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話 頭 하 는 法
소참법문(小參法門 ) 一 ( 話頭하는 法) ① 화두(話頭)는 반드시 선지식(善知識)의 지도(指導)를 받아서 하라. 큰스님 : 화두(話頭) 안 배운 사람 없지? 그 전엔 안 배운 사람 더러 있었거든. 안 배운 사람은 반드시 화두를 배워서 참선(參禪)을 해야되지. 話頭는 다른 것하고 달라서 우리 공부(工夫)하는 수좌(首座)들의 생명이지. 생명인데, 참선하는 사람을, 여러 수 백 명이 아니라, 참 많이 봤는데, 그 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하면, 배우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뭘 갖다가 화두로 만들어 하는 사람이 더러 있어. 책을 보다가 무슨 의심이 났다든지,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무슨 생각을 해서 만들어. 이런 식으로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화두(話頭)라는 것은 반드시 배워서 해야되지, 책을 보고한다든지, 뭘 보고 생각해서 한다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절대로 안되는 거야. 혹 상식이 좀 있는 사람들이 (책같은 걸) 보고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걸로 하는 경우가 많은데, 어떤 때는 잘 안된단 말이여. 어떤 사람은 보면 하다가 병이 나는 수가 있단 말이여. 그러니 화두하다가 병이 나고 고민이 생기고 하는 것이, 배우지 않고 아무 지도없이 자기 마음대로 하기 때문이다 이 말이여. '나는 아무 것도 안 배워도 자신 있다'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사람은 설사 몇 해가 됐다해도 화두를 다시 배워야 되지, 자기 마음대로 뭘 갖다 공부가 안된단 말이여. 오래오래 하다보면 나중에 고장이 나고 이러거든. 어떤 사람은 큰 병이 나는 경우도 더러 있거든. 하지만 결국 모두 내버리고 배워서 하면 괜찮단 말이여. 그러니 제일 첫째로 화두는 배워서 해야되지,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면 못쓴다 말이여. ② 본래부터 참구(參究)하던 화두(話頭)를 바꾸지 말라. 그 다음엔 화두를 배웠으면 그 화두를 오래도록 그대로 계속해야 될 것 아니야? 이 화두가 좀 안되는 듯하면 저 화두 배워서 저 화두 좀 해보고... 자꾸 바꾸는 사람이 있단 말이여. 그것도 못쓰는 거야. 화두를 하나 배워서 하다가 보면 잘 안되거든? 또 하나 더 배워서 하면 잘될까 싶어서 (또 다른 걸) 배워서 해본단 말이여. 해보면 처음엔 잘되는 것 같은데 나중에 좀 하다보면 도루묵이여, 안되기는 똑같다 그 말이여. 그리고 어떤 사람은 화두를 몇 가지를 배워서는, 이놈 쪼금 해보다 저놈 쪼금 해보다 (그러는데), 그렇게 하면 죽도 안되고 밥도 안되고 아무 것도 안되는 것이여! 그러니까 화두하는 방법이 첫째는 화두를 자기 마음대로 하지 말고 배워서 할 것, 둘째는 하나를 배웠으면 그대로 계속해야 되지, 이리저리 화두를 변경시키지 말라 이거라. 변경시키면 안돼! 그런 사람 흔하거든. “아이구 스님, 이걸 해보면 좀 좋을 것 같은데... 이걸 하고 싶은데….” “그래 해봐라” 얼마 안 가서 “내나 마찬가집니다.” 이러거든. 역시 안되기는 마찬가지다 그 말이여. 그 전에 배워하던 공부만 혼동되고 말거든. 그렇기 때문에 화두를 이리저리 바꾸지 마라 이거야. 그러면 못써. ③ 공부(工夫)의 표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 또 화두를 하다가 깨쳤다고 와서 말하는 사람도 여러 수십 명 수백 분을 봤어. 어떤 수좌(首座)는 저기 오대산 그 쪽에 토굴을 지어 살다가 한 해 여름에, 그 천리 길을 세 번이나 왔어. 신심(信心)이 참 있어 보이니까, 처음에 와서는 공부를 하다가 자기가 깨쳤다고 그러길래 그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해줬어. 그래 다시 가서 공부하다보니 또 뭔가를 안 것 같아. 아, 이번에는 참말로 바로 깨쳤지 싶어서 또 찾아 왔단 말이여. 그렇게 해서 세 번이나 온 사람을 봤는데, 내가 볼 땐 아무 것도 아니라. 그 사람뿐만 아니라 흔히 보면 공부하다가 깨쳤다고 생각하고 와서 묻는 사람 더러 봤거든, 수 십 명, 수 백 명 봤어. 공부하다가 그냥 [공부에 대해] 의심난다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무슨 지견(知見)이 나고 무슨 경계가 나타나면 깨쳤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도, 아무리 내 몸이 고달프고 아파도 꼭 만나 줬거든. 만나 줬는데, 여러 해를 그렇게 해보니까 그 사람들한테 무슨 얘기를 해봐도 소용없어. 처음엔 '예, 예'하더라도 [나중엔] 아무도 내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해버려. 