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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3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30 15.03.10 10:1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장송이 조조를 비웃은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60회에는 서천 유장 휘하의 장송이 허창에서 조조를 비웃는 장면이 나온다.

장로의 공격에 대비해 유장이 보낸 장송이었지만 장송은 유장이 가망없다고 생각하여

조조에게 서천지도를 바치고자 하였다. 하지만 정작 조조에게는 푸대접을 받기만 했다.

 

이에 분노한 장송은 조조의 재능에 관해 비판을 퍼붓고 조조의 저서 ' 맹덕신서 ' 를

훑어본 뒤 전국시대 무명인의 표절이라 말하며 촉의 어린아이들도 암송하는 수준으로

비하한다. 이에 발끈한 조조가 다음 날, 휘황찬란한 호위군을 집합시킨 가운데

장송에게 그것을 보여주며 으름장을 놓자 조조의 패배한 전투만을 열거하며 화를 돋운다.

결국 조조가 장송을 목베려하자 양수, 순욱 등이 말려 간신히 목숨만 건진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

장송이 조조를 만난 장소는 허창이 아닌 형주였으며 208년, 조조가 형주에 입성했을 때다.

또 장송은 조조의 맹덕신서를 두고 양수와 언쟁한 적이 없으며 조조를 비웃지도 않았다.

사서에서 장송이 조조를 앞에 두고 비웃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조가 장송을 죽이려한

적도 없었다. 더욱이 몇 번이나 조조를 비웃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 언급이 없다.

 

이상의 예에서 보듯 장송이 조조를 비웃었다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나관중이 조조를 웃음거리로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허구의 하나라 할 수 있다.

 

2. 관우는 과연 칼 한 자루만 가지고 술자리에 참석한 것인가 ?

 

- 연의에서는 형주반환 문제를 두고 노숙과 관우가 담판을 짓는 장면이 나온다.

노숙은 육구 임강정에서 연회를 베풀고 관우를 초대하여 형주를 돌려받고자 하였다.

여의치 않을 때는 잠복시켜놓은 도부수를 이용 관우를 죽일 작정이었다.

 

관우는 대도 한 자루와 주창만을 곁에 두고 담판에 응했다.

여몽과 감녕이 강가에 군사들과 함께 숨어있고, 임강정 뒷편에 도부수들이 매복해있는

매우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결국 관우의 기지로 위기를 탈출하는 것이 주내용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

손권은 유비가 적벽대전 이후 빌려간 형주를 반환할 마음이 없음을 잘 알았다.

제갈근 등을 보내 반환을 요구했지만 유비는 다른 이유를 대며 반환을 미루었다.

결국 장사.영릉.계양 세 군에 관원을 임명해 부임시켰지만, 모두 관우에게 쫓겨났다.

 

정사 <주유전> <노숙전> 을 보면 당시 유비와 관우의 태도가 강경하여기에

노숙은 익양에 진입하여 관우와 대치함과 동시에 관우와 회담을 갖기로 하였다.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 서로 병사와 말을 백 보 떨어진 곳에 머무르게 하고, 장군만이 대도 한 자루를 차고 

회견에 임한다 '

 

두 사람의 익양 회견은 관우 혼자 대도 한 자루를 차고 회담에 나타난 것이 아니라,

쌍방 모두 대도 한 자루씩 차고 회담에 나온 것이다.

 

이 밖에도 두 사람의 회담에서 노숙은 당당한 언사로 유비의 신의 없음을 비난했지만,

관우는 말이 궁핍하여 회피하기만 하였다. 연의에서처럼 관우는 정기가 가득하고,

노숙은 횡설수설하는 수동적 자세가 전혀 아니었다.

더구나 노숙이 덫을 놓아 관우를 살해하려 했다는 근거는 사서 그 어디에도 없다.

 

3. 노숙은 과연 평범한 사나이였는가 ?

 

- 연의에서 노숙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크지 않으며 무게감도 상당히 떨어진다.

