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색채에 관해 관심이 많아서 이번 졸업 레포트를 다양한 색으로 본
스페인과 중남미 문화에 대해 여러가지 자료를 이용해 완성하였습니다.
비록 잘 쓴 레포트는 아니라도 여러분들이 제 글을 읽고 스페인과
중남미 문화에 대해 좀 더 다가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1. 서론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 할수록 분명해지는 것이 있다. 감성이 이성에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이 감성에 봉사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판단과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이성이 아니고 비이성적인 어떤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감성이라는 단어는 비이성적인 그 어떤 것을 총칭한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를 지향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비이성적인 존재이다. 이 전제에서 보자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비이성적인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고 인정할 때에만 이성적 존재가 될 가능성을 얻게 된다. 사회나 문화를 바라보는 인식의 깊이도 마찬가지이다. 눈에 쉽게 보이는 제도나 법률, 사회체제, 관습, 역사적 사실 같은 것들의 뒤에 숨어서 한 사회를 움직이는 비이성적 요인들을 이해할 수 있어야 사회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 수 있다.
문화적 원형이라는 것도 이런 비이성적 요인에 속할 것이다. 카를 구스타프 융(Carl Gustav Jung)은 오랜 역사적 경험이 누적되어 형성된 집단적 무의식을 ‘원형(archetype)’이라고 했다. 원형은 모든 이류가 공유하는 보편적인 것에서부터 특정 지역이나 문화권에서만 공유되는 것, 더 작게는 한 개인에게만 의미가 있는 매우 개인적인 원형에 이르기까지 여러 층위가 있다. 학자마다 원형을 다양하게 규정하고 있지만 문화의 시원(始原)에서 볼 수 있는 문화의 기본적인 구조라는 사실은 같다.
원형은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예컨대 혹자는, 세계인이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까닭은 축구 경기가 여우나 토끼와 같은 사냥감을 쫓아 무리 지어 쫓아다니던 모습을 원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원형들은 인간 무의식의 심연 속에 숨어 우리의 행동과 사유를 조종한다.
원형을 이해하는 일은 우리 삶 속에서 사소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심상하게 넘겼던 것들에 대한 질문에서부터 시작 될 수 있다.
예컨대 홍콩의 거리에는 왜 그렇게 붉은색이 많은가? 미국 대통령은 그렇지 않은데 왜 우리 대통령은 꼭 높은 단상에서만 연설을 할까? 왜 우리나라에서는 유럽의 성곽을 흉내낸 결혼식장을 지어야 장사가 될까?
이런 사소해 보이는 질문들에 답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 유래나 시원을 찾게 되고 결과적으로 한 사회를 움직이는 중요한 원형들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나는 원형들에서 이전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문화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여기에서 스페인, 중남미의 색이 문화와 어떤 연관을 맺어왔는지를 살펴 볼 것이다. 그들이 믿는 색의 기원과 그들이 추구하는 색에 대해 생각해 보고 다양한 문화를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2. 본론
(1) 불과 피의 색 빨강- 스페인 산 페르민 축제
San Fermin – 빰쁠로냐
왜 우리는 스페인이란 나라에 처음으로 드는 이미지는 빨강, 붉은 색일까? 그건 아마도 한때 태양이 지지 않은 나라였으며 아직도 정열과 환희, 기쁨이 있는 나라로 생각 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사회를 이루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축제’가 있다.
축제는 주로 종교적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데, 개인이나 공동체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날이나 기간에 행해지는 의식과 부수적인 행위들을 의미한다. 오늘날에는 종교적인 의미보다는 놀이나 여가의 개념과 연결된 변종 축제가 많다. 그래도 축제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벌어지는 ‘곳’과 그 ‘터’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 그리고 전통문화에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근대 이후 나타난 새로운 축제들도 해당 지역사회 공동체의 문화와 전통에 어떠한 방식으로든 관련을 맺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모든 축제들은 그것의 기원이나 유래에 직접적인 상관이 없이 국가나 지역사회를 결속시키는 순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축제는 집단의식을 표출하는 사건이며, 축제가 열리는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온전히 통합하는 무대이다. 그래서 오늘날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의 문화를 현미경적으로 해독하고자 할 때, 축제는 가장 효과적인 단서가 되기도 한다.
