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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대한민국이 세계에서 1위를 차지하는 산업이 많이 있습니다. 조선업, TV가전제품, 스마트폰, IT관련산업 등 많은 분야에서 1등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 한국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암울하고 슬픈 분야에서 압도적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자살률이 OECD국가중 1위라고 합니다. 인구 십만 명당 26명이 자살하면서 대한민국 자살률은 세계 최고입니다. 이 분야에서 2003년 1위로 올라선 이후 줄곧 1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일까요? 가족들이 있고 주변의 사람들이 있는데 왜 그들은 자신의 생명을 이렇게 쉽게 포기할까요? 자기는 그냥 인생 끝내면 아픔이나 슬픔이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할 지 모르겠지만 남은 가족과 친구, 친척, 동료들에게는 큰 아픔을 주고 세상을 암울하게 생각하며 힘들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덴데 남은 사람들에게 정신적 고통을 남겨두고 간다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은 자살은 사치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이며 가장 사치스럽고 가장 멍청하고 가장 큰 죄가 자살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힘들고 어려울 때 어떻게 힘든 상황과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십니까? 저와 여러분은 어느 순간 자신이 버려진 존재라고 느끼거나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될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땅의 창조주이시고 이 땅의 주권자, 이 세상의 경영자, 통치자되신 우리 하나님앞에서 우리는 절대 버려진 존재는 한 명도 없습니다. 버려진 존재도 없을 뿐 아니라 실패한 인생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가운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세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연합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뜻의 발견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들을 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행하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참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가 우리에게도 적용되어지고 우리 또한 바른 세례의 증거를 가지고 세례를 통해 변화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제대로 살아갈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 첫째는 하늘이 열렸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지난 주 말씀을 보면서 우리는 세례요한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은 ‘주의 길을 준비하는 것’, 즉 메시아가 오시기 전에 메시아의 행할 사역을 평탄케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길을 준비하는 과정”속에 오늘 본문 즉 예수님께서 세례받는 것도 포함이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은 요단강에서 세례사역을 감당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유다지역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이 사람들에게 회개를 선포할 때 죄를 자복하고 나오는 사람들에게 세례요한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세례’란 자신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고 이제 완전히 변화된 존재로 살아가겠다는 다짐하며 공적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음을 증명하는 예식입니다. 또한 세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십자가에서 함께 옛 사람이 완전히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래 이 ‘세례’라는 단어의 성경원어 헬라어는 ‘밥티조’라는 단어입니다. ‘물에 몸을 담그다’ ‘몸을 씻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침례교회등에서는 침례받는 사람의 몸을 물속에 완전히 담궜다가 다시 일어서게 합니다. 몸을 물속에 잠그면서 ‘나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표현하고 다시 일어서게 하면서 ‘이제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새 인생으로 부활했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침례교회나 순복음교회등의 교회에서는 이 형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침례예식을 하지만 대부분의 개혁신앙의 교회들, 특히 우리 장로교회는 이런 의미를 가르치기는 하지만 형식은 침례를 행하지 않습니다. 머리에 물을 뿌리는 형식으로 세례예식을 거행하며 주님의 보혈로 우리가 죄 씻음을 받게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세례예식에서의 고백을 통해 이제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무튼 세례든, 침례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내가 이제 예수믿고 죄사함받았다는 것을 고백하며 이제 세상에서는 죽고 주님안에서 새롭게 살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식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죄를 가지고 태어나고 죄인으로 살다가 죽을 존재이기에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그 세례 예식을 받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인생과는 전혀 다른 존재입니다. 그 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기에 세례라는 과정이 필요가 없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게 세례받기 위해 나오셨습니다. 그러자 세례요한은 극구 만류합니다.
