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갈량은 오의 군유와 설전을 벌였는가 ?
- 제갈량이 사신으로 오에 가서, 오와 연합하여 조조에 대항한 것은 사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은 손권에게 우선 관망의 태도를 포기하라고 설득하며 한편으로 격장법 (사람의 성을 돋구어 분발시키는 계책) 을 통하여 손권으로 하여금 조조에게 대항할 결의를 굳혀주기도 한다.
하지만 유.손 연합의 전과정을 통해 제갈량이 오나라의 유학자들과 무리한 설전을 벌이느 장면은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제갈량의 인물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한 작가의 문학적 각색에 지나지 않는다.
2. 주유는 연의에서처럼 속이 좁은 인물이었는가 ?
- 전혀 사실이 아니다. 정사 <주유전> 을 보면 " 성격은 너그럽고 도량이 넓어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았다 " 라고 기록하고 있다. 손권 역시 주유를 평가할 때 " 영웅의 기개와 담략을 겸비하고 있다 " 고 평하며 매우 높게 바라보았다. 여몽은 더욱 그를 숭배하여 " 주유와 노숙은 독자적인 견해로써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방침을 제안했다. 실로 기재라 할 것이다 " 라고 하였다.
주유가 도량이 좁았다는 등 그의 인품이나 기량에 관해 부정적으로 언급한 자료는 삼국시대 사서 중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북송시대 '자치통감' 의 저자 사마광은 적벽대전을 서술하며 특히 주유를 높이 평가했다. 강적에 직면하여 의연한 태도와 결단력 있는 지휘, 다른 사람을 능가하는 담력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강적인 조조를 크게 이겼다고 서술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주유가 뛰어난 군사 지휘관으로서 인품과 기지를 갖추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역사상 실제 주유는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에서처럼 도량이 좁은 인물이 아닐 뿐더러, 지혜와 용맹을 겸비하고 기지가 뛰어난 걸출한 군략가였던 것이다. 연의 속 주유의 모습이 실제와 크게 다른 이유는 분명해 보인다. 그것은 주유와 제갈량의 대결을 통해 제갈량의 비범함을 돋보이기 위한 작가의 의도이다.
3. 장간은 주유의 반간계에 빠졌는가 ?
- 사실이 아니다. 연의에서는 주유의 반간계에 빠진 장간으로 인해 조조가 부하장수 채모와 장윤의 목을 베어버리는 장면이 나타난다. 위의 수군도독을 제거하기 위한 주유의 계략에 장간이 넘어가 위의 상황을 어렵게 만들고 유비.손권 연합군에 힘을 실어준 모습이다.
하지만 연의에서처럼 애초 장간이 주유로 하여금 조조에게 투항하라는 설득을 위해 오의 진영을 찾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적벽대전 이년 후의 일이지 적벽대전 이전의 일은 아니다. 주유가 장간을 위해 연회를 베푼 것도 사실이지만 주유의 계략대로 편지를 훔쳐 조조진영으로 달아난 것은 허구에 불과하다. 주유가 장간에게 반간계를 사용한 일은 없으며, 당연히 장간이 계략에 넘어간 일도 없었다.
4. 기모를 이용하여 화살을 빌린 것은 과연 제갈량인가 ?
- 연의 46회를 보면 주유가 제갈량의 지모가 뛰어남을 보고 장차 오의 큰 재앙이 될 것이라 여겨, 또 그의 재능을 시기하여 제거하려는 모습이 나온다. 어느 날 주유가 열흘 안에 십만 개의 화살을 요청하자 제갈량은 삼일이면 충분하다 장담했다.
주유는 내심 기뻐하며 제갈량에게 군령장을 내리는 한편, 군 내에 있는 장인에게 일부러 시간을 끌어 납기일에 맞추지 못하게 하였다. 이를 구실로 제갈량을 죽이려는 의도였다.
삼일 째 되는 날 새벽, 장강은 짙은 안개에 둘러싸였다. 그 때 배의 양측에 볏단을 천 개씩 세운 이십 척의 배가 밧줄로 서로 연결한 채 북상했다. 날이 샐 무렵 제갈량이 지휘하는 배는 조조의 진영에 가까이 다가가 일렬로 나란히 섰고, 곧이어 모든 병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조조는 이 소식을 듣고 혹 복병이 있는 것이 아닌가하여 만 여명의 사수를 동원하여 활을 쏘게하였다. 이윽고 제갈량은 뱃머리를 반대로 돌리게하고 또 화살을 받아냈다.
이후 안개가 걷히자 즉시 물러났다. 이 때 이십척의 배 양측에 나란히 놓아둔 볏단에는 화살이 가득 꽂혀 있었고, 십만 개의 화살은 간단히 손에 들어왔다.
