 대세인 색이면서 (캐딜락을 파는 세일즈맨의 말처럼) 미래의 색이지만, 핏기 없이 죽어 있는 거짓을 뜻하는 색이기도 하다.
반면에 이 작품에서 사랑과 진실을 품고 있는 듯한 적색은 녹색과 시종 대조된다. (빨강과 초록은 서로 극명한 색상 대비를 이루는 색들이다.) 중반부에 이르러 괴생명체와 처음 사랑을 나눈 후 출근할 때의 엘라이저 머리띠와 옷에서 두드러지기 시작하는 적색은 마지막 장면에서 빨간 구두까지 갖춰가며 엘라이저를 온통 감싸는 것으로 사랑의 승리를 웅변한다. 자일스가 마음에 두었던 사랑이 무너져 내리는 양상은 그가 그려야 하는 포스터 속 빨간 젤로를 초록색으로 고쳐 그려야 하는 상황 속에 고스란히 요약되어 있기도 하다. 이 영화 속 극장의 문과 좌석이 빨간색으로 등장하는 것 역시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야말로 엘라이저와 괴생명체의 사랑에 대한 가장 큰 응원군이니까.
일견 녹색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청록색의 활용도 눈길을 끈다. 스트릭랜드는 자동차 세일즈맨의 능변에 이끌려 '진짜 녹색'인 청록색 캐딜락을 산다. 애초에 그 자신이 구분하지 못했던 것처럼 그의 동료들 역시 녹색이라고 지칭할 때, 스트릭랜드는 새로 타게 된 그 차의 색깔이 청록색이라고 강변한다. 녹색 계열의 색상들 중에서도 '진짜 녹색'인 청록색을 고른 후 별로 다르지 않은 그 차이를 강조하며 자랑하는 스트릭랜드의 행동은 배타적인 인종주의자이면서 성차별주의자인 그의 시각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셈이다.
'셰이프 오브 워터'는 고전적 향취가 잘 살아 있는 황홀한 영화다. 1950년대 유니버설의 몬스터 장르에 경도되어 있는 이 작품은 특히 한 여성을 마음에 두는 양서류인간이 등장하는 1953년작 '해양괴물'(The creature from the black lagoon)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아울러 '셰이프 오브 워터'에는 제임스 캐그니와 앨리스 페이가 출연한 오래된 할리우드 영화들이 나올 뿐만 아니라, 클라이맥스에 이르면 엘라이저와 괴생명체가 직접 춤추고 노래하는 흑백의 뮤지컬 장면까지 등장한다.
지나간 것과 사라져가는 것에 대한 이 영화의 향수가 단지 특정 장르에 대한 복고적 취향이나 극중 사랑을 꾸미는 양념에 불과한 것은 아니다. 이 이야기에서 폭력에 의존하는 한 쪽은 온통 미래만 바라본다. 우주에 대한 미래의 국가적 이익에만 골몰하는 세력을 대표하는 스트릭랜드는 장차 사람들이 과연 제트팩을 타고 날아오르게 될지를 묻는 어린 아들에게 미래를 믿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세일즈맨으로부터 미래에 어울리는 분이라는 찬사를 듣고서 흡족한 마음으로 캐딜락을 산다.
그 반대 쪽에 놓인 캐릭터들은 하나 같이 뒤늦은 존재다. 엘라이저는 늘상 직장에 지각한다. 괴생명체는 그 종의 마지막 개체인데다가 "한 주가 지나서 쓸모가 없게 된 생선"에 비유되기도 한다. 자일스는 시대에 뒤처지는 방식으로 영화 포스터를 그린다. 그런 자일스가 괴생명체를 보며 "우린 골동품인지도 몰라"라고 한숨짓기도 하지만, 결국 '셰이프 오브 워터'는 그런 골동품들이 우주선을 쳐부수고 낙원으로 돌아가는 영화인 것이다. 일력 뒤에 적혀 있던 "시간은 과거로부터 흐르는 강물에 불과하다"는 문장은 세월에 대한 허무 어린 탄식을 담고 있지만, 다르게 뒤집어보면 시간의 수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과거야말로 가치 있는 유일한 시제임을 전제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철저히 계급으로 편제되어 있는 한 쪽은 차별적 언행을 일삼는다. 스트릭랜드가 젤다에게 "신은 당신보다 내 모습에 더 가깝게 생기셨지"라고 단언할 때, 백인이면서 남성인 그는 인종과 성별에 서로 다른 급이 있다고 뻐기듯 말하는 셈이다. 스트릭랜드가 외부의 위험으로부터 소속 집단을 차단해 보호하려는 보안책임자 직책을 맡고 있다는 사실과, 여러 재료가 뒤섞인 신제품 사탕들을 멀리한 채 다른 재료를 첨가하지 않은 녹색 사탕만을 즐긴다는 설정은 의미심장해 보인다.
