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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 정진석] (34) 처음부터 다시
여름엔 냉방기 없이 살고 옷장엔 낡은 옷 몇 벌뿐
- 1972년 진천본당을 사목 방문한 정진석 주교가 본당 아이들과 환하게 웃고 있다.
정진석 주교는 청주교구 자립과 사목체계 확립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국인 교구장 임명으로 메리놀외방선교회가 일정 부분 담당했던 교구의 재정이 크게 줄어들면서 자연스럽게 ‘재정 자립’이 교구의 첫 번째 과제가 됐다. 이후 1970년대 내내 교구와 각 본당은 자립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이 모든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국인 사제 양성이 시급했다. 조선 교회의 본토인 사제 양성에 힘쓴 모방 신부의 지혜가 새삼 감탄스러웠다.
우리 힘으로 사제 키우자
정 주교는 가는 곳마다 성소 계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우리 자녀들을 우리 힘으로 키워 사제로 만들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신부님들, 그리고 신학생 여러분! 사제 직무는 확실히 일반 신자의 사도직과 구별되고, 사제는 신앙의 증거자가 돼야 합니다. 저는 사제 한 명의 역할이 얼마나 큰지 잘 알고 있습니다. 봉사의 삶이야말로 우리 사제직의 행복이고 보람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가져야 합니다.”
정 주교는 타 교구 학생이라도 학비가 없어 학업에 어려움을 겪으면 청주교구로 입적시켜 공부를 시킬 만큼 사제 양성에 욕심을 냈다. 인세 등 개인적으로 모은 사재를 사제 양성 기금에 모두 털어 넣을 정도였다. 사제 없이는 교구장도 교구를 원활하게 사목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제 양성에 정 주교는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투신했다.
- 1971년 수동성당에서 유치원생이 꽃다발을 들고 다가오자 정진석 주교(가운데)가 메리놀회 사제들과 함께 환하게 웃으며 반기고 있다.
사제는 주교의 협력자로서 하느님 백성에게 봉사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다. 사제는 복음의 전파자로서, 교회의 목자로서, 그리스도의 지체인 교회의 영적 성장을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사제의 직무와 생활이 추구하는 궁극 목적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래서 정 주교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신학생들의 품성을 중요하게 여겼고 성덕을 증진하는 것이 교구 성장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주님 은총과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 또한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기도만이 주님의 힘을 얻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게 해준다고 믿었다. 그는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리고 교구 구성원을 만날 때마다 사제 양성을 위한 기도를 청했다. 그는 성심을 다했다.
정진석 주교는 가능하면 사제들이 자신의 탈렌트를 활용하는 데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사제들이 하고 싶은 사목이라면 교회법이나 교회 전통에 어긋나지 않는 한 할 수 있도록 허락했다. 교구 사목을 위해 사제들을 믿어줌으로써 교구장과 믿음과 신뢰를 쌓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세세하게 말하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사제들이 점차 교구장의 마음을 읽어내는 것 같았다.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사제 양성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도왔다.
- 1970년 12월 청주교구 소속 삭발례 수품자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사실 신학교에 들어가 품을 받고 사제가 되는 과정은 짧지도 않고 쉽지도 않다. 신학대학에 들어가 군 복무까지 마치고 모든 과정을 수료하려면 족히 10년은 걸린다. 많은 지원자를 보내도 오랜 기간 잘 육성하지 못하면 탈락자도 많은 것이 사제 양성이다. 정 주교의 열정과 독려에 사제들과 신자들의 생각도 바뀌어갔다.
정 주교는 한발 더 나아가 가난한 교구에서 생활하려면 교구장 본인부터 가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사제들이 교구장의 말을 따를 리 없기 때문이다. 정 주교는 가능한 한 지출을 줄이고 소박한 삶을 살았다. 우선 방의 냉난방부터 조절했다. 이런 습관이 몸에 배어 나중에도 더운 여름날에 냉방기를 사용하지 않았다. 정 주교의 옷장은 텅 비어 있었다. 옷은 고작 몇 벌이었고 서류 가방도 하나로 수십 년을 쓸 정도였다. 자신뿐 아니라 주변에도 종이 한 장 낭비하지 않도록 당부했다.
