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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9시 반이 넘어서 집에서 나와 시내버스를 탔다. 다른 날보다 늦게 부곡정에 도착하였더니 나보다 먼저 와 있는 사람이 4명이나 되었다. 잠시 후 강공수가 홍시를 가져와서 탁자 위에 펼쳐 놓았다. 각자가 하나씩 먹었다. 제일 나중에 윤정남이 도착하였다. 버스를 잘 못 타서 돌고 돌아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7개를 가져와서 7명이 하나씩 나누어 먹었다. 박남용은 오늘 못 올 일이 생겼는지 참석이 어렵다는 문자가 왔다.
10시가 넘어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산소 이야기가 나왔다. 먼저 이용환이 장성에 있는 자기의 문중 산에 산소를 조성해 놓았는데 산소 주변에 과일나무와 잡목이 뒤섞여 우거져서, 문중 원들이 모여서 정리 작업을 하기 위해 회의를 하였고, 앞으로 선산관리에 대한 전망이 매우 힘들 것이라는 고백을 하였다.
그 말을 들은 윤상윤이 자기 문중에서 납골당을 조성한 이야기를 하였다.
자기 7대조 이하 자손들 중, 남의 집 살이를 할 정도의 매우 힘들게 살던 손아래 동생인 종손이 남의 집 살이를 던져버리고 중장비 기술을 배워, 70년대에 우리 농촌의 경지정리 사업이 시행될 때, 경지정리 주관 회사에 들어가서 밤낮으로 일을 하여 거금을 벌었었는데 그 이후 개인택시를 하면서 종손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산재해 있는 문중산소를 통합하기 위해, 납골당을 짓기 위한 건축자금 목표액을 1억 5천만 원으로 잡고, 자기가 먼저 5천만 원을 내 놓은 다음,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문중 원들을 설득한 결과 목표액을 달성하였고, 유골 200기를 봉안할 수 있는 납골당을 준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이후 이제는 이산 저산으로 성묘 다니던 수고를 덜었고, 1년이면 이 달 저 달, 이 날 저 날로 달리한 제삿날을 단 하루로 합동으로 제삿날을 정하여 하루에 지낼 수 있게 되었고, 10위 20위의 합동 제사도 신위 수대로 제수를 올리지 않고, 반(飯)과 갱(羹)은 생략하고, 주(酒)과(果)포(脯)만 올린다음, 시저(匙箸)만 신위 수대로 간략히 하여, 명절이나 정해진 날에 자손들이 참여하고 대면하는 것에 의의를 두는 쪽으로 시행하고 있다고 하여, 나도 적극 동감의 뜻을 표하였다.
이러한 사업에 성공하려면 윤상윤 7대조 종중의 종손처럼, 솔선수범하는 희생적인 주동자가 있어야만 하고, 그런 다음에 종중의 구성원들이 호응하고 동참하여 목적하는 사업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윤씨 문중의 사례에서처럼 찾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하산하어 음악정자에 모였다. 김상문이 밤과자를 사와서 장휘부까지 9명이 3개씩 나누어 먹었다.
금주의 노래는 지난주에 불렀던 <가을>을 다시 한 번 불러보고, 강공수가 오늘 부를 <한강>에 대한 배경 이야기를 해 주었다. 최병호가 작사 작곡한 이 노래는 심연옥이라는 가수가 불렀는데 6·25 한국 전쟁 직후, 한 많은 사연을 안고 유랑하던 사람들을 위로하던 노래였다. <한강>은 1947년 <아주까리 등불>, <개나리 고개>를 부른 가수 최병호가 만들어 발표했던 노래인데, 전쟁 중인 1952년 손로원이 개사하여 심연옥 자신이 재취입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심연옥은 1928년 생으로 1941년 조선음악협회의 조선악부 소속으로 창단된 조선 가무단 소속의 여류명창으로 활동하다가 1947년 KPK악단에서 가수활동을 시작하였고, 이 시기에 KBC레코드에서 <환강>을 취입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대구로 내려가, 1952년 오리엔트레코드에서 <아내의 노래>를 취입하여 큰 인기를 얻었다. 심연옥은 이 외에도 <시골버스 여차장>, <도라지 맘보>, <야래향>, <전화통신> 등의 히트곡을 내면서 활약한다. 한창 활약할 시기인 1950년 중반 가수 백년설과 결혼하였고,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미모에 미성을 갖추어 당시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였을 심연옥 이었다. 아련히 어렸을 무렵에 들어 보았던 이 노래를 약사가수 주현미가 부른 노래에 맞추어 따라 불러 보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한강에게 보내는 삼촌의 편지”를 읽고
구구절절 맞는 말이었다. 다각적 측면에서 60여년의 몸소 겪었던 경험과 해박한 지식으로 존경스러울 정도로, 질녀를 아끼는 마음들이 담뿍 들어 있었다.
