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백성호의 현문우답 중앙일보 입력 2023.09.01 00:32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백성호 기자 중앙일보 종교전문기자
중세 때는 그랬다. ‘종교적’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비과학적이었고, ‘과학적’이라고 하면 상당히 비종교적이었다.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 종교는 훨씬 더 열려 있고, 과학도 훨씬 더 발전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묻는다. “과학이 고도로 발전하면 종교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물음을 던지는 사람들은 상당수 종교와 과학을 양자택일의 대상으로 본다. 마치 중세 때의 종교, 중세 때의 과학을 앞에 놓고 하나를 골라야만 했듯이 말이다. 종교계를 취재하다 보면 남다르게 ‘과학적 사고’를 하는 이를 만날 때가 있다. 특히 고(故) 정진석 추기경(1931~2021)이 그랬다. 어릴 적부터 정 추기경의 꿈은 과학자였다. 실제 정 추기경은 서울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공학도의 길을 택했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졌고, 전쟁이 끝난 후에는 삶과 죽음을 고민하다가 서울대가 아닌 가톨릭 신학대에 들어갔다. 정 추기경과 인터뷰를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다름 아닌 창조론과 진화론에 대한 문답이었다. 목사나 신부 등 그리스도교 성직자에게 이 질문을 던지면 일종의 모범답안이 있다. 그들은 대부분 창조론은 인정하고, 진화론은 단호하게 부정한다. “우주의 시작을 말하는 빅뱅 이론도 일종의 가설일 뿐이다. 이 어마어마한 우주의 신비를 창조주 없이 설명하기는 불가능하다.” 주로 이렇게 답한다.
그런데 정 추기경은 달랐다. 그가 과학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달랐다. “우리 인간이 아는 것은 우주 전체의 한 부분에 불과합니다. 인간의 과학이 발달하는 과정은 결국 신의 섭리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종교가 찾는 것도 진리이고, 과학이 찾는 것도 진리다. 그러니 시대의 흐름과 함께 종교가 갈수록 열리고, 과학이 갈수록 발달한다면 둘은 결국 한 점에서 만날 수밖에 없다. 종교와 과학은 영원히 마주 보고 달리는 평행선이 아니다.
정 추기경은 정확하게 그 점을 지적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대치되는 개념이 아닙니다. 진화론은 ‘시간’을 전제로 한 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고등생물이 나왔다는 게 요지입니다. 그럼 ‘시간’이 언제부터 생겼는지를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대목에서 정 추기경은 ‘빅뱅 이론’을 과감하게 수용했다. 한때의 과학도답게 말이다. “시간은 빅뱅 때 생겨났습니다. 빅뱅으로 이 우주가 펼쳐지면서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매 순간 변화가 일어나는 겁니다. 우주는 매 순간 시ㆍ공간의 영향을 받으니까요.” “일종의 가설에 불과하다”며 손을 내젓는 그리스도교인들과 달리 정 추기경은 아예 빅뱅이란 가설의 출발점에 함께 서서 시간과 공간이 우주에 펼쳐졌다고 했다. 그럼 이게 전부일까. 그렇지 않다. 정 추기경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과학자들이 끊임없이 던지는 물음, 과학자들이 답을 얻지 못하는 물음, 일부 과학자들은 더 이상 묻기를 포기한 물음. 거기에 대해서 물음을 던진다. 다름 아닌 ‘빅뱅 이전’이다. “빅뱅이란 대폭발로 인해 우주가 시작됐다면, 빅뱅 이전에는 무엇이 있었나?”라는 우주의 근원에 관한 물음이다. 현대 과학은 아직 여기에 답을 하지 못한다. 양자물리학이 지금보다 더 많이 발전한다면 답을 할지도 모른다. 물질을 쪼개고, 쪼개고, 또 쪼개서 물질과 세계와 우주의 본질이 정체를 드러낸다면 말이다. 그런데 정 추기경은 이 물음에 대해서 답을 했다. 진화론을 부정하지 않고 진화론을 수용하면서, 또 그것을 넘어서는 안목을 보여주었다.