특히 그는 이면지를 쓰는 것을 중요시했다. 이는 습관으로 굳어졌는데, 교구의 한 사제는 첫 보고서를 드릴 때 무척 혼이 났다고 한다. 정 주교가 내용을 보는 것이 아니라 종이를 뒤로 넘겨 이면지를 사용했는지 먼저 봤던 것이다. 그리고 왜 이면지를 사용하지 않았느냐고 한소리 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또 이면지가 아닌 새 종이로 출력한 보고서를 드렸는데, 정 주교는 그때도 이면지 사용을 이야기하려 했다. 그래서 그 신부가 그냥 손으로 쓰는 용지는 이면지가 괜찮지만 인쇄기로 출력하는 데 이면지를 사용하면 오히려 기계가 고장 날 수 있다고 하니 그대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에는 이면지 사용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 주교는 합리적인 이유라면 자기 생각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다.
성가정 운동 전개
정진석 주교는 교구장 착좌 직후 교구 사제와 신자들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교구 상황을 파악하는 데 힘썼다. 그는 1971년과 1972년에 ‘신앙 강화의 해’를 사목 지표로 내세웠다. 정 주교에게 사목 목표의 첫 주제는 신앙이었다. 교회 안팎에서 신앙을 위협하는 요인들이 점점 더 증가하는 상황을 고려할 때 무엇보다 신앙을 점검하고 강화하는 것이 필요했다.
정 주교는 신자들이 신앙의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약한 신앙’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신앙을 강화하는 방법은 교리나 성경을 잘 아는 것이라 생각했다. 신자들의 재교육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본당을 방문해 견진성사 등을 주례하거나 미사를 집전할 때면 주로 교리 내용을 녹여 강론했다.
1973년에는 ‘처음부터 다시’라는 사목 지표를 발표했다. ‘처음부터 다시’라는 것은 그전의 사목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초심을 잃지 말고 기초를 튼튼하게 하자는 의미였다. 이때는 특히 외짝 교우들을 교회로 인도하기 위해 ‘성가정 운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정 주교가 강조한 신앙 내실화와 복음화 사업, 가정의 중요성은 이후의 사목 방향에서도 근간을 이뤘다. 정진석 주교의 착좌는 청주교구 사목의 제2기가 시작됨을 의미한다. 1970년 착좌 이후 3년 동안의 과도기를 거쳐 1974년부터 교구 행정 체제를 개편하기 위해 노력했다. 정 주교는 교회법 규정에 맞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가르침에 따라 교구 행정 체제를 확립하고자 박차를 가했다.
[추기경 정진석] (35) 농부의 마음으로
사제 양성의 씨앗 뿌리고 가꿔 결실, 교황청도 인정
- 1978년 5월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교에서 열린 교황청 선교후원회 및 선교위원장 회의에 참석한 정진석(가운데) 주교.
정진석 주교가 청주교구장에 임명되던 당시 교구 신자 수는 4만 명 정도였다. 정 주교가 교구장 착좌식을 마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 최우선으로 한 일은 본당 방문이었다. 교구 사정과 사제들, 신자들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 본당을 직접 방문해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리해서 업무 시작 1주일 만에 교구 22개 본당을 하나도 빠짐없이 돌아봤다.
몇 년 뒤인 1973년, 정 주교가 사목표어를 ‘처음부터 다시’로 정한 것도 본당 방문에서 비롯됐다. 당시 청주교구 관할 지역 도로는 거의 비포장이어서 이동이 힘들었다. 그래서 정 주교는 아침에 한쪽 방향으로 쭉 이동했다가 저녁에는 그 길을 되돌아오는 방법을 택했다. 같은 방향에 있는 본당을 차례차례 방문하면서 본당 신부를 만나지 못하면 되돌아올 때 다시 본당을 찾아가는 식이었다. 충주 방향으로 한번, 영동 방향으로 한번 오가다 보니 시간이 훌쩍 흘렀다.
교회법에 교구장은 5년에 한 번 교구 내 본당을 사목 방문하도록 정해져 있다. 그런데 정 주교는 1년에 서너 번씩 본당을 돌며 방문했다. 보통은 통보도 하지 않고 갔다. 수선을 떨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성당에 사람이 없는 경우도 많았다. 가끔 성당 마당에서 교우들을 만나는 경우도 있었다. 정 주교는 그때마다 교우들에게 “안녕하세요? 본명이 뭐예요?” 하고 인사했다. 그러나 신자들은 대답이 없었다. 알고 보니 대다수 신자들이 자신의 세례명을 모르고 있었다. ‘본명’이 무엇을 뜻하는 줄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다.
- 1974년 7월 청주교구 사제 서품식 후 정진석(앞줄 가운데) 주교가 사제단과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본명이요? 그게 뭐예요?”