그래서 근래 와서는 공부하다가 뭘 깨쳤다는 그런 사람들은 영 안 만나주거든. 그 깨쳤다는 것이 바로만 깨친 것이라면 얼마나 좋노. 바로만 깨치면 말할 것 없는 거라. 중간에 가다가 병난 걸 '깨쳤다' 이러니…. 그러니 공부라는 것은, 내가 혼자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종문(宗門)에 불교근본법칙이 있어. 법칙이 있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 말하면, 우리가 강당(講堂)에서 배우는 선요(禪要)가 있어. 고봉(高峰)스님 [語錄이지], 그 고봉스님이 공부하다가 [자기 생각에] 깨쳤단 말이야. 깨쳤다 생각하고는 설암(雪巖)스님한테 갔는데, 무슨 법문이든지 물어보면 대답을 얼마나 잘하나! 설암스님이 가만히 보니, 저놈이 바로 깨친 게 아니고 공부하다가 병이 난 것인데도 아무리 '[깨친 게] 아니다'고 해도 소용없거든. 그 땐 부처님이 아니라고 해도 말 안 들어. '내가 옳다'고 생각하고는 안 듣는단 말이여. 그래서 설암(雪巖)스님이 한 3년 [동안은] 그대로 (내버려) 둬버렸어, 말을 안 들으니까. 그래서 [고봉스님은] 한 3년 동안은 자기가 천하제일(天下第一)로 깨친 것 같고 자기 스님보다 나은 것 같단 말이여. 한 3년 지나서 설암스님이 보니 어지간히 그 객기(客氣)가, 그 병증(病症)이 좀 가라앉은 것 같거든. 그래서 오라고 해서 물었어. “내가 뭘 물으면 [니가] 대답 못하는 게 뭐 있노? 그러니 지금 무슨 법담을 하려는 게 아니고, 내 그런 걸 물으려는 게 아니라, 니가 실제 깨쳤다고 큰 소리 치는데, 니 공부한 그것이, 보통 밥 먹고 옷 입고 활동하고 다닐 때, 그때, 일간호호시(日間浩浩時)적에, 아무리 활동하더라도 그대로 일여(一如)하냐?” 이렇게 물었거든. 자기가 생각해보니 아무리 그 경계로 설치고 하더라도 자기 공부하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거든. 그대로 일여한거라. '그럼 꿈에도 일여(一如)하냐?' 가만히 생각해보니 꿈에도 일여하거든, 경계가 없단 말이여. 그래 또 물었어.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 꿈도 없을 때, 그 때도 니가 일여(一如)하냐?” 하니, 그 땐 캄캄하단 말이야. 그래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랬거든. 중생(衆生)생활이 어떠하냐면, 일간(日間)에 잠 안 잘 때 생활하고, 잠이 들어서 꿈꿀 때 생활하고, 잠이 아주 꽉 들어서 꿈도 없을 때 생활하고, 그 세 가지 생활이 평생 전체 생활이거든. 그런데 설암스님이 물은 것은 “그러면 니가 잠이 안 들어서 보통 활동할 때, 아무리 분주하더라도 [ 아무리 네가 거꾸로 놀든지 모로 놀든지 쭈그리고 앉았던지 무얼하든지 간에 일간 행동의 침해(侵害)나 장애를 조금도 받지 않고 그대로] 네 공부가 일여하냐?” 이렇게 물으니까 일여하다 했거든. “그럼 더 나아가서 꿈에도 [니 깨친 경계가] 공부가 [일상과 다름없이] 일여하냐?” 이렇게 물으니까 [아무리 꿈을 꾸고 할지라도, 꿈이 없는게 아니야. 부처님도 꿈을 꾸었으니까] 꿈에도 일여하다고 했단 말이여. 이건 실지로 하는 소리야. “그래 꿈에 일여하다면, 그럼 잠 꽉 들어서는 (어떠냐)?” 잠이 꽉 들면 꿈도 없단 말이야, 그 때는? 하고 물으니, 아이고 그 때는 캄캄하니, 아무 것도 없다 그랬거든. 그러면 그게 바로 깨친 게 아니다 이 말이여. 그래서 “니 공부가 바로 깨친 게 아니니까 오늘부터 무조건 다시 발심(發心)을 해서 공부(工夫)가 잠이 꽉 들어서 일여(一如)한 거기에서 깨쳐야 되지, 꿈에 일여한 그것 가지고는 안돼! 그거 공부 아니니까 다시 공부해라!” 그랬어. 그때 미친 기운이, 병난 기운이 많이 가라앉아 설암스님 말을 믿었거든. 그래 또 3년을 죽자고 했어. 죽자고 해 가지고 그 때 가선 바로 깨쳤단 말이여. 잠 꽉 들어서도 일여한 것을 실지 오매일여(寤寐一如)라 하는 거야. 꿈에 일여(一如)한 건 몽중일여(夢中一如)라 하고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一如)한 건 숙면일여(熟眠一如)라 하는 거여. 깨치고 보니까 그때선 夢中一如 들어가고 숙면일여(熟眠一如) 들어가서 자기가 바로 깨쳤거든. 그래서 설암스님이 인가(印可)를 했단 말이여. 그렇게 돼야만 바로 깨친 거여, 언제든지. 요새 깨쳤다는 사람들 보면 말이여, 뭣이 훤한 것 같고, 부처님보다 나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 석가(釋迦) 그까짓, 똥 덩어리만도 못한 거고 내가 천하제일이다' 이러거든. '그래, 석가가 똥 덩어리만도 못하든 금 덩어리만도 못하든 그런 소리하지 말고, 그런데 니 공부한 것이 보통 생활할 때도 일여(一如)하냐?' 하고 물으면, '아, 그건 안됩니다.' 이러거든. '아니 그럼 보통 생활할 때도 일여하지 못한 그걸 갖고 부처님보다 낫다는 생각이 드나?' '그럼 뭘 갖고 아는데요?' '그래 공부란 것이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해야 되. 