축제(Festival) 라는 말의 어원은 라틴어로 종교의식에 들어간다라는 뜻을 지닌 ‘페스투스(festus)’ 와, 일을 하지 않는다는 ‘페리에(feriae)’ 이다. 이 두 단어에서 축제란 ‘일상적인 일에서 벗어나 종교적 의식에 들어간다’ 는 축제의 기본적인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여기에서 종교적인 의식이라 함은 초월적이고 신성한 영역과의 만남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종교적인 의식의 이면을 보면, 방종과 일탈, 일상에서 용인되지 않는 열정이나 행동의 분출 등도 연상된다. 이렇듯 축제는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일종의 마나(mana) 의 표현이며, 신성한 범주의 것에 상응하는 것이기도 하면서, 세속적인 삶의 무표정한 반복이나 불확실성과 대조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세속적인 휴일의 기원도 종교적인 축제와 연관성이 있는데, 고대 로마에서는 신성한 축제가 있는 날엔 일상적인 활동을 멈추었다. 과거의 축제는 종교를 통해 사회 공동체를 유지하고, 그 지역의 문화적 정보를 전달하는 장치였다. 그래서 축제는 어느 문화권에서나 그들의 예술 속에 강한 상징으로 남아 있으며, 가령 그 사회가 사회문화적인 분열의 조짐을 보일 때에도 축제는 그 내부의 동질성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유효한 수단으로 작용하여 왔다.
본질적으로 축제는 신성한 시간의 개념에서 비롯된 축제와, 계절적 변화와 관련된 축제
대별 된다. 시간의 개념에서 비롯된 축제는 시간을 순환적으로 보는 종교나 문화권에서, 일종의 혼돈(chaos)에 대한 자연질서(cosmos)의 승리를 기념하는 특별한 기간에 벌여진다. 즉, 축제라는 모종의 의식을 통해 부분적으로나마 우주 속에서 자신의 위상을 확인 받고자 하는 것이다. 축제는 본래 성스러운 종교적 제의(祭儀)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그것에는 예술적 요소가 강하게 배어있다. 축제 속에는 모든 장르의 예술이 망라되어 있고, 미분화된 상태로 얽혀 있다. 그래서 축제는 ‘예술적인 제의’다. 우리 축제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고대 부족국가의 제천의례(祭天儀禮)만 보더라도 농공시필기(農功始畢期) 에 하늘에 제사를 지낸 후 사람들이 모여 음주가무를 즐겼다. 즉, 의례의 전반부는 종교적, 후반부는 예술적 동기를 갖는다. 무당이 벌이는 굿판도 기본적으로는 토착적인 종교의례의 장(場)이지만, 그 속에는 놀이판으로서의 성격이 복합되어 있다. 굿, 놀이, 풀이가 미분화되어 하나의 축제적 성격을 띠는 것이다.
태고의 사람들이 무언가에 색을 칠한 것은 아름답게 치장한다기보다 평범하지 않은 존재로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특히 그들이 무엇보다 두려워했던 죽음에 직면했을 때 그런 행위가 자주 행해졌다. 죽음을 상징하는 색은 검정이며, 이는 시체가 썩을 때 나타나는 색이다. 그에 반해 생명력과 활력을 상징하는 색은 빨강이다.