반면에 다른 한 쪽은 주류 집단의 바깥에 있다. 그들에 의하면, 괴생명체는 '짐승'에 불과하다. 엘라이저는 말을 못 하는 장애인이고 젤다는 흑인인데 둘은 모두 여성이다. 자일스는 동성애자이고, 디미트리는 외국인이다. 하지만 뜨겁게 사랑하고 열심히 배우는, "이름도 계급도 없는" 이들은 물처럼 하나가 되어 벽을 넘어선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물 속에서 포옹한 채 괴생명체와 하나가 된 엘라이저 목의 상처에서 발현하는 아가미를 보여줌으로써 그녀 역시 같은 종이었을 수 있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아닌 게 아니라, 물은 이 영화에서 힘이면서 사랑이다. 엘라이저에겐 언제나 물의 에로스와 로맨스가 함께 했다. 욕조에서 혼자 자위를 했던 그녀가 그를 만나 사랑을 만끽할 때, 욕실은 물로 넘실대고 바깥은 비로 흥건하다. 그리고 '셰이프 오브 워터'엔 물방울만으로 만들어낸 아름답기 이를 데 없는 섹스신이 담겨 있다. 처음 관계를 가진 후 출근하던 엘라이저가 버스 창을 바라볼 때 두 개의 빗방울은 매끄러운 유리 표면에서 2인무로 줄달음질치다가 마침내 하나의 물방울이 된다. 빗방울들이 움직였던 것은 먼저 버스가 움직였기 때문이다. 미래를 향해 버스가 앞으로 달려나갈 때, 관성의 법칙에 의해 빗방울들은 뒤로 밀려난다. 그렇게 아름답게 하나가 될 수 있는 건 세상의 흐름에서 뒤처져 밀려나던 것들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물의 모양'은 따로 형태가 없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흐르는 자일스의 내레이션에서는 오래된 시가 인용된다. "그대의 모양 무언지 알 수가 없네. 내 곁엔 온통 그대 뿐." 한 사람을 사랑할 때, 세상의 모든 곳에 편재해 있는 것처럼 느끼려면 그 사랑은 무정형일 수밖에 없다. 사랑의 모양은 이렇다고, 진짜 사랑의 형태는 바로 이래야 된다고 특정해서 규정하는 순간, 사랑의 신비는 휘발되고 그 규정 밖의 사랑들에 대해서 폭력이 시작된다. '괴물'과의 사랑을 아름답게 그려내는 이 영화는 그를 통해 세상 모든 모양의 사랑을 축복하려 한다.
삶은 달걀에서 세면대 위에 둔 타이머의 모양까지, 계란이 이 영화에서 지속적으로 로맨티시즘과 에로티시즘의 상징이 되는 것 역시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삶을 때 액체에서 고체로 변하는 계란은 곧 하나의 형태를 이룬 물인 셈이다. 삶은 계란이 타원형인 것은 담겨 있던 껍질이 타원형이기 때문이고, 그 타원형의 형태에 담긴 채 뜨거운 물 속에서 가열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뜨겁게 익힌 계란을 그녀와 그가 나눠 먹을 때 그들은 그대로 사랑을 나누는 셈이다. 그리고 식탁 건너편의 그가 계란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그 껍질을 까는 동안, 엘라이저는 뮤지컬 형식을 통해 마침내 사랑을 고백한다. (껍질이 단단하고 속이 부드러운 삶은 달걀은 곧 괴생명체의 외모와 유사하기도 하다.)
스트릭랜드는 오줌을 흘리고, 젤다의 남편은 방귀를 흘려 세상을 더럽힌다. 반면에 엘라이저는 물을 흘려 세상을 정화한다. 욕실을 물로 가득 채운 두 연인이 사랑으로 유영할 때, 엘라이저의 집에서 흘러내려간 물은 아래층 극장의 객석으로 떨어진다. 그 물방울 하나는 퇴락한 그 극장에서 영화관람도 외면한 채 자고 있던 한 관객의 입 속으로 떨어져 그를 깨운다.
말을 하지 못하는 괴생명체와 말을 하지 못하는 여자의 사랑은 그 자체로 영화의 초기 형태인 무성영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자일스가 일하는 방식은 '고전 할리우드 영화'로 불리는 시기의 방식이기도 하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은 그 시기가 저물어가는 1962년이다.)
엘라이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 속 장면을 모방해 춤추며 일상 속에서 영화를 살았다. 힘을 합쳐 괴생명체를 탈출시키는 과정은 그 자체로 영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네가 카메라를 옮길 거고, 우린 시계를 영화처럼 똑같이 맞추는 거야")
그러니, 넘쳐 흐르는 사랑을 통해 엘라이저가 깨운 것(관객)과 살린 것(괴생명체)은 결국 영화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극 초반에는 아래층 극장의 영화가 상영될 때 소리와 빛이 윗층 그녀의 집으로 새어 올라왔다. 그렇게 영화가 그녀의 현실을 뒤흔들었던 전반부와 달리, 후반부에 이르면 그녀의 현실이 영화를 적시는 것이다. 엘라이저는 (영예로운 과거의) 영화에서 배운 것들로 (위기에 처한 오늘의) 영화를 깨웠고 또 살렸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낙원은 '그때 거기'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