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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8장
나귀 새끼 타고 오시는 왕
말씀 / 마가복음 11:1-25
요절 / 마갑복음 11:9,10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말씀에는 왕으로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나옵니다. 그러나 백성들이 기대하던 바와는 전혀 다른 왕입니다.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 예수님은 어떤 왕이십니까?
예수님과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고 감람산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 중 두 사람을 보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은 묶여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약을 해둔 것도 아니고, 아는 사람의 나귀도 아닌데 묶어둔 것을 풀어온다면 도둑질로 오해받기 딱 좋았습니다. 게다가 나귀를 빌리려면 오기 전, 가버나움에서부터 미리 빌렸어야 먼 길을 걸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되는 것이지, 예루살렘에 거의 다 와서 거리가 얼마 남지 않는 지점에, 게다가 오르막길도 아닌 내리막길로 접어드는 위치에서 나귀를 빌리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행동이었습니다. 승합차 렌트비, 택시비가 아까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3절의 “왜 이렇게 하느냐?”라는 질문에는 ‘주인도 아니면서 왜 나귀를 풀어 가느냐?’라는 질문과 함께 ‘거의 다 와서 왜 나귀를 빌리느냐?’라는 질문도 담겨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명을 받은 제자들의 마음속 고민입니다.
그런데 4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건너편 마을로 가보니 나귀 새끼가 ‘문 앞 거리에’ 매여 있었습니다. 자동차로 말하자면, 집 안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차를 끌고 가기 좋게 집의 대문 앞에 내어 놓은 모양새였습니다.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나귀를 풀 때 거기 서 있던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나귀 새끼를 풀어 무엇 하려느냐? 나귀 새끼를 어디에 쓰시려고 그래요?” ‘왜 남의 것을 풀어 가느냐? 너희 도둑놈들 아니냐?’ 이것을 따지는 질문이 아니라 나귀를 풀어가서 어디에 쓰려는지, 용도를 궁금해하는 질문입니다. 그때 제자들이 어떻게 말합니까? 6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예수께서 이르신 대로 말한대 이에 허락하는지라.” 제자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말했고, 그러자 사람들이 허락했습니다.
두 제자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가감 없이 전달했습니다. 그랬더니 순탄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그 동안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 버림받음, 죽음, 부활 등 이런 이야기를 좀처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랬던 제자들이 오랜만에 예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했고 형통을 경험했습니다. 제자들은 이를 통해 예수님이 나귀의 진정한 주인일 뿐 아니라 제자인 자신들의 참 주인이라는 믿음이 새로워졌을 것입니다. 지난 10장 말씀에서 길가에 있던 맹인 거지 바디매오가 예수님을 통해 눈을 뜨게 된 후, 겉옷을 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님을 따라나섰던 것처럼 제자들도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나귀 등에 얹었습니다. 예수님이 타시도록 말입니다. 그러자 그 위에 예수님이 앉으셨습니다. 이는 주인에 대한 공경, 또는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는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주인으로, 왕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 또한 제자들을 따라서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펼치고, 어떤 이들은 들에서 벤 나뭇가지와 잎사귀들을 펼쳤습니다.
우리는 이 나귀 스토리를 통해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주인이고, 진정한 왕이며, 이 세상의 주권자임을 배우게 됩니다. 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렇게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그 동안 섬기는 위치에 서셨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섬기는 위치에 서실 것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섬기기 위해 십자가를 매고 죽음의 길을 가실 것입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상징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만유의 주요, 만물의 주권자이심을 밝히시는 것입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만물이 다 주님의 것이고 예수님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쓰기 원하시면 다 쓰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을 때 예수님이 세상 만물의 주권자임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 3절은 말씀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수님은 세상 만물, 모든 것들의 주인, 주권자가 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의 인생, 또 인간관계에 속한 부모나 형제, 자녀, 친구, 또 물질, 재산, 더 나아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순종하며 예수님의 주권 아래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결정적인 순간에 우리 인생과 삶에 대해서도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주님이 우리의 인생을 쓰기를 원하신다.” 우리는 주님이 나를 쓰겠다고 하실 때 얼른 생각하면 부담스러울 수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내 것이고, 내 야망과 욕심을 따라 내 맘대로 살고 싶은데, 이런 생각이 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주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영접하는 자들을 귀하게 쓰시고 그들을 통해 주님의 구속 역사를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캠프에서 특송을 섬기면서 ‘예수의 길’을 불렀습니다. 우리는 우리 삶을 주님이 주관하신다는 믿음 가운데서, 주님 주신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저 하늘의 소망을 붙잡고, 그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오직 주님이 인도하시는 길을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주의 것임을 고백하며, 주님이 우리를 마음껏 쓰시도록 온전히 내어드리는 그런 신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들의 주권을 가지신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데 원하시면 무엇이든 타실 수 있는데 하필이면 왜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일까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우스꽝스럽습니다. 그런데 왜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예수님에 대해 스가랴 선지자를 통해 이런 예언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스가랴9:9).” 예수님은 자신의 원하는 모든 것들을 하실 수 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기 위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그가 나귀 새끼를 타도록 하신 것입니까? 나귀 새끼에는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알면, 예수님이 어떤 사역을 앞으로 하실 것이고, 예수님이 어떤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귀 새끼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겸손과 평화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새끼’라는 말에서 겸손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또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전쟁의 상징적, 중추적 짐승인 ‘말’을 가지지 말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은 노새나 나귀를 탔습니다. 다윗도 노새를 탔고, 솔로몬도 왕위에 오를 때에 다윗 왕의 노새에 앉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에게 나귀 새끼를 타게 하심으로 예수님이 진정한 겸손과 평화의 왕임을 나타내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섬기시기 위해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자기를 십자가에 내어주시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진정한 화평을 가져다 주셨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은 우리를 겸손과 평화로 다스려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왕이 되십니다. 아멘!