동(動)할 때나 정(靜)할 때나 일여(一如)해야 되고, 몽중(夢中)에도 일여(一如)해야 되고 숙면(熟眠)에도 일여(一如)해야 해. 숙면(熟眠)에 일여(一如)해도 거기서 깨쳐야 공부지, 바로 깨친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병이지 공부가 아니야.' '아 그럼 난 큰일났네. 난 꿈에는 고사하고 일상생활에서도 잘 안됩니다.' 그 천하제일이라는 게 안된다 이거야. '그럼 니 어쩔래?' '그럼 스님 말 믿고...' '이놈아, 내 말이 아니여! 이건 예전 조사(祖師)스님도 다 말씀하신 거지. 이 도둑놈아, 내가 뭐 잘났다고 내 법 내세우면 되나? 자고로 어떤 큰스님이든지, 잠 꽉 들어서도 일여(一如)한 거기서 깨쳤어야 그게 참으로 바로 깨친 거지 그러기 전엔 절대 깨친 게 아니라고 (말씀하셨어), 부처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조사스님도 다 그렇게 말씀했단 말이여. 잠 꽉 들어서는 고사하고 또 꿈에서는 고사하고 동정(動靜)에도 일여(一如)하지 않는 그것 갖고 니가 뭘 깨쳤다 할거고? 그건 순전히 병 난 거지 깨친 게 아니야.' 그래 (그 사람이) 가만히 들어보니 자기 공부는 틀려버렸거든? '아이고 이전에 잘못 배운 것 같습니다. 그럼 그걸 표준삼고, 몽중(夢中)에도 일여(一如)하고 숙면(熟眠)에도 일여(一如)한 거기서 깨쳐 가지고 오겠습니다.' 아, 그런 사람 더러 봤는데, 동정일여(動靜一如) 이건 또 보통 보면 쉬운 것 같지만 그것도 참 어려운 거여. 뭐 [이리저리] 오고가고 쫓아다닐 때 화두(話頭)가 일여(一如)하든가? 안 일여하단 말이여. 좀 知見이 났다 하면, 화두는 있건 없건, [話頭를] 하고 안하고에 관계없이 [動靜에] 一如한 경우가 더러 있어. 난 이때까지 몽중(夢中)에 일여한 사람은 아직 못 봤어. 몇 사람 이제 몽중(夢中)에 좀 일여할라 하는데, 그만 아이구 '깨쳤다!' 싶어서 공부를 안 해버린단 말이여. 그러면 나중에 도루묵이 돼버리는 거야. 여기 있는 우리 대중들 한 번 생각해 봐라. 그까짓 법문(法問;法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법문 (法門)을 알고, 그건 문제가 아니야. 그건 무슨 소릴 해도 아무 소용없는 것이고, 실지 내 공부가, (어떤지는) 돌아다니다 보면 알 것 아니야? 동정일여(動靜一如)라 하는 것은, 얘기할 때 밥 먹을 때뿐만 아니라 아무리 분주하고 또 아무리 바쁘게 몸뚱이를 움직인다해도 그대로 간단(間斷)없이 일여(一如)한 그런 경계(境界)를 말하는데, 동정일여(動靜一如)가 여간해서 되는 게 아니야. 그런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夢中一如라 하면 그건 참- 어려운 거야. 그건 참말 어려운 거야. 그래 몽중(夢中)에 화두 들어서 되는 사람 있거든 한 번 손들어 봐! 그게 참 어려운 거야. ④ 양심(良心)을 속이지 말라 그전에 [내가] 어디 갔는데, 그곳 조실(祖室)스님이 점잖으신 분이야, 사람으로 치면 말할 수 없이 좋은 사람인데, 그 조실스님하고 이것저것 얘기하다가, '실지 공부란 것은 동정(動靜)에 일여(一如)해야 되고 夢中에 一如해야 되고 熟眠에 一如해야 되지 그렇지 않으면 안되는데, 스님 어떻습니까, 꿈에도 좀 뭐[一如]합니까?' 이렇게 물으니, 아이구 참! 꿈에도 꿈에도 안된다 하거든? 그런 이 여럿 봤어. '아니 꿈에도 안되는 그걸 갖고 조실이라 하면 어디 되겠나?' '그걸 말했다. [하지만 주위에서] 조실해라고 자꾸 이러는데...' 그 말도 옳거든. 아무리 안 하려해도 자꾸 와서 조실해라 하니 할 수 없는 게지. 꿈에도 안되는 그런 사람, 큰스님들 중에도 보면 더러 있거든? 어떤 사람은 또 안 그래. (물어보면) '그걸 말이라고 해? 난 숙면(熟眠)[一如의 境界]는 벌써 지나갔어!' (하지만 실지) 내용은 안 그렇거든. 내용은 안 그런데 벌써 지나갔다고 한단 말이여. 그러면 (그 사람과는) 더 이상 말도 못해. 하지만 자기 양심은 안 있겠어? 예전 사람들이 다 그렇단 말이 아니라, 예를 들면 그럴 수가 있다 그 말이라. 양심 있는 스님들은 꿈에도 안된다고 해. 그런 말씀 많이 들었어. 깨친다는 것은 (표준이 있는데도), 가다가 무슨 한 생각나면 '한 소식했다'하고 '그까짓 것 다 알아 버렸다'하고, 무슨 경계가 나타났다하면 '부처나 달마보다 내 법(法)이 더 깊다' 그러고, 그런 쓸데없는 妄想을 가진단 말이야. (그러면) 내 그런 사람들한테 뭘 말하느냐? '그러면 그 경계가, 그 깨친 것이 동중(動中)에도 일여(一如)하냐, 夢中에도 一如하냐, 잠 꽉 들어서도 一如하냐?' 이렇게 물어보면, 다 그만 무너져 버리거든. 언제 한 번은 큰 법당(法堂)에서 법문(法門)을 하고 내려오니까, 웬 수좌 하나가 나를 보고 절을 자꾸 해. '와? 절을 와 하노?' 이러니까, '아이구 스님 法門하시는데 그만 일언지하(一言之下)에 확철대오(廓徹大悟)했습니다.' '허 참 반갑네, 이 초단법칙이로구만. 