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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묵상글 들 (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 늙어서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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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늙어서도
오늘 마카베오서의 엘아자르는 나이 많고 풍채도 훌륭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인격도 고매하고 신앙심도 대단한 존재입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자캐오도 나이는 많을 것이지만
키가 작아서 풍채는 볼 품 없고 당시 멸시를 받던 세관장입니다.
그러니 이 두 사람은 나이 많은 것은 같지만 대조되는 인물들인 셈입니다.
그래서 늙은이들의 모범으로 두 사람을 한 번 다뤄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엘아자르는 그저 자존심 강한 늙은이로 치부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를 너무 얕이 보는 것이고 제대로 평가한다면
자기 인격을 하찮은 것에 파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제가 하찮은 것이라고 했지만, 그 하찮은 것이 자기 목숨이니
보통 사람들에게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고 가장 소중한 것이고,
그러니 보통 사람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찮게 여기는 그는
보통 사람이 아닌 특별한 사람이요 대단한 사람이라고 해야겠습니다.
그렇긴 한데 저는 이 대단한 사람을 별로 닮고 싶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사람은 감히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생각하기 때문일까요?
그런 이유 때문일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제가 될 수 있다 하더라도 저는 닮고 싶지 않고
특히 오늘 복음의 자캐오와 비교하면 더더욱 닮고 싶지 않습니다.
우선 제게 엘아자르라는 존재는 사람같지 않을 정도로 너무 완벽하고,
그러니 너무도 완벽하지 않은 저와는 이미 너무 다른 존재입니다.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인간미랄까 사람 냄내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는 율법 학자이기 때문인지
율법적인 옳음이 느껴지지 복음적이고 인격적인 사랑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이에 비해 오늘 복음의 자캐오는 저와 마찬가지로 흠결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 은총으로 의화하는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성장해가고 그래서 늙어 성숙해지는 사람입니다.
율법적으로 옳은 사람이 아니라 그 반대이고,
그러나 사랑을 원하고 사랑으로 변화되는 사람이며
그래서 하느님 사랑으로 구원받는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렇습니다.
자캐오는 작은 사람입니다.
키만 작은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도
더 성장하고 성숙해야 할 작은 사람입니다.
너무도 다행인 것은 그 나이에도 나무에 오를 정도로
주님을 뵙고자 하는 열망이 있고
주님 사랑에 가 닿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는 점입니다.
성장이 멈추고, 굳어지고, 화석화되며,
사랑이 시들해지는 것이 보통인 늙은 나이에도 나무에 오름으로
주님을 자기 집에 오시게 한 자캐오가 무척 부럽고 닮고 싶은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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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 이야기로, 참으로 감동적인 장면입니다. 이 이야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찾아나서는 거대한 역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앞 장면>(1-4절)이 자캐오가 예수님을 찾는 이야기라면, <뒤 장면>(5-10절)은 예수님이 자캐오를 찾는 이야기입니다.
<앞 장면>에서 자캐오는 ‘키 작은 세관장이고 부자’였지만, 동포의 조롱과 멸시를 받아야 했고, 매국노의 혐오를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키가 작다’는 말은 그가 외면적으로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인간적으로도 그처럼 초라했고 ‘작은 자’였다는 것을 암시해 줍니다. 그래서 깊은 자괴심과 열등감으로 황폐해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쓰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보려고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 위에까지 올라간 사람이었습니다.
<뒤 장면>에서 자캐오는 ‘아브라함의 자손’로 드러납니다. 그리고 예수님 역시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오신 ‘사람의 아들’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벌어집니다. 아니, 나무 위에 걸린 죄인에게서 드러납니다. 그것은 십자가 아래의 백인대장의 고백처럼,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참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아셨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이곳에서, 마치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 이를 알고 부르듯이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이곳이 당신께서 자캐오를 불러내신 약속 장소였습니다. 당신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장소요, 자캐오가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장소였습니다. 그 장소로 부르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의 이름을 알고 계시고, 그의 아픈 마음도 이미 다 헤아려 아시는 분이셨습니다. 당신이 그를 약속 장소로 이끄시고 당신이 그 약속장소로 찾아오셨습니다. 마치, “내가 당신을 찾았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저를 먼저 찾으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처럼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10)
그렇습니다. 나무 위에서 얼른 내려와야 합니다. 나무에 달리는 그 자리는 예수님의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 사람이 하늘로 올라갈 필요가 없는 까닭입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땅으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자캐오는 ‘일어서서’(부활하여!) 말합니다.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그리하여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19,19)고 선언됩니다. 오늘 우리가 그러하면, 우리 집에도 구원이 내릴 것입니다.
이 ‘자캐오 이야기’는 예수님의 구원사건이 자동적이거나 법칙적인 것이 아니라, 실존적이고 창조적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에 대한 순명으로 자동적이고 법칙적으로 구원이 온다는 당시의 신학을 뛰어넘어, 자캐오와 같이 실존의 변화라는 창조적 행위를 통해서, 구원은 비로소 역동적으로 체험되고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오늘, 이러한 역동적인 실존의 변화를 우리에게 요청하신다. 곧 “얼른 내려오라”고 하십니다. 아멘.
-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루카 19,5)
주님!
당신은 저를 훤히 아십니다.
교만과 탐욕의 나무 위에 올라 허영과 가식으로 몸을 가리고
죄 속에 웅크리고 있는 저를 훤히 아십니다.
그릇된 저의 모든 행실을 아시고, 손가락질 당하고 배척받는 아픔도 아시고
죄인인 채로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이 가련함도 훤히 아십니다.
바득바득 기어 올라간 교만과 허영에서
얼른 내려와 당신 발아래 엎드리게 하소서.
당신 사랑 앞에 부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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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 비움으로 주님을 만납니다
사람은 각기 자기 위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은 그에 맞는 처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대접은 크게 받기를 원합니다. 권력을 가진 사람일수록 자기의 것을 포기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잘 대해주기를 바라며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갈릴래아 호수와 사해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해는 말 그대로 죽음의 바다입니다. 어떤 생물도 살지 못하고 주위에는 나무도 새소리도 없습니다. 사해는 물이 흘러나가는 강을 지니지 않았기 때문에 받아들인 모든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썩어버렸습니다. 반면에 갈릴래아 호수는 요르단강에서 물을 받아들인 만큼 사해로 흘려보내기 때문에 언제나 생명이 넘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을 줄만 알고 줄 줄을 모르면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맙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고 부자였습니다. 그런데 세관장이라는 위신과 체면을 포기하고 나무에 올랐습니다. 주님을 뵙고자 하는 갈망 때문입니다. 갈망이 큰 만큼 키가 작다는 장애를 극복해야만 했고, 따라서 나무에 오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그의 정성을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19,5). 하시며 그를 기억해 주셨습니다. 유다인들은 그가 세리였기 때문에 그를 죄인 취급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찾아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신을 보고 못마땅하게 생각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9-10).