“성당에서 부르는 이름요. 성당에서 형제님을 뭐라고 불러요?”
그러자 뾰로통한 얼굴이 풀리며 반색을 하며 답변이 돌아왔다.
“아! 밀가루 주는 이름이요?”
당시는 그랬다. 전쟁의 여파로 너무나 가난했던 나머지 기본 교리에는 관심 없이, 밀가루를 준다고 해서 세례를 받은 이들이 많았다. 어떤 본당은 교우 전체가 그랬고, 도시보다 시골로 갈수록 상황은 더욱 심했다. 신자들이 밀가루 때문에 성당에 오니 당연히 본당 교무금은 0원이었다. 신자들이 본당에 돈을 봉헌한다는 개념이 있을 수가 없었다.
당시 메리놀외방선교회(이하 메리놀회) 사제들은 메리놀회 본부를 통해 큰 금액은 아니지만 생활비를 보조받고 있었다. 이를 쪼개고 쪼개 쓰며 아주 가난하게 살았다. 그들은 적게나마 생활비가 있었기에 신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러니 신자들은 성당에 헌금, 교무금을 내지 않는 것은 물론 물자를 공짜로 가져다 쓰기 일쑤였다.
반면 한국인 사제들은 교구장이 주는 생활비가 없어 정말 어렵게 살았다. 정 주교는 안타까웠지만 교구의 한국인 신부들에게 교구 상황을 설명하고 자립하라고 권고했다. 다만 포기할 수 없는 사제 양성은 교구장이 책임지겠다고 선언했다. 사제들은 먹고사는 것을 스스로 해결해야 했다. 수입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 1978년 11월 청주실내체육관에서 거행한 청주교구 설립 20주년 기념 신앙대회.
정 주교는 사목 방문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본당은 두 번 세 번 방문해도 비어 있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면 정 주교는 혼자 여기저기 둘러보고 돌아왔다. 가끔 성당을 돌아다니다 보면 밖에서 교우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다. 성당에서 만난 신자들은 정 주교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에게 사제는 노란 머리의 서양 외국인이라는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난데없이 한국인 사제를 처음 보니 이상한 것은 당연했다.
청주교구는 휴전 직후인 1953년 서울대목구에서 감목대리구로 분리될 때 본당이 5개였다. 5년 뒤인 1958년 대목구로 승격될 때는 본당이 15개였다. 파디 주교가 본당 10개를 증설한 것이다. 본당 증설은 보통 신자 수를 감안해서 이뤄졌지만 파디 주교는 거리를 중심으로 증설했다. 그러니 신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본당도 있었다. ‘처음부터 다시’라는 사목표어는 절박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진석 주교는 농부의 마음으로 신앙의 터전을 차근차근 다져나가고 정성껏 복음의 씨앗을 심었다. 사제와 신자들을 독려하고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길 기도하며 공동체를 꾸려나갔다. 그렇게 6년, 정 주교는 “하느님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드디어 교구 내 메리놀회 사제와 한국인 사제가 16명씩 같은 수가 된 것이다.
그 해에는 사제 서품식이 두 번 있었다. 사제 양성 기간이 7년제에서 6년제로 바뀌며 변화가 생긴 것이다. 1976년 5월 청주교구에서 새 사제가 4명이나 탄생했다. 4명이 한꺼번에 서품을 받은 것은 교구 역사상 처음이었다. 장봉훈 신부(현 청주교구장 주교), 오웅진 신부 등이 그날의 주인공이었다. 그동안은 매년 한 명씩 새 사제가 나왔을 뿐이었다. 정 주교는 무척 기쁘고 감격스러웠다. 서품식 아침, 그는 보따리에 꽁꽁 싸뒀던 귀한 헝겊신을 찾아 신었다. 노란 테두리의 흰 헝겊신은 자신이 주교품을 받을 때 신은 것이었다. 주교 서품 때 한번 사용하고 잘 싸매둔 헝겊신을 꺼내 신은 정 주교는 당당하게 걸었다. 일생에 꼭 두 번 귀한 그 헝겊신을 신었다.
1976년 한국인 사제가 메리놀회와 같은 수가 되면서 비로소 정진석 주교는 인사권을 갖게 됐다. 그 이전까지는 정 주교가 인사발령을 내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메리놀회 지부장이 바꿔버리기가 일쑤였다. 사제회의도 영어로 하던 것을 한국어로 하게 됐다. 정 주교가 “이제부터 사제회의는 한국어로 하겠습니다”고 하자 외국인 사제들은 “어휴!” 하며 한숨을 쉬었다. 그동안 한국인 사제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래도 아무런 투정 없이 잘 따라와 준 사제들이 고마웠다.