그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뭘 깨쳤길래 깨쳤다 하노?' '온 1700공안(公案)이 환합니다.' '그래 그래 1700공안(公案)이 환하고 뭐고 그건 그만두고 지금 니 얘기할 때 지금도 공부가 그대로 되나?' 가만히 생각해 보더니, 얘기할 땐 없다고 그래. '허허 이 도둑놈의 자식아, 니 공부 깨치는 게 그런 건 줄 아나? 쌍놈의 새끼 말이여!' 그러니까 당장 잘못했다는 거라. 그래서 몽둥이로 탕! 탕! 때려줬어. '임마, 그런 게 工夫 아니야. 어떻게 가다보면 망상(妄想)이 좀 생기고, 어떻게 하다보면 경계(境界)가 조금 비친다 해서 그게 깨친 게 아니란 말이여! 동정일여(動靜一如)해 가지고 몽중일여(夢中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한데서 깨쳐야지 그렇지 않으면 깨친 게 아니여. (이건) 내 法이 아니고 우리 불법(佛法)의 근본이 거기에 서 있단 말이여.' 그리고 나서 공부 열심히 하는 것 봤어. ⑤ 선방(禪房)밥을 먹으려면 그래 工夫란 것은, (겉으로) 工夫하는 체 하고, 묵언(默言)을 하고, 장좌(長坐)[不臥]를 하고, 뭐를 하고 해도, 속을 보면 동정일여(動靜一如)도 안되거든. 뭘 알았다고 한 사람 더러 봤지만 夢中에도 되는 사람, 그게 참 드물다 그 말이여. (하지만) 아무래도 우리가 이제 그래도 선방밥을 먹으려면 夢中一如는 되야 선방(禪房)밥도 먹을 수 있는 것이지, 그러기 전엔 뭘(갖고) 공부라 할거고? 아무리 가사를 입고 앉았다 해도 속으로는 아무 것도 아니면, 수좌(首座)라 할 수 없거든? 그러니 동중일여ㆍ몽중일여ㆍ숙면일여(動靜一如ㆍ夢中一如ㆍ熟眠一如)가 공부의 표준이 되야 한다 이 말이야. 이게 내 法이 아니고, 우리 佛法ㆍ禪家의 근본생명이 되어 내려오는 것이야. 이렇게 된 뒤에야 이제 화두(에 대한) 얘기를 해야 돼. (그런데) 보면 선방에 나온 지 한 두 철 안되서 말짱 다 깨치고는, 모두 자기 소견(所見)은 하나씩 다 있어 가지고 자기가 뭐 석가ㆍ달마보다 낫다는 그런 생각, 그런 망상(妄想)가진 사람 쌨거든. 그런 병 가진 사람 쌨다 그 말이여! 여기도 깨친 사람 안 쌨나? 속으로, 자기 속으로 깨쳤다 그 말이여, 바로 깨친 게 아니고... 그러니 動靜一如한지, 夢中一如한지, 熟眠一如한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란 말이여. 그 세 가지 조건에 안 들었으면, 깨친 게 아니고 병이여! 그러면 말할 필요도 없는 거거든? 그러니 動靜一如되고, 夢中一如되고, 熟眠一如되고 하려면, 참 애를 많이 써야 돼. ⑥ 올바른 화두참구법(話頭參究法) : 항상 '어째서?'를 넣어라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또 안된단 말이여. 역사적으로 보면 '無'字(를), 그냥 '무(無)-' 이렇게 하는 사람이 쌨거든. '佛性이 있나 없나, 무-, 무, 무-,무' 자꾸 '무-'하면 된다 이거라.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원로스님이, 웬 나이 많은 노인 하나가 참선한다고 앉았는데, 이리 꾸뻑 졸면서 '무-', 저리 꾸뻑 졸면서 '무-', 자꾸 '무'만 하면서 이리 꾸뻑 저리 꾸뻑 (졸더라면서) 흉내를 냈는데, 그런 식으로 해서는 만년(萬年)을 해도 안돼! 자꾸 '무, 무' 하면서 꾸뻑 꾸뻑 졸기만 하는데 그 병이 제일 큰 병이라. 자고로 '무-' 이렇게 하라는 조실스님네가 하나도 없었어. '무-하면 그만이지 어디 딴 거 뭐 있나'하는 그런 소리 더러 들었는데, (예전)스님들이 다 말씀하시기를, '조주인심도무(趙州因甚道無)?' 조주(趙州)는 어째서 무(無)라 했나? 조주(趙州)가 어째서...?(하는 식으로) '어째서'를 장[늘] 넣으라고 했어.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니 마삼근(麻三斤)이니 무슨 무슨 화두, 화두가 안 쌨어?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를 화두로 하는 사람은 '정전백수자?' 이러지 말고,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를 모르니까 의심(疑心)이 있는데, 그러니 '어째서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는고?' 또 마삼근(麻三斤)을 하면, '어째서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는고?' 무(無)를 하면,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걸 장 붙여서 해야 된단 말이여. [ 어떤 사람은] '어째서'를 할 필요가 있나? 이러지만,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무-'하거나, 그냥 '정전백수자'하거나, 그냥 '마삼근'하면, 그건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된 거라. 그렇게 해서는 깊이 못 들어가, 절대 깊이 못 들어가! 그런 사람 더러 있거든. ⑦ 잘못된 공부법으로 인한 병(病)의 사례(事例) 그 처사 나이가 마흔 넘은 사람인데, 공부하다가 딱 앉아서는 정(定) 들어버리는 거라. 