만약 자캐오가 부자라는 것에 대한 자만이 있었더라면, 세관장이라는 위치를 고집했더라면 그 위신과 체면 때문에 나무에 오를 수 있었을까? 그는 자기를 버림으로써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만난 후 사람이 바뀌었습니다. 돈에 눈멀었던 그였지만 가난한 이를 위해 재산의 반을 내놓을 마음이 생겼고, 혹시라도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라도 갚아 자신이 지은 죄의 대가를 치를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아무리 풍요하더라도 인간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캐오가 나무에 오르지 않더라도 자캐오를 부르실 수 있으시지만, 그의 자유의지를 존중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19,10). 고 하신대로 모든 이를 구원에로 초대하십니다. 그러나 모두가 구원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선물이지만 주님 때문에 자기의 위신과 체면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협력하는 이에게서 완성되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구원을 얻었습니다. 오늘은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가 나무에 오르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모쪼록 예수님과의 깊은 입맞춤으로 삶의 쇄신을 이루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1티모1,15).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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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 고결하고 훌륭한 죽음
마카베오 시대에 뛰어난 율법 학자였던 엘아자르는 헬레니즘 정권이 유다교를 금지하며 율법이 금하는 돼지고기를 먹이려 하자, 그는 더럽혀진 삶을 사는 것보다는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서 자진해서 형틀로 나아갔습니다. 이런 행동에 대해서 마카베오서의 저자는 엘아자르가 율법을 숭고하고 거룩하게 여겼기 때문에 고결하고 훌륭한 죽음의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보여주고자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 종교인 유다교가 이 마카베오 시대에 율법을 금지시키는 박해를 받으면 죽음을 불사할 정도로 그 권위와 진정성이 살아있음을 알 수 있게 해 주는 사건이자 기록입니다.
그런가 하면 예리코에 살던 부유한 세관장 자캐오는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계신다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터에 자기 마을에 오시는 그분을 만나 뵈오려 애썼지만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고 드디어 예수님의 눈에 띄었습니다. 그러자 회개하고자 하는 그의 간절한 마음을 읽으신 예수님께서는 주변 사람들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그를 부르시며 하룻밤 묵어가시겠다고 청하셨습니다. 루카는 이 뜻밖의 호의에 감격한 자캐오가 자진해서 재산을 그것도 파격적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다는 놀라운 회개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불의한 직업으로 돈을 많이 모은 부자라 하더라도 하느님께 돌아오겠다는 사람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기꺼이 환영하셨다는 사실과 함께, 당시의 대표적 부유층이었던 바리사이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캐오가 파격적인 자선을 선언한 회개는 매우 예외적인 것이었음도 알 수 있습니다. 부자 청년의 이야기와 비교해 보시면 그 대조적인 정도와 예외적 성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다 하더라도 명예를 소중히 여겼던 엘아자르의 고결한 죽음과 이스라엘의 부자들 가운데 예외적이기는 하지만 매우 대조적인 모범을 보여준 자캐오의 선심성 회개는 생존과 소유라는 인간 본성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미사에서 들려오는 하느님 말씀의 초점입니다.
사실 회개는 작은 죽음입니다. 결코 죽지 않을 듯이 살던 사람들이 막상 죽음을 의식하게 되면 그 어느 것도, 예를 들면 권세는 물론 재산도, 지식이나 명예까지도 죽음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고 하느님 앞에 회개합니다. 죽음을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인생에서 다행스럽게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것은 부활입니다. 더욱 다행하게도 가톨릭교회의 성인성녀들을 공경하게 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그것은 그들처럼 우리도 그 부활을 지금 여기서 살 수 있다는 희망입니다.
생명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그에 못지않게 고귀한 것을 함께 주셨으니, 그것은 죽음입니다. 삶이 있어야 죽음도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싫어하기까지 하지만, 사람은 언젠가는 반드시 누구나 죽어야 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죽지 않을 것처럼 회개를 미루고 사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와는 달리, 이러한 깨달음에 접한 사람은 남은 생애 동안 하느님을 닮고자 거룩하게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삶을 거룩하는 죽음의 힘이요, 죽음도 창조하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닮고자 거룩하게 사는 사람은 죽어서 누릴 수 있는 천국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따라서 이미 살아있는 동안에 천국을 사는 사람은 거룩함을 넘어 이 거룩함을 나누어 주는 사람입니다. 부활을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삶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부활의 삶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부르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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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책을 많이 읽습니다. 특히 하루에 350페이지를 읽겠다고 자신에게 다짐하고 계속해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상황에서도 이 다짐을 지키려고 노력하다 보니 때로는 책을 아주 급하게 읽게 됩니다. 이렇게 급하게 빨리 읽다 보면 마지막 장을 넘기고 책을 덮는 순간에 다 읽었다는 뿌듯함보다 읽는 데에만 몰두해서 중요한 것을 놓친 것이 아닐까 라는 아쉬움이 남게 됩니다. 이해하려면 잠깐 책을 덮고 생각하는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문득 책과 사람이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책을 성급하게 읽으면 안 되는 것처럼, 사람도 성급하게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이 아닐까요? 그를 이해하고 인정해 주기 위해서는 침묵 속에서 생각을 많이 해야 하는데, 나의 입장만 내세우면서 섣부르게 말하고 행동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잠시 머무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 시간이 이해하는 시간이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이 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를 이해하고 함께하는 시간을 만드셨습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이해하기 위해 끊임없이 기회를 주십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자캐오 이야기에서 주님의 모습을 묵상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루카 18,25 참조). 그런데 부자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 구원은 부자냐 가난이냐의 문제가 아니고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치십니다. 당시의 유다인들이 세리라는 이유로 죄인으로 판단하고 단죄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자캐오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자캐오는 예리코 세관의 세관장이었고 부자였습니다. 이러한 지위와 재산 상태는 구원받고 못 받는데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를 보려고만 애썼습니다. 구원은 복음의 말씀을 듣고 주님을 뵈옵기를 원하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한 도시의 세관장이며 내로라하는 부자가 채신머리없이 나무에 기어 올라가 있는 모습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의 열정이 대단하지 않습니까? 이 마음을 보시는 주님께서는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면서 자캐오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도 주님의 모습을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섣부르게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인정하기 위해 노력하는 시간을 만들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함께 하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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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가치를 결정짓는 것은 사회적 명예나 재산이 아니라, ‘자신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이다(법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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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관계를 생각해보세요.
명절 때가 되면 가게 앞에 또 마트에 가도 많은 과일 상자를 보게 됩니다. 그런데 커다란 과일 상자에는 과일 몇 개만 달랑 들어있는 것입니다. 과대포장이 아니냐고 누군가에게 말했더니, 의외의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작은 상자에 다닥다닥 붙어 있으면 빨리 상한다는 것입니다. 좋은 과일이기 때문에 숨 쉴 공간을 만들어주기 위해 커다란 상자에 드문드문 담는다는 것입니다.
숨 쉴 공간이 있어야 한다는 말에 사람도 그런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었습니다. 적당한 틈이 있어야 상처를 받지 않고 함께 살 수 있습니다.
