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맹획은 일곱 번 붙잡아 일곱 번 놓아준 이야기는 사실인가 ?
- 연의에서는 87회부터 90회까지 제갈량의 남만정벌에 대폭 지면을 할애하여 그리고 있다. 건안 3년 (225년) 당시 남중을 장악하고 있던 실력자 옹개가 촉의 세력이 약화된 틈을 타 소수민족의 수령 맹획, 월준이왕 고정, 장가군승 주포와 결탁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몸소 대군을 이끌고 남정에 나선 제갈량은 만왕 맹획에 대하여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라는 전략을 폈다. 전후로 일곱 번에 걸쳐 맹획을 생포하고는 석방했다.
첫 번째, 출격한 왕평과 관색이 일부러 진 척하며 맹획에거 추격하게 하고, 조운과 위연 등에게 후방을 습격하게 하여 맹획을 생포했다.
두 번째, 제갈량의 은혜를 입어 석방된 맹획의 부장 동도나가 싸우지도 않고 후퇴하였다는 이유로 맹획에게 채찍질을 당한 것을 이용하였다. 동도나는 각 부족의 추장들과 함께 맹획을 붙들어 제갈량에게 넘겼다.
세 번째, 맹획이 동생인 맹우를 거짓 항복시켜 안팎으로 호응하여 촉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제갈량은 맹우를 취해 뻗게 하고 맹획이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려 대패시켰다. 맹획은 단기로 도망쳤지만, 만병으로 변장한 마대에게 붙잡혔다.
네 번째, 제갈량이 후퇴하는 척하자 맹획이 추격하였다. 이 때 조운에게 명해 후방을 공격하게 했다. 대패환 맹획은 십여 기를 끌고 도망치다가 제갈량과 맞닥뜨리자 무턱대고 덤볐다. 그러나 결국 함정에 빠져 붙잡혔다.
다섯 번째, 계속 촉군에게 대항하는 맹획에 반감을 가진 은야동주 양봉이 다섯 명의 아들과 함께 삼만 군사를 이끌고 맹획을 도와준다며 갔다. 환영하는 연회가 벌어지자 양봉은 다섯 아들에게 명하여 맹획을 사로잡아서 제갈량에게 인도하였다.
여섯 번째, 맹획이 목록대왕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제갈량이 나무로 만든 화려하고 현란한 색채의 큰 짐승으로 진짜 맹수를 쫓아 보내서 적을 크게 이겼다. 그 후에 맹획의 처남 대래동주가 맹획을 꽁꽁 묶고 나타나 거짓 항복하여 제갈량을 찔러 죽이려고 하지만, 제갈량에게 들켜 전원 생포되었다.
일곱 번째, 제갈량이 올돌골이 이끄는 등갑병에게 화공을 퍼붓고, 맹획을 기다렸다가 공격해 패주시킨다. 맹획은 단기로 포위를 뚫고 도망쳤지만 다시 마대에게 붙잡혔다. 맹획은 더 이상 어찌할 수가 없어서 마음으로 복종마혀 이렇게 말했다. "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으신 분입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러면 역사상 정말로 이러한 일이 있었는가 ? 예부터 지금까지 긍정론자와 부정론자로 나뉘어 있다.
긍정론자들은 다음과 같은 예시를 근거로 사실임을 주장한다.
첫째, 배송지의 주에서 인용한 ' 한진춘추 ' 에 다음의 글이 씌여 있다. " 제갈량이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려 하자, 맹획은 깊이 심복하여 그 자리를 떠나지 않고, '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는 분이십니다. 남만에 사는 것들은 두 번 다시 배반하지 않을 것입니다 ' 라고 하였다 "
둘째, ' 화양국지 ' 에도 이렇게 씌여있다. " 남정에 나선 제갈량이 맹획을 생포하여 ......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더니, 맹획은 완전히 심복하여 ' 승상 전하는 하늘의 위엄을 받는 분이십니다. 변경의 백성은 두 번 다시 나쁜 짓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 라 하였다 "
셋째, ' 삼국지집해 ' 에는 장약기의 ' 전운기략 ' 을 인용하여,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은 각각의 장소를 고증하고 있다.
이러한 이야길르 바탕으로 나관중의 연의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까닭에, 사람들은 모두 이 이야기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 이 이야기와 관련된 전설, 고사는 지금도 서남 소수민족 사이에 널리 퍼져있다.
