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1월 1일 온고을교회 수요예배 설교 – 황의찬 목사
《 말라기 N 소크라테스 》
말 1:2~5
<산파술과 말라기>
‘산파술 産婆術’하면, 뭐가 떠오릅니까?
① 임산부, 해산, 태아를 다루는 기술...
맞습니다. 우리 국어 사전에도 나옵니다. 산파술은 아이를 받아내는 숙련된 기법입니다.
그리고요, 산파(産婆)는 ‘해산을 돕는 사람’을 뜻합니다.
성경에도 산파 이야기가 나옵니다. 출애굽기는 ‘산파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애굽에서 노예가 된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를 엄청나게 낳아 제낍니다.
마치 한국에서 6.25이후 베이비붐 시대를 연상케 합니다.
집집마다 자고 나면 아이 울음소리가 담장을 넘었습니다.
집집마다 6남매, 7남매는 보통이었습니다. 어떤 집은 10남매, 11남매,,,
출애굽기는 애굽에서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왕성한 출산으로 서두를 엽니다.
☞ 애굽이 위기를 느꼈습니다.
‘노예종족인 이스라엘이 이렇게 아이를 많이 낳다가는 우리가 그들에게 먹히겠다.’
그래서 방법이 뭐였지요? 산파에게 명령하는 일이었습니다.
“산파들은 이스라엘 여인이 아들을 낳거든 그 자리에서 죽여라!”
그래서 산파들이 그렇게 했습니까, 안 했습니까? ~ 차마 죽일 수 없어요, 왜요?
“하나님이 두려워서~”
그래서 모세가 살아남고, 모세가 애굽의 공주에게 양아들이 되어 출애굽기가 펼쳐집니다!
출애굽기 앞 창세기에도 산파는 여러번 등장합니다.
야곱의 사랑하는 아내 ‘라헬’ 그녀가 아들을 낳을 때 산파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합니다.
‘산파’ 아무나 합니까?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산파는 산파술을 익힌 사람이 합니다.
우리가 구약 창세기 출애굽기에서 산파와 산파술에 대한 개념을 가졌습니다.
구약성경 막바지에 이르렀습니다. 말라기입니다.
말라기에 이르면 그때까지 알고 있었던 ‘산파’ ‘산파술’ 개념에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합니다.
말라기에는 새로운 산파술이 등장하거든요!
말라기에 나오는 산파술은 그리스 아테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을 알아야 말라기의 은혜가 더욱 풍성해집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말라기 앞, 스가랴까지는 우리가 해산을 돕는 산파, 산파술만 알고 있으면 되었습니다.
말라기에 당도했습니다. 새로운 산파술을 이해할 때 말라기가 주는 은혜가 태산이 됩니다.
말라기를 이해하기 위한 산파술은 이름하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철학자이고, 남자인데, 웬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이냐고요?
☞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아테네 출신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멀지 않아요, 지중해를 건너면 됩니다.
고대로부터 항해술이 발달하여 빈번하게 그리스와 예루살렘은 교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문물이 1년도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에 유입됩니다.
소크라테스는 주전 470년에 태어나서 699년 향년 71세로 독약을 마시고 죽습니다.
사형 당한 것입니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을 남기고 사약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말라기 선지자가 활동한 시기와 겹칩니다.
소크라테스는 ‘주전 5세기 선지자 말라기’와 동시대 인물입니다.
한국에서 대한해협을 건너면 일본이듯이, 예루살렘에서 지중해를 건너면 그리스입니다.
말라기 선지자 당시 그리스에서 철학이 꽃을 피웁니다. 그당시 철학자가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가 남긴 유명한 철학기법이 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어슬렁어슬렁 시내를 배회합니다. 소피스트를 찾아나선 것입니다.
당시 유명했던 철학사조로서 ‘소피스트’가 있었습니다. ‘궤변론자’들입니다.
논리를 배배꼬아서 이상한 결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소 한 마리 훔친 죄로 신문을 받게 되었습니다. “왜 남의 소를 훔쳐 갔느냐?”
“길을 가는데, 끈이 하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그 끈을 주워 집으로 갔을 뿐입니다. 그랬는데 소가 따라왔습니다. 그러니 저는 죄가 없습니다.”
이 도둑놈(?)에게 여러분이 취조를 한다면 어떻게 말해서 자백을 받아내겠습니까?
이렇게 ‘눈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에서 말로서 꼼짝못하게 하는 탁월한 기술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말라기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 그리스 아테네의 ‘소크라테스’입니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을 ‘산파술’이라고 합니다.
☞ 아이를 받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받아낸다는 뜻입니다.
산파술(産婆術)은 질문을 던져 상대가 깨닫게 하여 진실을 토해내게 하는 기술입니다.
☞ 소크라테스가 이 산파술로서 궤변을 깨고 진실에 접근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
<말라기의 산파술>
오늘 설교를 시작하면서 ‘산파술’ 이야기를 조금 길게 했습니다.
왜냐면, 말라기 선지자가 말라기서를 쓰면서 ‘산파술’ 기법을 원용합니다.
인류 역사를 보면, 시대마다 ‘트랜드’가 있습니다. ‘트랜드’ 유행이지요?
말라기 선지자 시대 트랜드는 바로 ‘산파술’이었습니다.
“질문을 통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겠다.” 야무진 꿈입니다. 2절을 봅니다.