철학자 디오게네스도 “사람을 대할 때는 불을 대하듯 해야 한다. 다가갈 때는 타지 않을 정도로 접근하고, 멀어질 때는 얼지 않을 만큼만 떨어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적당한 인간관계의 거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적당함을 찾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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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6년 전의 기억입니다. 당시 저는 교구 사목국에서 교육 담담 업무를 맡고 있었습니다. 사목국에는 사제가 10명 있었습니다. 젊고, 열정이 많은 사제들이 모였으니 활기가 넘쳤습니다. 교회를 바라보는,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이 조금씩 다르기에 때로는 의견의 충돌도 있었지만 그렇게 다름은 우리의 안목을 더욱 풍요롭게 해 주었습니다. 가끔씩 연수를 가면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고, 앞으로의 일정을 기획하였습니다. 양평에 있는 한화콘도에서 모이기로 했습니다. 다들 양평으로 왔는데 한 신부님이 늦게 왔습니다. 신부님은 용인에 있는 한화콘도로 착각했습니다. 차 안에서 묵주기도를 했고, 음악도 듣고 기쁘게 출발했지만 동료들이 있는 곳으로 오지 못했습니다. 양평을 용인으로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The devil is in the detail)’라는 말이 있습니다. 계약서도 꼼꼼하게 읽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칫하면 낭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피닉스 한인 성당으로 홍보를 다녀왔습니다. 공항으로 마중 나온 신부님과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습니다. 신부님은 ‘아시아 마트’를 내비에서 찍어 달라고 했습니다. 저는 내비에서 아시아 마트를 찍었고, 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은 맞는다고 하면서 내비가 알려주는 데로 갔습니다. 30분을 달려갔는데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 찾아보니 피닉스에 아시아 마트는 2개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그렌데일’에 있고, 다른 하나는 ‘메사’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메사에 있는 아시아 마트로 가야했는데 그렌데일에 있는 아시아 마트로 갔습니다. 결국 식당의 문을 닫을 시간이 되었고, 우리는 사제관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짐을 풀고 편하게 먹으니 더 좋았습니다. 17년 전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사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는 말은 ‘신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라는 말을 모방한 것이라고 합니다. 명품은 기능뿐만 아니라 디자인도 명품이어야 하고, 마무리도 명품이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전지, 전능, 전선하신 분입니다. 우리를 언제까지나 기다려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독서에서 90세의 노인 엘아자르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엘아자르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엘아자르를 좋아했던 사람들은 한 가지 제안을 하였습니다. 겉으로는 율법을 어겨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는 것 같지만, 사실은 정결한 음식을 주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면 엘아자르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느님 앞에 떳떳할 수 있습니다.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고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엘아자르의 인품과 덕망에 대한 배려였습니다. 그러나 엘아자르는 그러한 제안을 거부하였습니다. 비록 본인은 이교 제사의 음식을 먹지 않았지만 많은 젊은이들이 엘아자르가 이교 음식을 먹은 것으로 알고 따라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이교 음식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는 평가와 평판이 문제였습니다. 엘아자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자캐오’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자캐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사랑받는 길에는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회개’입니다. 세리였던 자캐오는 예수님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자캐오는 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불렀습니다. 그릇된 길을 돌아서 올바른 길로 향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것이 회개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뉘우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향을 하느님의 뜻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둘째는 ‘실천’입니다. 회개한 자캐오는 예수님께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은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아 주겠습니다.” 회개한 사람은 그것이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야고보 사도도 분명하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믿음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회개에 실천이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개가 아닙니다.
셋째는 ‘순명’입니다. 이제는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청했던 마리아의 삶입니다.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라고 청했던 예수님의 삶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순교했던 엘아자르의 삶입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이 걸어갔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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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을 ‘참으로(truely)’ 만난 사람들
- 엘아자르, 자캐오, 제르투르다, 나 -
‘참’ “참으로’ 제가 자주 사용하는 참 좋은 우리말입니다. ‘참으로 사는 것’은 초기 사막 수도승의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참으로 살 때 참으로 죽을 수 있습니다. 참으로 살지 못하기에 참으로 죽음다운 죽음을 맞이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참으로 살지 못하기에 참으로 기쁨도 감사도 평화도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늘 강론 주제는 주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주님이든 사람이든 참으로 진짜 만나지 못하기에 여전히 외롭고 공허하고 목마른 것입니다. 아무리 오래 많이 살아도 참으로 살지 못하는 이들 많듯이 아무리 오래 만나도 참으로 만나지 못하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평생 살아가는 부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자연스럽게 회개와 더불어 겸손이 뒤따릅니다. 주님이든 사람이든 참으로 만날 때 참나를 알게되고 감동과 변화, 순수를 체험합니다. 오늘은 주님을 참으로 만난 사람들을 연대기순으로 배치하며 나눕니다. 주님을 참으로 만남으로 참으로 살았던 성인들입니다.
첫째, ‘엘아자르’입니다.
오늘 제1독서 마카베오 하권에 나오는 전설적 인물, 영웅이자 순교자인 성인 엘아자르입니다. 초지일관, 시종일관 살다가 하느님을 위해 영예롭게 순교한 엘아자르의 생애가 참 감동적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났기에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참 나를 살 수 있었고 주님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에는 변절로 참 자기를 잃고 살아도 참으로 살아있는 삶이 아닌 죽은 삶을 사는 이들도 많을 것입니다. 참으로 살기위해 자발적 순교의 죽음으로 영원한 삶을 살게 된 엘라자르는 참된 순교자의 모범입니다. 참 사랑에서 참 삶이요 참 순교의 죽음임을, 참으로 죽기 위해 참으로 사랑하며 참으로 사는 것이 전제됨을 깨닫습니다. 마지막 유언입니다.
“우리 나이에는 그런 가장된 행동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많은 젊은이가 아흔 살이나 된 엘아자르가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또한 조금이라도 더 살아 보려고 내가 취한 가장된 행동을 보고 그들은 나 때문에 잘못된 길로 빠지고, 이 늙은이에게는 오욕과 치욕만 남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지금은 인간의 벌을 피할 수 있다 하더라도,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을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나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이렇게 90세 노년에 까지 한결같은 삶을 산 성인들을 참 드물 것입니다. 이렇게 엘아자르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습니다. 후대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이런 보고 배울 죽음의 선물보다 더 귀하고 좋은 선물은 없을 것입니다.
둘째, ‘자캐오’입니다.
어제 주님을 참으로 만나 눈이 열린 눈 먼 사람에 이어 참으로 주님을 만나 마음의 눈이 열린 자캐오의 등장입니다. 앞서 복음의 재산이 많아 주님을 따르는 추종을 거부하고 슬프게 떠난 부자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부자 세관장 자캐오입니다. 앞서 추종을 거부하고 떠난 부자는 실은 주님을 만났으나 참으로 만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외관상 세관장이자 죄인이자 부자인 자캐오는 내적으로 주님을 갈망했던 순수한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봅니다. 편견을 넘어 이런 자캐오의 진면목을 보신 예수님은 무화과 나무에서 자기를 보는 자캐오의 순수한 갈망과 믿음을 한 눈에 알아보셨고 위를 쳐다 보시며 그에게 이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니, 예수님과의 결정적 참 만남의 구원입니다. 즉시 자기 재산을 아낌없이 나누는 회개의 실천을 통해 그가 참으로 주님을 만났음을 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나 재산을 아낌없이 나눔으로 회개의 진정성과 더불어 부자의 구원도 가능함을 입증한 성인 자캐오입니다.
앞서 많은 재산에 슬프게 떠난 부자와는 정반대의 반응입니다. 주님을 참으로 만난 자캐오의 감동과 회개의 결행에 이어 예수님 역시 감동으로 화답합니다.순수와 순수, 감동과 감동의 참 만남에 참 삶의 체험입니다. 예수님의 자캐오에 대한 감격에 벅찬 구원선언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만날 때 회개의 구원이요 참 삶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셋째, ‘제르투르다’ 성녀입니다.
