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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가을 계방산을 뛰어오른 적이 있다. 강원도 평창·홍천군에 걸쳐 있는 이 산은 1577m다. 남한에서 다섯 번째 고지를 달려 오르게 된 건 그해 9월 16일 강릉 안인진리에 침투한 북한 무장간첩 때문이었다. 당시 간첩 대부분은 화비령·칠성산에서 소탕됐다. 그런데 몇몇 잔당의 종적이 아리송해졌다. '어디까지 도주…' 식의 추측 보도가 난무할 무렵 계방산에서 버섯 캐던 주민 3명이 사살된 것이다.
각사 기자들의 육군 소령을 앞세운 기묘한 산상(山上) 질주는 정상 부근에서 끝났다. 현장은 잔당들이 대관령→진고개→계방산→향로봉 코스로 북진 탈출을 시도하는 것 아니냐는 정황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금도 인적 드문 계방산은 북한 '수습 간첩'의 교육장이라고 한다. 태백산맥 줄기를 타고 경북 울진 근처까지 내려왔다 돌아간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계방산 주변엔 공비(共匪)와 관련된 비극이 이 땅에서 제일 많다.
그 가운데 40대 이상의 기억에 아직도 생생한 사건이 1968년 12월 9일 밤 벌어졌다.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노동리 화전민의 외딴 집이었다. 11월 2일 울진에 상륙한 공비 120명 가운데 일부가 나타난 것이다. 화전민 일가족 중 가장 잔인하게 살해된 사람은 아홉 살 난 이승복군이었다. "야, 너는 북한이 좋으냐, 남한이 좋으냐"는 공비의 물음에 "우리는 북한은 싫어요. 공산당은 싫어요"라고 답한 게 화근이었다.
공비는 대검을 뽑아 아이의 입속에 쑤셔넣었다. 아홉 번째 생일에 삶을 마감한 승복군은 '반공(反共)의 상징'에서 사후 30년인 1998년 종북 좌파에 의해 '조작의 상징'이 되는 비극적 운명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다. 중앙일보(1998년 6월 25일)→월간 '말'(같은 해 8월호)→주간 '미디어오늘'(같은 해 9월 2일)→MBC PD수첩(같은 해 9월 22일)이 파상적으로 조선일보의 이승복군 관련 보도가 작문(作文)이라고 몰아붙인 것이다.
46년 전 공비가, 16년 전 선동가가 다시 죽인 아이의 진실을 찾기 위한 8년 전쟁은 조선일보의 승리로 끝났다. 며칠 전 받은 '우리는 공산당이 싫어요'라는 책의 저자는 조선일보 기자들과 함께 '악마의 변호인'과 맞선 김태수 변호사다. 그는 말한다. "왜 이승복 사건을 종북 좌파들은 파괴해야 할 상징으로 보는가. 북한 지도부의 도덕성을 밑바닥부터 흔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궁핍한 화전민 가족, 그들이 말하는 인민 중의 인민을 '인민의 군대'가 무참히 도륙했으니 그들에겐 '불편한 진실'이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는 수십 년 전 사건을 느닷없이 들고 나와 재해석하려는 세력이 있다. 이승복군 사건만큼이나 논쟁이 되는 1987년 KAL 858기 폭파 사건도 그중 하나다. 김 변호사는 여기에 대해서도 명쾌하게 진단하고 있다. "탑승자 전원이 풀뿌리 민중인 중동 건설현장 근로자였다. 논란의 본질 역시 승복군 사건과 비슷하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규명이 이뤄졌지만 좌파들은 '조작됐다'는 결론 외에는 결과에 승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책을 쓴 것은 2007년 여름이었다. 원고가 7년간 봉인(封印)된 것은 반공 소재의 책을 누가 읽겠느냐는 만류 때문이라고 한다.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변호인'보다 더 외롭고 정의로운 투쟁이 과연 영화화되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안고 책을 덮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