마태복음 3장 14절 말씀입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세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구원인증, 세례인증을 해주시는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세례요한은 단지 세례예식을 대행하는 존재, 하나님의 쓰임을 받고 세례예식을 집례하는 존재가 세례요한입니다. 그런 세례요한에게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나오셨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세례를 받으러 오셨을까요? ‘세례’라는 것은 죄를 씻는다라는 의미가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있으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죄를 씻기 위한 세례를 받으러 나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세례를 받고 공생애를 시작하게 된 것을 선포하기 위해 세례요한에게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세례예식을 통해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이시려고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받기 위해 찾아오니 세례요한은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 오십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요한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죄를 씻음받고 오히려 주님을 찾아가 죄사함을 받아야할 것인데 주님께서 찾아오시니 깜짝 놀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런 세례요한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3장 1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하나님 나라 의를 위해 세례의 의미를 보이셨고 직접 세례를 받으시면서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 세례를 받으시는 예수님을 보게 됩니다. 세례를 베풀어 주셔야 할 분이 세례를 받으시면서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세례받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세례요한에게 자신에게 세례를 베풀라고 하셨습니다. 죄 없이 이 땅에 오신 유일무이하신 분이 우리 예수님이신데, 씻을 죄가 없이 이 땅에서 사신 유일한 분에 예수님이신데, 그 분이 죄 씻음의 표시인 세례를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면서 예수님의 공생애는 본격적으로 시작을 합니다. 그러기에 세례받고 물밖으로 나오신 예수님에게 하늘문이 열리는 광경이 보여졌습니다. 이것은 예수님만이 하늘에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하늘로 들어갈 수 있음을 세례를 통해 보여주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0장 7,8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요한복음 10장 1,2절도 보시겠습니다. 같이 읽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 문으로 들어가는 이는 양의 목자라”
예수님께서는 “나는 양의 문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양이 들어오고 나오며 예수님을 통해 먹을 것을 얻고 생명을 얻는게 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이 땅의 모든 인생은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 영원한 양식이 얻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 구원의 통로이신 것, 유일한 구원의 통로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세례받고 땅으로 올라오실 때에 하늘 문이 열렸다는 사실에서도 그 의미를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늘 문을 여시며 예수님이 바로 하늘문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임하시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는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그 믿음의 비결이 있는데 바로 그것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늘문이 열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늘문을 들어가게 되고 예수님께서 계신 그 곳이 바로 하늘나라라는 것을 오늘 본문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이 형 에서의 미움을 피해서 외삼촌 집으로 도망갔습니다. 도망가는 중 광야에서 야영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돌베게를 베고 잠들었는데 꿈을 꾸게 됩니다. 꿈에서 하늘 문이 열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늘 문이 열린 사이로 사닥다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그 사닥다리에서 오르락 내리락했습니다. 사닥다리 끝부분 하늘에서 하나님 음성이 들리는 것을 꿈에서 듣게 됩니다.
창세기 28장 13,14절입니다.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야곱은 이 음성을 듣고 꿈에서 일어나서 그 곳에 돌을 모아 기름을 붓고 이곳은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의 ‘벧엘’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집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베이트”와 하나님이라는 뜻의 히브리어 “엘”이 합쳐지면서 생긴 고유명사 “벧엘”이 이 때부터 생겨난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세례를 받아야 하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오늘 예수님께서는 직접 세례를 받으시면서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은 하늘문이신 예수님께서 열어주시고 그 하늘문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7장 55,56절에서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늘문이 열린 광경을 영적으로 체험하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속에 이전과는 다른 세상속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느끼며 내 생활속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받은 자에게 허락된 것은 하늘문이 열리고 하늘문을 통해 풍성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시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진짜 하늘문을 통과하는 것은 죽은 후에 저 천국에 들어갈 때이겠지만 이미 우리는 영적인 하늘문을 통과하고 영적인 하늘나라에서 살고 있어야 합니다. 저와 여러분 우리에게 하늘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을 믿을 때 이 땅에서도 하늘나라의 삶과 같은 영적 은혜충만을 느끼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 둘째는,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마태복음 3장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나오실 때 하늘이 열리는 것과 아울러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공생애의 사역을 하시면서 우리에게 허락된 것이 바로 성령의 임재, 성령의 충만,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역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령의 상징물로 오늘 본문에 포현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입니다.