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사의 며느리 록지는 석녀(石女·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가 맞았다.
혼례를 올린 지 3년이 지나도 아기를 갖지 못하자 집안의 대가 끊어진다고 시어미가 난리 쳐 신랑이 첩을 얻었다.
몇 달 만에 첩이 입덧을 한다는 소문이 떠돌더니 달이 차자 아들을 낳았다.
유씨 집안에 삼 대 독자 핏줄을 잇게 된 것이다.
록지의 위상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하더니 은근한 압박이 피부로 느껴지자 첩에게 안방을 물려주기로 했다.
록지가 시아버지에게 큰절을 드리며 마지막 인사를 올리자
유 진사가 록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보였다.
시집 유 진사댁도 평양에서 알아주는 양반 대가지만 친정 오 대인집도 시집 못지않은 명문가다.
록지는 시집과 친정에 누를 끼치지 않으려고 소리 소문 없이 장옷을 깊이 쓰고 평양을 빠져 나갔다.
록지 나이 이제 스물둘! 어디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아갈까?
땅거미가 지는 평양성 밖 주막집 객방에서 벽에 기대어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닦지도 않아 저고리 앞섶이 다 젖었다.
한 식경이나 머릿속이 먹물처럼 엉키다가
‘그래, 운명의 쪽배를 타는 거다. 운명! 흘러가는 대로 가는 거야’ 생각하자 갑자기 마음이 편해졌다.
탁배기 한 병에 안주를 시켰다.
자작 석 잔에 픽 쓰러졌다.
이튿날 남장(男裝)을 했다.
여자가 홀몸으로 돌아다니기에는 아무래도 남장을 하는 게 나을 듯해서다.
초립에 조끼를 입고 바지 정강이는 노끈으로 묶었다.
‘다른 사람 눈에 남자로 보이겠지’ 하는 건 록지의 생각이고 반듯한 이목구비에 백옥 같은 살결, 야들한 손은 누가 봐도 여자다.
록지가 가려는 곳은 구월산 자락 황해도 은율이다.
어릴 적 이웃 친구가 그곳으로 시집가 실낱같은 연고라도 만들겠다고 은율을 항해 발걸음을 뗐다.
몇 날 며칠을 걸어 남포에 가니 바다처럼 드넓은 대동강 하구가 가로막았다.
황포돛배를 타고 대동강을 건너니 은율이 멀지 않았다.
아침을 챙겨 먹고 주막을 나서는데 주모가 말했다.
“봉수고개를 넘을 때는 머릿수가 열 다섯이 돼야 관군이 따라가.”
산적이 나올지 모른다고 겁을 줘 다시 주막으로 들어갔다.
하룻밤을 더 잤는데도 여덟 사람 밖에 되지 않았다.
“주모가 매상 올리려고 저러지.”
장돌뱅이 하나가 빈정대며 주막을 나서자 모두 따라 나섰다.
온 산이 진달래꽃으로 뒤덮인 고갯길을 오르며 창을 뽑는 사람도 있었다.
“엄마야∼” 록지는 폭 주저앉고 남정네들은 두 손을 치켜들었다.
소나무에서 산적들이 칼춤을 추며 툭툭 떨어졌다.
큰소리치던 장돌뱅이는 선 채로 바지에 설설 오줌을 쌌다.
돈과 쓸 만한 물건만 빼앗고 모두 풀어주는데 산적들이 키득거리며 록지만 둘러쌌다.
가슴을 만져보는 놈, 엉덩이를 주무르는 놈, 록지는 발에 밟힌 지렁이처럼 꿈틀댔다.
눈을 가린 채 막대기를 잡고 온종일 걸어가는데 소쩍새 소리가 들려 밤이 깊은 줄 알았다.
가다가 암호를 외치기에 초소를 지나는 걸 알았다.
마침내 눈가림 막을 벗기자 말로만 듣던 산채다.
그 악명 높은 구월산 산적 소굴에 온 것이다.
록지는 깜짝 놀랐다.
한 마을처럼 산채가 넓었다.
움막만 있는 줄 알았더니 비록 초가지만 번듯한 집도 있었다.
여기저기 불빛이 반짝였다.
맨 위쪽 너와집에 록지를 넣었다.
아직 산속 밤은 싸늘한데 너와집 온돌방은 따뜻했다.
