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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3월 3일 금요일 [(자)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단식과 고행은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는 것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느냐는 요한의 제자들의 물음에,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단식할 것이라고 하신다(복음).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58,1-9ㄴ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목청껏 소리쳐라, 망설이지 마라. 나팔처럼 네 목소리를 높여라. 내 백성에게 그들의 악행을, 야곱 집안에 그들의 죄악을 알려라. 2 그들은 마치 정의를 실천하고 자기 하느님의 공정을 저버리지 않는 민족인 양, 날마다 나를 찾으며 나의 길 알기를 갈망한다. 그들은 나에게 의로운 법규들을 물으며 하느님께 가까이 있기를 갈망한다. 3 ‘저희가 단식하는데 왜 보아 주지 않으십니까? 저희가 고행하는데 왜 알아주지 않으십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 단식일에 제 일만 찾고 너희 일꾼들을 다그친다. 4 보라, 너희는 단식한다면서 다투고 싸우며 못된 주먹질이나 하고 있다. 저 높은 곳에 너희 목소리를 들리게 하려거든, 지금처럼 단식하여서는 안 된다. 5 이것이 내가 좋아하는 단식이냐? 사람이 고행한다는 날이 이러하냐?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 6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7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8 그리하면 너의 빛이 새벽빛처럼 터져 나오고, 너의 상처가 곧바로 아물리라. 너의 의로움이 네 앞에 서서 가고, 주님의 영광이 네 뒤를 지켜 주리라. 9 그때 네가 부르면 주님께서 대답해 주시고, 네가 부르짖으면 ‘나 여기 있다.’ 하고 말씀해 주시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신랑을 빼앗길 때에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4-15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은 단식에 관한 내용입니다. 먼저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참된 단식의 자세에 대해 말씀하고 있지요.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단식,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단식은 아무 효과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대신 실천적인 단식을 요구하지 않습니까? 그것은 불의한 사회 구조를 정화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하는 것입니다. 굶주린 이들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며 그들을 따뜻하게 돌보는 것이지요.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도 같은 맥락입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지요. 이에 예수님께서는 단식할 때도 있지만, 하지 않을 때도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무엇보다 단식의 정신이 중요하다는 뜻이지요. 우리가 단식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희생과 수난에 동참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약한 것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 봉헌함으로써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려고 단순히 한 끼를 굶는다는 식의 기계적이고 소극적인 자세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보다 내가 평소 보고 즐기는 것까지도 하루 정도 절제하고, 그 시간에 주님 말씀을 묵상하는 것도 바람직한 단식의 실천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울러 절약한 시간과 비용을 어려운 이들과 함께 나눈다면 주님의 희생에 동참하는 적극적인 행위가 될 것입니다. 이번 사순 시기에는 먹고 마시는 것뿐만 아니라 이기심, 과시욕, 방종, 질투와 경쟁의식을 비롯한 여러 욕망을 절제하고 나를 비움으로써 예수님의 수난에 적극적으로 동참해야 하겠습니다.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 |