화두는 '무(無)'字를 했는데, (공부가 어떠했냐면) 처음에 '무-' 하면서 이렇게 떡 앉아 있으면 모든 생각, 모든 번뇌망상(煩惱妄想)이 다 떨어져. 그냥 '무-'[하면] 그만 정(定)에 들어가 버린단 말이여, 定(?)에. 그리고는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있다 이거야. '그래, 니 그게 공부(工夫)가? 공부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처음엔 말을 잘 안 들으려고 해. 그러니까 그냥 '무-'하지 말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해야지, 그냥 '무-'하면 결국 무기(無記)에 빠지고 말아. 그런 일이 많이 있어. 또 어떤 처사(處士)는, 한 20년 전에 金龍寺 있을 때 찾아왔었는데, 지금 살아있으면 80 넘었을 거라. ?利寺에 가서 6년을 공부했고 어디 가서 공부를 많이 했어. 나중에 돌아다녀 보니까 자기보다 더 잘 아는 사람도 없고, 자기보다 더 크게 깨친 사람도 없어. 그래서 중(僧)도 상대하지 않고 자기가 천하제일(天下第一)이라. 그래 자기 어록(語錄)을 만들어서 이 만큼 책을 가지고 다녔는데, 누구의 말이든 안 들으려 한단 말이야. 누가 '그러지 말고 성철스님을 한 번 찾아가 보라'고 그러드래. '그분도 별 수 있을까? 하지만 한 번 가보지.' 그렇게 해서 왔는데, 만나보니 아만(我慢)이 충천하고... 그 처사가 딱- 이렇게 앉았는데, (말하기를) 이렇게 앉으면 定에 드는데, 定에 들면 한 일곱 시간 여덟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언제 지나가는지 몰라. 그런 자기 경계를 가지고 큰스님네한테 가서 물어봐도 아무도 모른다거든? 그럼 자기가 최고다 이거야, 자기 경계를 모르니까. 그래가지고 자기가 바로 견성(見性)했고, 신선(神仙)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으며, 대통령인들 이렇게 좋을 수 있나? 무엇보다 자기가 定에 들었을 때 定에 든 경계 그건 다 할 수도 없고, 또 어디 물어보니 잘 모르고, 이러니까 (남들이) 자기보다 못하다 이거라. 그래 내가, '그 참 공부 많이 했구먼, 그 경계가 꿈에도 있나, 없나?' 가만히 있더니 꿈에는 없다고 그래. 그것 갖고는 꿈에 안되는 거라. '에이 도둑놈의 자식! 그게 정(定)에든 병(病)이지, 꿈에도 없는 그게 무슨 공부(工夫)라고 니가 공부라고 그래? 니 생각해 봐라. 공부라면 동정(動靜)에든지, 몽중(夢中)에든지, 숙면(熟眠)에든지 일여(一如)해야지 꿈에도 없는 그것 갖고 그게 무슨 공부라고, 천하제일이라 해?' 그만 몽둥이로 두들겨 줬어. 보통들 보면 定에 든다든지, 7, 8시간이 눈 깜짝할 새 넘어가 버리면 천하제일이라고 (생각하지), 자기도 그렇게 알고. 하지만 공부를 많이 하고 애쓴 사람이라 머리는 영리해. 양심이 있으니까, 이해(利害)가 없거든? 속인(俗人)이다보니 어디 가서 조실(祖室) 앉을 그런 생각도 없는 사람이고. 만일 조실이나 그런 데 생각이 있었으면 또 '꿈이 뭐꼬, 내가 숙면일여(熟眠一如) 되는데!'하고 꿉뻑 쎄울끼라, 안된다고 하면 조실 안해야 되니까. 그런 이해관계가 없으니까, 양심적으로 '잘못됐다'고 그래서 결국 내게 절하고 화두를 새로 배워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 사람도 보니까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됐어. 그래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하고 '어째서'를 붙여서 (화두를)하니까 자기가 말한 定이 안 나타난단 말이야. 자꾸 화두만 성성(惺惺)해서 '어째서 무(無)라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하게 되지 정(定)이 안 나타나거든. 그러니까 화두하는 방법이 잘못되면 그만 딴 길로 들어가 버린단 말이여. 영 잘못돼버린단 말이여. 그럼 아무리 죽자고 애를 써도 헛일이여. 헛일이기만 하면 괜찮지, 도리어 병만 생기고 만다 그 말이여. 아까 내 말한 그 고봉스님도 처음엔 그냥 '무-'했거든. 그냥 '무-, 무-' 이렇게 3년을 해도 아무런 진척도 없고, 공부가 안된단 말이여. 그래서 자기가 출세(出世)한 뒤에는 도대체 무(無)자를 못하게 했어, (사람들이) 자꾸 '무-, 무-' 하고 앉아 있으니까. 그러니까 그 수제자(首弟子)인 中峰國師(말씀)이 (無字를 못하게 할 게 아니라) 無字[를 參究하는] 방법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無라 했는가?'(라고) 고치면 된다 이거라. 그래 이 '조주인심도무(趙州因甚道無)?'