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에 눈물은 없다 / 최미아
드라마에서 호텔로 나오는 건물이 낯익었다. 여고 시절에 자주 갔던 곳이었다.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지만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고향은 여행을 할 수 없는 곳이라 했던가. 고향에는 집안 행사에 와서 쫓기듯 바쁘게 떠나는데 오늘은 오롯이 혼자 남았다.
목포 근대역사관에 왔다. 일본영사관으로 지은 붉은 벽돌 건물이다. 뒤에는 유달산이 앞에는 목포항과 삼학도가 한눈에 보인다. 백 년이 넘은 건물이지만 드라마에서 보았던 대로 건재하다. 이곳은 해방 후에 시청, 시립도서관, 문화원으로 사용하다 지금은 근대역사관이 되었다. 개항부터 수탈과 저항, 도시의 변천사가 실감나게 전시되어 있다. 건물 뒤쪽으로 예전에 보지 못했던 방공호가 있다. 자연암반을 뚫어 만들었다. 방공호는 어른 서넛이 나란히 걸어도 될 정도로 넓다. 전쟁 막바지에 한국인을 강제 동원시켜 만든 것이란다.
40년 전에 이곳은 시립도서관이었다. 일층 작은 공간에 음악 감상실이 있었다. 누가 그런 낭만적인 생각을 했을까. 도서관에 오면 들어가 보곤 했다. 어둑한 곳에 긴 의자가 놓여있었다. 진행자가 곡명만 간단히 알려주고 음악을 들려주었다. 시험문제로만 외우던 비창이나 월광소나타, 사계 등을 들었다. 그 뒤로 클래식하고 더 친해지지는 못했지만 처음 접한 고전 음악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도서관에 있다 심심하면 친구들과 동네 구경에 나섰다. 일본인이 살던 곳이어서 저택이 많았다. 무조건 큰 대문 앞에서 초인종을 눌렀다. 구경 왔다고 하면 거의 문을 열어주었다. 교복 입은 학생이어서 쉽게 들어오라고 했을까. 집안까지 보지는 못했지만 정원은 마음대로 돌아다녔다. 조선내화 이훈동 사장 댁은 신기한 나무들이 많았다. 호남에서 가장 넓은 그 정원은 지금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후손들은 ‘성옥기념관’을 지어 선생이 모은 미술품을 전시하고 무료로 개방한다. 한국화 거장이신 남농 선생 댁도 좋았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우리를 거실에서 건너다보시던 선생이 생각난다.
일본인 거리로 내려와 목포항 쪽으로 걸었다. 어느 국회의원 덕분에 반짝 활기를 띠다 다시 잠잠해진 곳이다. 한낮인데도 촬영 끝난 영화 세트장처럼 조용하다. 이제는 연륙교가 많이 생겨 섬사람들이 드나들면서 흥성흥성하던 항구도 많이 쇠락해졌다. 고3 때 야간자율학습이 끝나고 버스를 타려면 선창가로 와야 했다. 부두 쪽으로 오다 보면 제주 다니는 ‘가야호’가 보였다. 가야호는 워낙 크니까 멀리서도 눈에 확 띈다. 제주 배가 들어오면 선창가는 한바탕 북새통을 이룬다. 그래서 목포에서는 시끌사끌한 일이 있으면 “제주 배 닿았냐. 왜 이렇게 시끄럽냐.”고 한다. 우리는 가까운 섬에 다니는 연락선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크나큰 가야호가 궁금했다. 들어가 보려고 뽀작거렸지만 쉽게 태워주지 않았다.
발걸음 가는대로 걷다 보니 오거리다. 지금은 신도시로 상권이 옮겨갔지만 목포 번화가였다. 오십 대 이상 목포 사람이라면 추억 한 보따리씩은 간직한 거리다. 목포의 원도심이라는 ‘목원동’으로 이름도 바뀌었다. 불 밝혀 옛 번성을 되찾아보려 했을까. 루미나리에 구조물이 을씨년스럽게 서 있다. 이런 안간힘도 역부족이었는지 한 집 건너 빈 상가다. 여기저기 유리문에 임대문의만 나붙어 있다.
‘옥단이길’이라는 이정표가 보인다. 캐릭터가 물지게를 지고 있는 처자다. 목포는 눈 감고도 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옥단이라니, 생소하다. 날씨 겁나게 좋소잉. 입에 착 엥기는 구수한 언어들이 길바닥에 쓰여 있다. 옥단이를 따라 걷다보니 극작가 차범석 선생 생가다. 대문이 잠겨있다. 문패가 있는 걸 보니 개인 소유 집인가 보다. 반세기 전 가족사진이 벽에 붙어있다. 대가족이다. 젊은 시절 선생의 모습이 뒷줄에 보인다. 대문 옆으로 쏙 들어간 자리에 ‘차범석 작은 도서관’이 있다. 주차장이었는지 승용차 한 대 들어갈 공간이다.
출입문인 한옥 창문을 살며시 열었다. 책을 들고 계신 선생의 캐리커처가 반겨준다. 자개문갑 위에, 선반에 책이 가지런히 꽂혀있다. 아담하지만 옛날 도서관에 음악 감상실을 만들었던 목포다운 감성이 흐른다. 집 담장에 선생의 작품인 연극 포스터가 죽 걸려 있다. 그중에 팔순 기념공연이었다는 ‘옥 단어’가 눈에 띈다. 옥단이는 1930년대 초반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유달산 일대에서 물장수로 살았던 인물이란다. 선생은 어려서 봤던 옥단이를 주인공으로 ‘옥 단어’를 쓰셨단다. 연극으로 살아났던 옥단이가 다시 물지게를 지고 씩씩하게 목포 골목을 누비고 있다.
바로 앞집은 ‘이난영과 김시스터즈’ 전시관이다. 슈퍼 자리였는지 ‘현진슈퍼’ 간판이 그대로다. 널빤지를 잇대어 만든 입간판이 아니었다면 지나칠 뻔했다. 한복저고리를 입은 이난영과 김시스터즈가 슈퍼 덧문에 그려져 있다. 김시스터즈는 이난영의 두 딸과 조카로 결성된 여성 보컬그룹이다. 아시아 걸그룹으로는 최초로 미국에 진출해 ‘동양의 요정’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난영을 기리는 노래비도 난영공원도 있지만 이렇게 작은 전시관이 골목에 숨어있다니 반갑다. 자개농과 자개문갑 위로 공연 사진과 무대의상들이 걸려 있다. 한쪽에 있는 축음기에서 이난영의 애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올 것만 같다.
이난영은 ‘목포의 눈물’과 ‘목포는 항구다’를 불렀다. 전 국민 애창곡이지만 특히 목포 사람들이 즐겨 부른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목포에서는 이 노래가 무시로 들린다. 목포는 도시를 상징하는 노래를 두 곡이나 가지고 있다. 만고에 부러워할 일이다. 그런데 노래 때문에 목포가 눈물과 항구로만 묶여버렸던 것은 아닐까. 두 곡은 일제강점기 때 항구 도시의 슬픔과 한을 달래주었던 노래다. 이제 세월은 흐르고 흘러 설움도 울분도 없다. 아니 애초에 목포에 눈물은 없었다.
혼자 생각에 잠겨있다 전시관을 나왔다. 옥단이가 알려주는 ‘예술인골목’으로 들어섰다. 여기가 진짜 볼거리라는 듯 목포 출신 예술인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은 벽화가 보인다. 유달산 위로는 케이블카가 유유히 오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