청주교구 사제들뿐 아니라 신자들에게도 언어는 큰 문제였다. 선교사인 메리놀회 사제들도 한국어를 배울 시간 없이 본당에 파견되는 상황이어서 본당 신자들과의 소통이 상당히 어려웠다. 메리놀회 사제들은 언어를 배울 마땅한 기관도 없어 신자들과 어울리며 주먹구구로 배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서로 애쓰며 교구를 일궈왔다.
정진석 주교는 자신은 굶어도 신학생은 양성한다는 마음으로 성소 계발에 열심히 매달렸다. 매일 묵주기도를 바치며 첫 단은 성직자ㆍ수도자 부모들을 기억하며 봉헌했다. 신학생 부모의 협조와 희생이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예비 신학생 부모들을 만날 때마다 아들을 꼭 주님께 봉헌해달라고 말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결과 1978년에는 신학생이 80명이 됐다.
1978년은 특별히 청주교구 설정 20주년이 되는 의미 있는 해였다. 같은 해 5월 교황청 선교후원회 및 선교위원장 회의가 로마에서 있었다. 회의에 참석한 정 주교는 5월 15일 교황청에서 바오로 6세 교황을 특별 알현했다. 교황은 보고서를 찬찬히 보다가 웃으며 정 주교의 등을 두드렸다.
“자네 교구가 신자 1000명당 대신학생 1명의 비율을 달성했다니 정말 대견하네. 전 세계에 이런 교구는 없다네.”
정진석 주교는 뛸 듯이 기뻤다.
[추기경 정진석] (36) 청주교구의 새로운 기틀을 다지며
하느님의 집 하나씩 짓고 성가정도 꾸준히 늘고
- 교육사업에 관심을 두었던 정진석 주교는 유치원 증설에 앞장섰다. 1973년 2월 진천본당 부설 성모유치원 제1회 입원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는 정진석 주교.
정진석 주교의 사목 목표는 교구와 본당의 재정 자립이었다. 아무리 좋은 지향을 둬도 재정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정 주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데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필요하다면 외국에 여러 번 편지를 보내는 일도 적지 않았다. 1974년 1월부터는 메리놀회의 교구청 운영 지원금이 중단됐다.
정 주교는 어려운 사정을 신자들에게 직접 호소하고, 주보나 교계 신문을 통해서도 자세하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외국의 원조를 받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재정 자립에 관한 신자들의 생각이 변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를 위해서는 신자들의 협조와 희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교구는 오랫동안 22개 본당에 머물러 있었다. 신자 수가 늘어 성당을 건립해야 했지만 사제가 부족한 것은 물론 새 부지 매입과 건축 등 재정 부족 문제가 심각했다. 정 주교는 신부들에게 교구 사정을 소상히 설명했다. 그리고 한 사제가 하나의 성당을 건립하자는 제안을 한 뒤 이를 신부들과 논의했다. 맨 먼저 나서 성당을 짓겠다고 한 이들은 정 주교의 동창이었다. 동창 신부가 나서자 후배들도 이어서 성전 건립에 뛰어들었다. 최고참 사제들이 성전 건립을 위해 희생을 아끼지 않으니 후배들도 자연스레 선배들의 뒤를 따라 애를 썼다. 정 주교는 그 점이 너무너무 고마웠다. 청주교구 설정 20주년과 30주년 사이에 본당이 많이 늘어난 이유는 이렇게 사제들이 자발적으로 성당을 짓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당 수가 획기적으로 늘어났다.
- 정진석 주교는 착좌 초기 교구 재정이 많이 어려웠지만 사제단과 함께 성당 건설에 힘썼다. 1976년 12월 교구 가톨릭회관 축복식에서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는 정진석(가운데) 주교.
그중 하나가 가난한 무극본당이었다. 무극본당은 오웅진 신부가 건립했는데, 정 주교는 무극본당 신자들 앞에서 호소했다.
“식사 때 보리밥에 풋고추에 된장 찍어 드시지요? 오 신부도 꽁보리밥에 풋고추에 된장 찍어 먹으면서 삽니다. 오 신부도 굶어 죽지만 않게 해주세요.”
그러면 신자들도 어려운 살림에 십시일반 나누고 도우며 성당을 건립했다. 그 당시 참 어렵게 살면서도 하느님의 집인 성당을 짓는 데는 신자들이 두 팔을 걷고 나섰다. 정 주교도 돈이 조금씩 생기면 성당 짓는 데 보태라고 보내줬다.