하는 것이, 그전[中峰스님 以前]에는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그전에도 다 그런 식으로 했는데, 거기서 내려 온 거라, 내가 특별히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래서 천하선지식ㆍ조사스님들이 공부하셨던 방법이, '정전백수자'나 '마삼근'이나 무엇이든 할 것 없이, 언제든지 화두할 때, '어째서'가 들어가야지 안 들어가면 공부가 안된다 이거라, 이게 근본요령이거든. ⑧ 참의(參意)와 사구(死句)라는 오해(誤解) 또 흔히 그냥 '무-'라고 하든지, 그냥 '정전백수자'라고 하든지, 이렇게 하면 참구(參句)가 되고, '어째서'를 넣으면 참의(參意)가 된다고 하는데, 그건 미친 소리구먼. 參意니 參句니 하는 것은 나중에 깨친 사람이 깨친 분상(分上)에서 이런 말 저런 말 한 것이지, 공부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면 못쓴다 이 말이여. 그리고 또 그냥 '무-'하면 활구(活句)고 '어째서'하면 사구(死句)라고 하는 소리도 듣는데, 이건 사구(死句)고 활구(活句)고 참으로 꿈에도 모르고 하는 소리야. 그럼 趙州 無字 같은 건 [예전의] 여러 큰스님들이 그걸 몰라서 '어째서 無라 했는고?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했을까? 그럼 대강의 要點은 내 얘기했으니까, 개별적으로 의심나는 사람 있으면 간단하게 얘기 해. 질문과 대답 스님 1 : 話頭에 대해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祖師스님 말씀이나, 큰스님 말씀에, 話頭를 들어서 動中一如, 夢中一如, 熟眠一如가 되어 가지고 깨친다고 하셨지 않습니까? 그런데, '一超直入如來地'라고, 그냥 한 마디 듣고는, 바로 들어가시는 분들이 있잖습니까? ① 공부의 필수관문(必須關門) : 숙면일여(熟眠一如) 큰스님 : 그래, 바로 들어가는 분이 있는 데, 그건 경우가 없다는 건 아니야. 누구든지 사다리를 꼭꼭 밟고 올라가라는 말은 아니야. 아닌데,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한 사람도 말이야, 동정(動靜)에, 몽중(夢中)에, 숙면(熟眠)에 일여(一如)한 그 단계를 초월해 버려야 되지, 거기에 걸리면 안된다 그 말이야. 일초직입여래지 했다해도 숙면(熟眠)에 일여하지 않다든지, 몽중(夢中)에 일여하지 않다든지 하면 안된다 그 말이라. 이전에 일초직입여래지 했다는 스님들을 보면 모두 다 숙면(熟眠)에서도 일여한 그 경계를 지나갔다 그 말이여. 공부의 단계를 자세히 말하자니까 동정과 몽중과 숙면을 얘기했는데, 이전 큰스님들은 대개 뭣을 말했느냐하면, 제일 끄트머리인 숙면일여만 얘기했거든. 현사(玄沙)스님같은 유명한 대도인(大道人)스님은 장 숙면일여(熟眠一如)만 많이 말씀하셨거든. 숙면일여 밑의 (단계같은) 건 말할 필요 없는 것 아니가? '니가 큰소리치고, 니가 조사(祖師)라 하고, 일초직입여래지 했다 하는데, 그러면 잠이 꽉 들어서도 네 경계가 그대로 일여(一如)하냐?'하고 묻거든, 알겠어? 그러면 일초직입여래지(一超直入如來地), 이것이 없는 건 아니야, 있지만 숙면(熟眠)에서 일여한 그 경계에서 반드시 살아나야 되지, 그게 안되면 안된단 말이여. 자기가 아무리 크게 깨쳤더라도, 일초직입(一超直入)했더라도 숙면일여가 안되면 안돼, 소용없단 말이여. 그건 쓸데없는 망상이고 생사(生死)의 근본이니 아무 소용없는 거라고 이전의 조사스님들이 다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그렇다고 꼭 계단을 밟아 올라가라 이 말은 아니야. 어떻게 했든지. 밟아 올라 왔든지, 일초직입(一超直入), 한 번에 꽉 뛰었던지, 이랬든 저랬든 간에, [중요한 것은] 숙면(熟眠)에 일여(一如)한 경계를 반드시 통과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그 말이여. 그럼 알겠어? 이전에 조사스님들 치고 숙면일여를 통과하지 않은 스님은 없어. 사람도 여러 질이어서 고봉(高峰)스님처럼 몽중일여(夢中一如)된 뒤에 숙면일여(熟眠一如)를 통과한 스님도 있고, 그만 한 번에 숙면일여를 통과한 스님도 있고, 어떤 스님들은 또 [공부]하다가 몽중일여도 안 되가지고 확철(廓徹)했다고 하는 스님도 있고, 그러니 사람이 그 근기(根器)에 따라서 삼단(三段)을 다 밟아 가는 사람도 있고 한 번만에 뛰어 넘어가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결국엔 잠이 꽉 들어서도 일여(一如)하냐, 그게 근본이거든. 숙면에서 일여하지 못하면 자기가 아무리 크게 깨쳤다고 해도 소용없어. 또 화두하는 방법[에 의문이 있는 사람]? ② '이뭣고?' 화두(話頭)의 바른 참구법(參究法) 스님 2 : 저는 '이뭣고?'를 잡고 있습니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이것이 무엇인고?'하면, 이것이 잘못된 데는 없습니까? 큰스님 : 그런데, 내 '이뭣고?'를 하는 사람 참으로 많이 봤는데,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 말 아니가? 니 이 화두한지 몇 해나 됐노? 스님 2 : 3년…. 큰스님 : 3년 돼? 어떤 사람은 오래해도 안되는 사람 봤어. 