7월의 스페인에는 400년 이상의 전통을 가진 산 페르민 축제(San Fermin Carnival)가 열리는데, 이 축제는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소설 ‘태양은 또다시 떠오른다’ 에 나와 더욱 유명해졌다. 매년 7월 6일 정오 정각에 빰쁠로냐(Pamplona) 시청 앞 광장에는 수많은 군중이 모인다. 시청 청사 발코니에서 한 시청직원이 “산 페르민 만세(Viva San Fermin)!”를 외치고 거대한 폭죽에 불을 붙이면, 광장에 운집한 사람들은 일제히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제의 시작을 알린다. 산 페르민 축제 일정 중 가장 유명한 행사는 축제기간 중 매일 아침 8시마다 반복되는 ‘거리투우’ 또는 ‘ 소몰이(los encierros)’ 이다. 인간의 거리를 소에게 내어주는 날이다. 오후에 투우장에 들어설 10여 마리의 소들을 거리에 풀어놓고 하얀색 의상에 빨간색 목도리와 허리띠를 두른 수많은 젊은이들이 성난 소와 함께 거리를 질주하며 투우장으로 소를 유인해 간다. 소 앞에서 달리다 넘어져 부상을 당하거나, 소의 뿔에 받쳐 죽기까지 하는 사고가 가끔 일어나는데도 젊은이들은 자신의 용기를 실험하며, 현기(眩氣)를 즐기고 있다. 공포와 격정의 시간이 지나 이 거리투우에 참여한 젊은이들과 소떼가 투우장에 도착하면 미리부터 와 있던 플라맹고 무희들과 관중들이 올레(Ole)! 를 연발하며 이들을 환영한다. 이렇듯 축제에는 살아 있는 것이나 사물이 있어야 할 제자자리를 떠나게 함으로써 참여자의 정신을 해방하고 의식을 전도를 꾀한다.
축제의 본질은 인간의 의식을 지상에서 가장 즐거운 상태로 끌어올리는 데 있다. 축제가 축제이기 위해서는 일상으로부터의 일탈, 도피, 해방, 혼돈, 전도, 전복, 풍자, 은유, 모의, 환상, 열광, 열림, 홀림, 신들림, 생명력 등의 개념에 기반하거나, 그것 자체를 목표로 한다. 축제는 ‘인간의 자연화’ 실현을 이상으로 하는바, 기성의 고급문화가 구분해온 세련되고 고상한 색의 사용을 거부하며, 되려 완벽하고 불변적인 것에 대해 적개심을 갖는다. 그래서 대부분 축제의 색이 원색인 동시에, 일상의 엄숙함과 음울한 진지함에서 떠난 다채의 적용을 공통된 특징으로 한다. 그것은 색채를 통해 전도된 가치관을 표출하는 것이요, 공식화된 세계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 그리고 모종의 홀림 현상을 드러내는 것이다.
따라서 축제에서 붉은 색은 나름의 생명력으로 스페인의 축제에 없어서는 안 되는 색인 것이다.
(2) 소생의 색과 죽음의 색 – 마야인의 우주상
<Codex Fejervary > - 중심에는 불의 신 시우테쿠틀리가 살고 사방으로 에너지를 분출한다
‘생명의 나무’는 세계의 중심에 서 있다. 즉 마야 사람들이 생활하는 대지의 중심 색은 무성한 나무의 녹색인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녹색과 파랑을 표현하는 문자가 같기 때문에 이를 구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빨강이라 여겼다. 이는 떠오르는 태양의 색이며 태양이 다시 부활하는 생명의 색 그리고 소생의 색이었다. 또 산 제물의 붉은 피는 세계가 변함없이 운행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였다. 이에 반해 태양이 지는 서쪽은, 당시 사람들이 태양이 지하계 시바르바로 들어가는 암흑 세계로 여겼기 때문에 검정이었다. 즉 검정은 죽음과 죽음으로 연결되는 전쟁을 상징하는 색이었다.