“빅뱅으로 우주에 시간과 공간이 생겨났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어떤 분일까요. 하느님도 시간의 영향을 받는 분일까요. 하느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입니다. 왜냐고요? 하느님은 빅뱅 이전부터 존재하셨기 때문입니다.” 정 추기경은 종교의 영역에서 ‘빅뱅 이전’을 풀었다. “하느님은 이 우주가 생기기 전부터 계신 분이죠. 그러니 시작이 없고, 변화가 없고, 끝도 없는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나는 있는 나다’(탈출기 3장 14절)라고 돼 있습니다.” 가령 빅뱅 이후에 펼쳐진 이 우주, 그 우주 속에서 작동하는 시간과 공간이 모두 도화지 위에 그려진 그림이라고 해보자. 그럴 때 ‘빅뱅 이전’인 하느님은 그 모든 그림의 바탕인 도화지 자체가 된다는 뜻이다.
정 추기경은 그런 우주의 바탕을 가리켜 ‘영원한 법’이라고 불렀다.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그것을 초월해 있기에 ‘영원한 법’이라고 했다. “하느님에겐 1억 년 정도 ‘지금’이고, 지금도 지금이고, 1억 년 후도 ‘지금’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니까요.”
가령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철로가 있다고 하자. 진화론은 수원역에서 대전역까지를 설명한다. 반면 ‘빅뱅 이전’을 이야기하는 창조론은 수원역 이전인 서울역과 대전역 이후인 부산역까지도 안고 있다.
이렇게 보면 창조론과 진화론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다. 창조론이 진화론을 품고 있는 모양새다. 그러니 우리에게는 열린 자세가 필요하다. 종교에 대해서도, 과학에 대해서도 말이다. 이 둘에 대해서 유연하고 열린 자세를 취할 때 비로소 우리는 훗날 종교를 통해서도, 과학을 통해서도 인간과 우주를 최대한 풀 수 있을 테니 말이다.
* 문제 해결을 위한 지혜 (따뜻한 편지 2357)
일은 맺은 사람이 풀어야 한다는 뜻의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사자성어가 있습니다.
이 사자성어는 조선 인조 때 홍만종이 지은 문학평론집 ‘순오지’에 나오는 격언 ‘결자해지 기시자 당임기종(結者解之 其始者 當任其終)’의 일부입니다.
격언 전체를 풀이하자면 ‘맺은 자가 그것을 풀고, 일을 시작한 자가 마땅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원인을 만든 사람에게 결과에 대한 책임이 있다는 뜻이 되고, 문제를 만든 사람이 그 문제의 해답을 제일 잘 안다는 뜻도 됩니다.
우리가 살면서 생기는 많은 다툼과 사건 중 원만히 풀리지 않고 파국까지 가는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 맨 사람이 풀기를 싫어하는 경우, 둘째, 다른 사람이 그것을 풀다 더 헝클어 버리는 경우이고 셋째는 맨 사람이 풀려고 하는데 풀 시간과 여유를 주지 않고 다그치게 될 때 더 단단히 조여버려 도저히 풀리지 않는 파국을 맞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문제를 만든 사람이 그것을 풀어야 한다는 대전제를 기억해 그 사람이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는 시간을 줄 수 있는 여유를 우리가 가져야 함을 깨닫게 합니다.
이제 막 사회를 경험하는 자녀들에게도 ‘결자해지’는 적용됩니다. 부모는 따뜻한 응원과 신뢰하며 기다려줄 뿐 인생의 몫은 자녀들 자신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비단 자녀뿐만 아니라 어른도 때때로 자신의 문제를 누군가 대신 해결해 주기를, 기적 같은 일이 자주 생기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삶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것입니다. 무언가 이루어지기를, 누군가 알아서 해주기를 바라지 말고 능동적인 자세로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 오늘의 명언
그곳을 빠져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곳을 거쳐 가는 것이다.
– 로버트 프로스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