(2절)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뭐라고 말합니까?
“~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
하나님의 말씀에 질문으로 맞섰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파술’을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고자 시도를 한 것입니다.
발칙합니다. 그렇지요? 오만방자하기 이를 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까지 토를 달고 당돌하게 질문한 것은 당시 유행하던 ‘산파술’의 영향입니다.
이렇게 질문을 하여 하나님이 “그래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는 말은 틀렸구나~” 이 고백!
이 고백을 받아내려 한 것입니다.
인간의 오만, 교만, 당돌함이 극치에 다다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의 산파술에 끄덕도 안 하십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2~3절)
말라기서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때 이스라엘은 이렇게 또 질문했을 겁니다.
“에서는 어떻게 미워하였나이까?”
말꼬리를 잡아가면서 연거푸 질문하는 것이 산파술이거든요.
하나님은 그것을 모르실 리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하나 말씀을 하십니다.
“그(에서)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3절)
<이스라엘 백성의 산파술>
오늘 본문은 산파술이 근간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 : 내가 너희를 사랑했다. 이스라엘 :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나님 :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이스라엘 : 에서를 어떻게 미워하셨나이까? 하나님 :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 이스라엘 : 에돔이 가만 있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하나님 : 에돔이 그랬지, ‘우리가 무너뜨림을 당하였으나 황폐된 곳을 다시 쌓으리라’했다. 이스라엘 : 그래서 하나님이 뭐라 하셨나요? 하나님 : ‘그들이 쌓을 지라도 나는 헐리라’라고 말했다. 이스라엘 : 주변에서 사람들이 뭐라 그러던가요? 하나님 : 거기를 ‘악한 지역’이라 하고, ‘여호와의 영원한 진노를 받은 백성’이라 한다. |
그리고, 5절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5절) “너희는 눈으로 보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으로 보아라”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그리고 이르시기를,
“~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시다 하리라”
☞ 사람들의 본능 속에는 반문하고자 하는 충동이 있습니다.
☞ “그래서 어쨌는데요?” 이렇게 늘 받아치고 싶습니다.
☞ 사람의 본능적 충동을 이용하여 산파술이라는 대화법을 소크라테스가 시도했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당대의 내로라 하는 소피스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궤변이 횡행하는 시대, 궤변의 황당무계를 무너뜨렸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위대함이 여기 있습니다.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은 당대의 트랜드가 되었습니다. 고대 근동 지방의 유행이었습니다.
트랜드, 유행은 무의식중에 영향을 끼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의 유행을 탓하시거나 꾸짖지 않으십니다.
그 방식을 받아들이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밖에서도 크신 하나님>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입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의 마지막 책입니다.
말라기서는 구약시대를 마감하는 책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를 마감하시면서 다가올 신약시대에 대한 암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밖에서도 크시도다!”
구약시대에는 여호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주로 대화를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모든 지역은 ‘이방’ 즉, ‘다른 나라’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의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을 사랑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의 제사장 민족이다.
이스라엘은 우월주의에 빠져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습관적으로 젖어들었습니다.
‘호의가 되풀이되면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 앞 마당을 마을 사람들의 주차장으로 개방하고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일에도 아무 거리낌없이 주차하기도 합니다.
교회 앞 주차장에 주차하면서 목사인 저를 보고 인사도 안 건넵니다.
담배꽁초를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 쓰레기도 버립니다.
☞ 이스라엘 백성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지속되자, 이들은 그것이 당연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생깁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생각이 고개를 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말라기 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심을 이제는 깨우쳐 주실 때가 되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기에 들어가십니다.
<대화의 유익>
말라기는 당대의 트랜드인 ‘산파술’을 원용하면서 쓰여졌습니다.
산파술은 대화의 기술입니다.
대화, 참 중요합니다.
대화가 부족하여 생기는 문제가 너무나 많습니다.
부부간의 대화, 부모 자녀간의 대화, 이웃간의 대화,
더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대화~
저는 책을 쓰기 전에 책으로 펴내기 위한 주제를 만나는 사람과 진지하게 나눕니다.
때로는 책의 주제임을 천명하기도 하지만, 짐짓 시침을 떼고 주제를 전개합니다.
듣는 분이 지루하지 않도록, 또 호응을 이끌어내면서 대화를 합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주제를 점검하게 됩니다.
‘아, 이것은 말이 안 되는구나’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아, 이것은 이렇게 고치고, 이렇게 전개하면 되겠구나’를 알게 됩니다.
대화함으로써 자기 생각이 정리됩니다.
여성들의 ‘수다’ 꼭 필요합니다. “수다 떨지 않는 여성은 여성이 아니다.”
한참 자기 안의 것들을 끄집어내서 수다를 떨다보면, 자기 안의 것이 정리됩니다.
아, 이것은 내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구나, 이것은 괜찮구나, 이것은 쓸만하다. 등등~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개발해냈습니다.
소크라테스 이후 대화법이 장족의 발전을 합니다.
이 모두가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대화하시면서 자기를 드러내십니다.
나는 너희 이스라엘만의 하나님이 아니다.
나는 온 세상의 주인이다.
나는 창조주이고, 사랑의 하나님이고, 공의의 하나님이다.
말라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끊임없이 질문을 쏟아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질문에 답하시면서 하나님을 드러냅니다.
“이스라엘 지역 밖에서도 크신 하나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