오늘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들은 헬프타의 성 마리아 시토회 수녀원의 수녀인 제르투르다 성녀 기념미사를 봉헌합니다. 교회로부터 정식적인 시성식을 거치지는 않았지만, 성인으로 인정받아 공경을 받았고, 1677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모든 교회가 기념일을 지내도록 지시합니다.
참으로 예수님을 만났던 중세의 신비가, 제르투르다 성녀는 특히 예수 발현 체험을 통해 심오한 내적상태로 들어간 후 자신을 그리스도의 신부로, 그리스도를 자신의 영적 신랑으로 보고 최초로 예수 성심에 대한 공경을 실천합니다.
1288년 제르투르다는 합병증을 앓아 병상에 눞게 되고 오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1302년 11월16일 만46세 나이에, “아! 신랑께서 오신다.” 부르짖으며 선종의 죽음을 맞이합니다. 성녀는 연옥 영혼들에 대해 연민과 동정을 느꼈으며, 이들을 위한 기도를 촉구했습니다.
“영원하신 아버지, 연옥에 있는 모든 죄인들과 온 세상 교회에 있는 죄인들과 내 집안과 내 가정 안에 있는 죄인들을 위하여 오늘 온 세상에서 드리는 모든 미사성제와 더불어 당신 성자 예수의 가장 값진 피를 당신께 봉헌하나이다. 아멘.”
넷째, ‘나’입니다.
결국 강론의 초점은 오늘 지금 여기 ‘나’로 집중됩니다. 강론을 쓰고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저는 물론이고 모든 신자들 하나하나가 주님을 참으로 사랑해야 하고, 주님을 참으로 만나야 하고, 참으로 회개해야 하고 참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오래 살고 많이 만나도 주님을 참으로 만나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살지 못하면 여전히 공허하고 외롭고 목마른 삶이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을 참으로 만나 참으로 사랑하고 참으로 회개하며 참으로 살 때 성인의 삶이겠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당신을 참으로 만나 참 사랑의 성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예수님, 당신은 저의 전부이옵니다.
저의 사랑, 저의 생명, 저의 희망, 저의 기쁨, 저의 행복이옵니다.
하루하루가 감사와 감동이요 감탄이옵니다.
날마다 새롭게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루, 파스카의 새날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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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오늘 미사의 말씀은 구원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루카 19,3-4)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보고 싶어하는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죄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부유한 세리 자케오입니다.
군중보다 키가 작은 탓에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자 자케오는 예수님께서 가실 방향을 미리 앞질러 달려갑니다. 그리고 나무 위로 오르지요. 한 도시의 세관장이 연배로 보나 지위로 보나 쉽게 하기 어려운 행동을 한 건 그만큼 간절했기 때문일 겁니다.
자케오는 세상적으로도 참 열심히 살던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돈과 이권을 향해 성실하게 달렸겠지요. 그는 하느님께서 주신 보물이 뭔지도 모르고 그저 성공을 향해 열심히만 달리면 된다고 여기는 어리석고 눈먼 열정가들의 전형입니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예수님을 보고 싶어 달립니다. 물질이 아닌 사람, 그것도 하느님의 사람을 보려고 달린 일이 과연 그의 인생에 몇 번이나 있었을까요. 이제야 자케오는 물질이 아닌 의미, 육적인 일이 아닌 영적인 일을 향하기 시작한 겁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19,8)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아보시고, 친히 그의 집에 머무르시니 자케오는 너무 기뻐 어쩔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시키시지도 요구하시지도 않은 일을 자청해 선언합니다. 자기 삶을 돌이켜서 허물을 기워갚고자 이웃에게 나눔과 보상을 약속하는 겁니다.
그림자에 불과한 세상 것을 향해 뛰느라 사람들을 착취하고 해치며 살던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달리더니, 결국 예수님을 발견해 그분과 머무르자 가난한 이들을 향해 마음을 엽니다.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르고 무작정 열심히 살았던 그가 이제야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하느님의 마음이 가는 방향과 결을 같이하게 된 것이지요. 구원입니다!
제1독서인 마카베오기 하권은 유다 민족의 매우 뛰어난 율법 학자 엘아자르의 순교를 다룹니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여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2마카 6,30)
이교 제사 책임자들은 "하는 척만 해도 살려 주겠다"고 그를 회유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존경을 받는 원로 스승인 그의 변절이 이교 문화 수용에 엄청난 기폭제가 될 터였지요. 하지만 그는 잔인한 고문에도 물러서지 않고 고결한 의지를 발휘해 고통을 용감히 견디어 냅니다.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영과 마음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이는 찰나의 안위 때문에 신앙을 저버릴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거래 불가한 가치이기 때문이지요. 위선으로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느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느님을 정향하며 살아온 엘아자르는 길을 돌이켜 위선으로 퇴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제야 구원의 방향을 찾은 자케오가 다시는 죄악의 진창으로 되돌아갈 이유도 없는 겁니다. "오늘 이집에 구원이 내렸"으니 멈춤 없이 후퇴 없이 그저 충실히 나아갈 일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얼굴을 보고자 몸과 마음과 영혼이 힘껏 달려나가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필요하다면 체면일랑 잊고 나무 꼭대기까지 올라도 좋습니다. 영혼이 사랑하는 주님을 꼭 붙들고 결코 돌아서지 않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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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오늘의 묵상
지난 7월, 미사를 부탁받아 한 본당을 찾았습니다.
마침 『매일미사』에 묵상 글을 썼던 달이라
강론을 묵상 글의 내용으로 할까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묵상한 글이고 내가 살아왔던 나의 이야기이니 괜찮지 않을까?’
잠시 고민하였지만, 새롭게 준비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의 모습이 다르고, 듣는 사람들이 다르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또한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변하지 않지만 복음을 듣는 우리가 변하기에,
그 의미와 메시지도 때마다 다르게 전달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러한 마음이 성경에 대한 저의 열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열정이 변하지 않고 지치지 않는 저의 목표가 되었으면 합니다.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사람은 열정이 사라집니다.
부족함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현실에 안주하기 쉽습니다.
자캐오는 부자이면서도 그 돈이 자신의 권력이 되어 버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면 그는 계속 세관에 앉아 있었을 것입니다.
더 큰 권력을 얻고 싶은 간절함이 있었다면
그는 권력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만이 있었습니다.
현실적인 어려움(예수님을 보려고 모인 많은 사람,
키가 작으며, 공동체에서 소외당하는 자신의 모습) 때문에
그 열망이 위기에 부딪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캐오가 예수님과 시선을 맞추고 예수님을 만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변화하고 구원되는 모든 과정의 시작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는 열망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간절함입니다.
예수님을 보고 싶은 열망, 그분과 눈을 맞추고 싶은 열망,
그분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열망, 그분처럼 살아가고 싶은 열망,
그분처럼 사랑하고 싶은 간절함,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그 간절함이 우리를 예수님께 인도할 것이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손을 잡고 당신의 품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지금 어떤 열망과 간절함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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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사람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셨을 때 자캐오를 만나신다. 모든 사람으로부터 소외당한 이 자캐오는 예수님의 자비를 입는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2절) 그는 세관장이었다. 그는 탐욕에 찌들고 재산 증식이 유일한 목표인 사람이었다. 세리들이 거의 다 그러한 사람이었다. 이 가운데서 자캐오는 주님의 자비를 얻는 사람이 되었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마태 19,23) 라고 하셨다. 그렇다면 부자인 자캐오는 어떻게 하늘나라에 들어갔을까? 그는 자기 재물을 나누어 줌으로써 곧바로 하늘나라에 재물을 쌓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하지 않으시고,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셨다.