북반구 사람들은 북쪽을 태양 빛이 닿지 않는 방향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북구라 해도 과테말라 부근쯤 되면 지리적인 감각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마야 문명에서 북쪽은 천정에 달한 태양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생명력이 넘치기 때문에 하양의 이미지를 갖는다. 하양은 천정에서 빛나는 태양 빛의 색인 것이다. 고대 문명 중에서도 가장 정확하게 태양의 주기를 이끌어내는 등 천문 관측에 뛰어났던 고대 마야의 사람들은 천구가 하늘의 북극을 중심으로 회전하기 때문에 북쪽을 방위의 기준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 여겨 이를 왕위와도 연결 지어 생각했다. 또 이들은 하양이 청결한 이미지를 지녔기 때문에 북쪽을 나타내는 색으로 어울린다고 판단한 듯하다. 낮 동안 태양이 남쪽에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마야 사람들은 남쪽을, 지하계에 들어간 태양이 부활하기 위해 갖는 어려움과 싸우는 방위로 여겼다. 그 남쪽의 색으로는 노랑(황색)을 들 수 있다. 옥수수가 익기 시작함을 나타내는 이삭의 색이 노랑인 것처럼 그 색을 탄생 전의 상태를 나타내는 색으로 여기기도 했다. 마야인들이 사는 세계의 중심인 녹색과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빨강, 검정, 노랑, 하양의 다섯 색은 그들의 생활 구석구석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의복으로, 각 집단마다 빨강, 하양, 노랑, 검정, 녹색의 선명한 오색 실을 기본으로 예전부터 전해오는 무늬의 천을 짠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선명하고 화려한 의상을 여성의 외출복으로 자주 볼 수 있지만, 고대 마야 시대에 그것은 각 도시의 상류계급 남성이 입는 의상이었으며 그 무늬로 소속된 도시를 나타내기도 했다.
마야인들의 주식이었던 옥수수에서도 그 색들을 볼 수 있었다. 사실 옥수수는 중앙아메리카가 원산지로, 적어도 기원전 3000년경에 이미 재배되고 있었다. 우리는 옥수수가 노란색을 띤다고 생각하지만, 중앙아메리카에는 세이바 나무의 녹색을 빼고 검정, 하양, 빨강, 노란색 옥수수가 다 있다. 즉 동서남북의 색 말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네 방위의 색이 옥수수의 네 가지 색에서 온 것은 아닌지 추축하기도 한다.
-아즈텍 신화와 네 가지 색
<Quetzalcoatl> - 아즈텍 사람들은 그가 서쪽을 상징하는 하얀색을 띠었다고 생각했다.
9~10세기 동안 마야 문명이 쇠퇴한 후, 12~13세기에 멕시코 고원을 중심으로 대서양 연안, 태평양 연안에서 발생한 아스텍 문명은 1521년 스페인에게 멸망할 때까지 번성했다. 또한 수도 테노치티틀란에는 20만 혹은 30만 명의 사람들이 살았으며, 거대란 피라미드와 신전이 늘어서 있었다. 마야 문명의 영향이 여전하기는 했지만, 아즈텍 문명으로 넘어가면서 색에 대한 관념은 바뀌어 있었다. 아즈텍의 창세 신화에 따르면, 최초의 신 토나카테쿠틀리 에게서 네 명의 형제 신이 탄생했고, 그들은 이 세상의 탄생과 관련되었다. 이 네 신 중 가장 먼저 ‘토라토라우키 테스카틀리포카’ 라는 붉은 육체의 신이 태어났다. 이 빨강은 동쪽을 상징하는 색으로 ‘빛의 방위, 태양의 집이 있는 장소의 정면’을 의미했다. 다음으로 ‘야야우키 테스카틀리포카’ 가 태어났다. 이 신은 네 형제 중에서도 가장 악한 신이며 그의 몸은 검정색이었다. 검정은 북쪽을 상징하는 색으로 ‘죽은 자 나라의 방위, 황도의 오른편’을 의미한다. 북쪽이 오른쪽이 되는 이유는, 당시 사람들이 동쪽을 최고의 빙위로 여겨 그 방향을 등에 지고 세계를 봤기 때문이다. 세번째로 태어난 신은 ‘케트살코아틀’ 로, 그 색은 하양이다. 하양은 서쪽을 상징하며, ‘여자들의 방위, 태양의 집이 있는 장소’ 라는 의미를 지닌다. 마지막으로 ‘우이칠로포크틀리’가 태어났으며, 파랑색을 띤다. 파랑은 남쪽의 상징으로 ‘가시의 방위, 황도의 왼편’을 나타냈다.
