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각 이상중에서 저는 감각의 하향처리에 문제가 조금 있습니다.
주변의 에너지를 감각기관이 탐지해서 생체 전기 신호로 바꾸는 걸 감각이라고 하며
그런 감각을 뇌에서 선택, 조직화하는 과정이 지각이랍니다.
감각이 지각화 될 때 이전 경험과 심리적 상황에 따라
어떤 사실보다는 감정적 부분이 작용하여 처리되는 걸 하향처리라 합니다.
전 여기에서 이상이 발생한답니다.
실제 감각에 제가 만든 허상이 평균보다 좀 많이 덫대여지다 보니
실체가 없는 상상의 지각이 생기는 것이죠.
이를 테면 바람의 색깔이 보이고 구름의 소리가 들리는 식입니다.
이걸 어릴 때 잘 키워주면 화가나 작가가 될 수도 있다지만
대부분은 그냥 어른이 되어 환청, 환향, 환시에 시달립니다.
전 환향을 맡습니다. 그닥 좋은 냄새는 아닙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억력이 좋았습니다.
어떤 장면이든 원하면 그대로 사진 찍듯 기억합니다.
머리속엔 언제나 수많은 사진들이 있고
스르륵 슬라이드 넘기다 맘에 드는 사진을 떠올린 후
거기에 어울리는 이야기를 지어냅니다.
뭐 가끔은 캔버스에 그리기도 합니다.
아이들 클 때, 전 동화책을 읽어주기 보단 즉석에서 이야기를 만들어 들려주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시골 동네 모래톱에서 놀던 이야기,
검정고무신이 배도 되고 비행기도 되던 이야기,
그렇게 제 유년의 사진을 들추다
문득 40년전 머리 속에 찍어 놓은 한 장의 장면에서 눈시울이 뜨거웠던 일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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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시절,
풍물패 동아리에서 하루종일 혼자서 쇠를 치다
또 장구를 연습하다 오후 늦게부터 돌리던 북.
그 큰 사물북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리다 저 멀리 하늘을 보니 어느새 노을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붉은 빛에 이유도 모른 채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드랬습니다.
그후로 몇 년 동안, 내가 그날 왜 울었을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모르겠더군요.
다만 너무도 강렬한 인상으로
불타던 하늘과 그 아래 무너져 혼자 울던 초보 풍물꾼의 모습이
또 한 장의 사진으로 남았드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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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열심히 이야기를 만들다
아마 그날의 이야기는 대보름날 달맞이하러 가던 남매의 이야기였을 겁니다.
달이 떠오르기 전에 어서 뒷동산에 올라 한복저고리에 제일 먼저 달을 담아 오니라!
신이가 나서 누나 손을 잡고 줄달음쳐 달려가던 꼬맹이 앞에
갑자기 우뚝 나타난 무시무시한 도깨비!
시뻘건 얼굴을 하곤 집채만한 북을 돌리다 천둥같은 북소리를 내지릅니다.
꼬맹이는 너무 무서워 그만 뒤로 발랑 나자빠져 엉엉 울어버리네요.
누나는 동생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베시시 웃으며 옆에 주저앉아 다만 꼭 안아줍니다.
눈물이 그렁그렁 코를 훌쩍훌쩍
도깨비는 누나에게서 꼬맹이를 빼앗듯 하늘 높이 안아올리곤 탈을 벗습니다.
에구머니나! 이게 누구야!!
마당밟이 하던 풍물꾼들은 북치배를 떼놓구서 이미 서낭으로 향했고
아예 등 뒤로 북을 돌려메어 울할아버지,
넓은 품에 손주를 안고는 멀어지는 풍물패를 지긋히 바라봅니다.
할아버지 얼굴이 석양에 물들어 발그레 달처럼 떠오릅니다.
콩닥콩닥 쌕쌕 여전히 가슴은 뛰지만
싱긋 올라오는 녹진한 할아버지 땀냄새가 너무 좋아 손주는 말갛게 상기된 얼굴을 파뭍습니다.
그렇게 소년은 대보름달을 어리고 작은 가슴에 품었습니다.
제 머리 어딘가 숨어있던 빛바랜 사진 한장이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지어주던 그때 불연듯 떠올랐습니다.
십수년전 동아리방 앞언덕에서 혼자 북을 치다 바라본 석양에
왜 그리 사무치게 눈물을 찍어냈는지 그 이유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대보름이면 동네에서 벌어지던 작살판굿,
그 패거리엔 언제나 할아버지가 북을 치며 계셨습니다.
북 치던 할아버지의 기억이 오랜 시간 잊혀져 있다 시간을 거슬러 대보름달처럼 떠오릅니다.
봄날이면 아장아장 지 몸통만한 공을 튀기며 깡총깡총 뛰어가고
할아버지는 하나뿐인 손주 넘어질까 안절부절, “어이쿠나”하시며 자근자근 즈려 밟던 발걸음.
통통 튀는 “덩기 덩기”와 즈려 밟는 “덩따궁따”
삼채가락을 치면 지금도 전 할아버지가 생각납니다.
얼굴 하나 가득 손주가 이뻐서 어쩔 줄 몰라하시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살아.”
“그때 내가 참 행복했거든.“
무당이 신기가 떨어지면 모시던 신을 버리고 다른 신을 받는 재신내림굿을 받기도 하지만
그래도 본댁정이라지요.
다시금 신력을 복돋기위해 정성을 다해 자기 자신에게 굿을 한답니다.
그걸 “꽃맞이굿”이라 합니다.
저에게 연극은, 꽃맞이굿입니다.
재주가 성치 못해 여전히 많은 필름, 현상기에 돌리지도 못한 저에게 극단새벽은
빛바랜 사진첩에 불어넣을 반가운 입김입니다.
곱씹어야할 기억의 편린으로 향하는 마중물입니다.
할아버지에서 저에게로 이어진 질긴 끈을 잡고 끊이지 않고 흐르는 작은 시냇물에서 물장구치며 놀고 싶습니다.
왜 연극이어야 하는지,
영화가 아닌, 글이 아닌,
왜 연극이어야만 하는 지를 보여준 작품이었습니다.
연극을 보고나서 할아버지가 보고싶었는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를 찾기 위해서라도 다음 공연이 기다려지는
“당신은 극단새벽이다!”
[후기 글 주의사항]
Tip 1. 솔직하고 정성이 담긴 감상평 부탁드립니다^^
Tip 2. 줄거리요약 및 스포일러성의 글은 다른 관객을 위해 자제해 주세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