한편 부정론자들은 다음을 근거로 이 이야기는 믿을수 없다고 말한다.
첫째, 진수의 정사는 삼국지의 역사를 기록한 가장 권위있는 사서이며, 거기에는 칠금칠종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뿐더러 맹획이란 인물조차 나오지 않는다.
둘째, 청대의 ' 통감집람 ' 은 이렇게 보고 있다. ' 칠금칠종은 이야기로서는 재미있지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제갈량의 남정은 원래부터 만이를 심복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번 사로잡고 여러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마치 아동극과 비슷하다. 더구나 당시 제갈량이 가장 서두르던 것은 북쪽의 위를 치는 일이었다. 누차 풀어 주었다가 다시 사로잡을 정도로 시간을 헛되이 보낼 여유는 없었다. 정세는 절박하여 서둘러 군을 되돌려 북벌에 나서야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일에 얽매여있을 여유는 없었다. '
셋째, 정사의 <장의전> 에 의하면, 남정 후의 남중은 결코 평온하지 않았다. 남이가 다시 한 번 배반하고 수장을 살해했다고 쓰여있다. 때문에 제갈량의 ' 마음을 공격하는 것이 상책 ' 이라는 전략이나 칠금칠종의 이야기는 의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또 다른 견해는 제갈량이 맹획을 심복시켰다거나 붙잡아서 죽이지 않고 놓아주었다는 이야기는 있을수 있어도, 일곱 번 사로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신빙성이 크게 떨어진다. 당시의 급한 일은 북벌이었고, 아무리 한정된 시간일지라도 이렇게 시간을 끄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았다.
현재는 제갈량이 맹획을 사로잡아 다시 놓아주었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풀어주었다는 것은 지나치게 과장이 심하다는 것이 다수의 견해다.
2. 관색은 실존인물인가 ?
- 결론적으로 나관중의 연의에서 등장한 화관색은 완전한 가공의 인물이다.
연의 87회에 처음 등장한 관색은 관우의 셋째 아들로 형주 함락 후, 포가장에 숨어 있다 병을 치료하고 서천으로 들어가던 도중 제갈량의 남정군을 만나 특별히 접견을 청하였다. 관색의 이야기를 들은 제갈량은 감탄해 마지 않으며 바로 조정에 보고하는 한편, 그를 전부선봉에 임명하여 함께 남정길에 올랐다. 이후 남중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관색은 눈부신 전공을 올렸다.
그러나 ' 삼국지 ' ' 후한서 ' ' 화양국지 ' 등 그 어느 사서에도 화관색 또는 관색에 대한 언급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당대와 송대부터 이미 관색과 관련된 설화나 민간전설이 떠돌고 있었고 사당등도 세워졌다. 다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민간전설 차원에서 내려온 것일뿐이며 연의 역시 이에 영향을 받아 관색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실제 역사속 관색이라는 인물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허구의 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3. 옹개와 주포는 제갈량의 반간계에 죽었는가 ?
- 연의에서는 제갈량의 지략에 의해, 남정에서 반란을 일으킨 옹개와 주포, 고정 가운데 옹개와 주포가 고정에게 죽임을 당하고 고정은 제갈량에 투항한 후, 익주태수에 임명되어 삼군을 다스렸으며 부장 악환은 아장에 임명되었다.
실제는 어떠했을까 ?
사서에는 남중의 호족 옹개와 주포의 죽음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있다. 촉서 <여개전> 에 의하면 옹개는 유비가 영안에서 병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투항하였다. 손권은 그를 영창태수에 임명했다. 그러나 옹개는 제갈량이 남만 땅에 이르렀을 때 고정의 친위병에게 살해되었다.
주포의 죽음 역시 <마충전> 과 ' 화양국지 ' <남중지> 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마충이 장가군을 격파한 후에 죽었다고 확실히 쓰여있다.
결국 옹개가 죽은 것은 제갈량의 남정 중에 일어난 일이고, 주포의 죽음 역시 촉장 마충이 장가를 공격했을 때의 일이다. 제갈량이 반간계를 쓴 일은 전혀 없으며, 그 경위도 연의에서와는 전혀 다르다.
고정 역시 사서에서는 옹개와의 내분을 통해 옹개를 죽인 후, 얼마 뒤 촉군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량 반간계의 도구가 된 적도 없고, 익주태수가 된 행운도 없었다.
