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칭다오 한국인 도우미 마을(칭도마)
 
 
 
 

친구 카페

 
등록된 친구카페가 없습니다
 
카페 게시글
[사랑방]자유로운 이야기 스크랩 [기타] 어버이날 선비고장 전주 방문....
잡초 추천 0 조회 64 06.05.10 11:51 댓글 5
게시글 본문내용

뜬금없는 주문이다.

장모님게서 전주 비빕밥을 잡수시겠다고 벼른다.

고령서 전주까정은 왕복 5시간이 족히 걸려야 오고갈수 있는 거리다.

허나 어쩌랴 .........

어버이 날이라서 거절하기보담은 이런날 선택해서 못다한 효도를 채우겠다는 심상으로  날을 잡았다.그저 비빕밥 한그릇 달랑 챙기고 오기는 넘 먼거리라서 이것 저것 구경거리를 혼자서 정리해 본다. 전주는 몇차례 다녀 봣길래 길이 훤하다. 어른들 구미 당기는 프로그램을 쉽게 정리 할수 있었다.........

 

마침 아내의 학교가 시험 기간이라서리 오전 수업 끝남과 동시 88고속도로를 미끌렸다.

전주에 도착 곧장 비빕밥을 먹자는 어른들의 의견을 차안에서 바꿨다. 전주 한식으로 늦은 점심을 먹은후 한지 공예전을 감상하고 경기전/유서깊은 성당까지 구경후 천천히 저녁때 유명하고 맛난 전주 비빕밥으로 마무리후 돌아오자 했다..........

 

 

 

전주의 교동과 풍남동 일대 한옥촌은 가로 300m?세로 700m에 이르는 4개 구역에 기와를 얹은 한옥 800여 채가 모여있다. 이곳에 마을이 형성된 것은 고려 말기쯤인데 조선 중기 이후 양반들이 많이 모여 살면서 자연스럽게 한옥 기와촌이 형성됐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와 해방을 거치면서 새로 신축되거나 실내 구조와 담, 대문 등이 많이 바뀌었다. 이 때문에 건축학자들은 한옥의 모양과 구조가 시대에 따라 어떻게 변해 가는지를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한옥 박물관`이라고 부른다. 한옥이 전주에 많은 것은 전주가 양반의 고향이기 때문이다.

 

 

 

 

한지의 발전 과정
1) 초기
105년 중국 후한시대 채륜에 의해 개량된 종이생산 기술은 이후 한반도에도 전해졌으며 비슷한 시기 한반도에서도 종이와 비슷하게 쓰였던 재료가 발견 되었다는 얘기가 전하는 것을 보아, 아마도 한반도에서도 채륜에 의한 개량시기에 앞서 종이가 쓰였으리라 추측된다.
「일본서기(日本書記)」에 고구려 승 담징이 영양왕 21년(610)에 종이와 먹을 만드는 기술을 일본에 전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2) 전기
종이 원료는 우리나라에 제지술이 처음 전래되던 시기의 경우 마(麻)와 저(楮)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다가 7세기 전후에 이르러 닥나무가 우리 종이의 주 원료로 사용되었으며, 또 이때부터 기술면에서도 중국의 제지술에서 벗어나 우리만의 기술로 종이를 제조하게 되는 것 같다. 삼국시대 각 국의 우수한 문화적 역량은 한반도 최초의 통일왕조인 고려가 세워짐으로써 보다 발전하게 되었다.
3) 중기
우리나라 제지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통일 신라를 거쳐 고려시대에 이르러서이다. 11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확대된 불경 조판사업으로 종이 생산기술은 크게 발달하였으며, 국가에서도 이들 종이 생산 기술자들을 지장(紙匠)이라는 명칭을 주었고, 이들을 모아 특수 집단인 ‘소(所)' 로 구성하게 하여 이들의 기술을 한층 더 높일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해 주었다. 중국인들이 제일의 종이로 선호하는 고려지는 이 때 형성된 것이다.
4) 후기
조선시대에 들어 종이 생산기술은 중요한 국가 수공업의 하나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양에 조지서라는 기구를 설치해 종이생산을 담당케 하였다. 이러한 기틀 위에서 중앙과 각 지방의 종이 생산 기술자들은 수많은 노력과 경험을 통해 다양하면서도 우수한 종류의 종이를 생산하게 되었다. 또한 인접한 중국과 일본의 종이 생산재료 및 기술을 들여와 우리 역사 속에 축적된 기술과 외래 기술을 바탕으로 더 한층 높은 우리만의 종이 생산기술로 발전시켜 우리 종이의 우수함이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풍남문에서 동쪽으로 150m 쯤 가면, 고색이 창연한 경기전이 나온다. 사적 제339호로 지정된 경내에는 유형문화재 제2호로 지정된 경기전과 유형문화재 제16호로 지정된 조경묘가 있다. 조선왕조를 창업한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하기 위하여 태종 10년(1410년)에창건하였다.

경기전은 조선이 건국되자 왕기를 공고히 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으로서 태조의 어용을 봉안하였으며, 태종 14년(1414년)에 건립되었다. 전주, 경주, 평양 등은 창건 당시에는 어용전이라 불리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는 태조진전이라 하였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숭전이라 하였다.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네 곳에 있었던 태조 어용전은 전부 소실되었다. 경기전은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6년(1614년) 11월에 중건되었다.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내 동남쪽에 광대한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 때에 그 서쪽을 분할하여 일본인 전용인 수상소학교를 세움으로써 경기전 절반 이상의 땅을 상실하였으며, 부속된 건물은 이때 거의 철거되었다. 현존 건물인 전각은 다포식 맞배지붕 건물로서, 전면에 하마비, 홍살문, 외삼문, 내삼문등이 있다.