하지만 위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 건안 18년 (213년) 에 손권과 조조는 유수에서 대치했다. 어느 날 손권이 큰 배를 타고 적의 정세를 시찰하러 가니, 조조의 군사들이 활과 쇠뇌를 마구 쏘았다. 그 때문에 배에 꽂힌 화살의 무게로 배가 전복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배를 돌려 반대쪽으로 화살을 맞으니, 화살의 무게가 골고루 분산되어 안정되었다.
기모로써 화살을 빌린 이야기는 분명 존재한다. 하지만 그것은 적벽대전 이후의 이야기이며, 실행자 역시 제갈량이 아닌 손권이었다.
5. 황개는 정말로 고육지계를 썼는가 ?
- 황개가 거짓으로 조조에게 항복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아무리 역사자료나 적벽대전에 관계한 사람들의 전기를 훑어보아도 주유와 황개가 고육지계를 꾸민 흔적은 없으며, 황개가 매를 맞은 사실도 없다. 결국 황개의 거짓 투항은 고육지계와는 전혀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작가가 황개의 거짓 투항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고육지계라는 허구를 덧붙인 것은 제갈량에 의한 적벽화공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것이었다.
6. 방통이 조조에게 연환계를 가르쳐준 것은 사실인가 ?
- 연의의 적벽대전을 살펴보면 방통에게 배운 연환계를 실행한 조조가 이후 상대의 화공에 크게 화를 입고 결국 대패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방통의 간단한 경력 중, 그가 적벽대전에 참가했다는 사실은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다. 적벽대전에 참가조차 하지 않은 그가, 싸움의 과정에서 조조에게 교모히 연환계를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은 작가의 허구에 다름아니다.
7. 적벽대전에서 화공의 계략을 꾸민 것은 제갈량인가 ?
- 사실과 다르다. 정사의 <주유전>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주유의 부장 황개가 진언했다. " 지금 적은 다수이고 아군은 세력이 약하므로 대항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군선을 보니 선수와 선미를 연결해 두었습니다. 화공을 쓰면 물리칠 수 있을 것입니다. "
<주유전> 과 <강표전> 에는 이에 덧붙여, 황개가 투항을 가장하여 적벽을 화공한 전과정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결국 적벽대전 화공 계획의 입안자는 황개였으며, 주유가 이를 허락한 뒤 다시 황개가 실행에 옮긴 것이다. 제갈량은 주유의 참모도 아니었을 뿐더러, 화공의 계획에 참가하여 상담에 응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8. 제갈량은 적벽대전의 지휘자였는가 ?
- 연의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의 사실상 지휘자였던 반면, 주유는 조역의 한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에 입각한 사서를 살펴보면 사실은 이와 다르다.
모든 사서들이 하나같이 확실히 하고 있는 부분 한가지, 그것은 바로 적벽대전의 한쪽 당사자는 조조였고, 또 한쪽의 주역은 주유라는 사실이다.
실제 역사에서 주유는 흔들리지 않는 주전파였다. 전쟁이 발발하기 전, 스스로 정예병력 삼만을 이끌고 하구에 나아가 조조군을 물리쳤다. 즉 주유는 주전파였을뿐 아니라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 역활을 한 사람이다.
요컨데 적벽대전의 지휘자는 제갈량이 아닌 오의 대도독 주유라는 사실이다. 제갈량이 구체적으로 전투를 지휘했다는 기록은 사서에 보이지 않으며, 머리를 흩뜨리고 검을 받쳐든 채 단에 올라 바람을 가른 사실은 존재하지 않았다.
물론 제갈량은 매우 긴급한 시기에 비교적 정확하게 정세를 분석했고, 오의 결의를 굳건히하여 손.유 연합을 이끌어 냈으며 그리하여 국면을 반전시킨 후, 조조군을 대패시키고 적벽대전의 승리를 불러왔다는 점에서 중요한 역활을 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9. 관우가 화용도에서 패퇴하는 조조와 마주치고도 그냥 보내준 것은 사실인가 ?
- 적벽대전에서 대패한 조조는 확실히 군사를 정리하여 화용도에서 도보로 후퇴하였고, 큰 비로 진흙탕이 된 길을 큰 대가를 치르고 간신히 지나친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다만 관우가 이 곳에서 조조를 만나고도 옛정에 사로잡혀 눈감아 주었다는 것, 이것은 연의의 작가 나관중이 만들어낸 완전한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이 이야기는 수백 년간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특히 의를 중시하는 봉건시대의 독자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비난 대신 커다란 찬사를 보내게한 요인이 되었다.