9,10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를 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제자들과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찬양했습니다. 예수님이 ‘만유의 주인’이라는 이름, 타이틀로 오신다는 것, 예수님으로 인하여 조상 다윗의 통치가 다시 한번 임하고 있다는 것을 찬양했습니다. 또 여기 ‘호산나’는 ‘지금 우리를 구원해 주소서’라는 의미입니다. 사사 시대 이방 민족들의 침략으로 늘 고통받던 이스라엘을 다윗 왕이 일어나 구원하고 가장 번영된 나라로 세웠던 것처럼, 이방 민족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여 놀랍게 번영시켜달라는 간청입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간절한 구원의 열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들이 소망하는 바와는 차이가 있습니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이렇게 무리들이 외친 것을 볼 때, 그들은 예수님이 다윗 왕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독립시키고, 부강하고 잘먹고 잘살며, 정의로운 이상 국가를 건설해 주기를 소망한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도자들에 대해 국민들 눈높이가 상당히 높아졌습니다. 당면한 경제문제, 취직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대통령. 주택, 육아 등을 해결해주며, 평생 직장을 보장해주고, 노후를 책임져줄 수 있는 지도자. 호산나!를 외치며 이런 지도자, 이런 대통령이 나와서 우리에게 안정과 평안을 주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신학자 칼 바르트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는 것 같지만 실상은 우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상당수가 자신들의 소원과 바램을 성취해 줄 수 있는 자기 만족을 충족시켜줄 신, 즉 우상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지도자, 어떤 왕이 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을까요?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산나!를 연발하며 그토록 갈망했던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 메시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영적 메시야로 오셨습니다. 단지 삶의 외적인 면만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과 생각까지 다스리시는 왕, 눈에 보이는 적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원수 마귀 사탄을 물리치는 왕, 단지 복지 문제만이 아니라 죄와 죽음 문제, 영생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왕. 그런 왕 말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주의 이름, 즉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요,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왕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이 이 세상의 진정한 왕이 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어주고, 나의 요구를 들어주고, 우리의 구미에 맞는 왕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시기 위해 오신 왕입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 참된 왕은 예수님뿐이십니다. 우리의 왕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와 평화와 행복을 가져다주십니다. 우리 모두 왕 되신 주께 감사하고 우리의 왕으로 모셔들이고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여름 캠프를 통해 우리 인생은 끊임없는 목마름의 연속임을 배웠습니다. 끊임없이 새로운 것, 다른 것들을 통해 충족시키고자 합니다. 이런 모습이 부정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이런 모습은 사실 진정으로 채워주고 구원해 줄 왕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을 만날 때 우리의 목마름은 해결될 것입니다. 그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누가 우리를 위해 자신의 소중한 목숨을 내어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고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누가 우리에게 인생의 방향을 제시해 주고 희망을 줄 수 있습니까? 비록 초라해보이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지라도,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구원과 생명을 주시는 진정한 왕이 되십니다. 우리의 진정한 왕, 겸손과 평화의 왕, 예수님을 마음으로부터 ‘호산나 - 지금 우리를 구원해주소서’ 찬양하며 열렬히 주님을 환영하고 심령에 모셔 들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왕이신 예수님과 함께 할 때 우리 심령에 평강과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아멘!