성실하고 정직한 성격을 가지고 있으나 소심한 인물로, 조연 정도로 등장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제 역사 속의 노숙 역시 그토록 평범하고 무능했을까?

정답은 전혀 아니오이다. 역사에 등장하는 노숙은 오의 명장으로 매우 지혜로운 사람이며

중국 고대의 인물 중 몇 손가락 안에 들만큼 걸출한 영웅호걸의 한 사람이었다.

연의에서와 같이 절대 평범한 모습의 사나이는 아니었다.

 

정사의 <노숙전> 을 인용한 <오서>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노숙은 난세에 처하여 젊은 시절부터 뜻이 커서, 종종 사람들의 의표를 찌르를 일을 했다.

일찍부터 전란을 수습하여 세상을 구하고자 하는 원대한 뜻을 세우고 있었다. '

 

또한 그는 천하의 호걸과 교류하며, 병법에 능통하고 담론에 뛰어났으며,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사려 깊은 인물이었다.

 

조조에 대항하기 위한 손.유 연합의 제창자 역시 노숙이었으며 제갈량이 오를 방문할 수

있었던 것 역시 노숙의 지지와 동행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연의에서 노숙이 평범하게 그려진 것은 제갈량의 인의와 지혜를 돋보이기 위한 것이었다.

 

4. 제갈량은 한중공략에 관여했는가 ?

 

- 연의 72회와 73회에서는 유비와 조조가 서로에게 매우 중요했던 한중을 차지하기 위해

격렬히 싸우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제갈량이 의심 많은 조조의 성격을 간파하여

의병 (거짓 복병) 을 사용하여 승리를 거두고 한중을 차지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서를 살펴보면 실제 역사는 이와 다르다.

건안 20년 (215년) 조조는 관중을 차지하고 대군을 투입해 한중의 장로를 공격하여

항복을 받아낸다. 조조의 세력은 한중까지 넓어져 삼파 깊숙한 곳에 이르렀다.

 

불안해진 유비는 황권에게 조조가 임명한 삼파의 수령을 공격하게 하고,

그 결과 삼파지역을 제압하였다. 조조는 장합을 보내 대항하게 하였지만 장비에게 패한다.

 

조조가 한중 주둔시, 사마의와 유엽 등이 서천으로의 진격을 건의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리고 하후연에게 한중의 수비를 맡긴 후, 자신은 중원으로 돌아갔다.

 

당시 법정은 조조의 심정을 간파하고 유비에게 한중진격을 건의한 뒤,

그 당위성을 역설했다. 결국 유비는 건안 24년 (219년) 대군을 이끌고 정군산에 출진했다.

조조군에서는 하후연이 전력을 다해 방어했고, 유비는 황충까지 투입한 끝에

조조군을 무찌른 뒤 대장 하후연의 목까지 벨 수 있었다.

조조군은 장합의 통솔 아래 양평관으로 퇴각하였다.

결국 유비는 한중을 점령하고 7월에 스스로 한중왕에 오른 것이다.

 

이와 같이 한중에서 전투가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이것은 유비와 법정의 지휘하에

행해진 것일뿐, 제갈량과는 직접 관계가 없었다. 제갈량의 지혜에 의한 승리가 아니었다.

 

제갈량은 당시 성도유수로 식량과 군사의 보급을 맡았고, 일년 넘게 지속된 한중전투에서

군수품보급과 장병 동원은 매우 중대한 역활이었기에 그 공은 아주 크다 할 수 있다.

 

5. 화타가 관우의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75회에서는 건안 24년 (219년)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수공한 후,

군사를 이끌고 번성을 공격하는 모습이 나온다. 이 때 오른팔에 독화살을 맞고,

거무튀튀하게 부어올라 더이상 움직일수 없었다. 결국 당대의 명의 화타가 나섰다.

 

장교에게 큰 쟁반을 들게하고 팔 밑으로 흐르는 피를 받게 하였다.

작은 칼로 살을 자르고 쓱쓱 뼈를 깍아냈다.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정작 당사자인 관우는 마량과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며 담소를 나눌뿐, 조금도 고통스런

기색을 비추지 않아 모두의 감탄을 자아냈다.