자캐오가 회심한 과정을 보기로 하자. 그는 예수님을 보려는 간절한 마음에서 돌무화과 나무로 올라갔다. 그 안에서는 구원의 씨앗이 싹텄다. 예수님은 그것을 보시고는 자캐오에게 손길을 뻗으신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5절) 여기서 “군중에 가려”(3절)라고 했는데, 군중은 그의 죄를 가리킨다. 자캐오는 자기의 죄를 벗어버리고 높은 곳으로 올라갔다.
그는 군중을 떠나, 즉 죄를 떠나 나무 위로 올라갔고 거기서 군중의 방해 없이 예수님을 볼 수 있었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는데 장애가 되는 군중을, 죄를 무시하고, 대신 “바보 같은 열매”를 맺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갔다. 우리도 끊임없이 죄를 벗고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뵙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것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가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오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는 것과 같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본 것만도 큰 은총이라고 생각했는데, 주님을 자기 집에 모시게 되었다. 은총이 쏟아져 내리고, 사랑으로 마음이 끓어오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8절) 절반을 내놓겠다는 것은 절반은 갖겠다는 것이 아니라, 갚을 것이 있다면 갚기 위해서이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9절) 자캐오는 구원을 받는다.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으나, 그가 천국의 문으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오히려 많은 재물이 그를 하늘나라의 입구로 데려다주었다. 재물이란 장애가 아니라, 영광을 얻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유가 아니라 사용할 줄 모르는 것이 죄이다. 예수님은 자캐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신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재산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그러한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0절) 모두가 잃은 이들이며 죄 없으신 유일한 분이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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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루카 19, 6)
머리에서
가슴까지
내려오는
이 여정이 멀다.
고운
단풍잎이
먼저 아래로
내려앉는다.
올라갈 때가
있으면
반드시
내려올 때가
있다.
내려와야
기쁘게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다.
내려와야
살아있는
오늘에
감사할 수
있다.
부여잡고
있는 것을
우리가
놓게된다.
버리지 않고서는
내려올 수 없다.
내려오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깨달음이다.
내려오니
가야할 길이
보인다.
언제나
회개의 마지막은
예수님께 기쁘게
내려오는 것이다.
내려오는
자캐오는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오늘의 길을
되찾아준다.
내려와야
사람의 체온을
느낄 수 있다.
우리보다
먼져 내려
오셔서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주님이시다.
자캐오 드디어
예수님께로
내려와
내려오신 하느님
사랑을 만나다.
하느님을 닮은
사람은 얼른
기쁘게 아래로
내려온다.
내려온 거기에
기쁜 회개가 있고
기쁜 오늘이 있다.
삶의 해답은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이는
변화이다.
단풍이
아래로
땅으로
내려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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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자캐오>
“예수님께서 예리코에 들어가시어 거리를 지나가고 계셨다.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루카 19,1-4).”
자캐오는 부자였지만, 즉 ‘바늘귀’로 들어가지 못할 ‘낙타’였지만(루카 18,25),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바늘귀’로 들어간 사람이고,
‘잃은 양’이었지만(루카 15,4), 예수님을 만남으로써 ‘되찾은 양’이 된 사람이고,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어서 ‘새 인생’을 살게 된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난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자동적으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본인이 스스로 변화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헤로데도 예수님을 만나 보려고 했고(루카 9,9), 결국 만났지만(루카 23,8),
새롭게 변화되기는커녕 더 나쁜 상태로 떨어졌습니다(루카 23,11).
그 자신이 구원에 대해서 아무런 관심이 없었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세속 일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배반자 유다는 예수님과 함께 지냈지만,
그 자신이 스스로 ‘목자를 떠나버린 양’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자캐오가 애썼다는 말은,
그의 마음속에 간절한 갈망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그것은 새롭게 변화된 인생을 살고 싶다는 갈망입니다.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라는 말은,
그가 소외계층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자캐오는 세관장이었고 부자였기 때문에 겉으로만 보면 기득권층 사람인데,
당시의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또 영적으로는 소외계층 사람이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죄인 취급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자캐오의 키가 작았다는 것은 그의 처지와 열등감을 상징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키가 작은 것이 무슨 잘못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상징적인 말로 사용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캐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일은, 그가 자신의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지금의 상황에서, ‘군중’과 자캐오 자신의 ‘열등감’과 ‘자격지심’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서 극복해야 할 난관입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실제로 많습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는 군중은 여기서는 ‘자칭 의인들’이고,
죄인이라고 낙인찍힌 사람들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구원을 방해하는 ‘걸림돌’입니다.>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간 자캐오의 모습에서 5장의 중풍병자 이야기가 연상됩니다.
“하루는 예수님께서 가르치고 계셨는데, 갈릴래아와 유다의 모든 마을과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교사들도 앉아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의 힘으로 병을 고쳐 주기도 하셨다. 그때에 남자 몇이 중풍에 걸린
어떤 사람을 평상에 누인 채 들고 와서, 예수님 앞으로 들여다 놓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군중 때문에 그를 안으로 들일 길이 없어 지붕으로 올라가, 기와를 벗겨
내고, 평상에 누인 그 환자를 예수님 앞 한가운데로 내려 보냈다(루카 5,17-19).”
(이 이야기에서도 군중이 예수님과 병자 사이에서 장벽이 되어 있습니다.
그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들이 지붕으로 올라간 것은
아마도 병자 자신이 그렇게라도 해 주기를 간절하게 부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끝까지 찾아 나서시는 착한 목자이신 분이지만,
‘잃은 양’ 자신도 목자에게 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소극적으로 목자를 기다리기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거기에 이르러 위를 쳐다보시며 그에게 이르셨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예수님을 기쁘게 맞아들였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저이가 죄인의 집에 들어가 묵는군.’ 하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자캐오는 일어서서 주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5-10)”
자캐오의 입장에서는, 예수님과 자캐오는 ‘서로 모르는 사이’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부르시는 모습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를 전부터 잘 알고 계셨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름만 알고 계셨던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것을,
즉 그의 처지와 상황도, 그리고 그의 마음속도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요한복음 1장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요한 1,48).”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은, “네가 성경을 공부하면서
메시아를 갈망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기 전에도, 또 주님을 믿기 전에도,
주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이 모든 상황은, 예수님과 자캐오가 만난 일은 ‘우연’이 아니라
‘섭리’ 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자캐오가 예수님을 보기 전에 이미 그의 마음속에 ‘부르심’이 주어졌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쓴 일은 ‘응답의 시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직접 부르시자 그가 기뻐하면서 예수님을 맏아들인 일과
자기의 재산을 모두 내놓은 일은 ‘응답’을 본격적으로 실천한 일입니다.
