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북공을 비롯하여 선생까지 문과 급제자가 3명 나왔으며, 실직을 역임한 이로는 그의 10대조 수인(壽仁, 수원부사), 9대조 시걸(時傑, 대사간), 8대조 영행(令行, 임천군수), 7대조 이건(履健, 청주목사), 그리고 조부 정균(正均, 고령현감) 등이 있으니 집안은 혁혁한 양반가문임에 틀림없다 하겠다.
선생은 개인적으로는 불우하게 성장하였다. 6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었으며 1년도 채 안되어 모친마저 잃고 말았다. 또 다음 해에는 선생을 아껴 주던 조부마저 타계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행히 어린 나이에 천애고아가 된 선생을 종조부인 김민근이 여러 해 동안 훈육해 주었으며 가산까지도 돌보아 주었다. 후일 선생은 “내가 문리를 깨우치고 전택을 보전한 것은 소죽(小竹)의 힘이 아닌 것이 없다”라고 그에 대한 감사의 뜻을 드러내곤 하였다. 선생은 12살 때인 1871년부터는 예산군 덕산면의 송애에 거주하던 농은(農隱) 이돈필(李敦弼)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살 되는 1874년부터는 내종형 이설의 가르침도 받았다. 그 후 이설과는 관직에 앞뒤를 다투며 나갔으며 홍주에서 을미의병을 일으킨 동지가 되기도 하였다.
미관말직에서 시작했으나 실력과 경륜을 인정 받아 왕세자와 왕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다
선생이 관계에 진출한 것은 31살 때인 1890년 9월 음직으로 선릉참봉에 제수되면서부터이다. 이 직임을 1개월간 근무한 선생에게 우시직이 제수되었으며 그 해 12월부터는 서연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2년여에 걸쳐 뒤에 순종황제가 된 왕세자의 교육에 전력을 기울였다. 서연에서 선생이 왕세자에게 교육한 내용은 4서 가운데 맹자와 중용이 중심이었다. 1890년 12월 16일부터 시작된 서연은 1892년 3월 7일까지 총 37회에 걸쳐 진행되었다. 서연은 차기 국왕이 될 왕세자에게 경사를 강론하여 왕세자로 하여금 유교적인 소양을 쌓게 하고자 실시되는 교육제도를 말한다. 따라서 미관말직인 선생에게 1년 반 가까이 서연을 베풀 기회가 부여되었다는 것은 선생의 경사에 대한 해박함과 뛰어난 경륜이 널리 인정된 것을 의미한다. 왕세자를 시종하면서 정치 도의를 강학함에 따라 선생의 정치적 입지가 크게 강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연을 베푸는 시기인 1892년 2월 별시로 경시(慶試)가 열렸으며, 이 과거에서 선생은 문과 병과에 급제하는 영예까지 누리게 되었다.
문과에 급제한 후인 그 해 3월까지 서연을 계속하였으며 왕세자를 모시고 황단(皇壇)의 제향에도 참석하였다. 3월의 서연은 4회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강학의 내용은 맹자를 끝내고 중용을 강학하였다. 그러한 선생에게 그 해 5월 홍문관 부교리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 사간원 정언 등이 제수되면서, 이제는 경연관으로서 왕에게 강학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다. 6월에는 사헌부 지평이 되어 신정왕후의 제향에 옥책관으로 참여하였으며, 10월에는 홍문관 부수찬지제교 겸 경연검토관, 춘추관기사관에 제수되었다. 이때 고종황제의 명에 따라 ‘권상하치제문’을 지어 올렸으며, 11월에는 ‘박성양치제문’을 지었다.
일제의 만행인 갑오변란 후 관직을 내놓고 낙향…항일 의병의 길 시작
선생이 고종황제에게 경연을 베푼 것은 11월 18일 하루뿐이었던 것 같다. 이 귀중한 기회에 선생은 즐겨 읽던 자치통감강목에서 후한의 「영제기(靈帝紀)」 장을 택하여 강독하고 왕도정치에서 현명한 군주와 재상의 중요성을 피력하였다. 그 다음 해인 1893년 2월에 선생은 홍문관 부교리, 5월에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7월에 홍문관 수찬, 9월에 경연 시강관, 춘추관 편수관, 시강원 사서, 통례원 상례 겸 시강원 사서지제교 등에 제수되었다. 10월에는 정3품 통정대부에 올라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춘추관 수찬관, 형조 참의, 부호군, 성균관 대사성 등을 차례로 받았다. 1894년 3월에는 우부승지에 올라 왕을 측근에서 보필하였다. 그러나 그 해 6월 일본군이 경복궁에 침입하는 만행을 저지른 갑오변란(甲午變亂) 등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선생은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였으며 이후 일체의 관직을 받지 않았다.
그 동안 선생은 왕세자와 왕에게 유교정치이념에 입각한 통치 철학을 강론하여 왕정을 굳건히 하고 나아가 국가를 반석 위에 올려놓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부일개화파들의 개화를 빙자한 망국적 행위를 더 이상 조정에서는 억제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민족과 국가의 위기에 국왕을 끝까지 보위해야 할 중책에 있었으나 이미 선생의 주장이 조정에서는 받아들여질 여지가 없어지게 되었음을 절감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낙향하여 직접적인 항일의 방도를 찾고자 하였다.
선생을 중심으로 충청도의 유생들이 의병으로 궐기…홍주 관찰사도 의병 참여키로
일본군에 의해 경복궁이 점령되는 갑오변란을 선생은 국망의 시초로 보았다. 두문불출하던 선생은 1895년 8월 을미사변의 비보와 11월의 단발령 공포에 접하자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반개화 반침략의 의병투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단발령 공포 직후부터 선생은 홍주 지역 유생들과 잦은 접촉을 하였다. 중앙정계에서 요직을 역임했던 선생의 의병 봉기는 지방 유생들을 크게 고무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우선 선생은 이설에게 자신의 뜻을 밝히고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홍주부 전 영장 홍건과 함께 관찰사 이승우의 의병 참여문제에 대하여 여러 차례 협의하였다. 또한 홍주 향교 전교인 안병찬과 만나 거의(擧義)의 뜻을 같이 하였다. 그리고 이상린‧이봉학 등과 연락을 취하였으며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글을 보내어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선생의 의병 봉기에 안병찬을 중심으로 하는 재지유생들과의 연합은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이들은 노론과 소론이라는 당색의 차이를 극복하고 의병투쟁에 적극 합류한 것이다. 이미 안병찬은 1894년 여름부터 의병봉기를 준비하고 있었으며, 을미사변 직후부터는 군사모집과 무기수집 등의 구체적인 행동을 취하고 있었다. 실제로 안병찬은 선생을 만난 다음 날 청양의 화성에서 향회를 실시하고 180여명의 민병을 모집하였으며, 이들이 홍주의병의 중심이 되었다.
선생의 거병은 12월 1일에 시작되었다. 이날 저녁에 이봉학‧이세영‧김정하 등에게 정산과 청양의 민병 수백 명을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여 성안에 들어오도록 하였다. 12월 2일, 선생은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사민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는 것을 기다려 의병을 반대하는 홍주부 참서관 함인학과 경무사 강호선을 체포하여 이들의 목을 벨 것을 명령하였다. 의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들어가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구타하기에 이르자 관찰사 이승우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면서도 동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에 선생은 당 태종이 죄 없는 진양령을 죽여 천하를 다스린 고사를 들어 힐책하자 이승우는 결국 의병에 참여하기로 승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