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산에 있는 정시의 충절을 기리고 김익순의 죄를 탄(嘆)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김병연은 일필휘지 붓을 휘둘러 이렇게 논박했습니다. “너의 혼은 죽어서도 저승에도 못갈 것이며 한번 죽어서는 그 죄가 가벼우니 만번 죽어 마땅하다.” 이 사실을 알게된 가족들과 조부를 맹공한 김병연의 실의가 상상이 가십니까? 장원급제의 기쁨보다는 조부에 대한 죄송함, 가세의 몰락, 고단한 신세가 연달아 떠올랐을 겁니다. 김병연의 가출은 지금으로치면 자살 쯤에 해당됐을 겁니다. 이렇게 해서 세상을 등지고 전국을 떠돌기 시작한 김병연에 대해서는 많은 일화가 있습니다. 그중 욕설의 백미(白眉)가 자신을 모질게 박대한 시골 서당의 훈장을 향해 날린 다음과 같은 시입니다. 제목이 ‘욕설모서당(辱說某書堂)’입니다.
서당내조지(書堂乃早知)
방중개존물(房中皆尊物)
학생제미십(學生諸未十)
선생내불알(先生來不謁)
- '회향자탄'이라는 김삿갓의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고향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한탄한다는 뜻이다. 방랑객에게 고향은 가고파도 갈 수 없는 곳이었던 모양이다.
해석하자면 ‘서당을 내 일찌감치 알고왔는데 방안에는 모두 귀한 물건뿐이네. 학생 수는 채 열명이 안되는데 알량한 선생은 나와서 나를 보지않네….’ 참으로 재치가 넘치지만 입으로 암송하기는 쉽지않은 시인의 분노가 느껴지지요. 이런 김병연이 전라도 땅으로 흘러들어온 것은 1850년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창원 정씨와의 인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병들고 늙은 그가 정씨 집 사랑채에서 숨을 거뒀을 때 사람들은 그의 시신을 마을 뒷편 ‘똥뫼’라는 곳에 매장합니다. 죽음을 예감했는지 정씨 집 앞에는 이런 시비(詩碑)가 서있어 오가는 나그네들의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절반이나 이즈러진 서가(書架)에는 수권의 책이 있고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한 개의 벼루가 있어묵향(墨香)에 스스로 깊이 취하니마음이 한가롭구려미약한 이 몸이 이밖에 또 무엇을 바랄소냐’
- 화순군에는 김삿갓로가 있다. 강원도 영월에 있는 김삿갓 묘와는 또다른 시인의 흔적이다.
똥뫼라는 이름에는 사연이 있는데 행려병자로 연고없이 사망한 사람들을 묻은 곳입니다. 일종의 공동묘지지요. 그곳에는 김삿갓과 관련된 비석이 서있는데 바로 옆이 소와 돼지 키우는 축사입니다. 짐승들의 울음소리와 분뇨냄새가 진동하지요. 땅에는 인연이 있는지 200년전 시인이 숨진 곳이 오늘날에도 소와 돼지의 우리가 되어있습니다. 흔히 김삿갓을 두고 사람들은 세계의 3대 민중시인이라고 하지요. 나머지 둘이 누군가 보니 미국의 월트 휘트먼(1819~1892)이 꼽혔습니다.학교를 다니지 못한 휘트먼은 목수(木手)로 일하며 민중의 대변인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다음이 이시가와 타쿠보쿠(石川啄木·1886~1912)지요. 모리오카중 중퇴 학력으로 사회주의적 계몽운동을 펴다 26세로 요절한 시인입니다. 나이로 보면 김삿갓이 가장 연장자이지요. 일본의 이시가와 타쿠보쿠는 가장 어립니다. 비슷한 시기에 3대 민중 시인이 탄생했다는 것은 19세기가 양(洋)의 동서(東西)를 막론하고 얼마나 백성들이 살기 힘든 시대였는지를 말해준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왜 김삿갓은 이곳으로 온 것일까요? 지금 구암마을에는 김삿갓이 숨진 옛 집이 잘 보존돼있습니다. 마당에는 자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었고 우물에는 커다란 거미 한마리가 또아리를 틀고있어 세월의 무상함을 보여줍니다.
-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종명지 근처 정자에 서 있는 김삿갓의 동상이다. 아름다운 봄날 시인의 감성을 자극할 것이다.
이 집은 백인당(百忍堂) 정치업 선생이 1728년 터를 잡은 곳입니다. 그 후손들이 290년을 떠나지않고 살고 있는데 백인당은 ‘백번을 참는다’는 당호(堂號)처럼 집을 찾는 식객(食客)을 후히 대접하고 쉬도록 하는게 가풍이라고합니다. 그의 6세손 정시룡(丁時龍) 선생 대에 김삿갓이 찾아오자 그는 오랜 기간 사랑채를 비워주고 1863년 김병연이 죽자 장제(葬祭)를 치렀으며 3년 뒤 김병연의 후손이 찾아오자 유골을 넘겨줬다고 합니다. 후덕한 인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그의 집 앞쪽에는 작은 정자가 서있으며 그 앞에는 죽장(竹杖)에 삿갓을 쓴 김삿갓의 동상이 서있습니다. 김삿갓은 정씨 가문의 후덕함 때문인지 세차례 이 마을을 찾았는데 그때마다의 족적이 아직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맨처음이 1841년으로 화순적벽(赤壁)을 보고 이런 시를 읊었습니다.무등산고송하재(無等山高松下在)적벽강심사상류(赤壁 江深沙上流)‘무등산이 높다지만 소나무 아래요 적벽강이 깊다더니 모래위로 흐르는구나’라는 뜻입니다. 두번째가 1850년으로 협선루라는 누각에서 시상(詩想)을 얻어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 김삿갓이 보고 반했다는 화순적벽의 일부다. 중국의 적벽과 비슷하다고해서 붙은 이름이다.
약경심홍선(藥經深紅鮮)산창만취휘(山窓滿翠徽)선군하화취(羨君下花醉)호접몽중비(胡蝶夢中飛)해석하자면 ‘약 캐러 가는 길가엔 붉은 이끼가 깊고 산을 향해 난 창문에는 푸르름이 가득하다. 그대 꽃아래 취해있음이 부럽구려, 나비는 꿈속에서 날고있는데’ 정도지요. 세번째가 1857년으로, 그때부터 김삿갓은 평생을 짚고 다녔던 죽장을 내던지고 정씨 집에 6년을 머물다 숨을 거둡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후손이 그의 시신을 인수해간 다음에도 그의 묘가 제대로 알려지기까지 시간이 걸렸다는 것입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첫댓글 감사히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