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한 마리가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별일 없을 테니 당황하지 마십시오."
평소 때와 다름없이 말을 아낀 칼이 소총을 들어 닫혀 있는 문을 겨냥하자 론과 스와르는 서로에게 눈짓을 보내며 자신들의 권총을 꺼내 들었다. 리나는 그들의 뒤편에서 총을 뽑아야 할지 말지를 아직 정하지 못한 체 이 낯선 분위기를 관망한다. 이때 하나의 총구가 허공에서 칼의 등으로 고정됐다.
'탕!'
공기를 가르는 소음이 빈 공간 속을 오염시켰고 칼이 쓰러졌다. 쓰러진 그의 주검에선 짙고 선명한 붉은 액체가 흘러나온다.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론은 동상처럼 경직되어 버렸고 너무 놀라 한순간 넋을 읽었던 리나가 비명을 질려됐다. 그런 그들에게로 칼을 겨냥했던 총구가 날아든다 그리고 한치의 떨림도 없는 특유의 차가운 음성이 이어졌다.
"총을 내려놓고 뒤로 물러서시오."
"도. 도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론이 반항적으로 차가운 음성을 향해 울부짖어 보지만 역시 아무런 변화 없는 음성이 되돌아왔다.
"물러서시오."
음성에 눌려버린 론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권총을 내려놓고 부들부들 떨고 있는 리나를 감싸며 뒤로 물러났다. 차가운 음성은 한쪽 눈을 치켜 세우며 잊은 물건을 상기시키자 론은 리나의 권총을 집어 앞으로 던진다.
"왜 이러는 거요 스와르."
스와르는 그의 말보다 더욱 차가운 눈빛으로 론을 찔러 보며 입을 움직인다.
"조용히 있으시오. 곳 모든 걸 알게 될 테니."
말을 마친 그가 총구를 론에게로 고정시킨 체 문 곁으로 다가가 스위치를 누른다. 문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백열등이 내뿜는 열기로 하얗게 달구어진 통로가 초조한 시간을 부채질한다. 스와르는 그 끝을 참을성 있게 지켜보며 예측한 주인공이 튀어나오기를 기다린다. 곧, 발자국 소리가 커져오며 문제의 당사자가 출연했다. 당사자와 인간들 모두에게 어색한, 정지된 시간이 틈타 들었다.
"칸. 칸인가?"
스와르의 희열 섞인 작은 목소리가 론의 귀에 비쳐졌다. 드칸이 생각한다.
'신이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군. 이렇게 죽을 수는 없다. 이렇게 홀로는...'
얼어붙은 시간이 깨어지며 거구의 회색 레피탄이 재생된 체로 돌려지는 비디오처럼 빠르게 움직였다. 그 날렵한 움직임에 론과 리나의 숨이 멈추어 졌고 스와르는 총기를 들지 않은 손을 앞으로 뻗으며 소리쳤다. 인간이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지만 드칸의 귀에는 옥소리처럼 또렷하게 와 박혔다.
"멈추어라 나의 아들아, 이제 너의 방황은 끝났다."
급브레이크의 제동이 걸리듯 드칸이 멈추어 선다. 멈추어선 드칸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의 앞에 있는 조그마한 신이 거대한 벽처럼 너무도 높고 커서 자신은 건드릴 수도 처다 볼 수도 없는, 알 수 없는 기운을 내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놀란 리나가 불명확한 음정으로 묻는다.
"그사이에 라판어를 익힌 거예요?"
스와르는 자신의 1m 남짓한 거리에 서있는 드칸을 올려보다 차갑다 못해 가슴 시리도록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본다.
"당신도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닥터 고벨, 아니 아버지라 불러야 할까?"
론의 눈이 크게 확대되며 떨려온다. 얼굴 근육이 부르르 경련을 시작했고 이빨이 부디 친다. 땀이 비오듯 흐르고 뇌 속은 전쟁이 난 듯이 혼란스럽다. 증상을 잠재우기 위해 론은 어금니를 악물고 손가락을 앞으로 향했다. 그리고 더듬거리며 말했다.