이 것은 과연 사실인가?

 

정사의 <관우전> 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 관우는 예전에 화살에 맞아 왼팔에 관통상을 당했다. 나중에 그 상처는 치료했지만,

비가 오거나 구름이 낀 날에는 항상 상처가 쑤시고 아팠다. 상처를 치료한 의사가

화살 끝에 묻어 있던 독이 뼈에 스며 들었으니, 팔의 상처를 찢어 뼈를 깍아 독을 제거하면

이 아픔은 없어진다 라고 하였다 '

 

관우가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나관중의 이야기도

기본은 사실에 틀림없다. 다만 연의는 역사적 사실을 몇 가지 고쳤다.

 

우선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수공하기 전이었다.

번성을 공격했을 때 화살에 맞은 사실은 없다.

 

그리고 뼈를 깍아 독을 치료한 것은 화살에 의한 상처가 치료된 후의 일일뿐,

화살에 맞았을 때는 아니다. 또 사서에서는 왼팔을 관통당했다고 썼는데,

연의에서는 오른팔로 나타나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우를 수술한 의사가 화타라는 사실이다.

실제 화타는 208년 조조에 의해 죽임을 당했고, 관우가 조조의 칠군을 수공한 것은

219년의 일이다. 11년 전 죽은 화타가 다시 살아나 관우를 치료한다 ?

애시당초 이 의사는 화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6. 형주습격의 계략은 누가 세웠는가 ?

 

-  연의 75회를 보면  육손의 계략으로 오나라가 형주를 차지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몽은 관우가 번성 원정에 나간 틈을 타 형주를 차지할 것은 손권에 진언한다.

그러나 관우가 이미 장강연안에 엄중한 경계태세를 쌓자 병을 핑계로 물러났다.

 

손권이 육손을 보내 여몽의 상태를 알아보게 하니, 과연 병든 기색이 아니었다.

육손은 여몽에게 한자기 계략을 제안한다. 병든 여몽을 대신하여 오나라의 병권을

자신에게 물려주라는 것이다. 육손의 계략대로 여몽의 병권을 육손에게 물려주자,

관우는 그 때까지 별 이름없던 육손을 경시하여 드디어 경계를 느슨히하기 시작했다.

 

결국 이를 탐지한 육손이 손권에게 급히 보고했고, 손권은 여몽을 대도독에 임명하여

강동의 군사력을 총지휘하게 하였다. 결국 쾌속선 팔십척에 배 안에는 병사들을 숨겨놓고,

배 위에는 상인으로 위장한 병사들을 올려놓은 뒤, 봉화대의 수비군까지 매수하여

정박을 허락받았다.

 

밤이 되어 배안에 숨어있던 정예병을 풀어놓고, 장강 연안의 봉화대를 모두 점령한 뒤,

경보를 받지못한 형주성의 봉화대 수비병마저 포섭하여 성문을 열게하고 순식간에

형주를 점령한 것이다.

 

하지만 정사의 <여몽전> 과 <육손전> 그 밖의 사서를 살펴보면 형주탈환 작전의

입안자도 실행자도 모두 여몽이다. 이 계획의 일등공신은 단연 여몽인 것이다.

 

여몽은 처음부터 적벽대전 이후 유비를 삼켜버려야한다는 강경론자였고,

수차례 주유 이후 병권을 쥐고있던 노숙과 손권에게 이를 건의했다.

217년 노숙을 대신하여 병권을 통솔한 이후 계속 형주를 습격할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손권에게 여몽 자신의 병을 치료할 구실로 수도 건업으로 불러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하면 관우는 반드시 이를 진짜로 여겨 후방의 군대를 번성전투에 투입할 것이며

그 때 장강을 북상하여 급습하면 남부를 손에 넣고 관우도 생포할 것이라 주장한다.

 

결국 건의대로 여몽은 건업에 불려왔고, 마침 여몽을 문병온 육손이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과 손권의 비밀이므로 발설치 않았다.