사순절에는 더 많은 맥주를 유머감각이 탁월하셨던 한 원로 신부님께서 사순 시기를 맞이하여 훈화말씀을 하실 때였습니다. “우리 살레시안들은 사순시기에 더 잘 먹어야 합니다.” 저는 그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이단을 선포하시면 안 되는데...또 어떤 말씀을 하시려나?’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이어가셨습니다. “잘 먹고 나서 대신 더 많이 사랑하길 바랍니다. 더 많이 청소년들 사이에서 현존하고, 더 많이 참아주고...그것이 살레시안으로서 참된 단식입니다.” 인도 뱅갈 지방의 성 패트릭 본당의 주임 신부님께서는 사순절을 맞이하는 본당 신자들에게 한 가자 지침을 주셨는데...ㅋㅋㅋ ‘사순시기 동안 맥주를 더 많이 마시자!’였습니다. 원문으로는 이렇습니다. ‘Take lots of BEER during Lent.' 깜짝 놀란 신자들에게 주임 신부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지침을 해설해주셨습니다. BEER=Bible(성경)-Empathy(공감)-Eucharist(성체성사)-Reconciliation(화해) 성경: 성경말씀을 통해 영적으로 풍요로운 시기를 보내십시오. 그러기 위해 자주 성경을 펼치십시오. 공감: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고통에 공감하며 연대하십시오! 성체성사: 보다 자주 성체성사에 참여하십시오. 주일 미사 뿐만 아니라 가능하면 매일 매사에 가십시오! 화해: 사순절은 우리가 상처 준 이웃들과 화해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입니다. 아무 말 말고 가서 용서를 구하십시오. 사순절을 맞이하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단식에 대해 잘 설명해주고 계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태오 9장 15절) 사순시기를 맞아 단식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께 드리는 인간 측의 작은 선물이 아닐까요?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기 위한 작은 봉헌이 아닐까요? 우리가 당신을 위해 단식한다는 사실을 예수님 그분만 아시면 되지 단식한다는 것을 이 사람 저 사람, 동네방네 떠나가도록 떠벌이고 자랑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단식할 때는 티내지 말고 침묵 속에 단식하는 것이 참된 단식입니다. 단식하는 사람의 태도도 깊은 성찰이 필요합니다. 단식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가 지금 단식을 하고 있는데 얼마나 힘들게 단식하고 있는가, 잔뜩 이마에 써 붙이고 다녀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차라리 단식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러니 단식은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이 정답입니다. 우리의 단식은 교회법 규정에 나와 있으니 마지못해 수행하는 과제가 아니라 좋으신 주님을 위해서, 너무나 감사한 그분께 작은 선물 드리는 마음으로 이루어졌으면 좋겠습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환하고 행복한 얼굴로 단식을 해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단식의 목적 >
아씨시에 가면 ‘포르치운콜라’라고 하는 프란치스코가 움막을 짓고 살았던 자리에 있는 작은 경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프란치스코가 욕정이 오를 때마다 뒹굴었다는 장미 밭이 있습니다. 그 장미 밭에서는 아직도 가시가 없는 장미가 자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가 하도 뒹굴어서 가시가 다 빠졌다고 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가장 보고 싶었던 여인은 걸어서 30분 거리의 다미아노 성당에 있는 글라라였는지도 모릅니다. 글라라도 프란치스코가 보고 싶었을 텐데, 프란치스코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제자들에게, “여기에서 거기까지 길에 꽃이 피지 않으면 나는 그 곳에 가지 않겠다.”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그 때는 겨울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정말 길 양옆에 꽃이 피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글라라를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어쩌면 하느님은 극기만을 원하시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가끔 ‘어디까지 절제해야 하는가?’라는 혼란이 올 때가 있습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그랬는지도 모릅니다. 요한은 워낙 극기의 삶을 사신 분이라 그분의 제자들은 당연히 육체를 절제하는 삶의 이로움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영성의 대가 십자가의 성 요한도 가장 빠른 영적 진보의 방법은 몸을 괴롭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거친 철사와 천 등을 감고 다니며 온갖 고행을 했습니다. 이는 성경에도 나옵니다. 영과 육은 서로 반대된다고 예수님도 그러시고 바오로도 그렇게 말합니다. 육체가 배부르면 성령의 힘은 그만큼 숨이 막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신학생 때 유학 가서는 잠을 4시간 정도 자고 밥도 하루에 한 끼 먹고 고기도 안 먹고 물도 잘 마시지 않았습니다. 삼일 가까이 음식은 물론 물도 한 방울 안 마셔 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보다는 20킬로가 덜 나갔습니다.