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순종적인 동물이 비둘기입니다. 특히 예전에는 이 비둘기가 세계 어느 곳이든 소식을 전하는 전령으로 쓰인 적이 있습니다. 비둘기 다리에 전통을 붙이고 전보문을 둘둘말아 그 전통에 넣고 날려 보내면 수 백Km, 수 천Km떨어진 곳에 정확하게 날아가서 소식을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비둘기는 소식을 전하는 존재였습니다. 비둘기는 평화의 소식을 정확히 전하는 존재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령님도 우리에게 평안을 전하며 은혜를 전달하시는 분입니다. 성령이 임하는 곳에 참 평안이 있고 성령이 임할 때 부드러운 역사와 기쁨의 역사가 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과격하던 사람도 주님의 성령을 받으면 비둘기같이 부드럽고 친절하게 됩니다. 사회와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 임하시면 그 사회는 온유하고 부드럽고 화평이 넘치게 됩니다. 성령받는 사람이 많은 사회는 그 사회가 온유함이 넘치고 부드럽고 화평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충만한 성도가 많은 교회는 은혜와 화평이 넘치고 사랑과 기쁨이 충만합니다. 교회가 천국 같고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교회가 성령으로 충만하지 못하면 늘 분쟁과 갈등이 끝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예수님 이름으로 모인 그 곳에는 분명 성령이 임하십니다. 예수님의 뜻을 기억하며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곳에는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은 어떤 물질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기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으로 함께 임재하시고 함께 일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은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임재하십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16,17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하나님께서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대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아니 그럼 “성령님은 신약시대 예수님 이후에 생겨난 존재입니까?”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성령님은 창조 때 성부, 성자, 성령께서 함께 창조사역을 하셨기에 신약시대에 생겨난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무슨 예수님께서 성령은 보내달라고 했다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으로 살펴볼 때 잘못된 거 이닙니까?라고 물어보실 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 승천이후 성령님이 이 땅에 오셨다라고 가르친다면 그것은 틀린 것 아닙니까?”라고도 물어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렇게 설명드리려고 합니다. 지인의 결혼식 날 어느 뷔페를 가서 식사했는데 너무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평일에 그 뷔페에서 식사하려고 찾아갔더니 열려 있지 않았습니다. 알고 봤더니 결혼식, 돌잔치, 고희연 등 특별한 날만 행사와 함께 오픈되는 뷔페였습니다. 한시적 뷔페라는 말이죠. 음식이 맛있었는데 평일에 식사할 수 없다니 그 뷔페가 상설뷔페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유명 관광지에 가서 시장에 가보았더니 그 시장에 진귀한 물건도 많고 지역특산물도 많아서 다음에 언제 기회되면 다시 와서 천천히 돌아보고 물건을 사야겠다 생각했습니다. 시간이 흘러 언제 생각이 나서 그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시장이 전부 문을 닫고 영업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물어봤더니 시장이 열렸을 때는 5일장 기간이라 열렸던 것이었고 다시 방문했을 때는 5일장 날짜가 아니라 모두 닫혀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상설시장이 아니었던 거죠. 정말 좋은 제품도 많고 특별한 물건이 많아 상설이었으면 하는 아쉬움을 남기고 돌아왔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의 성령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때, 특별한 사람에게 특별한 사역을 위해 잠시 임하셨던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성령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에게 임한 상태로 항상 사람속에서 존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 성령 사역에 대해 이제 우리 예수님께서 신약시대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성령 사역으로 성령 사역을 정립해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여 항상 내주하며 항상 우리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게 하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게 하고 하나님께서 위로하시고 평안을 주시는 것을 느끼게 하며 성령의 은혜속에서 평안이 넘치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이런 일을 위해 성령님을 허락하여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우리 예수님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고 성령이 우리를 감찰하고 성령이 우리의 심령을 만져주시도록 만드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지난 주 우리가 살펴본 말씀중에서 세례요한이 자신의 세례와 예수님의 세례의 차이점을 말해준 본문입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성령의 사역은 있을 수 없습니다. 많은 이단들이 성령시대를 주장하고 성령의 역사를 주장하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숨기는 것은 결코 바른 신학, 바른 신앙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예수님의 역사속에서 우리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를 보며 우리 또한 예수님을 통해 성령의 체험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에 감사하며 하나님안에서 성령충만한 인생을 살아가는 저와 여려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실 때 일어난 일 마지막 셋째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마태복음 3장 17절입니다.