"당신, 당신이었군. 당신이 바로..."
미소가 사라지며 냉기 가득한 남자의 고요한 목소리가 론을 확인 시켰다.
"그렇소 내가 바로 닥터 겜마요."
버러진 입을 다물지 못하며 론이 말한다.
"왜... 아니 어떻게..."
미소가 되살아난다.
"2110년 5월 27일, 세이비어들은 다시 지구로 돌아왔지. 자신들이 돌보고 있던 인간들을 지구로 귀환시킬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세이비어가 다시?"
"그렇소. 아마 당신이 처음 그들에게 이끌려 갔을 때와 같은 식 이였을 거라 생각되오. 그들은 나와 한참 문화의 꽃 봉우리를 일으키려 하는 레피탄들을 보고 지극히 놀라게 됐지. 자신들의 계산으론 지구상의 생명체는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었으니 까. 그래서 그들이 내게 물었소. 나는 누구냐고. 내가 대답하기를 제 3자, 인간과 신의 사이에 있는 생명체라 하였소 그리고 레피탄들이 나의 아들들이라 했지. 세이비어들은 지구의 변화에 무척 놀라면서도 자신들이 보호하고 있는 인간들을 다시 지구에 돌려보낼 수 있게 되었다며 좋아했어. 그때 나는 처음으로 당신들. 세이비어들이 데려간 인간들에 대해 알게 되었지. 무려 1만이나 되는 수의 인간들이 우주 저편에 잠들어 있다는 걸..."
"그래서?"
다소 평정을 되찾은 론이 겜마를 노려보며 재촉한다.
"난 위험을 느꼈지. 인간의 뿌리깊은 곳에 들어차 있는 파괴성과 이중성 그리고 남에 대한 이기심과 배척의 화살이 아직 문화적 걸음마 단계인 레피탄에게 돌아올까 두려웠던 거야. 인간의 작은 날개 짓이 레피탄들에게는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폭풍이 될 수 있다는 그런 이유였지. 그래서 시간을 벌기로 했지. 난 그들에게 마이더스를 이용해 인간을 재 탄생시킬 수 있다고 한 거야. 그들은 바로 나를 이끌고 우주공간으로 날아갔지 그 곳에서 그들은 새로운 마이다스를 만들어 주었고 난 잠들어 있던 인간들 중, 우성 유전자를 가진 여성들의 DNA를 이용해 그들에게 내 말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증명해 주었어. 그 증거가 바로."
겜마의 시선이 리나에 머물자 그녀는 퍼득 놀라 떨리는 음성으로 말한다.
"설마. 저를 만든 것이..."
"바로 나란다 나의 딸아. 그리고 난 세이비어들을 혼란시켰다.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과 레피탄은 동등한 생명체 이였으므로 인간이 지구로 돌아올 시에 레피탄의 생존여부를 확신할 수 없다고 한 거야. 그렇게 난 레피탄들을 발전시킬 천년이란 시간을 요구했고 세이비어들은 나의 미끼를 물은 거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충격적 사실에 리나는 할말을 잃었고 신중함을 되찾은 론은 모든 비밀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겜마를 향해 계속해서 진실을 파헤쳐 갔다.
"그렇다면 이 탐사를 계획한 것도."
"물론 나요, 론. 세이비어들에게서 받은 천년의 시간을 넘어서 지구가 인간과 레피탄이 어울려 살 수 있는 이상적 행성인지 아닌지를 파악하고 서로의 문명을 재건, 발전시키는 것이 표면상의 목표이지."
"그렇다면 실지 목적은?"
"솔직히, 지극히 개인적 이였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요. 난 단지 보고싶었을 뿐이요. 내가 이룬 이 에덴이 천년이란 시간이 흘러 어떠한 모습으로 변했는지. 나의 자식들이 어떻게 살아가는 지를..."
"겨우 그런 이유였다면 칼을 죽일 필요가 없었을 텐데."
"과연."