운명에 몸을 맡겨서일까. 별로 겁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열리고 술 냄새를 풍기며 덩치 큰 남자가 들어오더니 다짜고짜 록지를 쓰러뜨렸다.
“웬 여편네가 바지를 입었어? 너 사당패야?”
“으아∼악” 록지가 고함쳤다.
생전 처음 겪어보는 괴상한 짓거리에 록지는 사지가 갈기갈기 찢겨져 나가는 것 같았다.
고통과 쾌감은 양면이라 했던가.
아침이 밝았을 때 록지는 발가벗은 채 털보 품에 안겨 있었다.
이상했다. 록지는 십여 년을 함께 산 서방님 품에 안겨 있는 것 같은 충만감에 온몸이 녹아내렸다.
술이 깬 산적 두목은 적이 놀랐다.
빼어난 미인일 뿐 아니라 얼굴에 기품이 서려 있고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엄도 있었다.
록지도 옷매무새를 여미며 산적 두목의 얼굴을 쳐다보고는 텁수룩한 수염 속에 감춰진 귀골 상을 보게 되었다.
보통 여인네를 납치해와 두목이 하룻밤을 지내고 나면 밑으로 보내 이 산적 저 산적이 해우(解憂)하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뿐만 아니라 사흘 후 아예 혼례식을 올렸다.
산채에서 기르던 돼지를 두마리나 잡고 술독이 바닥났다.
록지는 신방에서 새신랑을 기다리며 들창 위에 걸린 초승달을 보고 기도했다.
“천지신명님이시여, 고맙습니다. 저는 행복합니다.”
신랑이 들어왔다.
너와집이 흔들리고 록지는 태산 같은 새신랑 품에 안겨 꿈나라로 갔다.
호사다마, 그날 새벽 은율 관아에서 관군이 기습해 왔다.
산채는 불바다가 되고 피바다가 되었다.
“임자는 납치돼 온 사람이니 아무 문제가 없을 거요.”
새신랑이 무쭐한 주머니 하나를 록지 손에 쥐어주고 으스러지게 껴안더니 들창 밖으로 몸을 날렸다.
록지는 관군에 구출(?)되어 내려갔다.
뚜당뚜당’ 목수들이 서너 달 땀을 흘리더니 은율관아 앞 개울 건너에 새집이 들어섰다.
한 울타리 속에서 뒤에는 아담한 기와집이 가운데 중문을 두고,
앞에는 초가집이 들어서 사물패가 상모를 돌리고 꽹과리를 치더니
초가집은 주막이 되고 기와집은 요릿집이 되었다.
요릿집엔 사또와 은율 토호들이 출입하고 주막엔 은율관아의 육방관속과 관군, 포졸, 장돌뱅이 나부랭이들이 들락거렸다.
요릿집과 주막집 주인은 록지요, 자금 출처는 신랑 산적 두목이 주고 간 금덩어리 주머니였다.
록지가 어느 날 은율장터에 나갔다가 길가에서 좌판 산나물을 한 보자기 사서 계산하다가 서로 깜짝 놀랐다.
어릴 적 이웃 친구 덕순이었다.
록지와 덕순이는 두 손을 마주잡고 팔짝팔짝 뛰다가 록지 집으로 갔다.
살아온 얘기로 꼬박 밤을 새웠다.
덕순이 팔자도 파란만장했다.
은율관아의 관군으로 있던 신랑이 삼 년 전 구월산 전투에서 전사해 딸 하나를 두고 과부가 되었다.
기와집인 요릿집은 록지가 맡고, 초가집 주막은 덕순이가 맡아 주모가 되었다.
덕순이는 원래 음식 솜씨가 있었고 손도 훤칠한 데다 관군들이 모두 죽은 남편의 동료들이라 주막은 문전성시를 이뤘다.
요릿집도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가장 큰 손님은 사또다.
사또는 이미 록지가 산적 두목과 혼례를 올린 사실을 알고 있었고,
록지는 사또가 산채에 세작(첩자)을 심어놓았단 사실을 알았다.
산채에서 혼례를 올린 날 밤 모두가 술에 취해 떨어져 있을 때 관군이 쳐들어왔다는 건 우연의 일치일까?