“왜 전 재산을 내놓지 않고 ‘재산의 반’만 내놓았을까?” 라고 물을 수도 있는데,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기 위해서
‘재산의 반’을 남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사실상 전 재산을 내놓은 것입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라는 말씀은,
자캐오와 그의 식구들이 모두 ‘구원의 길’을 걷기 시작했음을
인정하신다는 선언입니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라는 말씀은,
어느 누구도, 어떤 이유로든지 구원에서 배제되지 않는다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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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눔을 부르는 기쁨>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19,5)
세리는 이방인 압제자들을 위해 일하는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고, 부당착취를 했기에 천대와 멸시를 받았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그분이 어떤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으나 키가 작아 군중에 가려 볼 수 없었습니다(19,3). 그래서 예수님을 보려고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습니다(19,4).
오늘 복음을 주의 깊게 보면 자캐오가 회개했거나 회개하려고 예수님을 보려고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저 예수님을 ‘보려고’ 했습니다. 본다는 것은 예수님께로 자신의 인격을 향함으로써 일치하려는 지향을 드러낸 것입니다.
기쁨이 아닌 세리 자캐오가 기쁨을 받아들여 기쁨 안에 머물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애를 썼고’ 군중에 가려 볼 수 없자 ‘군중을 앞질러 달려가’ 무화과나무로 올라가 그분을 봅니다. 영혼의 어둠 중에 있던 그가 기쁨을 열렬히 갈망한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19,5) 하십니다. 구원의 기쁨 자체이신 그분께서 죄인의 집에 들어가는 것만으로도 부정하게 된다고 여겼던(5,30; 7,34) 유다인들의 전통적 사고를 뛰어넘어 그와 함께 하기로 하신 것이지요. 그러자 자캐오는 얼른 내려와 그분을 기쁘게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19,6).
자캐오는 구원의 기쁨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함이 바로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기쁨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이시지요.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으로 “잃은 이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입니다.”(19,10)
예수님과 함께함으로써 기쁨을 체험한 자캐오는 그분께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19,8)고 합니다. 그렇게 기쁨은 나눔으로 이어집니다.
우리네 삶은 때로 고달프고 자주 넘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기쁨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그분만이 주실 수 있는 기쁨을 끌어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과의 만남,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와 함께함으로써 주어지는 기쁨이야말로 세상을 살아가는 가장 큰 힘임을 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의 선물을 받은 우리 모두는 그것을 나누어야 할 것입니다. 나누지 못하는 기쁨은 참 기쁨이 아니며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뿐이겠지요. 사랑과 은총의 대상인 사회적 약자들과 나눔이야말로 우리가 살아내야 할 기쁨과 구원의 길이 될 것입니다. 이런 기쁨을 놓치지 않은 지혜로운 우리였으면 합니다.
또한 이 사회의 모습에서 서로에게 기쁨을 앗아가고 기쁨의 길을 가로막는 온갖 부조리와 악을 거둬내도록 힘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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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
자캐오 회개 사건은 아주 짧은 스토리지만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예리코라는 도시를 들르셨습니다. 수많은 군중들이 그분의 동선을 뒤따르기도 하고 길가에 나와 있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천천히 걸어가시던 예수님께서 큰 돌무화과 나무 앞에 딱 멈춰서셨습니다. 숨어있던 자캐오를 보신 것입니다. 당시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어떻게 처신했을까, 생각해봤습니다.
당시 자캐오는 예리코에서 무시 못할 존재였습니다. 죄인으로 소문난 사람이었지만, 지역 유지였습니다. 그런 자캐오가 돌무화과 나무 위에 올라가 몸을 숨기고 있었습니다. 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해 아마도 그냥 모르는체 하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냥 지나치지 않으시고 자캐오를 뚫어지게 바라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꽤나 짖궂은 분이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부끄럽고 송구스러웠던 나머지 애써 몸을 숨기고 있던 그였는데,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셨으면 좋으련만, 굳이 멈춰서서 한참동안 그를 바라보신 것입니다.
이윽고 예수님의 시선과 자캐오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 순간 자캐오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인지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도둑이 제발 저린다.’고 긴장감이 밀려와 숨이 멎을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아니, 생면부지의 저분이 왜 내 앞에 서시는 거지? 왜 나를 빤히 바라보시는 거지? 저분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라는 데, 내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있을텐데, 오늘 이러다가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인 창피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그런데 여기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자캐오의 걱정과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언성을 높이지 않으십니다. 화를 내지도 않고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세상 다정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루카 복음 19장 5절)
자캐오는 ‘존귀하신 분이 내 집에 머물겠다니, 이게 꿈이냐? 생시냐?’생각하며, 다람쥐처럼 조르르 나무 아래로 내려섰습니다.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하신 예수님의 배려 앞에 자캐오의 눈에서는 쉼없이 감사와 기쁨의 눈물이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크신 주님의 자비에 힘입어 어둡고 스산했던 자캐오의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하고 찬란한 봄날이 시작된 것입니다. 반전은 그 한번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용광로보다 더 뜨거운 주님 사랑 앞에 수전노 자캐오는 자신도 모르게 지갑을 활짝 열어버립니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횡령한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루카 복음 19장 8절)
그리고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 세상 사람들은 그의 구원 가능성을 0퍼센트로 봤는데, 주님께서는 그에게 100퍼센트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루카 복음 19장 9절)
예리코는 해저 258m에 건설된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로 유명합니다. 서쪽 40㎞에 위치해 있는 예루살렘과 무려 1000m 넘는 고도차를 보입니다.
그런데 가장 높으신 예수님께서는 지구상 가장 낮은 도시에서 살아가던 가장 키 작은 사람, 가장 짙은 어둠 속에 살아가던 자캐오에게 내려오셨습니다. 그의 집에 머무르시며 그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회개하는 그를 칭찬하시며 바로 그 자리에서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자캐오에게 베풀어진 즉각적인 구원의 선포,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자캐오는 열렬히 예수님을 뵙고 싶어했습니다. 그래서 돌무화과 나무 위로 올라가 간절히 기다렸습니다.
인간의 구원은 열렬히 바라보고, 간절히 기다리고, 진지하게 들음을 통해 다가옵니다. 혹시라도 지금 인생의 최저점(最低點)에 서 계십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 크게 먹고 기다리시기 바랍니다. 머지않아 기적처럼 그분께서 내려오실 것입니다. 그 옛날 자캐오에게 하신 것과 똑같이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워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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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욕망의 종말: 아버지의 인정
세관장 자캐오는 부자였습니다(루카 19,1-10 참조).
자캐오는 예수님을 보기 위해 나무 위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 정성을 보시고 예수님은 많은 사람 중에 자캐오의 집에 가서 머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자캐오는 자기 집에 ‘기쁘게’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모으기만 했던 삶에서 내어주는 삶으로의 전환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 사람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뜻은 사랑입니다.
사랑을 받아들였는데 재물을 좋아하는 욕구를 동시에 지니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캐오는 왜 굳이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려 했을까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없애고 싶었을까요?
돈에 대한 욕심입니다. 돈에 대한 욕심을 없앨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예수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는 욕심을 제어할 수 없는데 욕심은 자아에게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아가 사라지지 않는 한 욕심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아를 버리면 나를 움직일 선장이 없어집니다.
따라서 자아를 밟고 내 주인이 되실 분을 내 안에 모시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요? 인정받지 못해서 생기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자녀를 인정해 줄 때 자녀들이 굳이 돈 욕심부릴 필요가 없습니다.
부모님이 다 책임져 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춘기가 되면 사정이 바뀝니다.
부모가 자신의 참 부모가 아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눈을 다시 넣어줄 수도 없고 생명을 다시 줄 수도 없습니다.