11,12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도착해 성전에 들어가셨고 성전의 모든 것들을 둘러보셨습니다. 이튿날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나왔는데, 예수님이 배가 고프셨습니다. 그러자 저 멀리 있는 잎을 가진 무화과나무를 보셨는데, 거기서 무엇이라도 먹을 것을 좀 발견할까 싶어 다가섰는데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대개 이스라엘에서 무화과나무는 3월이면 좀 시지만 먹을 수 있는 설익은 첫 번째 열매가 열리고, 4월이면 크고 무성한 잎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 첫 번째 열매들은 대부분 떨어지고 또 다른 열매들이 맺히게 되어 때가 되면 맛좋은 무화과들을 3차례 정도 수확하게 됩니다. 당시 때는 유월절을 일주일 앞두고 있는 4월 초순이기 때문에 맛좋은 무화과들을 수확할 때는 아직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시고 작은 첫 번째 열매라도 맺혀 있어야 마땅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열매를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열매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저주하셨습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14).” 이 사건은 예수님의 유일한 파괴적 기적입니다. 예수님이 단지 시장하신데 열매가 없자 감정적으로 화가 나서 저주하셨을까요? 아닙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한 국가나 민족의 운명에 대한 하나님의 예언을 이처럼 특이한 사건을 통해 비유적으로 선포하곤 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사건도 예언적 성격을 띤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예언적 성격을 띠고 있을까요? 15,16절을 보십시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고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는 성전 안에서 팔고 사고 하는 자들을 내쫓고, 돈 바꾸는 환전상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또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 다니는 자들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하셨을까요? 17절을 읽겠습니다.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하지 아니하였으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성전은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하는데, 성전의 본질적인 기능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자들로 인해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당시 성전에서 장사하면 그 수익이 엄청났는데, 엄청난 수익의 대부분이 대제사장들에게로 돌아갔습니다. 서기관들에게도 꽤 많은 수익이 돌아갔으리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에 대해 책망하니 무리들이 그 용기와 단호함에 놀랐습니다. 뭔가 새일을 행하실 분, ‘호산나 – 지금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쳐야 마땅한 그분이 왔다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는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성전의 수익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지도자로서의 지위까지 예수님이 통째로 흔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리들의 반응이 너무 열렬했기 때문에 ‘죽여야 한다’는 결론이 났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의논합니다.
이튿날 이른 아침,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다시 성전으로 가는 길이었는데,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마른 것을 보았습니다. 화병에 꽂아놓은 꽃도 하루 만에 마르지는 않습니다. 화병에 꽂지 않고, 물주머니 없이 꽃다발 그대로 두어도 단 하루 만에 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땅에 뿌리가 굳게 박혀 있는 나무가 말랐습니다. 대개 가지부터 마르기 시작하는데 이 무화과나무는 뿌리까지 말라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생각이 났습니다.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저주하신 무화과나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무엇에 대한 예고편일까요? 전통적으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는 진정한 예배가 없고 형식적인 예배와 무의미한 제사의식, 장사하는 이권으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을 말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겉으로는 당대 히브리 건축의 금자탑이라 할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겉은 화려했지만 내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부패했습니다. 수많은 뇌물과 로비자금을 받아먹었습니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유대교와 성전의 기능을 잃어버린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 심판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부패할 대로 부패한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철저한 심판입니다.
베드로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예수님의 권능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22).”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믿음을 가지라.” 제자들은 스스로 기대하고 있는 바가 있고 그것을 믿고 싶어 합니다. 그렇게 될 것을 소망하고 믿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기대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렇게 이루어 가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룰 수 있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의 바램, 자기들의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의 뜻’을 품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이 다 이루리라는 그런 믿음입니다. 이것은 또한 예수님의 믿음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하나님의 믿음, 예수님의 믿음, 하나님의 비전, 예수님의 비전을 함께 공유하고 함께 이루어 나갈 예수님의 계승자들입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 하나님이 가지신 믿음, 예수님이 가진 믿음은 과연 무엇일까요? 23-25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 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이 가진 믿음, 예수님이 가진 믿음은 ‘강도의 소굴’이 되어버린 성전이 회복되어 다시금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요?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성전산이 통째로 뽑혀 바로 앞에 내다보이는 사해 바다에 던져져 심판받고, 죽었던 그 바다가 살아나는 일이 일어나야 가능합니다. 이것이 에스겔 선지자에게 하나님이 말씀하셨던 성전의 회복과 이스라엘의 회복, 만민의 회복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죽으시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써만 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이루실 일들, 즉 이것이 하나님의 믿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새끼 나귀의 주인이시고, 만유의 주권자이신 하나님이 이루실 일이고, 예수님이 새 성전이 되셔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하나님과 교제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의 기도를 통해 이루실 일이고, 제자들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이루어가실 일들입니다. 성전의 진정한 회복, 만민의 회복과 구원, 이런 일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믿음과 뜻 안에서 이루어져 갑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가지신 믿음과 비전과 뜻을 공유하고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함께 할 때 하나님은 그대로 이루어 나가실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오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왕이십니다. 겸손과 평화의 왕으로 우리를 다스려 주십니다. 하나님의 믿음, 하나님의 비전, 하나님의 뜻은 예수님을 새 성전 삼으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과 기도, 교제하는 은혜를 누리도록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만민이 하나님을 경험하고 교제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민이 기도하는 집으로 회복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왕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뜻 두신 목적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의 믿음을 따라 우리를 호산나! 구원해주시고 회복시켜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참 성전되시는 예수님, 십자가 용서 기도의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풍성하게 경험하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며,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우리의 삶과 신앙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