겜마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으려 하다 들려오는 발소리에 몸을 돌린다. 그는 스위치를 눌러 문을 닫은 뒤 총을 발사해 컨트롤러를 박살 냈다. 드칸은 처음과 같은 자세로 멍하니 그의 신이 하는 행위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렇게 하면 당분간 저들을 막아 낼 수 있겠지."
겜마는 혼잔 말을 하며 다시 론의 눈과 마주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지, 그건 인간을 시험하기 위한 것."
"우리들을 시험했다고?"
"그렇다 난 확신이 없었거든. 인간이 진짜로 레피탄과 어울려 지낼 수 있을 것이란 확신이 말이야. 마지막 기회를 인간에게 선물한 거지."
"그래서 결과는?"
론의 물음에 레피탄의 신은 호쾌하게 웃어 제친다.
"하하하, 지금 로베르토를 보고도 결과를 운운하나? 파이오니아 팀원은 나를 제외하고 모두 12명, 그것도 내가 무작위로 뽑은 거라 생각하나? 천만에, 난 이번 탐사를 위해 캡슐에 잠들었던 시간을 재외하고도 무려 4년이란 시간을 들여 계획했다. 1만의 인간 중에서도 최고의 엘리트만을 뽑았단 말이다. 그럼에도 네가 말하는 결과를 보라. 겜마성지는 파괴되고 레피탄들은 유린됐다. 12명, 그것도 가장 이상적인 능력의 소유자들 중에... 그렇다면 나머지 1만 명의 사람들 중엔 얼마나 많은 로베르토가 숨어 있겠나? 얼마나 많은 신이 되고자 하는 욕망들이 레피탄들을 다스리려 하겠냔 말이다. 그 만들어진 더러운 신앙으로 인간을 숭배할 레피탄을 생각해 보았나? 광신과 복종, 혐오와 배척, 이단과 심판 급기야 전쟁에까지 이르게 될 그 끔직한 광경을 상상이나 해 보았냐 말이다. 우리의 탐사는 그것이 인간의 본성이란 것만을 처절히 깨닫고 실패 한 거다. 과거 선악과를 깨 물은 아담처럼 인간은 최후의 시험에서 탈락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겜마는 흥분을 추수 리며 이어간다.
"시험에 탈락했으니 벌칙을 받아야겠지."
"벌칙?"
"인류의 진정한 종말."
마치 아침 신문에 쓰여진 날씨를 읽듯이 서슴없이 말하는 겜마의 말에 론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체 되묻는다.
"뭐, 뭐라고?"
"핵분열로 갓 태어난 수백만 볼트의 중성자를 이용한 원자로인 '고속 중성자로', 파이오니아의 엔진은 바로 그 고속 중성자로를 사용하고 있지. 그 고속 중성자로 시스템을 도입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당신이? 왜?"
"고속 중성자는 그 하나가 핵 폭탄 아니 그이상가는 엄청난 에너지를 가지고 있거든. 한마디로 파이오니아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중성자로 폭탄이나 다름없다는 거지."
"그걸 어떻게 하겠다는 거요."
"세이비어의 마더쉽에 자폭할 거다. 일종의 가미카제이지."
너무나도 엄청난 말에 리나가 외쳤다.
"미쳤군요. 세이비어의 배에는 1 만 명이나 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고요. 그리고 그들 말고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수의 생명체들이 잠들어 있어요. 당신은 그들 모두를 죽일 샘인가요?!"
"아버지에게 대하는 말투가 다소 거칠군, 리나양. 누가 뭐라 해도 난 너의 분명한 창조주라고. 후후후, 그리고 너무 아쉬워 말라고 파이오니아는 처음부터 인간의 종말을 위한 용도로 만들어 졌던 거니까.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에겐 다소 미안한 일이지만...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해야겠지. 인간을 주인으로 가지게된 지구처럼 말이야. 좋은 찬스였지 지구 폭발은, 비록 실패했지만. 애초에 인간들은 그 폭발에서 모두 전멸했어야 했어."
"정신 나간 소리! 그랬다면 당신과 레피탄 그리고 지금의 지구 역시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 아니오."
