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철의 기억/靑石 전성훈
세월이 흐를수록 과거의 기억들이 실타래에 실이 뒤죽박죽 엉키듯이 기억 이쪽과 저쪽이 하나로 뒤섞여서 사실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과거에는 가족과 형제들 집안일을 누구보다도 잘 기억했는데, 지금은 나이가 들었는지 아니면 기억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예전만 못하다. 여름인지 겨울인지 계절에 대한 기억은 분명한데, 사건이나 사고가 일어났던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거나 어느 해였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헷갈린다. 마치 장마철 장대 같은 폭우로 불어난 강물이나 냇물의 기세에 눌려서 강둑이 뚫리고 냇가 방죽이 터지듯이 과거의 자질구레한 기억들이 속절없이 사라져버린다. 한때 이름을 떨치던 스포츠계의 스타가 무심한 세월에 등 떠밀려서 평범한 노인으로 변해가는 모습이 안타깝다. 젊은 시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어서 섬뜩한 기분이 들 정도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금언처럼 세월을 이기는 장사는 없다는 옛 말씀이 정말 가슴에 와닿는다.
여름철 장마에 대한 잊을 수 없는 공포와 추억을 가진 경험은 어린 시절 외가에서 살던 때이다. 번동 외갓집 동네에는 마을 앞에 개울이 있고 개울 너머에 논과 밭이, 그리고 논밭을 지나면 제법 큰 하천(한내, 한천)이 있다. 우이천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로 그 물이 더 내려가면 중랑천과 합쳐져 한강으로 흘러간다. 지금은 아파트촌으로 바뀌어 상전벽해의 모습이다.
국민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느 해 여름, 며칠 동안 장대 같은 폭우가 억수같이 퍼부었다. 논에 물이 가득 차서 넘쳤고, 마을 어귀의 폭 좁은 개울이 넘칠듯하여 동네 어른들이 밤잠을 거르고 물이 넘치지 못하게 가마니와 부댓자루에 흙을 담아서 축대를 쌓았다. 어른들 고생에 하늘이 응답하시어 다행히 개울물이 마을로 넘치지 않았다. 흙탕물이 휩쓸고 간 논밭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시던 동네 어른들이 통발과 반도를 가지고 논에 들어가 물고기를 잡았다. 어른들이 물고기 잡는 모습을 신이 나서 구경하였던 광경이 마치 바로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하다. 물고기를 잡은 후 커다란 가마솥에 고추장, 된장을 풀고 물고기와 호박, 고사리, 대파를 썰어 넣고 끓였다. 국수를 삶고 밀가루 반죽을 띠어 넣어 푸짐하게 끓인 미꾸리탕은 장마로 억장이 무너지고 힘들었던 사람들을 위로하는 동네잔치였다. 어른이 되어 생각하니 그것은 매운탕이었다. 장마와 태풍의 피해가 특별하게 기억되는 사건이 하나 더 있다.
1980년대 초반, 8월 말이나 9월 초순쯤 같다. 며칠 동안 폭우가 쏟아져 커다란 피해를 보았다. 철도와 도로가 물에 잠기고 여기저기 지하차도가 침수되어 그야말로 교통지옥이 되었다. 아침에 출근하기 위해서 집을 나섰는데 전철도 다니지 않고 버스도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어렵게 회사에 갔을 때는 오전 10시가 넘었는데 사무실에 직원이 반 정도만 출근하였다. 당시 북한 김일성정권에서 피해를 입은 남쪽 동포들에게 ‘동포애’를 베풀어 원조하겠다고 하자, 정부에서 북쪽의 제의를 받아드렸다. 북에서 포목과 옷가지 그리고 밀가루와 쌀을 보내왔는데, 북한 물자를 받아보겠다는 사람들이 벌린 웃지 못할 소동이 매스컴에 보도되었다. 처갓집이 이북 출신이라서 쌀 배급이 나왔다. 당시 보도를 떠올리면, 포목의 질은 국산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여 우리나라 60년대 수준이고, 쌀에는 ‘뉘’가 많이 들어가 정미소에서 도정을 해야 했다.
물난리를 겪거나 화마를 당해도 물과 불은 사람과 원수지간이 아니라는 옛 말씀처럼, 사람은 물을 마시고 불을 이용하여 밥을 짓고 음식을 만들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해마다 여름철이면 장마와 태풍으로 큰 피해를 보고, 여기저기서 생명을 잃는 사고가 반복된다. 정부에서는 긴급 지원 정책을 펴고 민간단체에는 수재민 돕기 운동을 벌인다. 인간의 편리함을 쫓아서 개발이라는 미명으로 자연을 무참하게 파괴하면 자연은 반드시 인간에게 그 대가를 치르도록 한다. 무릇 모든 생명체를 품고 있는 지구라는 별은, 인간이 우쭐거리지 않고 자연과 서로 돕고 살아야만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아름다운 곳이다. (202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