아스텍 왕국이 번성했던 시대의 신화에서는 우이칠로포크틀리가 아스텍의 주신이었다. 그는 싸움의 신이었으며, 사람들과 이 신과 관계된 의식에서 인간을 희생양으로 삼고 심장을 바치지 않으면 태양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믿었다.
우이칠로포크틀리의 이 잔혹한 의식에 반대한 신이 그의 형 케트살코아틀이다. 우이칠로포크틀리 이전에는 케트살코아틀이 멕시코 고원을 다스렸는데 우이칠로포크틀리에게 패해 추방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케아살코아틀이 아스텍력으로 ‘하나의 갈대의 해’ 에 귀환하여 또다시 아스텍을 다스릴 것이라 믿었다.
테노치티틀란에 수도가 들어선 뒤 ‘하나의 갈대의 해’를 두번이나 맞았지만 케트살코아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하나의 갈대의 해’ 가 되기 10년쯤 전부터 혜성이 보이고 이상 기후가 나타나자 아스텍 전역에 케트살코아틀이 돌아온다는 소문이 퍼졌다.
당시 왕이었던 몬테수마 2세는 이 전설을 두려워했다. 신기하게도 우연에 우연이 겹쳐 아스텍의 멸망이 현실이 되었다. 세 번째 ‘하나의 갈대의 해’는 1519년이었다. 스페인 사람들이 멕시코 연안에 도착한 날은 1517년 3월 1일었지만, 정보 수집 후 1519년이 되어서야 스페인의 정복자 코르테스가 본격적으로 상륙했던 것이다. 아스텍인도 이미 그 전해에 이미 연안을 경비하던 병사가 스페인 사람들과 접촉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백인의 도래를 예감하고 있었다. 아스텍인이 스페인인의 도래에 대해 하얀 육체를 지녔다고 믿었던 케트살코아틀이 돌아온 것으로 착각한 상황도 그리 이상하지 않다.
‘하나의 갈대의 해’ 에 목테수마 2세는 코르테스가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심부름을 보내 그때까지 우이칠로포크틀리를 대한 것과 마찬가지로 사람을 희생으로 삼은 공양물을 바쳐 코르테스가 케트살코아틀인지 아닌지 시험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관습이 생소했던 스페인인은 케트살코아틀과 마찬가지로 피의 공양물을 강하게 거부했다. 이 보고를 들은 몬테수마 2세는 케트살코아틀의 전설을 운명으로 받아들여 저항하지 않고 코르테스를 수도로 들여놓았다고 한다. 아스텍 문명은 그 후 2년 뒤, 1521년에 멸망했다. 결국 아스텍인에게 하양은 멸망을 결정하는 운명의 색이었던 것이다.