론이 거친 목소리로 소리치며 강렬한 시선으로 겜마의 눈에 대항했다.
"패러독스. 인생은 처음부터 아이러니한 거요 론. 지구의 인생도 별수 있겠소. 하지만 지구는 우리들의 도움 없이도 분명히 다시 살아 낳을 거요. 비록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였겠지만."
'쿵 쿵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며 송신기가 진의 목소리로 외쳐된다.
"어떻게 된 거야? 어서 문을 열어. 문을 열라고!"
겜마는 짜증스런 얼굴로 송신기를 껐다.
"당신의 친구들이 무척 다급한 모양이군."
"우리의 친구들이요 겜마. 지금도 늦지 않았소 생각을 바꾸시오.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겪었던 일들을 생각해 보시오. 그 시간들이 그토록 무의미했다 난 생각지 않소. 당신은 한번도 이렇게 많고 다양한 사람들과 접해 보지 못했었기 때문이요. 인간은 완벽하지 않아요. 언제고 실수 할 수 있고 나쁜 유혹에 빠져들 수 있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단체로 협동하며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채우고 고치고 좋은 부분을 배우고 나누는 겁니다. 당신은 분명 똑똑한 사람이요. 하지만 당신 역시 홀로 살아 갈 수 없었소. 인간이 싫었다 하더라도 레피탄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 증거요."
겜마는 론의 말에 같잖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나를 설득하려는 거라면 시간 낭비일 뿐이요, 론. 당신의 마이다스 학설로 결국의 내가 태어난 일종의 창조물 같은 존재지만. 난 그런 것에 대한 어떠한 고마움도 느끼는 바가 없소."
론은 성난 어조로 겜마의 무표정한 얼굴에 내뱉었다.
"당신은 인간에 대한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단 말이요?"
"좋은 지적이요. 나에겐 남아 있지 않소. 아무 것도. 하지만 너무 나를 탓하진 마시오. 난 내 자신을, 인간을, 나의 아버지들을 죽일 때 깨끗이 지웠으니까."
"아버지들이라면, 벤과 박사들?"
"그렇소. 이미 마이더스 파일들을 보아서 알고 있겠지만, 난 그들의 인형에 지나지 않았소. 마이다스의 파일은 지극히 단면적인 이야기들일 뿐. 그들은 내가 무슨 자신들의 로봇인양 나를 조종하고 규제했소. 내가 자신들의 희망이라는 이유로 나의 자유를 무시하고 짓밟았소. 끈임 없는 교육 그리고 성과를 만족시키지 못했을 때의 벌칙들. 간섭과 억압, 구속, 체벌. 그것이 6살, 꼬마에게는 얼마나 무섭고도 두렵고 악랄한 짓이라는 걸 당신은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요. 그러다 나는 그들의 무능함을 확인하게 되지. 바로 여성 유전자의 실패 때였소. 그때부터 서서히 그들은 무너져 갔고 난 강해졌소. 그들이 틀려 갔고 나는 맞는 답을 같게 되어 갔소. 나의 지식이 그들을 뛰어 넘게 된 거지. 그리고 난 나 자신을 해방 시켰소. 그와 동시에 인간을 버렸지. 단지 그 것 뿐이 안이야. 내가 인간의 역사를 통해 배운 것은 그 동족을 살육하고 전쟁을 통해 발전하는 너무도 끔찍스럽고 혐오스런 모습들뿐. 실망과 좌절이었다."
'쿵 쿵 쿵.'
소리가 거세 지며 소란한 소음이 계속된다. 겜마는 아랑곳 안고 다시 입을 열었다.
"아! 딱 한번, 나의 분신을 만들어 레피탄들의 발전에 힘쓰도록 하려 한 적이 있었지, 나 역시 늙어 가고 언젠 간 죽게 될 테니까 나를 대신하게 될 그런 존재를 만들려 한 거야. 하지만 노아에 찾아가 나의 DNA를 뽑아 마이다스를 작동시키려는 순간 난 나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기계의 작동을 멈추었다. 악마의 유혹을 이겨낸 거지."