4. 제갈량은 왜 자오곡의 계책을 사용하지 않았는가 ?
- 연의 92회에서 북벌에 나선 제갈량에게 위주 조예의 부마 하후무가 관중의 모든 병력을 동원하여 대항하려 한다는 정보가 들어왔다. 위연은 이 말을 듣고 제갈량의 진영을 방문하여 대책을 바쳤다.
" 하후무는 계략도 패기도 없습니다. 저에게 정예병 오천을 주십시오. 포중에서 진령을 따라 동으로 올라가 자오곡에서 북으로 쳐들어가면 열흘 안에 장안을 습격할 수 있습니다. 하후무는 제가 군사를 이끌고 갑자기 나타났다는 말을 들으면, 성을 버리고 저각 횡문으로 도망칠 것입니다. 이 때 제가 동쪽에서 공격하고 승상 전하께서 대군을 이끌고 야곡에서 진격한다면, 함양의 서쪽지역을 일거에 평정할 것입니다. "
제갈량이 웃으며 말했다.
" 그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귀공은 중원에 인재가 없다고 생각하는가 ? 만약 진언하는 사람이 있어 산간 지역을 막는다면, 오천의 정예병을 잃을 뿐더러 우리 군의 사기마저 꺽이게 된다. 이 계책은 절대로 쓸 수 없다. "
" 승상 전하께서 큰 길을 따라 진격하시면, 적은 관중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큰 길에서 막아설 것입니다. 그러면 쌍방 모두 서로 물러서지 않고 장기간에 걸쳐 서로 대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중원평정은 언젠가 될지 모릅니다. "
" 내가 먼저 농우를 뺏고, 병법에 따라 평평한 길로 군사를 몰아간다면 승리를 거두지 않을 리가 없다 "
결국 이러한 이유로 위연의 계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위연의 계책은 ' 자오곡의 계책 ' 으로 알려져 있다. 나관중은 연의에서 이 장면을 다소 과장하였지만, 역사적 사실에 의거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자오곡의 계책이 어떠한 효과를 가져왔을지는 실제 시행되지 않았기에 알 수 없다. 따라서 이에 대한 후세인의 평론과 분석은 제갈량이 끝내 북벌에 성공하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마음과 위연의 계책이 어쩌면 성공했을지 모른다는 요행심리가 깔려있다.
삼국지 정사의 저자 진수를 비롯 ' 제갈충무후평전 ' 의 저자 왕치진 등도 제갈량이 모험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며 그를 비꼬는 사람들이 있기도하다. 그렇다면 과연 위연의 계책을 물리친 것은 제갈량이 겁쟁이여서일까 ?
사실 제갈량이 이 계책을 쓰지 않은데는 이유가 없던 것이 아니다. 당시 제갈량의 말을 빌리자면, 이 계책은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기 때문이다. 이보다 전에 맹달이 경솔하여 사마의에게 생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 여파로 제갈량이 위 내부에서 반역을 일으키게 하려던 공작이 중지되었기 때문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위연의 계략은 상대를 업신여기는 것이었다. 만약 하후무가 관문을 닫아건 채 싸우려 하지 않고, 촉군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리는 작전으로 나왔다면 결과는 어찌 되었을까 ?
후세인들 가운데 제갈량 이 계책을 쓰지 않은데 비난하는 이가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 군사가 반드시 백 퍼센트 성공한다는 확신이 있어야 실행하는 것은 아니다. 육십 퍼센트의 희망한 있어도 해볼 만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평생 신중히 생각하고 작전을 실행한 제갈량에 있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촉은 소국이고 병력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큰 손실을 견딜 수 없었다. 신중하지 않을 수 없는 제갈량으로서는 전망이 서지 않는 상황에서 병사들을 헛되이 희생할 수 없었다. 병사를 아끼고 전쟁을 신중히 한 것은 정치가이자 군사가로서 제갈량의 귀중한 자질이었다. 제갈량이 위연의 자오곡계책을 쓰지 않은 것은 겁쟁이여서가 아닌 바로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심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제갈량의 행동에 관한 합리성을 모두 설명할 수는 없다. 촉은 소국이었고 병력은 부족해 위와 정면으로 싸우는 것은 되도록 피해야했다. 서로 양보하지 않고 장기간 대치하는 것은 병력이 많고 물자가 풍부한 상태에서 가능했고 이러한 점은 촉한에 절대 불리한 것이었다.