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세례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다가오셨습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자신을 찾아온 예수님은 자기자신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분이 아니라 오히려 세례요한 자신이 오신 예수님에게 세례를 받을 존재라는 것을 밝힙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베풀 것을 요청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요단강 세례터의 물안에서 세례를 마치고 땅으로 올라오는데 바로 그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임하고 하늘에서 음성이 들리는 것을 듣게 됩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라는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모두 이 음성을 들었을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듣고 어떤 사람들은 못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들었던 것을 우리는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세례요한은 하늘이 열리는 것, 성령이 비둘기처럼 하늘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이 세 가지 현상을 어떤 신학자들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사역을 형상화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한 자리에 성부, 성자, 성령의 임재가 한꺼번에 나타난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예수님은 사랑받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신 아들 예수님에 대해 아들이라는 확실한 표증으로 이 본문의 상황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상황을 통해 이제 아들 독생자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동일한 권세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마태복음 28장 18절에서 20절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세상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모든 권세를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권세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훈련시키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또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을 세례를 베풀 수 있는 자격도 허락하여 주셨습니다. 말씀을 가르쳐 말씀대로 지키며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예수님의 지상명령, 지극히 높으신 명령이라고 부릅니다.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은 분명 구분되지만 서로 하나로 연합되고 서로 교통하며 질서있게 존재하십니다.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하나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삼위이시지만 일체이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신비가 구약부터 있었고 신약에도 이어지지만 오늘 본문 예수님의 세례를 통해 이 삼위일체의 신비를 현상적으로 완전히 분명 하나이시라는 사실,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습니다. 또한 오늘 본문 예수님께서 세례받으실 때 임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 이제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갈라디아서 3장 26,27절입니다.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 또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저주의 심판 대상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나아가서 사랑받는 자녀가 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 우리 안에 아들을 모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참 세례를 받으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면서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은혜는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죄값을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하나님의 자녀된 자들이 성령과 불로 거듭나 참 변화된 인생을 살아가는 것, 진정 삶의 의미를 깨닫고 어떤 난간과 어려움도 하나님만 의지하며 담대하게 살아가도록 성령으로 인쳐주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되어 내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이 있으십니까? 그 자존감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게 살고 하나님의 딸이 그렇게 살아갑니까? 하나님의 아들인데, 하나님의 딸인데 왜 세상을 두려워하고 매일 걱정하고 염려하고 세상 분위기, 주변 사람들의 시선, 내 생활의 형편, 내 건강의 상태에 따른 감정기복 등으로 살아갑니까?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신으로 이젠 담대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바다를 우리가 지나가는 것은 정말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다. 인생에 어떤 거친 파도가 우리를 흔들는지 어떤 큰 태풍이 인생이라는 배를 흔들어 놓을지 알 수 없습니다. 어떤 분이 그래서 인생은 ‘고해’라고 했습니다. 힘들 고(苦) 바다 해 (海) 정말 힘든 바다생활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이 고해라는 인생바다를 항해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문을 여시고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분으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또한 성령의 임재를 체험하게 하며 성령충만하게 하셔서 모든 문제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내 딸이다”라고 말씀하시며 하나님의 유업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우리는 이제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앞에 하늘 문이 열리게 되었기에 하늘나라로 들어가는 길위에서 우리는 살아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우리가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며 무한한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 되었으니 이제 우리는 뭘 낙심하며 뭘 낙담하며, 뭘 좌절하며 살아갑니까? 두려움과 걱정을 떨쳐버리고 위대하신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감사하며 어떤 환경속에서도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하며 만족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며 은혜받은 인생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통해 받은 세례,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가 우리의 삶에서 보여지는 열매가 바로 그것입니다. 항상 은혜충만하고 항상 기쁨이 충만하고 항상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인생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세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 세례를 받은 사람의 모습이 항상 보여지는 인생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