10. 제갈량은 주유를 분사시켰는가 ?
- 연의에서는 적벽대전 이후, 형주의 귀속문제를 놓고 제갈량과 주유가 다투는 장면이 나오고 제갈량이 세 번이나 주유를 화나게해 끝내 분사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에 따른 것인가 ? 역시 전혀 사실과 다른 작품 속 허구에 불과하다.
손권과 유비는 적벽대전 이후 모두 서천을 손에 넣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특히 손권은 주유에게서 서천을 뺏기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확실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주유는 서천을 차지하기 위해 출병하는 도중 파구에서 병사하고 말았다. 파구는 파릉이라고도 하며, 형주로부터 멀리 떨어진 동정호 동쪽에 위치한 곳이다.
결국 주유는 파구에서 병사한 것이지, 연의에서처럼 형주성 밑에서 분사한 것이 아니다.
11. 관우는 의로써 황충을 놓아주었는가 ?
- 연의 53회에서는 제갈량이 장사를 차지하기 위해 관우를 파견해 싸우게한다. 장사태수 한현의 장수 황충이 나타나 관우와 대적하고, 오륙십합이 넘도록 싸우지만 승부는 나지 않는다. 이 때 황충을 유인하고자 갑자기 퇴각하는 관우의 계략에 빠져 뒤쫓던 황충의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그는 낙마하고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는다.
이 때 상대의 실수로 승리하는 것을 더럽게 여긴 관우로 인해 황충은 목숨을 구하고, 이후 삼일째 승부에서 신궁의 솜씨로 관우의 투구끈만 맞히며 은혜에 보답한다.
사서의 기록을 보면 황충은 장사태수 한현의 부장이었고, 유비가 남방의 여러 군을 정벌할 때 유비에게 귀순했다. 그러나 황충이 유비에게 귀순한 경위는 나타나지 않았다. 관우가 의로써 황충을 놓아주었다거나 황충이 은의에 감동하여 유비에게 귀순했다는 기록 역시 찾아볼 수 없다.
역사상 실제 관우는 황충을 노병이라 부르며 자신이 황충과 동렬로 취급되는 것을 싫어했다. 관우가 이런 황충과 교전했을 가능성은 지극히 낮다.
확실한 것은 사서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실을 나관중이 허구로 붙였다는 것이다.
12. 조조가 수염을 자르고 옷을 버림으로써 겨우 위기를 모면한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58회에는 조조에게 죽임을 당한 마등의 아들 마초.한수 연합군과 조조군의 전투가 그려져있다. 이 전투에서 마초는 몸소 진두지휘하며 조조군의 부장들을 연달아 물리치고 적군을 교란시킨 후 조조를 겨냥하여 돌진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후 서량군에서 잇달아 붉은 장포, 긴 수염 등 조조의 특성을 외치며 지목할 때마다 조조는 장포를 벗어 던지고 수염을 칼로 자르며 깃발 끝으로 머리를 감싸는 등, 온갖 수모를 겪고 급기야 마초의 추격에 놀라 말채찍까지 떨어뜨리는 치욕 끝에 간신히 조홍과 하후연 등의 장수들이 달려와 위기를 벗어난다.
그러나 이는 역사적 사실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허구 중의 허구이다.
실제 211년 7월, 조조와 마초의 관서 연합군은 동관에서 대치하였다. 조조군은 정면 작전에서 마초군에게 시종 압도당하였다. 그러나 측면 공격으로 전환하여 연합군의 추격을 피했을뿐 아니라, 신속하게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마초의 공격과 방어 모두를 교란하였다. 결국 연합군은 어쩔 수 없이 동관을 포기하고 위남으로 철수하였다.
위남에서 승부를 결정지으려한 마초였지만 조조는 적을 깊숙히 유인한 후, 허를 찔러 위남을 들이쳐서 마초를 패배의 수렁으로 몰아넣었다. 조조의 상대가 되지 못함을 간파한 마초가 강화를 제의했지만 거절당했고, 조조는 짐짓 강화에 응하는척 하며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시켰다.
두 사람이 서로 의심하는 것을 본 조조는 돌연 공격으로 돌아섰고, 결국 마초와 한수는 서량으로 도망쳐 관중의 태반은 조조에게 넘어간 것이다.
조조는 관서를 차지한 위남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서 자신의 걸출한 군사적 재능을 유감없이 드러낸 것이다. 나관중의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조조의 이미지에 흠집내기 위한 차원에서 완전히 실제와 반대로 뒤집어 버린 것이다. |
출처: 소공녀의 행복어사전 원문보기 글쓴이: 이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