다만 자신과 생각이 같음을 확인한 육손을 자신의 후임으로 육구에 주둔시킨다.

 

육구에 주둔한 육손은 크게 과장하여 관우의 용기와 지략을 칭찬하였다.

이에 관우는 육손을 일개 풋나기로 과소평가하고 대단치 않게 여겼다.

완전히 방심한 관우는 결국 후방의 부대를 이동하여 전선에 증원하였다.

 

그 즉시 손권은 여몽을 총사령관에 임여하고 형주의 남부로 급파했다.

그리고 백의로 속여 장강을 건넌 후, 연안 초소를 함락시키고 군대를 형주성으로 향했다.

강릉과 공안의 수비를 맡았던 미방과 부사인은 평소 관우에게 불만을 갖고 있던터라

손쉽게 여몽에게 투항해버렸다. 고립된 관우는 상용에 있던 유봉과 맹달에게 사자를 보내

구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한다. 당시 양양과 번성의 전투상황으로 볼 때, 조인의 추격태세

는 갖추어지지 않았다.

 

결국 고립된 관우는 어쩔수 없이 군사를 이끌고 서쪽의 맥성으로 후퇴할수 밖에 없었고,

곧 생포됨과 동시에 형주를 빼앗기고 말았다.

 

실제 육손은 여몽과 같은 계략을 갖고 있었다기보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한 것이었다.

미리 여몽을 위한 계략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형주를 탈환하는 계획은 여몽과 손권이

생각하고 실행한 것이며, 육손은 국외자에 지나지 않았다.

 

삼국지정사의 저자 진수는 여몽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 용감하고 작전의 결단력이 뛰어났다. 형주를 빼앗고 관우를 생포한 것은 가장 큰 공이다 '

 

연의에서 여몽을 용기는 있되 계략이 부족한 평범한 인물로 그린 것은

육손의 비범한 지혜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에서였다.

 

7. 손권은 진심으로 관우를 귀순시키려 하였는가 ?

 

- 연의 76회에서는 맥성에 갇혀 절체절명의 위기에 놓인 관우에게 손권이 제갈근을 보내

투항을 권유하는 장면이 나온다. 관우는 이를 단번에 거절하고 제갈근은 소득없이 물러난다. 결국 관우는 아들 관평과 함께 탈출을 시도하다 생포당하고 이후 죽임을 당한다.

 

정사 <여몽전> <관우전> <손권전> <주연전> <반장전> 등의 기록을 보면,

관우가 맥성으로 패퇴한 뒤 손권에게 생포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관우 부자가 맥성으로 후퇴한 뒤 임저에서 처형당할 때까지,

그 사이 손권이 제갈근을 보내 귀순을 권유했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삼국지연의가 널리 퍼진 후, 관우의 맥성 패퇴를 둘러싼 이야기는

대중들 속에 깊이 침투되어 오랫동안 진실로 신봉되었다.

 

사람들은 관우를 믿고, 관우의 마지막 미치광이 같았던 전투를 믿고,

관우가 제갈근에게 말한 정의감 넘치는 교훈을 믿고, 죽음에도 굴하지 않는

일생의 충의를 굳게 믿은 것이다.

 

8. 관흥과 장포는 유비의 동정에 참가하였는가 ?

 

- 연의 81회는 관우.장비가 죽임을 당한 후 분노한 유비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군사를 일으켜 원수를 갚을 것을 결의하였다.

결국 칠십만 대군을 동원하여, 오반을 선봉으로 삼고 관흥, 장포에게 친위대를 맡기고

몸소 군사를 지휘하여 동진하였다.

 

촉한의 군사가 이르는 곳마다 오병은 소문을 들은 것만으로 투항하였다.

촉한의 대군은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의도에 이르렀다.

그 동안 관흥.장포는 오의 좌도독 손환과 이이 등을 해치우고, 사정을 찔러 죽이고,

마충을 물리치고, 효정을 공격하여 빼앗아 오군을 대파하였다.