그러나 30여 년 동안을 큰 형님 댁과 왕래를 하지 않고 살아온 관계 때문에 편지를 전달할 방법이 없어서 고육지책으로 공표의 방법을 택하였다는 변명을 하였지만, 그것은 인류를 구원하겠다는 목회자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하여, 한충원목사가 택한 방법은 진정성이 없다는 전제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저 이런 방법으로 만천하에 자기를 키워준 형님과 자기가 업어서 키웠다는 사랑하는 질녀를 욕보이고자 택한 비양심적 고백이라 생각한다.
한강은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이제 50여년을 비바람에 노출된 광야에서 온갖 핍박을 받고 부대끼면서 살아온 잡초가 아니라,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아온 얕은 경험으로 오로지 자기의 타고난 재능으로 문학의 지평을 넓혀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세상은 아니 문학계에서는 그런 그녀를 칭찬하였고, 그녀가 쌓은 업적이 훌륭하다고 갖은 찬사와 함께 노벨상이라는 명예와 부수적으로 물질적 보상까지 해 주었다.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 좋은 작품이라고 명예와 상금까지 주었으면, 내가 받은 상처럼 참 잘했다고 축하해 주면 끝날 일인데, 거기에 대고 어깃장을 놓는 것이 무슨 심보냐 말이다.
삼촌으로서 진정 질녀를 사랑한다면, 구구절절이 맞는 그 말들을 직접 만나서, 아니면 아무리 개인정보법 때문에 수신처를 알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삼촌이라면, 어떤 방법으로든 한강의 개인정보를 알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사랑하는 질녀에게 전달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말이다.
그리고 헌법에 보장된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개신교 목회자로서 “인류를 구원할 방도가 오직 하느님뿐이다.”라고 강변함은 억지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종교가 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이 세상은 종교전쟁으로 하루도 평화로울 날이 없을 것이다.
종교적 신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를 낳아준 보모님이요, 같은 피를 나눈 형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 인류보편의 일관된 명제라 생각한다. 다음은 삼촌인 한충원목사가 시작한 편지의 서두와 그 내용이다. 나름의 생각은 자유이지만 냉철히 받아들이기 바란다.
“사랑하는 조카, 노벨문학상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조카 개인의 크나큰 영광이요 아버지 한승원 작가 형님 가문의 영광이요 대한민국의 쾌거네. 나도 조카와의 관계를 아는 지인들로부터 꽤 많은 축하 메시지와 전화를 받았다네.”로 시작하는 편지이다.
연결이 잘 안된 부분은 내가 중간 중간 생략하였다.
교사 생활과 창작 활동을 겸하면서 자녀 3명을 부양하고, 어린 동생 3명을 돌보시며, 대가족 집안의 가장 역할까지 하셨으니 형님은 인간적으로 거인이셨네.
나는 형님의 은덕을 갚고자 형님이 교사직을 그만두고 작가로 활동하시던 초기 4년 동안 나의 월급 절반 이상을 형님에게 보내드리면서 형님의 전업 작가 생활을 도왔다네. 게다가 형님은 나의 결혼 주례로 작가 이호철 선생님을 세워 나의 작가 활동 발판을 마련해주실 만큼 나를 아끼셨다네. 마치 아들을 챙기듯이.