그러나 배가 고프니 자연적으로 얼굴이 찡그려지고 함께 놀아달라는 친구들도 조금은 귀찮아졌습니다. 주위 사람들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도 불만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혼자 있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힘이 드니 수업시간엔 졸려서 잠들기 일쑤였고 그래서 성적도 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내 자신의 육체와 싸우는 사람이다.’라는 자만심에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몸도 이기지 못하여 해야 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이들을 교만한 마음으로 바라보곤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논문 지도교수와 다투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때의 모습은 아마도 오늘 복음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그런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사실 단식의 좋은 점은 작고 겸손해지는 데 있습니다. 나의 나약함과 보잘 것 없음을 알고 이런 나를 사랑해주시는 하느님의 위대함에 감사가 나와야 합니다. 저는 신학교 들어갔을 때 모든 것이 불만스럽게 느껴질 때 단식을 하고 겸손해 졌고 다시 감사하는 삶을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 때는 사람을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나의 부족함과 나약함을 아니 내 주위 모두가 나보다 커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요한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단식하여 겸손해지려는 목적이 아니라 오히려 교만을 키우는 단식을 했다는 뜻입니다. 무조건 기차를 탄다고 좋은 것이 아니라 항상 행선지를 확인하고 타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낭패를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단식보다 관계가 더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있는데 어떻게 단식을 하느냐고 하십니다. 함께 있을 때 단식하는 것보다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더 큰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듯 극기의 목적은 겸손해짐과 더 깊고 넓은 친교가 우선 되어야지 극기 자체가 가치 있는 것처럼 여겨서는 안 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는 기도만 하는 수녀를 자꾸 성당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기도의 목적은 더 깊은 친교를 위함인데 기도만이 가치가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내가 기도나 극기를 하면서 남을 판단하거나 혹은 사람이 귀찮아진다면 그것을 당장 그만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도 타볼산에서 하느님과 함께 함이 행복했지만 이 지상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는 것은 에너지 낭비입니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면 항상 무엇을 지향하고 이 행위를 하는지를 잘 살펴야합니다. 겸손과 사랑과 친교의 목적이 아닌 어떤 행위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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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聖女 가타리나 님 |
미국의 성녀 카타리나 마리아 드레셀(Catharina Maria Drexel) |
성녀 카타리나 마리아 드레셀(Catharina Maria Drexel, 가타리나)은 1858년 11월 2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의 필라델피아(Philadelphia)에서 유복한 가족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라면서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깊이 빠져들었다. 그녀는 흑인과 토착 미국인인 인디언들의 물질적, 영성적 삶의 질에 큰 관심을 갖게 되어 그들을 위한 기부금을 모으기 시작했으나 그래서 성녀 카타리나는 인디언과 유색인종의 권익을 위해 일하고 그들을 섬기기 위한 복된 성사의 수녀회(Sisters of the Blessed Sacrament)를 설립하였다. 자신의 삶을 헌신하며 기금을 마련한 성녀 카타리나 원장은 1894년 뉴멕시코(New Mexico) 산타페(Santa Fe)에 인디언들을 위한 최초의 선교학교 개교식에 참가하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미시시피(Mississippi) 강 서편의 인디언들을 위한 학교와 미국 남부 지방의 흑인들을 위한 학교들도 개교하였다. 1915년에는 뉴올리언스(New Orleans)에 미국 최초의 흑인들을 위한 대학인 사비에르(Xavier) 대학을 설립하였다. 그녀가 선종할 무렵에는 이미 미국 전역에서 500명이 넘는 수녀들이 63개의 학교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성녀 카타리나는 1988년 11월 20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으며, 2000년 10월 1일 같은 교황에 의해 시성되었다. * 자료집에서 발췌 |
필라델피아의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이웃의 흑인과 인디안들을 위한 기금을 모집하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뿐임을 깨달아 '복된 성사의 수녀회'를 설립하여 인디안과 흑인들을 위한 학교를 곳곳에 설립했던 성녀 가타리나 님이시여 진정한 사랑을 기원했던 님을 기억하오니 오늘 하루 저희들의 삶이 주님 사랑으로 가득할 수 있도록 천상 기도의 축복을 보내 주옵소서!....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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