(3)슬픔, 차가운 밤, 고독의 파란색 – 피카소의 변화하는 팔레트
<비극>은 피카소가 1903년의 작품으로 그의 청색 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스페인의 천재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는 대단히 오랜 활동 기간 동안 끊임없이 새로운 양식과 주제를 탐구했다. 그 중에서도 색채는 가장 유용한 도구였다. 그의 색채는 ‘청색 시대’ 청색을 주조로 한 슬픈 분위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차가운 파란색에서부터 만년의 유쾌하고 야한 색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걸쳐 있다. 입체주의 단계에는 전통적으로 지적인 측면과 연관된 선과 형태에 집착했고 감성 측면과 연관된 색채는 사실상 배제했다. 피카소는 1901년 20세의 나이에 친구의 자살에 대한 병적인 반응으로 ‘청색’ 회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카사제마스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청색 그림을 시작했다.” 게다가 피카소는 석유 등의 조용한 빛 속에서 밤에 작업하기를 좋아했다. 초기에 파라핀 연료를 살 돈도 없을 때는 착색제를 대신 쓰기도 했다. 초기의 청색 회화는 한 손에 붓을 들고 다른 손에는 촛불을 든 채 그렸다. 이 약한 불빛은 그가 사용하는 인디고 블루를 더 강렬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는 색채의 상징을 잘 알고 있었다. 1890년대 상징주의 화가들은 청색의 ‘우울함’을 특히 좋아했다. 피카소에게 청색은 슬픔, 차가운 밤, 고독을 나타내는 색채였는데 당시 그의 처지와 무관하지 않다. 1903년 겨울 바르셀로나에서 그린 <비극>은 추위 속에서 청색 옷을 입고 파란 물가에 맨발로 서 있는 가족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가난한 삶은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청색이 주조를 이루며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 표현했던 시기인 1901-1904는 피카소의 작품 속에 큰 영향을 미친다. 당시 세기말의 영향으로 피카소는 이 시기에 페시미즘적이고 고뇌주의적인 분위기에 휩싸여서 그의 그림의 주조가 짙은 푸른색으로 나타난다.
그는 모든 것을 푸르게 느끼면서 밤을 지새우는 생활을 계속하며 이 시기 그가 사물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서의 청색, 게다가 그가 입고 다녔던 옷들의 색깔까지도 청색이었으며, 그는 청색이야말로 ‘모든 색들을 다 담고 있는 색깔’이라고 말할 정도 였다. 이 시기 젊고 감수성이 예민하였던 피카소는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세기말의 암울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는데, 이로서 그의 작품이 전체적으로 청색이 감도는 어둡고 침울하고 내성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4) 스페인을 사로잡은 아스텍의 자주색
멕시코시티 근처의 건물 Tepantitla에 그려진 벽화 – 아스텍인들의 이상적 천국, 틀랄로칸이 아스텍 특유의 자주색으로 표현되어 있다.
지중해의 자주색이 사라진 뒤 2, 3세기 후, 새로운 색을 발견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대서양 시대에 발을 내딛은 스페인인이다.
1479년,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통합해 스페인 왕국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1492년, 이베리아 반도 최후의 이슬람 세력이 남아 있던 그라나다를 제압해 레콩키스타가 끝난다. 그 기세에 힘입어 스페인 왕국의 이사벨 여왕은 해외 진출을 꾀했는데, 그 시작은 동양으로 가는 서쪽 항로를 찾으려 했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 대한 지원이었다.
콜럼버스는 카나리아 제도를 거쳐 대서양의 서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콜럼버스가 끝까지 동양의 일부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서인도 제도, 즉 아메리카를 발견했던 것이다. 콜럼버스의 발견에 자극을 받아 많은 탐험가들이 대서양을 횡단하기 시작하면서 16세기 전반에는 탐험이 정복으로 변해갔다. 당시 멕시코 고원에는 아스텍 왕국, 안데스 고원에는 잉카 제국이 번성하고 있었는데, 스페인은 그들을 철저하게 멸망시켰다.
황금 외에도 아스텍과 잉카의 문화를 파괴한 스페인 사람들을 사로잡은 것이 있었다. 바로 아스텍과 잉카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화려한 붉은 자주색의 염색 문화였다.
당시 멕시코 사람들은 와하카 지방에서 보내오는 고둥의 자주색과는 별도로 부채 선인장에 붙은 기생충을 긁어모은 뒤 그 붉은 자주색의 분비물을 모아 염료로 삼았다. 이 벌레는 코치닐 패각충 이라 불리며, 남아메리카에서는 아직도 그 벌레를 이용한 염색이 빈번히 행해지고 있다.
