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균 시인의 시집 『달아공원에 달아는 없고』
책소개
'원숙의 지경'에 이르매, 이달균
어느덧 10번째 시집을 상재하게 된 이달균 시인의 신작시집 『달아공원에 달아는 없고』 가 가히 시인선 003으로 출간되었다. 독자적이자 독보적인 시와 시조로 세간의 관심과 문단의 주목을 받아온 이달균의 이번 시집은 치열한 자기 고민과 자아 성찰 그리고 시집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깊은 철학적 사유까지 담아내고 있다. 특히 30여 편에 이르는 「난중일기」 연작에서 볼수 있듯 펜데믹이라는 전 세계적 재난 상황 속 에서의 국가의 역할에 대한 대사회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다. 이는 이순신이 겪은 과거의 전란과 현재의 재난을 교차시키며 과거-현재 간 간극, 세대 간 격차를 좁혀 보려는 이달균 특유의 화법이라 할 수 있다. 시력 37년을 넘긴 중진 시인이지만 이달균의 시는 여전히 호탕하고 호방하며 호기롭다. 뿐만 아니라 대사회적 풍자로까지 인식이 확장하며 구사하는 재담은 우리에게서 가시 박힌 웃음을 이끌어낸다. 실로 '원숙의 지경'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달균 시인
약력 :
1987년 시집 『남해행』과 무크《지평》으로
문단 활동을시작했다. 시집 『열도의 등뼈』
『늙은 사자』 『문자의 파편』 『말뚝이 가라사대』
『장롱의 말』 『북행열차를 타고』『南海行』,
시·사진집 『탑, 선 채로 천년을 살면 무엇이 보일까』,
현대가사시집 『열두공방 열두고개』,
창비 6인 시집 『갈잎 흔드는 여섯 악장 칸타타』,
평론집 『구심력과 원심력의 경계』,
시조선집 『퇴화론자의 고백』,
영화에세이집 『영화, 포장마차에서의 즐거운 수다』
등이 있다.
중앙시조대상, 이호우 · 이영도시조문학상,
조운문학상, 오늘의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상,
경상남도문화상, 마산시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 E-mail: moon1509@hanmail.net
시인의 말
하루해
짧다 해도
길다
한 생애
길다 해도
짧다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오늘은 또
말줄임표로
2024년 5월
이달균
펀드매니저
악어라 불리는 사내가 있었다
눈빛은 달빛에 벼린 칼날처럼 차가워
냉철한 포식의 순간을 숨죽이며 기다린다
주파수는 언제나 낮은 곳을 향한다
모였다 흩어지는 개미들의 두런거림
이빨이 자라는 만큼 귀도 함께 자란다
모니터에 찾아온 악어새를 데불고
낮고 느린 음악에 생각을 데우며
고요한 늪의 시간을 묵상으로 이끈다
드디어 장이 선다 먼지가 밀려온다
지축을 흔드는 누 떼의 움직임
버려온 칼을 던져라 과녁이 바로 여기다
밥무덤
너울이 이랑이라면 밥배나 불려줄걸
물 긷는 물동이엔 노을만 출렁이고
봉긋한 찔레 무덤은 고봉밥처럼 눈부시다
이팝꽃 조팝꽃은 왜 봄에만 피어나
모심을 땅이라곤 다랑논 몇 뙈기뿐
한평생 먹은 쌀말이 얼마나 될까부냐
밀기울의 땟거리로 물질 나간 첫새벽을
그에 하염없이 수평선 너머로 간
허기진 이녁을 위해 비손 또 비손하다
친구를 위한 詩
천천히 걸어보게 시간은 너의 편이야
마지막 음악은 그리 쉽게 끝나지 않아
고독한 월계관을 쓸 날도 그리 멀진 않았어
지상의 끝까지 뛰어본 마라토너도
십자가를 진 사람도 종말을 말하진 않아
얼마쯤 걸어왔느냐고 가끔 묻긴 하겠지만
언젠가는 보청기에, 커피를 쏟는 일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지 않을 만큼
담담히 오늘을 건너는 연습이 필요하지
궁금하지 않다는 건 참 다행한 일이야
어제 누굴 만났는지 무슨 책을 읽었는지
그렇게 물음표보다 느낌표로 다가가야지
후투티가 오는 저녁
-LP음악카페 뱅뱅에서
콧수염의 주인이 돈가스를 만들고
엊그제 들여온 포도주를 거를 때
저만치 메타세쿼이아도 잠시 숨을 고른다
후후훗! 하고 운다는 새 이름 후투티
커피와 음악이 무료해지는 늦은 오후
돌아온 인디언처럼 화관무를 시작한다
갈아둔 이랑을 뛰어다니는 음표들
그 콩나물 대가리를 연신 쪼아먹다가
갸우뚱, 철새임을 잊고 사람과 눈을 맞춘다
노을이 시나브로 어둠과 몸을 섞어도
추장의 몸짓은 끝나지 않는다
대지의 신께 바치는 거룩한 제의祭의 춤
밥 딜런을 생각하다 존 덴버를 말하는
60대의 간이역을 깜박이는 기억들
후투티, 너의 GPS를 입력하며 길을 나선다
또랑광대의 노래
-난중일기 42
아서라 말아라, 넘지 못할 경계라면
詩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물구나무서서 걷는
인생도 그렇더라. 알량한 이름값에 어전광대 흉내
내며 줄줄이 줄 세우고, 줄 태우고 흔들흔들, 차라
리 난장판에 엉덩춤이나 추고 말까, 외줄타고 재담
하는 엿판 굿판 너름새에 목청껏 외쳐보는 애호박
단호박 같은 또랑광대면 또 어떠리. 못 배운 광대
집안에 국창나기는 언감생심
아서라
꿈도 크게 꾸면
가위눌려 낭패 본다
해설
상상된 현실에서 캐내는 삶의 진실
김효숙(문학평론가)
현실을 떠난 사람은 없듯이 시도 마찬가지다. 고통과 상흔이 삶의 내용을 이룰 때 시언어는 바로 그 상흔에 의해 씌어진다. 『달아공원에 달아는 없고』에 실린 많은 시편들은 팬데믹에 묶여 있었던 고통을 체화한 듯 보인다. 고통에 처한 자는 그것을 벗어나기 위한 말을 하고, 마찬가지로 시인도 자신의 육체와 다름없는 언어를 붙들고 그 언어를 벗어나 부단히 새로워지려고 몸부림친다.
시작에 관한 치열한 고민, 자기 성찰, 대사회적 발언을 담아낸 이 시집에는 서정과 리얼리티 감각이 첨예하게 배합되어 있다. 관념어로는 아포리즘을 피워 올리고, 화자의 직·간접 경험이 녹아 있는 서정에는 가늠키 어렵고 변화무쌍한 인간사의 음영이 드리워 있다. 표제시에서 보듯이 없는 것으로부터 있음을 유추하는 이달균 시는 덧없는 삶의 내면을 천착하면서 시작된다.
현대시는 흔히 해석의 어려움을 안긴다. 문명사회 속의 인간 감정과 의식을 단선적으로 담아내는 어려움이 난해시를 만든다. 현대시조는 어떠한가. 형식은 단조로우나 생동하는 우리말의 운율을 살리면서 가독성과 전달력을 높인다. 이 시대인의 정서를 생기 넘치는 언어에 실어낸 이달균 시는 위험한 현실 속에서 고투하느라 지친 우리에게 다시 일어설 힘을 불어넣는다. 활달한 정서에서 건강한 시언어가 태어나고, 시조의 힘은 시인의 기능적인 언어가 아닌 삶을 대면하는 그의 진정한 마음에서 우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