"그래서, 당신 말대로 지구가 레피탄들의 세상이 되어 버리면 더 이상의 지구 파괴가 없어 질 것 같소? 당신은 눈 뜬 장님이요? 레피탄 역시 인간과 같은 길을 갈 것이란 생각은 안 해봤단 말이요?"
"그 것은 어디까지나 레피탄들이 깨닫고 선택하여야 할 일. 이미 지구를 멸망 시켰던 인간에겐 그 일에 대해 간섭할 권리가 없소. 단지 인간은 그들의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받으면 되는 거요."
"난센스! 당신 역시 레피탄들에게 신으로 기억되고 싶은 미치광이일 뿐이요. 로베르토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미치광이!"
"너무 흥분하지 마시오, 론. 그런다고 변하는 건 없으니까. 신으로 기억되고 싶은 미치광이라... 그럴지도 모르지, 때로는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믿음직스러워 보일 때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그렇게 억울해 마시오. 난 꾀나 많은 힌트를 당신들에게 던져 주어왔으니까. 남을 욕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무지를 탓해야 할거요."
"힌트?"
"하하하, 내가 탐사를 계획하며 가장 두려웠던 것이 나의 신분 노출 이였소. 그래서 난 팀원들의 인종과 나라를 뒤섞어서 문화나 행동의 차이점에 의문을 던지지 않게 했지. 특이나, 팀원 중엔 프랑스 말을 할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어, 아주 간단한 단어조차도 말이야. 내가 썼던 스와르의 의미를 알게되면 정말이지 우습지도 안을걸. 물론 난 나의 행동에 어색함이 없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었지. 단순한 예로 도대체 내가 어떻게 해서 모두의 신분을 알고 있었다고 생각하나?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펜타곤의 비밀 기지인 노아에 들어 갈 수 있었겠는냐 말이야?"
론은 대답치 못하고 애써 버티고 서있었고 리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되어 버린 사나이를 짙은 녹색 우주로 경청하며 까닭 모른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3구역의 비상탈출구가 열린 것도."
"이제야. 좀 돌아가는군. 하지만 너무 늦었소."
"진들이 가만히 나 둘 것이라 생각하오?"
"그 여자 성격에 물론 아니겠지. 하지만 내게는 이 녀석이 있어. 레피탄의 왕인 칸이."
겜마는 든든한 표정으로 자신의 뒤에 서있는 회색 레피탄을 바라보았다. 드칸은 알 수 없는 기운을 지닌 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생각했다.
'그렇다. 이 신은 어디선가 본적이 있다. 어디선가...'
"진이 나를 잡는 것과 나와 이 녀석이 조종실을 탈취하는 것 중에 어떤 것이 더 빠를 것 같소?"
더 이상의 대화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론은 마지막으로 힘주어 말하려 할 때 리나가 깨어나듯 외쳤다.
"아버지!"
겜마는 처음으로 접하는 단어에 대한 거북함을 그대로 들어냈다.
"아버지! 그렇게 해서 당신이 얻게 되는 게 뭐예요? 결국 아버지 역시 죽게 되는 거잖아요. 아버지의 목숨을 버리면서 까지 레피탄을 지키려 하는 이유가 뭐냐고요?"
"그건. 레피탄들이 나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자식?"
"그들이 가지고 있는 DNA는 나의 것을 기초로 만들어 진 거니까. 레피탄 한 마리 한 마리 모두가 나의 자식인 거야. 난 그들을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어. 그들의 아버지로서, 신으로서의 의무가."
"어떻게 그런..."
리나는 결국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펑 엉!'
문의 왼쪽 부분이 찢겨져 나가며 연기와 함께 작은 틈이 생겨났다.
"캡틴!!"
진의 쥐어짜는 듯한 외침이 들려왔다. 더 이상 시간을 지체 할 수 없다 생각한 겜마는 사형 집행을 하는 재판관 같은 투로 론에게 말했다.