부채 선인장 잎에 패각충이 기생하면, 그 부분은 새하얗게 가루를 뿌린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공처럼 충분히 성장한 벌레를 긁어모아 건조시킨 다음 색소를 추출하는 것이다. 18세기에 영국, 프랑스가 이 염료의 제조법을 알 때까지, 스페인은 이 붉은 자주색의 염료를 기밀 사항으로 은밀히 숨겨 커다란 이익을 얻었다.
오늘날 여러 나라에서 합성 착색료의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는 추세여서 이 벌레의 분비액은 의복뿐 아니라 화장품, 식품, 약품의 착색료로도 주목받고 있다.
3. 결론
‘빛 색(色)’ 이라는 한자는 웅크리고 있는 여성을 남성이 덮고 있는 형상이다. 즉 남녀가 화합하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며, 성적인 것을 나타낼 때도 사용한다. 또한 ‘색’ 이라는 말이 의미하는 범위가 점차 넓어지면서, ‘얼굴빛이 붉으락푸르락하다’ 는 표현처럼 사람의 내면이 얼굴에 드러난 상태뿐만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다양한 색채까지 그 속에 포함되었다.
상형문자를 사용했던 고대 이집트에서 색을 나타내는 단어도 광물과 관련된 문자의 조합으로 되어 있다. 광물 안료를 도료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의 성격을 ‘색’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기도 했는데, 흥미롭게도 그 단어는 머리타락에 해당하는 문자와 관련된다. 인간의 머리카락과 성격을 연결 지어 생각했던 것 일까.
일상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영어 ‘컬러(color)’ 라는 단어의 어원인 라틴어는 ‘덮어서 감추는 것’ 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는 무언가의 덮개, 무언가의 바깥, 색을 칠하며 무언가를 감추는 안료 등을 가리킨다. 오늘날에는 재료로 쓰인 암석이 그대로 드러난 고대 이집트의 유적도, 나무에 칠한 물감이 벗겨져버린 일본의 오래된 절도, 당시에는 일정한 규칙에 따라 채색되었다. 즉 돌이나 나무가 특정한 색으로 덮임으로써 단순한 재료 차원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인간 또한 자신에게 색을 칠하여 다른 존재로 변화한다. 그것이 바로 ‘화장化粧’ 이다.
색에는 주술적인 힘이 있어서 시각 효과를 통해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으로 이용되어 왔으며, 사람들은 각양각색으로 물든 옷을 몸에 걸치는 것만으로도 그 사람에게 특별한 성질이 더해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신분이 높음을 나타내는 색도 있고 차별하는 색도 있는 것이다.
색은 관념적인 우주와 세계를 상징하기도 했다. 태양의 운행으로 나뉜 동서남북의 네 방향은 민족이나 종교마다 다양한 색으로 채색 되었다. 내세, 천국, 극락, 지옥, 저승도 다양한 이미지를 가지며 각각 특징 있는 색으로 그려졌다. 사람의 생(生)도 다양한 색으로 표현되는데, 일본에서는 빨강이 쓰인 ‘젖먹이’, 녹색이 쓰인 ‘영아’, ‘청년(靑年)’, ‘풋내기’ 같은 색이 들어간 단어들이 흔히 쓰인다.
아무리 다른 문화권이라도 본능적, 심리적으로 빨강이 피와 연결되고 위험을 예지한다거나, 검정이 암흑과 연결되고 죽음이나 공포 등의 어두운 이미지를 갖는 점 등은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위험을 나타내는 빨강이 중국에서는 경사스러운 일에 쓰이기도 하고 일본에서는 신사의 기둥 문을 칠하는 데 이용되는 일도 있다.
앞에서 살펴본 스페인과 중남미의 색들은 그들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그 나라 안에서 여러 축제나 문화의 요소로 다양성과 공존을 볼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스페인과 중남미를 더욱 잘 알 수 있었으면 한다. 나라들 마다 각각 가지는 독특한 색처럼 우리나라도 더욱 자기 정체성을 갖는 그런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