정진석 주교는 부임 초부터 몇 가지 숙제를 안고 있었다. 그 내용을 교구장 취임 2주년을 맞아 ‘경향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혔다. 정 주교가 교구장의 중책을 맡고 처음 염두에 둔 것이 교육사업이었다. 그래서 먼저 유치원을 증설했다. 교구 내 몇 개의 교구 재단 학교가 있었지만 새로 시작할 교육사업은 ‘학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교회 학교의 육영사업은 내외 여건으로 봤을 때 시의(時宜)를 잃었다고 판단했다. 그 대신 일본에서도 크게 활용되고 있는 본당 부속 유치원 교육에 중점을 두기로 방침을 세웠다. 가톨릭 유치원에 대한 일반의 평이 좋은 것도 사실이지만 본당 유치원은 평생 가톨릭의 좋은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기에 성장한 후에도 큰 영향을 준다고 생각했다. 23개 본당 중 5개 본당에 있던 유치원을 10개 본당으로 늘렸다.
또 하나는 병원 운영 문제였다. 옥천의 성모병원은 청주교구 최초의 가톨릭 종합병원이었다. 1720㎡(520평) 규모의 건물을 미완성인 채로 인계받았는데, 교구에서 운영할 형편이 못돼 고심하던 중 다행히 서울대교구 가톨릭중앙의료원에서 적자를 감수하고 운영을 맡기로 했다.
교구 묘지도 신자들의 숙원이었다. 정 주교가 교구장에 부임하자마자 노년층 신자들이 묘지 설립을 부탁했다. 그래서 묘지 부지로 46만 3000㎡(14만 평)의 산을 매입해 연령회에서 관리하도록 했다.
모든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정 주교의 가슴을 아프게 했던 것은 60년 역사를 자랑하는 장호원 매괴초등학교를 사정상 폐쇄하는 것이었다. 교육청의 협조로 학생들은 물론 교사들을 한 사람의 실직자도 내지 않고 모두 공립학교에 흡수시킨 것이 큰 보람이었다.
- 1980년 12월 신축 교사 축복식을 위해 충추 성심농아학교를 방문한 정진석 주교가 아이들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고 있다.
충주 성심농아학교에는 현대식 기숙사 건물을 세웠다. 정 주교도 불우한 농아들을 위해 사재를 털었다. 그리고 무의탁 노인들을 위한 복지사업에 더욱 충실하고자 옥천의 ‘천당의 문 양로원’을 청주의 ‘예수성심원’(양로원)에 흡수시켰다. 옥천 양로원 자리에는 청주교구 최초로 분원(分院)이 아닌 수도회 본원(가르멜회)이 진출했다. 이는 전임 교구장 파디 주교의 염원이기도 했다.
정 주교는 무엇보다 먼저 평신도 재교육에 힘을 쏟았다. 평신도 지도자 교육과 성가정 운동이 두 축을 이뤘다. 평신도 교육은 ‘처음부터 다시!’ 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보자는 의미였다. 각 본당과 공소 회장들을 대상으로 한 재교육이 큰 성과를 거뒀다. 평신도 지도자 교육을 마친 후에는 성가정 운동을 전개했다. 성가정 운동은 가족 전체가 신자인 가정의 경우 신앙을 더욱 공고히 하는 것을, 외짝 신자 가정은 가족 전체의 신자화를 목표로 했다.
정 주교가 신경 쓴 것 가운데 하나가 순교자 현양 사업이다. 충청북도에서 순교자가 많이 나왔으나 체계적인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다. 정 주교는 전담 신부를 임명하고, 순교자 현양 사업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다. 신자들에게 신앙인의 선조를 찾는 것은 의무이며, 신앙은 교리 지식이 아닌 순교 정신이 바탕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부들에게는 청주교구 관할 지역에서 12년간 악전고투하며 전교하던 최양업 신부의 정신을 본받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대학이 다섯 개나 있는 교육 도시 청주를 중심으로 한 가톨릭 학생운동은 각 단위 대학 학생회가 조직될 만큼 발전했다. 그런데 학생들이 모일 장소가 없었다. 가톨릭센터 건립이 과제로 떠올랐다.
당시 보좌 신부가 필요한 본당은 11곳, 새 본당이 필요한 곳도 5개였다. 당장 16명의 사제가 필요했다. 사제 부족 현상을 해소하는 것은 여전히 청주교구 최고의 과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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