"이제 끝을 맺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군."
론은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당당하게 몸을 일으키며 겜마와의 시선을 맞바꾼다.
"지구가 누구의 별이건 레피탄과 인간의 신이 누구 이건, 누구를 멸하고 누구를 살리건, 그런 건 중요한 게 안이요. 중요한 것은 한가지, 어떠한 생명체든, 어떠한 삶이든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그 의미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요. 겜마! 당신의 치졸한 지능으로 인간의 가치를 측정하지 마시오. 결국 당신 역시 인간의 그늘을 벗어 날수 없을 테니."
겜마의 무표정했던 인상이 무섭게 일그러졌다. 그는 분노하고 있었다. 신의 경지에 있는 자신을 인간으로 끓어 내린 인간에게. 하지만 입에선 차가운 한마디만이 흘러 나왔다.
"당신을 팀에 끼워 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 처음으로 인간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순간 이였소. 그럼 잘 가시오. 나의 창조자여."
겜마가 레피탄의 언어로 칸에게 말했다.
"레피탄의 왕이여, 저 인간들을 처단하라."
최면에서 깨어나 듯 드칸은 본 블레이드를 치켜세웠다.
'인간? 그래 이들은 신이 아니었던 거군. 난 속았던 거야. 신, 아니 겜마에게. 겜마? 이제 생각났어. 이자가 누구인지. 그래 이자는...'
'푸욱' 풍선의 공기 빠지는 듯한 소리와 함께 기대했던 기체 데신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바닥으로 파고들기 시작한 이 끈 적하고 비린내 나는 액체는 그 것을 지켜보는 론과 리나로 하여금 말할 수 없는 놀라움의 반전을 선사했다. 겜마는 서서히 고개를 움직여 액체가 흘러나오는 구멍을 바라다본다. 칼처럼 생긴 하얗고 기다란 뼈가 그 구멍 속에서 붉은 액체와 함께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겜마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뼈가 이어지고 있는 자신의 등 쪽을 돌아본다. 드칸은 자신의 본 블레이드가 박혀 있는 신의 몸 둥아 리를 쳐들어 널찍이 떨어져 있는 두 인간에게 집어 던졌다. 몸 둥아 리는 힘없이 날아가 론과 리나를 덮친다. 세 사람은 쓰러졌고 드칸은 목이 찢어져라 울부짖는다.
'드르르르라!!'
"왜, 나를. 너의 신인 나를."
피로 얼룩진 겜마의 억울한 심정이 희미해지는 의식 속에 가냘프게 흘러 나왔다. 론은 몸을 일으켜 겜마의 구멍을 손으로 눌러 지혈을 시도한다. 하지만 피는 멈추지 않고 겜마의 의식은 계속해서 흐려져만 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으르렁거리고 있는 레피탄이 조금씩 움직여온다.
"나는 이제 틀렸소. 론, 가시오. 가서 부디 레피탄들을..."
그토록 허무하게 한때나마 지구 유 일의 생존자이자 레피탄들의 신이었던 남자는 숨을 거두었다. 그의 마지막 말에 정신을 바짝 차린 론이 울먹이고 있는 리나를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리나, 잘 들어요. 우리 뒤편의 길로 가면 조종실과 탐사기 발사대의 두 길로 나뉘게 됩니다. 내가 녀석을 발사대 쪽으로 유인 할 테니 리나는 조종실로 가서 발사대의 헤치를 여는 거예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캡틴이."
여전히 울먹이며 말을 잊지 못하자 론이 다그쳤다.
"난 이카루스로 탈출하면 돼요! 이대로 녀석이 조종실로 들어가면 바비도 라밍도 파이오니아도 모든 게 끝이란 말입니다! 리나! 어서 뛰어요!"
겜마의 죽음을 확인하고 있는 드칸을 뒤로하고 두 사람은 죽을힘을 다해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한눈을 팔고 있던 레피탄의 왕이 달아나는 인간을 쫓아 달려든다. T자 형의 연결로 에서 두 남녀는 갈라졌다. 리나의 눈에선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그 중앙에선 드칸이 한순간의 딜레마에 빠져든다. 두 마리의 토끼를 쫓을 순 없다. 큰놈이냐, 작은놈이냐. 이때 그의 딜레마를 간단히 제거시키는 한마디가 들려왔다.