그러니까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해서, '이것이 무엇인고, 이것이 무엇인고?' 이러는 것이, 아까 내가 말한 그 처사라는 사람이 '이뭣고?'를 했어.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가만-히 생각하고 있으면, '이것이 무엇인고-?'하고 가만히 들여다보고 앉아 있는 식이 되버렸어. 그만, 이런 식이 되가지고 그만 정(?)에 들어가 버려. 그런 사람 많거든. 이러한 병폐가 따르는 수가 있고. 또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러면, 보고 듣고 하는데 따라서, 경계에 따라서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이 무엇이냐? [하게 되어] 산만해지는 병폐도 붙게 되거든. 알겠어? 그래서 이 병폐 저 병폐를 없애기 위해, 예전 조사스님들은 어떻게 장 주장했느냐하면, '마음도 아니요, 물건도 아니요,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인고?' 이뭣고?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하라했어!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란 말이여, 그럼 이것이 무엇인고? [이렇게 하면] 경계를 하나 집(執)해 갖고 들여다 볼 수도 없고, 경계에 따라서 이리 저리 자꾸 따라갈 수도 없고. 그런데, 한 20년 '이뭣고?'를 하다가 내버리는 사람 더러 봤어. 자꾸만 '보고 듣고 하는 이건 무엇인고?...'하고 따라다니다 보니까 자꾸 산만해지고, 그만 안된다 이거라. 보고 듣고 하는 '이것'만 바로 알면 그만이야. 이것을 바로 알면 마음이나 물건이나 부처나 이런 걸 바로 알 수가 있는데 말이여, 방법에 있어서는 자꾸 산만해진단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나는 '이뭣고?'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뭣고를 아주 내버리지는 마라'하는 말은 잘 안하거든. 아까 그 처사처럼 [오래도록 해서 병이 깊은] 그런 사람한테는 아주 완전히 내버리라고 하고, 완전히 딴 화두를 가르쳐 줬는데, [너는] 아직 초학인(初學人)이고 하니, '마음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닌,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해보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이 무엇이냐?' 이렇게 하는 것과는 좀 달라. 그럼 내 말 알겠나? ③ 호흡과 화두(話頭) 스님 3 : 저는 무(無)자를 드는데요, 호흡에 맞춰서, 호흡을 가늘게 하면서 들이마시고 내쉴 때... 큰스님 : 그래, 화두하는데 흔히 뭐 호흡을 하느니 단전(丹田)을 관(觀)하느니 하는 그런 사람 더러 있거든? 그런데 단전을 관한다는 것은 상기(上氣)가 나서 머리가 아파 공부를 못할 적에 일이고 알겠어? 단전을 관하면 좀 내려가거든. ( 하지만) 단전, 그것도 상기가 되게 나면 머리가 더 아파 버려. 그런데, 혹 병과 관련해서 단전(丹田)을 관(觀)하고 그러는데, 본래 호흡하고 화두(參究法)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자기 몸뚱이도 잊어 버려야 되는데, 예를 들어 말하자면, 화두만 부지런히 부지런히 하지 몸뚱이가 있는지 없는지 그것도 잊어버려야 하는데, 호흡에 맞추고 단전에 맞추고 그러면, 화두에 전념(專念)이 안돼. [상기가 되어서] 머리 아파 못하는 사람은 할 수 없어서 단전으로 하는데, 그것도 나중에 상기(上氣)가 너무 심해지면, 더 아파 버려! 내 그런 사람 더러 봤어. 그래서 영원히 공부 못하게 되는 사람 쌨거든? 화두할 때 누구든지 그런 병폐가 없으면, 호흡에 맞출 것도 없고 단전에 맞출 것도 없고, 다만 화두만 생각해 보란 말이야, 어째서 無라 했는지 그것만 생각해야 돼. 어떤 사람은 호흡을 이래할 때 이래하고 저래할 때 저래하고, 그런 소리 더러 하거든, 그런 거는 본래 선문(禪門)에서는, 조사문중(祖師門中)에서는 배척하는 거라, 호흡이고 그런 거는. 화두만 하는 거라 알겠어? 이 생각 저 생각하지 말고 화두만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야 되는 거라, 또? ④ '본래면목(本來面目)'화두의 바른 참구법(參究法) 스님 4 : 저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 화두를 드는데요, 화두가 잘 안되는데요. 큰스님 : 어떻게 안되드노? 스님 4 : 부모한테서 몸 받기 전에는 내가 과연 무엇이었던가를 잡고 있습니다. 큰스님 : 내가 뭐였던가? 개였던가, 짐승이었던가 사람이었던가? 허허! 그래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같은 것도, 그냥 '뭐였었던가?' 