경기전에 봉안된 어용은 경주 집경전본을 모사한 것이었는데, 세종 24년(1442년)7월에 집경전의 어용과 함께 개화하여 동년 10월에 봉안했다.

현재 경기전 어진은 고종 9년(1872년) 9월에 개화한 것이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빨리 내장산에 피난하였다가 정읍, 태인, 익산, 용안, 임천, 은산, 정산, 온양, 아산을 거친 다음 강화도, 안주를 경유하여 묘향산, 보현사 별전에 봉안되었다.

그 후 어용은 여러 번의 수난을 겪었는데, 즉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 때는 무주 적상산성에 피난했다가 돌아온 일이 있었으며, 영조 43년(1767년)이른바 정해대재 때는 전주향교 명륜당에 긴급 피난한 일이 있었으며, 고종 31년(1894년)에는 동학군의 전주입성으로 한때 위봉산성에 피난하기도 했다. 경기전에 인접한 북쪽에 전주이씨의 시조인 이한 공과 시조비의 위패를 봉안한 조경묘가 있다.

조경묘는 영조 47년에 창건하여 영조가 친히 위패를 썼으며 동학혁명군이 전주부성에 입성할 때 태조의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옮겼다가 7월에 다시 전주로 옮겨 놓았다.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전동에 있는 천주교 성당.

사적 제288호. 대지 약 1만 3,200㎡, 건물면적 약 625㎡이다. 1891년 프랑스인 신부 보두네가 대지를 매입하고, 1908년 푸아넬 신부의 설계로 착공하여 1914년에 준공했다. 회색과 적색의 이형(異形) 벽돌을 사용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로서, 내부 열주(列柱)는 8각 석주로 되어 있으며, 석주 사이는 반원의 아치로 연결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전주는 전라감영이 있는 곳으로 천주교회사에서 많은 순교자를 낸 곳으로 꼽힌다. 이 성당은 자연순교지의 하나가 되어 있는 전동의 풍남문이 있던 곳에 세워졌다.

 

 

 

 

 

 

 

 

 

40년 전통으로 2대째 내려 오고 있다. 전주비빔밥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구석구석 손길이 묻어 윤이 반질반질나는 나무로 되어 있는 실내를 봐도 오래된 집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돌솥이나 다른 비빔밥에 눈을 돌리지 않고 오로지 유기그릇 비빔밥만을 고집하고 있는 것만 봐도 제대로 된 전통 전주비빔밥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포묵, 버섯, 오이, 숙주나물, 당근, 김 등 식욕을 자극하는 형형색색의 20여 가지 고명들이 비빔밥 위에 가지런히 담아져 나온다

성미당의 맛의 비결을 세가지로 말하자면 직접 담궈 1년이상 보관한 찹쌀 고추장 맛이 그 첫째요, 고소한 참기름 맛이 그 둘째요, 셋째는 신선한 육회에 있다. 입안이 얼얼한 찹쌀 고추장은 먹을수록 그 매콤한 맛이 계속 땡기는, 흡입력이 있다. 한동안 안먹으면 그 고추장 맛이 그리워 이집 비빕밥을 먹고 싶은 충동에 당장이라도 전주로 내려가고 싶은 기분이 든다고 하면 과장일까? 참기름 맛은 또 어떠한가. 처음에는 참기름이 많이 들어가서 참기름 맛이 진하게 나는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라. 직접 짰다는 참기름이 향과 맛을 두배로 끌어올려 주기 때문에 진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2,000원을 더내야 먹을 수 있는 육회비빔밥은 다소 비싼감이 없지 않지만 그날그날 들어오는 육회를 사용하여 얼린 고기를 썰어 만든 육회에서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맛이 난다. 쫄깃쫄깃하게 싶히는 그 감칠맛이란. 먹다보면 밥의 온기로 살짝 익어 마치 스테이크를 먹는 듯하다.

비빔밥의 고명을 들쳐보면 살짝 놀라게 된다. 밥이 이미 비벼져 있기 때문. 주말에는 350그릇이나 나간다는 비빔밥을 직접 비빈다고 생각하니 그 정성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 손맛 때문일까. 성미당의 비빔밥은 손맛까지 더해져 유독 맛이 있다. 게다가 밥이 식지 않도록 유기그릇을 따뜻하게 데워서 내온다고 하니 손님 입장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마음 씀씀이까지 느껴진다.

 

 

 
다음검색
댓글
  • 06.05.10 12:18

    첫댓글 뜻깊은 하루를 보내셨습니다.전주비빔밥은 역시 전주에 가서 먹어야....

  • 06.05.10 12:51

    내 밥상이 초라해지네요....

  • 06.05.10 16:42

    전 고궁에 주로 갔었는데.. 다음에는 잡초님이 이야기하신 곳에 한 번 가봐야겠어요.

  • 06.05.11 10:51

    잡초님이 부럽고 전주비빔밥이 먹고 싶다.

  • 06.05.11 15:52

    장모님 한데 사랑받는 사위는 뭐가 달라도 달라. 나 처럼!!ㅎㅎ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