"레피탄!!"
론의 외침 이였다. 드칸은 가소롭게도 자신의 동족의 이름을 입에 담는 하찮은 인간을 두 동강 내기 위해 스프링처럼 튀어 나갔다. 론은 급히 몸을 돌려 달려나간다. 숨막히는 추격전 속에 기다란 통로를 통과하고 파일럿 대기실을 지나 발사대의 이카루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론은 재빨리 이카루스 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헤치는 열리지 않아 있다. 절망감과 공포의 나락으로 서서히 빠져든다. 하지만 그 순간, 론은 마음을 가다듬고 이카루스기의 탑승구를 과감히 개방시켰다.
'이렇게된 바에야.'
이때 막, 발사대 실로 들어온 레피탄과 론은 서로의 시선을 교환했다. 드칸은 인간에게 달라 들려 하다말고 다시 찾아온 위험의 그늘을 냄새 맛 는다. 레피탄의 왕은 그 그늘 속으로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5m 거리를 유지한 체 이카루스 안의 인간을 노려보고만 있다. 레피탄이 자신에게 달려들지 않자 초조해진 론이 소리쳤다.
"이 자식아! 뭘 망설이고 있나? 어서 와서 나를 죽이라고!"
드칸의 머리 속이 복잡하게 엉켜왔다. 하지만 섣불리 다가갈 수가 없다 적의 기만에 넘어가 버리면 그 순간이 끝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서 와라! 어서!"
론이 괴성을 질러 보지만 눈치 빠른 레피탄은 망설임과 관찰을 계속하며 다가서지 안는다. 론은 최후의 도박을 하기로 한다. 스위치를 누르자 탑승구의 커다란 마개가 다쳐왔다.
'윙 ∼ 잉'
부드러운 기계 음과 함께 마개와 기체와의 사이가 좁아져 왔다. 드칸의 신경이 급속도로 날 카로와 진다. 아드레날린이 분수처럼 뿜어져 몸 속을 뜨겁게 달구고 근육들이 아우성 친다. 그의 뇌리 저편에서 그를 책망하는 메아리들이 천둥 같은 소리로 울려 퍼졌다.
'무얼 망설이나 적이 도망가고 있다.'
엉키고 설킨 실타래가 가위로 잘리듯 그의 머리 속이 깨끗이 정리되는 순간 드칸은 바람처럼 움직여 좁혀오는 공간을 뚫고 이카루스 안에 들어갔다. 문이 닫혔고 좁은 공간 속에 갇혀 버린 인간과 레피탄의 처절한 사투가 시작됐다. 드칸은 론을 조종대 위에 때려눕히고 위에 올라탔다. 본 블레이드가 끄집어져 나왔고 론의 몸을 향해 난자된다. 론은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리나, 어서...'
피가 사방으로 튀어나가고 론의 몸은 조금씩 조각나 혼미해져 갔다. 이때 태양의 강렬한 빛이 론의 눈을 자극한다. 발사대의 헤치가 열린 것이다.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론은 조종 컨트롤러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터보 추진 스위치를 누르는 순간 이카루스는 푸른 하늘로 치솟았다. 갑작스레 창을 통해 들어오는 밝은 빛에 의해 드칸은 순간 어리둥절해 버린다. 곳, 상황을 깨달은 드칸이 울부짖는다.
'드르르라라라라!!'
"창조자와 창조물, 다함께 가는 거다!"
론의 외침과 드칸의 외침이 뒤섞여 지며 멋진 아치와 함께 하강하기 시작하는 이카루스기의 최후를 부추겼다. 가속도가 붙고 기체가 흔들거린다. 드칸의 외침이 계속되고 론이 눈을 감는다.
'쾅 ∼ 앙!'
아카루스는 작은 불꽃이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