내가 손위․아래 누이 둘과 함께 형님 집에서 살았던 10년 세월의 힘들고 슬프고 어려웠던 시절이 떠올라 목이 메네. 나는 중등 1년부터 누이 둘과 함께 광주에 사시던 형님에게 맡겨져 함께 지내게 되었네. 우리는 두어 번의 이사 끝에 형님의 처가에서 지어준 한옥 집에서 살았네.
조카가 아기 때 엄마 형수님이 담장 없는 1층 양옥집 마당에서 밥 짓는 불을 지피는 동안에 조카를 업어주었는데, 조카가 하도 울어대는 바람에 짜증이 나서 내가 조카의 엉덩이를 꼬집어 더 울렸다네. (이 자리를 빌려 용서를 구하네.)
내가 대학 1년 때 교양 영어 작문 리포트를 써놨는데, 5살 조카가 내 책상에 올라가서 리포트에 색연필로 그림을 그려놓아 황당했다네. 리포트를 새로 베껴 쓸 시간이 없어서 색연필 그림이 그려진 이유를 리포트 위에 써서 그대로 제출했는데 교수님한테서 ‘Excellent’를 받았던 일이 떠오르네.
형님의 제안으로 조카가 중등 2년에 영어교과서를 다 외우면 상금을 주기로 했었는데 석 달 후에 조카는 거짓말처럼 한 자리에서 교과서 전체를 연습문제까지 단 한 문장도 틀리지 않고 다 외웠네.
지금부터 18년 전에 형님의 김동리문학상 시상식에서 내가 조카의 얼굴을 본 이후로 편지로나마 대면하는 것은 처음이네.
지금부터 37년 전에 셋째형님의 장례식에서 그 형님의 구원 문제로 형님과 나 사이에 큰 충돌이 일어난 후로 형님 집안과 소원해져 있었지만, 그래도 나의 인생에서 은인이신 형님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하려고 갔던 자리였네. 그 후로 지금까지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던 조카를 가끔 매스컴을 통해 보곤 했다네.
노벨상 수상으로 인하여 오히려 형님 집안이 하나님의 구원에서 더 멀어지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카의 작품에 대한 평가로 한국 사회가 두 쪽으로 갈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라네. 형님 집안과 아예 단절된 상태에서 조카의 전화번호나 주소를 전혀 몰라 불가피하게 공개편지를 보내게 되었네.
사실, 조카와 나의 단절도 예수 그리스도 신앙을 미워하고 배척하신 형님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이 자리에서 밝히고 싶네. 지금부터 39년 전에 2년 동안 형님과 나는, 알코올중독에 빠져서 인생이 망가져 가는 셋째형님의 치유 방법을 놓고 두 해 동안 서로 첨예하게 갈등하였네.
그러다가 셋째형님은 돌아가셨고 그 형님의 장례식 기간에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는 어떤 사람도, 어떠한 것(문학 포함)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는 나의 주장에 분노하여 형님은 3일 동안 나를 가혹하게 핍박하셨네.
형님은 “피를 뽑고 뼈를 갈듯이 글을 써서 너를 가르쳤는데,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면서 그 말을 취소하라고 요구하며 삼우제 날 새벽까지 나를 심문하셨다네.
문학을 목숨처럼 여기면서 작가 활동을 해 오셨던 형님에게 “문학에는 구원이 없다”는 나의 말이 걷잡을 수 없는 분노를 일으켰던 것이네. 그때부터 형님과 나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오게 되었네.
나는 부강한 조국을 후손들에게 물려주려고 45년 동안 국방연구개발 현장에서 세 번이나 죽음의 고비를 넘기면서 일했던 공학자 출신이네.
이런 인생을 살아온 삼촌으로서 조카의 작품에 대한 논란거리를 중심으로 포괄적인 의견을 제시하고 조카의 앞으로의 작품 활동에 대해서 제안하고 싶다네. 어찌 되었건 나의 청소년 시절에 내게 은덕을 베푸신 형님의 자제요 내 등에 업어주기도 하고 예뻐하면서 함께 자란 조카의 작품에 대하여 논한다는 것 자체가 마치 가슴에 생채기를 난 것처럼 마음이 아프네.