봄비답지 않게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어느 날 밤,
주막 객방에 묵고 있던 장돌뱅이 하나가 덕순이를 통해 록지를 몰래 만나자고 했다.
용건을 물었더니 두목이 보냈다는 것이다.
이 남자를 따라 새 산채에 오라는 것이다.
“여봐라∼ 이 남자를 포박하여 광 속에 가뒀다가 내일 아침 날이 새거든 관아로 넘겨라.”
횃불을 든 하인들이 몰려와 그 장돌뱅이를 포박해 광에 넣었다.
록지는 사또가 자신을 시험해보려고 그 장돌뱅이를 보냈다는 걸 첫눈에 눈치챘다.
이튿날 아침, 하인들이 묶어 처박아 광 속에 넣어뒀던 장돌뱅이를 은율관아로 보냈더니 그날 밤 사또가 찾아왔다.
우아한 요릿집 주인 여자가 산적 두목에게 몸과 마음을 바친 색시가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그날 밤 만취한 사또는 록지에게 이상한 청을 했다.
구월산 산적 두목을 생포하는 데 록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해달라는 것이다.
록지는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산적 두목이라도 혼례를 올린 신랑을 어떻게 제 손으로 잡아 관아에 넘길 수 있겠느냐며 울었다.
사또는 고개를 끄덕이며 산적 두목과 사또 자신과의 기막힌 악연을 털어놓았다.
산적 두목 관동이와 은율 사또인 익주는 평양 통도리의 앞뒷집 불알친구였다.
함께 서당을 다니며 둘 다 평양 신동으로 훈장님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관동이는 무관 쪽으로, 익주는 문관으로 길을 정했다.
둘 다 한 번에 대과에 붙었다.
익주는 당장 등용이 되었지만 서자인 관동이는 한 해가 지나고 두 해가 지나도 등용되지 않았다.
허구한 날 술독에 빠져 살던 관동이는 육 년째 되던 해 구월산으로 들어가 산적 두목이 되었다.
오합지졸이던 산적들을 체계적으로 훈련시켜 구월산 산적이라면 울던 아이도 뚝, 울음을 그쳤다.
조정에서는 구월산 산적들의 세력이 커지는 걸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다가 익주를 불러 올려 은율 사또에 앉혔다.
평양성 관군의 지원을 받아 몇 번이나 쳐들어갔지만 관군들은 열에 아홉은 참담한 패배만 당했다.
곰곰이 생각하던 록지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이번에는 사또가 고개를 떨군 채 한참 있더니 “좋소” 하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록지와 사또는 술잔을 힘차게 부딪쳤다.
이튿날 먼동이 트자 장옷을 깊게 눌러쓴 록지는 사또가 마련해준 당나귀에 올라탔다.
말잡이가 고삐를 잡고 구월산으로 향했다.
저녁 나절 불바다가 되었던 산채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집집마다 등불이 켜졌다.
록지가 팔짝 뛰어내려 두목의 품에 안겼다.
록지의 얘기를 귀담아듣던 두목이 산채 마당에 횃불을 올리고 산적들을 모두 모았다.
“이제 모두 고향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습니다.
단 하룻밤이라도 다리를 뻗고 자봅시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여기저기서
“흑 흑∼” 울음이 터졌다.
잠시 후 은율 사또가 육방관속을 대동하고 산채 마당에 들어서 두목과 포옹했다.
“오랜만이야.” “진작 만날 걸.”
구월산이 떠나갈 듯 환호성이 터졌다.
“여러분의 죄는 불문에 부치고 이곳에 들어오게 된 억울한 사연은 모두 풀어드리겠습니다.”
사또의 연설에 또다시 함성이 터졌다.
밤중에 돼지와 닭을 잡고 술을 걸렀다.
구월산 산채에서는 밤새도록 잔치판이 벌어졌다.
이튿날 창고 문을 열고 금붙이 은붙이 모두 꺼내 머릿수대로 나눠주자 부하들은 두목을 잡고 눈물을 훔쳤다.
두목은 함경도 부령도호부 부사로 임관되었다.
산적 셋은 두목 밑에서 군관이 되겠다고 함경도로 따라가고 록지도 주막과 요릿집을 덕순이에게 맡기고
신랑 따라 함경도로 갔다. ㅡ終ㅡ
첫댓글 재미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