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2월 3일 토요일, 날씨: 강렬한 땡볕, 세찬 냉장고 바람
늘 가는 코스로, 늘 자주 뵙는 분들과 함께, 늘 똑같은 클럽으로, 늘 땀나게 더운 날씨 속에서, 늘 똑같은 운동을 하는데도 스코어와 승패는 갈 때마다 예상을 빗나갈 때가 많으니 참 신기하다. 오늘 알바 님, 무다이 님, 닥터노와 함께 한 조로 치게 된 나는 설마 닥터노가 1등을 할 줄은 사실 몰랐다. 늘 웃기는 농담을 던지며 스코어에 별로 연연해하지 않아 보였기 때문일까?
오늘은 드디어 오스틴에서 1번 홀부터 시작하게 되었다고 좋아하며 갔는데, 그때 막 시작한 어떤 사람들 중 한 명의 드라이버샷이 5미터 코앞에 떨어지는 모습을 보자마자 우리조는 고민할 것도 없이 바로 달리던 버기를 유턴하여 10번 홀로 갔다. 무다이 님을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은 계속 점수가 시원찮았다. 스윙할 때 왼쪽 어깨가 찌르는 듯 아프다는 알바 님은 2-3홀만에 벌써 본인의 핸디를 치셨고, 닥터노는 뜬금없이 형과 엄마가 보고 싶다며 어디론가 전화를 했다. "엄마가 전화를 안 받네"하더니 얼마 후 아마도 엄마로부터 전화를 받고 두런두런 통화를 하는 것 같았다. 그때는 한 버기를 탄 닥터노와 내가 모두 전반을 죽쓰고 있을 때였다. 난 어떨 때 엄마가 보고 싶고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는지 한번 생각해봤다. 그것은 아주 절박한 위기에 봉착했다고 느껴 극도로 불안할 때나, 너무 화나는 일이 생겨 당장 말로라도 풀어야 할 때나, 너무나 좋고 아름다운 것을 혼자 보고 있는 것이 아쉬울 때나, 너무 창피하고 민망하여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을 때나, 뭐 주로 그럴 때인 것 같다. 닥터노는 한창 라운드 중에 대체 어떤 감정을 느꼈기에 갑자기 자신이 평소에 제일 의지하는 사람들을 찾을 만큼 절박했던 것일까? 실은 그 정도로 골프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뭐 어쨌든 닥터노는 엄마와 짧은 통화를 마친 후부터 힘이 샘솟았는지 서서히 잘하기 시작했고 흔들림 없이 후반과 전체를 가뿐히 승리했다. 후반을 시작한 즈음이었나 "내가 1등 하면 누나 10달러 깎아줄게요"라는 닥터노에게 난 "뭐 그런 일이 생길 것 같진 않은데.. ㅎㅎ 암튼 약속 지켜야 해?"라고 했다. 다짐을 받아두길 잘했다. 정말 1등을 했고 약속을 지켰다.
햇볕이 강렬해지자 자동 헤드업 방지 기능까지 갖췄다는 햇볕 가리개를 장착한 무다이 님은 전반에 비해 후반에 고전하셨다. 어깨 부상에도 불구하고 니어 및 버디 2개와 함께 전반 1등과 후반/전체 2등을 차지하신 알바 님은 그래도 뭔가 성에 안 차신 눈치였다. 나는 진작부터 꼴찌로 재껴져 있었다. 요새 뱃살이 자꾸 찌는 듯하여 오늘은 아꿍에서 국수도 거르고 커피만 마시면서 "공복의 헝그리" 정신으로 치겠다고까지 했었는데 이게 뭔 꼴이람. 오스틴 라커룸에는 체중계가 있다. 집에 있는 것이 요새 고장나서 아침에 이 라커룸에서 나오면서 재어보았다. 역시나 어느 정도 예상한 숫자였다. 라운드가 끝난 후 씻고 나오면서 다시 재어보았다. 1kg가 줄어 있었다. 오늘 나의 성과다. 또한 라운드 중에 퍼팅에 대해 닥터노와 나는 알바 님한테 귀중한 레슨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오늘의 수확이라 하겠다.