따라서 촉한이 북벌에 성공하여 한실을 부흥시키고자 했다면, 전쟁에서 속고 속이는 것을 사양하지 말고 기병기모를 많이 써야만 했다.
5. 강유는 어떠한 경위로 촉을 따르게 되었는가 ?
- 연의 93회에서 강유는 북벌에 나선 촉군의 조운부대를 격퇴하고, 제갈량을 야습하는 등 크게 활약했지만 결국 그의 어머니를 이용한 제갈량의 계책에 당해 촉에 투항하게 되고, 훗날 제갈량의 후계자로 촉한이 멸망하는 그 날까지 북벌에 매진한다.
그렇다면 실제 강유가 투항한 경위는 무엇이었을까 ?
정사 <강유전> 과 ' 위략 ' 등의 기술에 의하면 건흥 6년 (228년) 제갈량의 북벌군이 기산으로 진격하였다. 천수군 태수 마준은 촉군이 오자 여러 현이 촉군에 호응했다는 소식을 듣고, 휘하의 강유 등을 의심하여 상영으로 도망쳤다.
강유 일행은 이유도 모른 채 상영까지 쫓아갔지만, 어찌된 일인지 익현에서도 강유 일행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행은 어쩔수 없이 제갈량에게 투항하였다.
그러므로 강유 등이 의심을 받은 것은 제갈량의 계책에 의한 것이 아니라, 궁지에 몰려 어쩔수 없이 투항한 것 뿐이었다.
나관중은 이 역사적 사실을 각색해 제갈량의 인재를 아끼고 후계자를 찾는 전략적 착안을 칭송함과 동시에 강유의 비범한 재주를 돋보이게 한 것이다.
6. 왕랑이 진영 앞에서 제갈량의 호통을 듣고 죽은 것은 사실인가 ?
- 연의 93회에서 제갈량의 첫 북벌 당시 기산에서 위와 촉이 대치하는 모습이 나온다. 위의 지휘관은 대도독 조진이었고 사도 왕랑이 군사로 보좌했다. 군사회의 석상에서 왕랑은 자기가 단 한마디로 제갈량을 투항시켜보겠다 큰소리 쳤다.
양군의 대치 도중 왕랑은 이렇게 소리쳤다. " 하늘이 정한 운수는 변하게 마련이다. 지금은 위가 정통이니 무장을 풀고 예를 갖추어 투항하여라. "
제갈량이 이를 듣고 껄껄 웃으며 대답하였다. " 너희는 한실을 배반하고 역적의 짐을 짊어진 놈들이다. 그 죄는 무겁다 아니할 수 없으니, 저승에서 무슨 면목으로 한실의 스물네분 황제를 뵈려 하느냐 ? "
왕랑은 그 순간, 분노와 수치로 가슴이 막혀 말에서 떨어져 죽었다. 바보스럽기까지 한 이 일은 실제로 있었던 일인가 ?
정사의 <왕랑전> 을 보면 왕랑은 위 명제 태화 2년 (228년) 낙양에서 병사했다. 그는 한 번도 조진의 군사에 임명된 적이 없으며, 더욱이 방위군에 종군하여 제갈량과 싸운 적은 없다. 제갈량의 호통에 분노하여 죽는 일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었다.
한편 유선 즉위 초기 당시, 유선이 어렸기에 실제 촉의 대소사는 제갈량이 결재하였다. 이 때 촉은 내정과 외교에 다소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였는데 이 때를 틈 타 위의 대신들, 사도 화흠과 사공 왕랑, 상서령 진군, 태사령 허지, 알자복야 제갈장 등이 앞다투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냈다. 시대의 추세를 알고 천명과 인심에 따라서 거국적으로 위에 항복하도록 권유하는 문서들이었다.
그러나 제갈량은 유인에 넘어가지 않고 경전 등을 인용하여 역사적 사례를 열거하며 정의편을 써서 반론을 가함과 동시에, 투항할 마음이 전혀 없고 약으로 강을 제압하여 천하를 통일할 결의와 자신감을 나타내었다.
결국 나관중은 왕랑이 228년에 죽었다는 사실과 제갈량이 투항권유를 받았다는 사실을 결합시켜 제갈량이 왕랑을 호통쳐 죽게 하였다는 이야기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
출처: 소공녀의 행복어사전 원문보기 글쓴이: 이미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