이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마자 수많은 사람이 나를 향해 ‘나쁜 놈’이라고 돌팔매질할 수도 있음을 익히 알고 있지만 이 편지를 쓰지 않을 수 없네.
편지를 써야 할지 말지를 하나님께 여러 번 여쭤보기도 했네. 보름 남짓 기도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이 편지를 쓰면서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르겠네.
나는 대의를 위하여, 나의 조국의 백성들과 후손들의 영혼을 위하여 이 편지를 공개하기로 결심했네.
따라서 문학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사회․윤리적인 책임 의식을 갖게 하고, 우리 국민이 문학작품에 대하여 분별력을 갖도록 하며,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도록 애쓰는 목회자로서의 사명감으로 이 편지를 공개하게 되었네.
첫째, 노벨문학상의 권위에 관한 의견
~ 이처럼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이라고 후세 사람들에게 다 사랑받진 않는다네.
~ 이처럼 노벨문학상은 분명한 수상 기준이 없이 수여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네. 따라서 조카는 노벨문학상을 받았다고 해서 작가로서 정상이요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고 이제부터가 시작이라 생각하고 후세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명작’의 반열에 들어갈 작품을 남기길 기원하네.
둘째, 조카의 소설작품 ‘채식주의자’에 대한 외설성 비난과 청소년 유해성 논란에 관한 의견
소설은 허구(虛構)이지만 현실을 기반으로 하는 글이네. 허구는 상상에서 오지만, 그 상상을 글로 표현할 때는 책임이 뒤따른다네. 그래서 상상을 글로 표현할 때는 절제가 있어야 하네. 숨겨야 할 것은 숨겨야 하네.
셋째, 조카의 소설작품 세계에 대한 의견
조카의 대표적인 작품들은 대부분 그 종결이 비극으로 끝나네. 작품을 읽는 내내 어둡고 답답하여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네.
넷째, 제주도 4.3 사건, 6.25 한국전쟁,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시각
5.18의 시작이요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전남대 출신(1975학번)이네. 전남대 학생 40명이 5.18 현장에서 죽었다고 하네.
만약, 당시에 ‘김대중 선생’이 한국에 없었다면 5.18이 일어났을까? 아마 5.18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네. 계엄령 선포 후 김대중 선생이 구금되었는데도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학생들의 데모가 수그러들고 멈췄네. 그러나 광주는 데모가 더욱 심해졌네.
5.18은 민주화를 염원한 시민의식에서 기인했다고 하지만 그 원인을 한두 가지로 말하기는 쉽지 않네.
호남의 샛별 같았던 김대중 선생의 구금이 광주 사람들의 그런 피해의식 속에 배어 있는 분노에 불을 질렀다고도 할 수 있네.
나의 반론 : 5·18 은 김대중과는 무관하다. 발단은 김대중의 구금이었을 지라도, 오직 5·18은 <공수부대의 무자비한 폭력 때문이었다.> 고 생각한다. 이 점에서 한목사와 나의 진단은 매우 다르다.
나는 전라도에서 태어나고 23살까지 자라났다네. 지금도 내 고향 전라도를 사랑하는 마음과 자부심은 누구 못지않다고 생각한다네. 고향을 떠난 지 45년이 지났는데도 프로야구 해태․기아타이거즈를 응원한다네. 주위에서 누군가 전라도를 안 좋게 말하면 핀잔을 주기도 했다네.
1980년대 초엔가, 학생운동을 했다는 고향 친구들이 국방연구기관에 근무하고 있던 나한테 ‘나라의 충견’이라고 비아냥거렸는데, 나는 45년 동안 국방연구기관에서 죽을 고비를 세 번이나 넘기면서 조국의 국방과 경제를 키우는데 내 인생을 통째로 바쳤네. 안전사고로 파열된 왼쪽 고막이 지금도 온전하지 않다네.