 

이렇듯 관흥. 장포는 오군과 교전하며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 원한과 분노를 씻어

충의의 정신을 발휘하였다.  그렇다면 이것은 과연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것인가 ?

 

정사 <관우전> 에 의하면 관우에게는 확실히 관흥이라는 아들이 있었고,

어릴 적부터 좋은 평판이 있어 제갈량이 중히 여겼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약관의 나이에 요절하였다.

따라서 요절한 관흥이 특별한 군공을 세울리 만무하고,

유비의 동정에 참가한다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었다.

 

장포 역시 마찬가지다.

정사 <장비전>에 의하면 장비에게 확실히 장포라는 아들이 있었지만,

장비가 죽기 전에 이미 요절했다. 때문에 장포 역시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유비의 동정에 참가한다는 것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두 명 모두 동정에 참가한 일도 없고, 참가할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관우.장비의 사후 이미 요절한 두 아들이 부활하여 오군에게 큰 타격을 입히고,

황충을 위기에서 구해내고, 어려움 속에 반장을 베고, 관우를 배반한 미방과 부사인을

죽이고, 관우를 살해한 마충의 목을 베고, 손권을 협박하여 장비를 살해한 범강. 장달

두 배반자를 송환시켜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다는 영웅적 행위를 허구화시켜 만든 것은

그만큼 두 영웅의 죽음을 크게 아쉬워하고 그들의 위대성을 관철하기 위한 작가의

의도가 진하게 베어 있는 것이다.

 

9. 황충은 어떻게 죽었는가 ?

 

- 연의 83회에는 유비의 동정에 참가한 황충의 모습이 그려진다.

노장은 도움이 안된다는 유비의 말에 오기가 난 황충은 칼을 차고 말을 달려

적진으로 돌진하였다. 오의 장수 사적을 죽이고, 반장을 쫓아내는 승리를 거두었다.

 

그는 관흥.장포의 진영으로 돌아오라는 충고도 무시하고 다음 날 다시 반장에게

싸움을 걸었다. 하지만 반장의 계략에 속아 후퇴하던 그를 쫓다 마충이 쏜 화살에

어깨를 맞고 그날 밤 죽음을 맞이한다.

 

사서를 살펴보면 황충의 이 죽음은 전면적으로 허구화된 것이다.

정사의 <황충전> 에는 건안 25년 (220년) 그가 성도에서 병사했음이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그럼에도 사후 일년 뒤, 다시 부활하여 유비의 동정에 참가해 오를 정벌하고

사적을 벤 뒤, 반장까지 혼내주고 전장에서 전사했다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

 

10. 육손은 팔진도에 갇혀 고생하였는가 ?

 

- 연의 84회에는 제갈량이 교묘히 팔진도를 설치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제갈량은 서천에 들어가면서 봉절의 어복포에 오군의 침공을 막기 위한

석진 (팔진도) 을 펼쳐놓았다. 언젠가 오의 대장이 이 곳에서 헤맬 것이라는 예언과 함께.

 

유비가 이릉에서 대패하여 퇴각하자, 육손은 기문관까지 추격하였다.

살펴보니 전방의 장강 연안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그는 경솔하게 나아가지 않고,

서둘러 정찰병을 보냄과 동시에 군사를 후퇴시켜 적에게 대비시켰다.

이윽고 정찰병이 돌아와 보고하였다.

 

"전방에 촉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어복포 일대에 돌산만 팔구십개 흩어져 있습니다 "

 

육손이 수십 기의 부하들을 끌고 전방에 위치한 산의 경사면에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사방 팔방 돌산이 흩어져 있고 각 방위마다 입구가 있어 통행할수 있게 되어있다.

 

의문을 가진 육손이 몇 기를 이끌고 석진으로 들어가 보았다.

특별한 의문점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한 부장이 날이 저문다는 것을 알렸다.

육손이 진을 나오려하자 갑자기 광풍이 일어나고 모래와 돌이 천지를 뒤덮듯 날렸다.

