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봉호 (20) 예배당은 검소하게… 한국교회 개혁 선도한 서울영동교회
(한창 개발 중이던 서울 영동 지역에 지식인들 위한 교회 개척 설교 맡아
기성교회에선 하기 힘든 개혁 시도)
손봉호 교수가 1976년 김경래 장로, 이재억 박사 등과 함께 창립한 서울영동교회 현재 예배당 전경.
경향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하신 김경래 장로님이 1976년 초에 만나자고 하셨다.
한창 개발 중이었던 서울 영동지역에 지식인들을 위한 교회를 개척하려는데
신학을 했고 사례비를 받지 않아도 되니 설교를 좀 맡아 달라 하셨다.
미국 성도들의 헌금으로 신학을 공부한 나는 빚진 마음으로
전임 목회자를 모실 때까지 6개월만 설교하겠다고 약속했다.
김장로님이 다니시던 흥천교회 연로 성도들 몇 분
그리고 한양대 산부인과 이재억 박사 부부와 함께 시작한 것이 서울영동교회다.
한국교회에 고쳐야 할 것들이 많았는데 기성교회에서는
저항이 크므로 새로 시작할 때가 적기였다.
그래서 예배당은 검소하게, 다른 교회 교인 훔치지 않기,
장로 장립 때 축의금과 선물 금지, 피택장로 거액헌금 요구하지 않기,
헌금의 절반 이상을 외부로 내보내기 등을 표방했다.
교인들 다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잠자리 체를 헌금 궤로 바꿨으며,
장로들이 주기적으로 재신임을 받도록 했으며,
적어도 내가 설교를 맡은 동안에는 냉방기를 설치하지 않았으며
약한 교회를 서럽게 하지 않기 위해 전자 오르간을 구입하지 않았다.
교회가 활발하게 성장하던 때였고 개혁 노력이 좋아서인지 교인 수가 급격하게 늘었다.
예배당을 건축하게 되자 나는 300명 이상 수용할 수 없게 짖자고 주장했으나
다수가 반대해 500명 정도만 수용할 수 있게 신축했고,
그 이상이 되면 분립하기로 했다.
그래서 1990년에 교인 100여 명이 분립해서 한영외고 강당에서 한영교회를 시작했는데,
학교 강당을 이용한 첫 교회가 되었다.
지금은 배재고등학교로 옮겨서 빛소금교회로 개명했지만,
자체 건물이 없는 교회 정책을 잘 유지하고 있다.
1982년에 박은조 담임목사가 취임했는데 그 뒤에도
일원동 교회, 샘물교회, 배곧영동교회 등을 분립 개척했고
그 교회들이 또다시 분립 개척해서 10개의 형제교회가 설립됐다.
지도자 양성을 강조해서 박은조 목사, 김낙춘 목사 등
교역자들과 신학생들 상당수를 해외에 유학시켜서 지금 고신대 신대원에는
서울영동교회 그룹 출신 교수가 3명이나 된다.
서울영동교회는 한국 교회 개혁을 어느 정도 선도했고
기독교 시민운동에도 적잖이 공헌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산파, 밀알선교단의 보모,
샘물호스피스의 산모 역할을 잘 감당해 주었고 지금도 그들을 열심히 돕고 있다.
정현구 현 담임목사도 희년선교회 이사장과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로 섬기고 있다.
카자흐스탄에 아담한 병원을 설립하여 자립시켰고,
정유근 장로가 말라위에 세운 대양누가병원을 열심히 돕고 있다.
나는 1990년에 분립할 때 같이 나가서 한영교회에 협동설교자로 돕다가
지금은 그 교회가 다시 분립시킨 다니엘새시대교회에 출석하면서
서울영동교회 그룹 교회들에서 간헐적으로 말씀을 전한다.
서울영동교회는 나의 삶에서 가장 뜻깊은 사역장 가운데 하나였고,
내가 일으킨 여러 공익활동을 뒷받침해 줘서 빚진 마음으로 감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