조카는 마치 이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하여 살 만한 나라가 아닌 것처럼 여기도록 만드는 작품을 몇 편 쓴 것으로 알고 있네. 여러 개의 국내 문학상도 탔네. 문학상 상금이 적잖은 금액일 것이네. 그런 상금을 받을 수 있다는 것, 오늘날 국내의 예술인들과 문학인들이 괜찮은 대접을 받는 것, 단편소설 한편의 원고료로 한 달 정도의 생계를 꾸릴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이만큼 잘 살게 된 덕분이라고 생각하네.
나의 반론 : 정의롭지 못한 정부를 보고만 있으란 말인가! 작가라면 정의롭지 못한 정부를 공격해서 바로 잡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부의 열매도 모두 우리들이 노력하여 만들었으니 그 열매를 우리가 따 먹는 것은 당연한 것인데, 마치 정부가 노력하여 열린 열매를 나누어 주는 것이니 감지덕지하라는 뜻으로, 아무소리도 하지 말라는 쪼의 논리이다.
다섯째, 5.18 민주화운동 관련 문학작품을 어떤 시각으로 쓰면 좋을까?
나의 생각 : 이 부분은 아마 한충원목사가 자기 교회에서 매번 설교했던 여러 가지 자료들을 나열하여, 말하고자 하는 논지가 분산되어 무엇을 강조하려는 것인지 잘 분별이 되지 않았다. 또 5·18에 대한 진단과 평가가 한목사의 기독교적 입장에서 하는 자의적 판단이어서 좀 더 비종교적 중립적인 판단이 요청된다.
여섯째, 조카가 세상에 밝음과 소망을 주는 작가가 되려면
조카는 50세를 넘었네. 예부터 50세는 지천명(知天命)의 나이라고 하네.
여기서도 한충원 목사의 설교 자료가 나열되어 있었다. 완전히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나의 사랑하는 조카가 앞으로는 그 같이 이 세상에 빛과 소망을 안겨주는 작가가 되길 바라네. 내가 조카의 책 수십 권을 사서 주변 이웃들에게 선물하고 싶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책의 저자가 바로 내 조카”라고 자랑스럽게 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에게 절망을 안겨주는 일들이 진저리나게 많이 일어나고 있는 이 세상에 어둠과 절망을 더 얹어주는 작품이 아니라 세상을 밝게 비춰 주고 세상 사람들에게 소망을 안겨주는 작품을 쓴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먼저 조카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빛을 받아 그 빛을 세상에 비추기를 바랄 뿐이네. 이 지구촌의 영원한 베스트셀러요 인류를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핏빛 사랑의 편지인 성경책을 반드시 반드시 읽어보길 바라네.
7 ~ 14까지도 모두 성경 설교 구절들임
맺는말
사랑하는 조카,
내가 지금까지 조카에게 한 말들이 조카의 마음을 아프게 찌를 것을 생각하니 나도 이 편지를 쓰는 내내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몇 번을 울었다네. 과거에 조카가 매스컴에서 “나도 빛을 찾고 싶다”고 말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네. 그래서 더더욱 이번에 조카에게 ‘참 빛’이 무엇인가를 얘기해주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네.
이제는 쉬엄쉬엄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보고 아름다운 자연을 즐기며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길 바라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누리면서 살아가길 축원하네.
2024년 11월 7일
한강 작가를 사랑하는 삼촌 한충원 목사 대전 안골에서
오늘의 장소 : 무등산 약사암
일 시 : 2024.11.14(목)
참 가 : 강공수 김상문 김영부 나종만 양수랑 윤상윤 윤정남 이용환 장휘부 등 9명
불 참 : 박남용(집안 일) 1명
회 비 : 9만원
식 대 : 71,000원(애호박찌개 3, 김치찌개 2, 장어탕 1, 청국장 1, 매밀전병 1, 공기 1 등) 리정훈 선배 협찬 막걸리 2, 사이다 1. 중 막걸리 1 반품으로, 총 식대 74,000원에서 막걸리 1병값 3,000원 공제한 금액
금 일 잔 액 : 19,000원
이월 잔액 : 556,000원
총 잔 액 : 575,000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