내가 지금 세상에 왜 존재하는지에 대한 불안이 다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감을 채우기 위해 세상 것들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시기가 사춘기입니다.
참 창조자, 참 아버지를 만나기 전까지 이 욕구는 그래서 사라지지 않습니다.
인간의 욕구는 결국 ‘아버지로부터의 인정’으로 종말을 맞습니다.
자캐오는 아버지의 인정이 곧 예수 그리스도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자 곧 부모는 자녀 앞에서 세속-육신-마귀의 욕구를 쫓지 않습니다.
사랑과 반대되는 욕구이기 때문입니다.
자기와 같은 욕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위로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가 아닐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모에게 인정받을 때를 생각하며 부모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의 위로를 기대합니다.
로빈 윌리엄스와 멧 데이먼이 주연한 영화 ‘굿 윌 헌팅(Good Will Hunting)’의 줄거리입니다.
고아인 ‘윌(멧 데이먼)’은 양부모에게 길러졌지만, 양아버지에게 학대만 받고 컸습니다.
지금은 MIT 공대에서 청소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윌은 공부를 한 적은 없지만, 수학, 법학, 역사, 경제 등 모든 면에서 천재입니다.
MIT공대에 노벨 수학상을 수상한 램보 교수가 복도에 써 놓은 문제를 단숨에 풀어버립니다.
누가 그 문제를 풀었는지 찾아내기 위해 그 교수는 더 어려운 문제를 복도 칠판에 써 놓았고 윌이 그 문제를 풀어내는 것을 목격합니다.
하지만 반항기 어린 윌은 교수까지도 무시합니다.
그리고 지나가다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친구가 보이자 달려가 마구 두들겨 팹니다.
그러다 자신을 말리는 경찰까지 폭행합니다. 이전까지는 천재적인 머리로 자신을 변호하여 풀려났지만, 경찰 폭행은 수천만 원의 보석금이 아니면 영창을 살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램보 교수는 노벨상을 타기는 하였지만 새로운 무언가를 내어놓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천재 윌을 빼내기 위해 두 가지 제안을 합니다. 첫 번째는 자신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제안을 받아들여 램보 교수를 도와줍니다.
그러나 정신과 치료는 잘 안 됩니다.
정신과 치료를 하는 사람들보다 윌이 한 수 위였기 때문입니다.
램보는 마지막 희망으로 자신의 친구 숀에게 부탁합니다.
숀은 얼마 전 아내와 사별하여 거의 폐인처럼 사는 시골 대학 심리치료 교수입니다.
숀을 본 윌은 그림 하나를 보며 숀을 다 파악합니다.
배 위에 있는 외로운 남자의 그림입니다.
그러며 아내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함부로 말을 합니다.
역시 숀도 화가 나서 윌에게 폭력을 쓰려 합니다.
그러나 어쩐 이유에서인지 숀은 윌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만나겠다고 합니다.
숀은 다른 정신과 의사들과는 다르게 그가 함부로 말한 아내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말해줍니다.
천재인 것은 알겠지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아픈 면을 말했으니 윌도 마음을 열라고 합니다.
윌은 자신이 그렇게 된 것이 어렸을 때 부모에게 버려지고 양자로 입양되었으나 그 집에서도 양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했던 것을 말합니다.
윌은 어쨌건 그런 환경 때문에 자신이 지금 망나니처럼 사는 것을 정당화하고 있었습니다.
숀은 말합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윌은 자신도 안다고 말했고 자꾸 그러니 화를 내다가 정말 위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한없이 눈물을 흘립니다.
그전까지는 이런 위로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잘난 척하며 남을 깔보며 사는 삶이 합리화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의 위로를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이용하기 위해 빼낸 램보 교수보다는 아버지와 같이 자기를 안아주는 숀에게 위로를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누구도 마음 아프게 하는 일은 하지 못하게 됩니다.
마음 아프게 했던 여인에게 용서를 청하고 그녀를 찾아 떠나며 영화가 끝납니다.
우리는 누구나 세상 것에 욕심을 내는 사람은 나의 창조자가 될 수 없음을 압니다.
부모님은 자녀 앞에서 그런 것들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였기에 우리는 참된 창조자, 곧 세속-육신-마귀에서 멀어져 순결한 사랑만을 간직한 이에게 위로를 받고 싶어 합니다.
부모, 혹은 창조자의 위로만이 나를 모든 욕망에서 자유롭게 해 줄 참된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성체는 바로 이런 목적으로 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캐오를 인정하시고 그의 집에 들어가시는 것처럼 우리 안에 들어오십니다.
그리고 당신과 하나라고 말씀하시며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임을 믿게 해 주십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가 욕망의 덫에서 벗어나게 해 줍니다.
세상에 이런 위로와 인정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는 이유는 욕심을 부리며 사는 것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미사의 목적은 이렇게 내 안에 자아와 생존 욕구를 사라지게 하고 그리스도께서 나를 지배하시게 하기 위함이지 욕망을 채우기 위함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치 맛있는 음식과 몸에 좋은 음식을 선택해야 하는 것처럼 욕심과 인정,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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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이승화 시몬 신부님.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
꿈이 현실이 되기 위해서는
말이 아닌 행동이 필요합니다.
무언가 결심을 할 때
주변에 그 결실을 알리는 방법이 좋다고 하지만
말만 할 뿐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런 변화가 생기지 않습니다.
꿈이 망상이 되느냐
아니면 현실이 되느냐는
꿈에 대한 간절함과
그에 따르는 행동이 정도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자캐오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했기에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만남을 통해 회개하였고
이웃 사랑을 실천했기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저 말씀을 듣기만 한다고 변하는 것도 아니며
주님과 가까이 있다고 변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이들에게는 유혹이 찾아옵니다.
가까이 있다고 함께 한다는 착각
들었다고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
이러한 착각은 예수님의 선물을 제대로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며 하느님과 함께 하도록 도와주는
그 선물의 의미와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에 오늘 함께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이미 들어온 하느님 말씀을 삶으로 실천할 수 있기를
주님 안에 우리의 희망이 현실이 되기를 기도하며
오늘 하루 작은 말씀이라도 실천하는
그런 하루 보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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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1116.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제1독서 (2마카6,18-31)
그러므로 이제 나는 이 삶을 하직하여 늙은 나이에 맞갖은 내 자신을 보여 주려고 합니다. 또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 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27-28)
~그는 매를 맞아 죽어 가면서도 신음 중에 큰 소리로 말하였다.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 주님께서는,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지만, 몸으로는 채찍질을 당하며 심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마음으로는 당신에 대한 경외심 때문에 이 고난을 달게 받는다는 사실을 분명히 아십니다." 이렇게 그는 젊은이들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30-31)
마카베오 하권 6장 1절 -7장 42절은 이교 예식을 강요하는 이야기와 순교자들의 이야기로서 마카베오 하권에서 가장 유명한 부분이다.
마카베오 하권 6장 1-6절에 나오는 자료는 다니엘서에서 "지극히 혐오스러운 일" 이라고 하는 것을 묘사한다.
마카베오 하권 6장 2절에 따르면, 그처럼 혐오스러운 일에는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 부르게 하였으며, 그리짐에 있는 성전은 그곳에 사는 이들이 하는 대로 나그네의 수호신 제우스의 신전이라고 부르게" 한 것이 포함되어 있다.