오스틴 클럽하우스 식당은 여전히 음식을 준비하는 속도가 달팽이도 비웃을 수준이었다. 주문부터 한 후 샤워를 마치고 나와도 기다려야 할 지경이다. 더 많이 팔아서 돈을 더 많이 벌려는 의욕은 별로 없는 모양이다. 고관절 부상으로 오랜만에 나오신 티케이 님은 근래 탄종루 지역으로 이사하셨다고 했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지역이라 많이 부러웠다. 또한 모처럼 나온 럭키는 다음 주말이면 아예 한국으로 들어간다는 깜짝 소식을 전했다. 한국의 새로운 회사에서 곧 일을 시작한다고 했다. 그래서 오늘 좋아하는 앨런 형님과 꼭 같은 조에서 치고 싶어했고 그렇게 했다. 아침에 살짝 늦잠을 잤다는 데도 라운드 시작 전에 두 개의 골프백을 들고 나타난 앨런은 그런 골프백이 7개는 들어갈 만한 큰 밴 같은 차량을 몰고 왔다. 앨런은 어쩐지 조호로 이사한 후 한결 여유가 있어 보인다. 블루스타 님은 몇몇 로컬 회사에서 오퍼가 들어와 곧 싱가폴에서 다시 일을 시작하시게 된다고 했다. 젊은 사람들도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은 요즘 정말 대단하신 것 같다. 블루스타 님 및 나마스떼 님과 함께 오신 지인분은 블루스타 님 전직장 후임자이신데 곧 싱신골 카페에 가입하실 거라고 했다. 블루스타 님이 "가입비가 있다"며 농담하시자 흠칫 놀라셨다. 버디를 하셨다는 블루스타 님은 오늘 텐텐텐의 승자로서 직접 수금도 다니셨다. 그동안 쌓아놓으신 공덕 때문인지 요즘 확실한 대세임에도 핸디 내리라는 압박을 거의 안 받으시는 듯한 호마산 님은 스스로 핸디를 20으로 낮추셨는데, 그런데도! 오늘 이븐을 쳐서 또 싹쓸이하셨다고 했다. 식당에서 36홀팀은 내기 룰을 정하면서 호마산 님과 파트너가 되려고 경쟁이 치열한 듯보였다. 루카 님은 오늘 1언더를 치셨다고 했다. 어려운 오스틴이고 블루티에서 쳤는데, 역시 예상한 대로 강적이다.
싱가폴로 돌아올 때는 길이 하나도 안 막혔다. 2시 반도 안 되어 집에 도착한 것 같다. 대충 정리한 후 인터넷 기사를 훑어보았다. 요즘 한국 뉴스는 너무 재미있다. 한 용감한 여검사의 결단으로 오랫동안 숨겨왔던 검찰의 더러운 실상이 세상에 까발려지고, 이명박을 옥죌 증거들이 속속 드러나고, 각종 황당한 갑질이 고발되고... 이 모든 것에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분노한다. 댓글들도 의외로 성숙한 댓글이 많다. 재치 있는 시니컬한 욕이나 그저 솔직한 심경을 담은 찰진 욕을 보면서 큭큭 웃으며 열심히 "좋아요"를 누르다 보면 어느새 나도 분노가 차츰 가라앉고 좀 후련해진다. 또한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든든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의 시행착오를 거쳐 적어도 지금은 어쩐지 제대로 방향을 잡은 것 같아 다행스럽다는 느낌도 든다. 나도 내 중심을 잃지 않고 내 자리에서 오늘도 열심히 즐겁게 살련다.
봉팔이의 일기 끝~
첫댓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항상 새벽에 정신없이 시작하니,다른조분들의 이런저런소식을 항상 봉작가님을 통해서 들으니 참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블루스타 님 ^^ 그리고 벌써 다시 일을 하시게 되다니 그 또한 축하드리고요! 편안한 저녁 되세욤 ^^
좋아 좋아 ㅎㅎ
ㅎㅎ 고마워 웬이글 ^^
2주 연속으로 같이 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요즘은 주말에 뭐 했는지 생각이 안나면, 봉팔이의 일기를 읽습니다.
감사합니다.
ㅎㅎ 나두 닥터노와 2주 연속 아주 즐거웠음! 그리고 1등 한거 축하해~~ ^^
너무 재미있습니다. 항상 잘 보고 있어요 :)
ㅎㅎ 고마워 앨런 ^__^
글이 점점 더 편해지시네요. 후기 1개당 커피 한잔 씩이라도 드려야 할 것 같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감사합니다 달보까 님 ^^ 이제 아주 습관적으로 쓰게 되네요 ㅎㅎ
@봉주르 참고로.. 적도 부근에 사시니까 한국보다 300그램 가볍습니다. 지구가 완전한 구형이 아니라서 중력의 영향을 좀 덜 받거든요. 에베레스트 가심 더 가벼워지실 수도.. 쿨럭..
@달을 보라니까 큰 위로 감사합니다. 오늘 저녁 한 숟가락 더 먹어도 되겠네요 -,.-
다양한 등장인물과 싱가폴과 한국까지 담은 후기네요. 잘 봤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필립 님 ^^
이젠 골프 후기와 함께 동호회 회원들 동정을 접할 수 있는 귀한 글이 되어 가고 있네요. 봉주르 님 글 덕분에 여러분들 근황도 접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
호호 감사합니다 얌얌 님 ^^ 앞으로도 주워듣는 대로 열심히 긁어다 기록하겠습니다 ㅎㅎㅎ
후기 항상 고맙습니다. 너무 좋은글을 매주 올려 주시네요!
ㅎㅎ 항상 든든한 회장님 ^^ 늘 감사해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