괴석은 검처럼 우뚝 솟고, 모래나 흙이 산처럼 겹겹이 쌓이고, 성난 파도가 으르렁대며

천군만마와 같이 습격해왔다. 육손은 너무 놀라 비명만 지르며 우왕좌왕했다.

이 때 제갈량의 장인 황승언이 나타나 길을 안내하여 겨우 탈출할 수 있었다.

육손은 그제서야 이것이 팔진도라는 것을 알고 황승언에게 예를 올린 뒤 물러났다.

 

육손은 정말로 제갈량의 팔진도로 곤경에 처했던 것인가 ?

정사의 <유비전> <유손전> 에 의하면 유비가 백제성으로 도망치자,

오군의 장수 서성, 반장, 송겸 등은 추격하여 유비를 생포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육손은 이이, 유아의 소부대로 한동안 추격하게 하였을뿐,

대부대는 위의 침공을 막기 위해서 재빨리 후퇴시켰다.

애초에 육손이 유비를 추격하지 않았으므로 그가 제갈량의 팔진도에 혼나는 따위의

일은 있을 수 없었다.

 

11.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세웠는가 ?

 

- 연의 85회에 처음 등장하는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략을 올린다.

조비는 유비가 죽고 유선이 뒤를 이었다는 소식을 듣고 춤을 추며 기뻐하였다.

여러 신하가 연달아 계략을 진언할 때, 사마의도 이 기회에 촉을 치자고 주장하였다.

 

그는 위의 군사력만으로 촉을 치면 즉각적인 승리를 거둘수 없다면서,

다음과 같은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치는 계략을 진언했다.

 

첫째, 선비족의 왕인 가비능에게 십만의 군사를 요청하여, 서평관을 공략하게 한다.

둘째, 만왕 맹획에게 십만의 군사를 요청하여, 익주.영창 등을 공략하게 한다.

셋째, 오의 손권에게 십만군사를 요청하여, 서천협을 공략하게 한다.

넷째, 항복한 장수 맹달에게 십만의 군사를 요청하여, 상용에서 한중으로 진격하게 한다.

다섯째, 대장 조진에게 십만의 군사를 맡겨, 양평관에서 서천을 공략하게 한다.

 

사마의는 이 다섯 방면의 협공이라면 제아무리 제갈량이 태공망 여상의 재주가 있다해도

처음부터 끝까지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따라서 촉의 멸망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후주 유선이 새파랗게 질렸음에도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던

제갈량은 이미 몰래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첫째, 마초에게 명해 서평관을 지키게하여 가비능을 막는다.

둘째, 위연에게 명하여 복병을 설치하여 맹획을 막는다.

셋째, 이엄의 자필을 가장한 서신을 보내 맹달의 마음을 부추긴다.

넷째, 조운에게 명해 양평관을 지키게하여 조진을 막는다.

다섯째, 등지를 사신으로 오에 보내 양국의 관계를 수복한다.

 

이러한 계획은 모두 그대로 시행되었고, 사마의의 계략 역시 조용히 깨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획을 세웠는가?

삼국지 정사를 비롯 진서 등 사서에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는 허구이다.

또 사마의의 계략이나 제갈량의 대책이라는 것 역시 진실과 허구가 뒤섞여 있다.

 

첫째, 건흥 원년 (223년) 오와 위는 대치상태였다. 연합해 촉을 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둘째, 건흥 원년에 맹획은 익주군의 실력자 옹개의 부하에 지나지 않았다.

          위가 옹개에게 아무 인사도 없이 맹획에게 출병을 요청하는 일은 불가능하였다.

셋째, 정사를 보면 마초는 장무 2년 (222년) 에 죽었다.

           223년에 군사를 맡아 서평관을 지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넷째, 등지가 수교의 사신으로 오에 건너간 일은 사실이다.

           그는 오.촉 동맹을 재건한 공신의 한 사람이다.

           동맹 수복 후 오는 위와 관계를 단절했다.

 

결론적으로 사마의는 다섯 방면에서 촉을 칠 계획을 세운 적도, 실행한 적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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