성전에서 창녀들과 놀아났다(2마카6,4)고 하는데, 이와 같은 이교 예식은 유다인들에게 토라를 버리고 유다인들이 종교 축일들을 준수하지 못하게 하며 유다인이라고 말하지도 못하게 하려는 더 큰 계획의 일부였다.
게다가 마카베오 하권 6장 7-9절에 따르면, 유다인들은 달마다 임금의 생일을 경축하고 포도주와 포도 수확의 수호신인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신을 찬양하는 행렬을 하도록 강요받았다.
그 모든 계획은 유다인들의 "관습을 그리스식으로 바꾸기" 위한 것으로 묘사된다.
마카베오 하권 6장 10-11절에는 유다 백성에게 있었던 두 가지 비참한 예가 소개되어 있다.
곧 어떤 여자 둘이 아들에게 할례를 베풀었다고 해서 고문을 받고 살해되었으며, 다른 유다인들은 근처 동굴에서 모여서 몰래 안식일을 지내다가 고발되어 한꺼번에 화형을 당하였다.
유다 백성에게 그와 같은 사건들이 일어나게 한 하느님의 목적을 지적하는 저자의 성찰(2마카6,12-17)로 인해 무시무시한 공포에 관한 묘사가 중단된다.
그의 기본 관점은 이와 같은 순교와 다른 고통은 하느님께서 짧은 기간 동안 당신 백성을 교육하시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민족들에게는 그들의 죄가 가득찰 때까지 벌을 내리지 않으시고 기다리시기 때문에, 그들의 최종 징벌은 이스라엘이 받는 징벌보다 훨씬 더 나쁠 것이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 충실하신 분이라는 저자의 믿음은 완벽하다.
"하느님은 고난으로 당신의 백성을 교육하시는 것이지 저버리시는 것이 아니다" (2마카6,16).
순교를 현재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교육하시기 위한 것으로 이해하는 저자의 신학은 저자에게 고통과 죽음의 실재를 알게 하고,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보존하게 해준다.
오늘 독서의 나이가 많은 율법학자 엘르아잘(2마카6,18-31)은 돼지고기를 먹는 것을 거부한다(레위11,7-8참조).
사실 그는 돼지고기를 먹는 체하는 것조차 거부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엘르아잘을 지적하며 "이민족들의 종교로 넘어갔다."(2마카6,24) 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엘르아잘은 담론(2마카6,24-28)에서 하느님 앞에서 받을 심판을 생각하며 ("살아서나 죽어서나 전능하신 분의 손길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숭고하고 거룩한 법을 위하여 어떻게 기꺼이 그리고 고결하게 훌륭한 죽음을 맞이하는지 그 모범을 젊은이들에게 남기려고 합니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엘르아잘이 "젊은이들 뿐 아니라 온 민족에게 자기의 죽음을 고결함의 모범과 덕의 귀감으로 남기고" 죽었다고 설명한다(2마카6,31).
연중 제33주간 화요일 복음(루카19,1~10)
"마침 거기에 자캐오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세관장이고 또 부자였다. 그는 예수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보려고 애썼지만 군중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키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앞질러 달려가 돌무화과나무로 올라갔다. 그곳을 지나시는 예수님을 보려는 것이었다." (2~4)
'자캐오'에 해당하는 희랍어 '작카이오스'(Zakcaaios; Zacchaeus)는 '순결한'(pure),'무죄한'(innocent)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히브리어 '작카이'(zakai)에서 유래되어 '깨끗한 자', '의로운 자'라는 뜻이다.
하지만 자캐오는 그의 직업이 당시 사람들이 부정하게 여기는 '허가받은 도둑'인 세관장이었기에 자신의 이름의 뜻에 걸맞게 살지 못하는 갈등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서 '세관장'에 해당하는 '아르키텔로네스'(architelones; a chief tax collector)는 '우두머리'라는 뜻의 '아르코'(archo)와 '세금 징수원'이라는 뜻의 명사 '텔로네스'(telones)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당시 예리코는 세금을 거두는 관리들이 로마로부터 파견되어 늘 머물러 있었고, 세관원들은 요르단 강 동편 지역에서 유다 땅으로 들어오는 물품에 대한 통관세를 받는 일을 했다.
그러나 로마 사람들이 일일이 세금을 징수한 게 아니라, 그곳 유대인들과의 임대차계약에 따라 일정 기간 동안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권한을 유대인들에게 주었고, 그들 세리(세관원)중에 우두머리가 바로 세관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루카 복음 19장 2절에는 세관장 자캐오가 '부자'였다고 말한다.
'부자'에 해당하는 '플루시오스'(plusios; was rich, wealthy)라는 표현은 그가 단지 잘먹고 잘사는 정도가 아니고, 당시 유대인 대부분이 식민지 생활로 인해 가난한 생활을 하던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재산이 아주 많았음을 암시하며, 동시에 이것은 부정직한 방법으로 그가 부를 축적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루카 복음 19장 3절에 '그가 ~ 애썼지만'에 해당하는 '에제테이'(ezetei; he sought)는 '집요하게 찾아'라는 뜻이 있는 '제테오'(zeteo)의 미완료 능동태이다.
희랍에서 미완료는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므로, 이것은 자캐오가 능동적으로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 단어 뒤에 '보려고'로 번역된 부정사 '이데인'(idein; to see)이 따르고 있는데, 이것은 '보기 위해 계속해서 찾고 있었다'는 뜻이다.
자캐오는 키가 작은 신체적 장애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라는 환경적 장애로 말미암아 난관에 부딪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자 계속적으로 노력했음을 말해준다.
자캐오는 자신들을 경멸하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죄인들과 함께 친구가 되어 주시며, 병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죄도 용서해주시는 권세도 갖고 계시다는 소문도 들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이러한 외롭고 수치스런 상황에서 구원받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고 본다.
자캐오는 가까이에서 지나가고 있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하는 두 가지 장애 요인, 즉 수많은 군중으로 말미암아 예수님께 접근하기 어려운 것과, 자신의 키가 작음에서 오는 난관을 극복하고자 두 가지 행동을 한다.
첫째로 군중들에 의해 둘러싸인 예수님 보다 '앞질러 달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달려가'로 번역된 '프로드라몬'(prodramon; he ran)은 능동태 분사인데, 이것은 예수님을 간절히 보기를 원하는 자신의 열망과 더불어, 결단을 내린 후 즉시 행동에 옮기는 강한 의지를 잘 보여준다.
둘째로 그는 키가 작아 예수님을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돌무화나무 위로 올라간다.'
'올라갔다'에 해당하는 '아네베'(anebe; and climbed up)는 자캐오의 적극적인 행동을 강조할 뿐 아니라 믿는 이들이 본받아야 할 믿음의 모델이 된다.
한편, 자캐오가 올라간 '돌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코모레안'(sykomorean; a sycamore-fig tree)는 루카 복음 17장 6절에 나오는 '돌무화과나무'('뽕나무'; '모폰'; mopon)와는 다른 나무이다.
이 나무는 일명 '이집트 무화과 나무', '시카모어 무화과나무', '백뽕나무'로 불리는데, 잎사귀는 뽕나무와 비슷하고 열매는 무화과와 비슷하며, 가지가 사람이 올라가기 쉬운 형태로 뻗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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