이러는 것보다도 '어떤 것이 너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냐[如何是汝本來面目고]?' 이렇게 묻거든, 알겠어? 우리 육조(六祖)스님도 도명(道明)스님 보고 물었거든,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마라[不思善不思惡하라], 바로 이러한 때에[正與마時에], 어떤 것이 너[明上座]의 본래면목인고[如何是明上座의 本來面目고]?' 이랬거든? 이렇게 물었단 말이여. 本來面目(話頭)가 거기서 시작됐고, (그 뒤로) 예전 스님네가 더러 本來面目을 물었는데, '어떤 것이[如何是]?'하는 이것이, '어째서?'하는 것과 같은 식이라. 니 말하는 것은 좀 틀리는 것 같네? 니 뭐라 했노 금방? 스님 4 : 부모한테 몸 받기 전에는 나는 뭐였었는가?... 큰스님 : '뭐였었는가?' 그것도 통하긴 통하는데, 그럼 소였던가, 개였던가? 이렇게 또 얘기할 수 있는 것 아니냔 말이야. 알겠지 그 소리? 그러니 그렇게 하지마! '그 뭐였던가?' 이렇게 하지 말고, '어떤 것이 나의 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이냐? 어떤 것이, 어떤 것이?' '어떤 것이'를 잊지 말고. ⑤ 조주무자(趙州無字) 화두 참구법(話頭 參究法) 스님 5 : 조주무자(趙州無字)를 드는데요, 아예 의심을 내기 위해 '무(無)자의 의지(意旨)는 무엇일까?' 하고 의심(疑心)을 냅니다. 큰스님 : 그런데, 무(無)자의 의지는 무엇일까? 이렇게 해도 아주 나쁜 것은 아닌데, '趙州意는 作마生고?'하는 것도 있거든? 나쁜 것은 아닌데, 화두할 때는, 그냥 '無字의 의지는 무엇일까?' 이러지 말고, 조주(趙州)가 '무(無)'라 했는데, 어째서 무(無)라 했나? 자꾸 그렇게 하는 게 話頭하는 근본정신이야. 또 흔히 '일체함령(一切含靈)이 전부 다 부처님은 불성(佛性)이 있다고 했는데, 조주는 어째서 개는 불성이 없다고 했나?' 이렇게 많이 하는데, 그러면 의심(疑心) 생기기가 천하(天下)쉽다. 하지만 이렇게 하면 유무(有無) 상대(相對)가 되어버린단 말이여. 그런데 조주(趙州)의 無라는 것이, 예전 스님도 하신 말씀이 '有無의 無도 아니며 眞無의 無도 아니다.[不是有無之無이며 不是眞無之無니라]'(라고 하셨으니) 有無를 가지고 따지면 화두가 깨져버린단 말이여. 그러니까 그 유무를 떠나서, '조주가 분명히 무라 했는데, 어째서 무(無)라 했는지 그 이유를 알아라.' 이거야. 유무(有無)고 상대(相對)고 (有無를) 떠난 것이고 할 것 없이, 조주가 無라고 한 이유는 분명히 안 있나 이 말이여. 알아듣겠어 그 소리? 그러니 '그 뜻이 무엇인고?' 이렇게 되새기기보다도 조주가 무라 한 이유를 모르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그렇게만 자꾸 해나가야지, '그 無의 뜻이 무엇인고?'하고 자꾸 분석하는 식으로 하는 건 좀 덜 좋은 거라. (다만)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만 하면 좋단 말이야. 그래 또 그 옆에 사람. ⑥ 책보다 선지식을 의지해서 공부하라 ( 스님 6과의 대화는 질문과 대답에 혼선이 있어 번잡하므로 큰스님 말씀의 요점만 정리했음.) 요즘은 末法시대여서 누가 참 선지식(善知識)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확고한 권위가 서있는 조사어록을 보고서 화두를 하는 경우가 있는 데, 참선은 반드시 사람한테 배워야지 책 갖고 되지 않는다. 실제 공부하는 중에 나타나는 의문점을 책을 통해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을 선택해서 그를 믿고 화두하는 방법을 실제로 배워서 지시하는 대로해야지, 책에 의지해서 하다보면 공부하다가 이랬다 저랬다 갈팡질팡하거나 병이 나는 경우가 많다. 큰스님 : (중략) 이것저것 다 그만두고, 조주(趙州)가 어째서 無라 했노? 그것 한 번 대답해 봐라! 스님 6 : 그... 처음부터 예? 큰스님 : 이 새끼야, 조주(趙州)가 왜 무(無)라 했노? 그 이유를 대답해 보란 말이여! 모르겠제? 알겠나? 스님 6 : ……. 큰스님 : 그건 니 분명히 모르지? 알겠다는 생각이 드나? 그걸 분명히 모르니, 모르면 알아야 될 것 아니가? 그러니까 '조주가 어째서 무(無)라 했는고? 어째서 無라 했는고?' 하고 자꾸 그것만 계속한단 말이야, 그럼 대강 알겠어? ⑦ 불완불급(不緩不急)하게 공부하라 스님 7 : 화두를 미는 강도(强度)를, 공안(公案)을 어떤 식으로 밀어야 되는지, 예를 들면 화두를 아주 조급하게 밀면 좀 되는 것 같고, 허술하게 밀면 안되는 것 같고, 그것을 어떻게 한다는 게 참 어렵거든요. 그것에 대해 얘기를 좀... 큰스님 : 그런 소리는 참고가 되는 소린데, 거문고 줄을 너무 조이면 땡땡해서 제 소리가 안 나지? 또 너무 늦추어 놓으면 딩딩거려서 소리가 안 난단 말이여. 그러니 너무 급하게도 하지말고 너무 느리게도 하지말고 좀 자연-스럽게, '조주(趙州)가 어째서 無라 했는고...?'하고 생각을 한단 말이여. 흔히 안된다고 자꾸 '어째서, 어째서?'하면서 되게 설치면 머리가 아프고 상기가 나서 죽느니 사느니 이러거든? 그렇게 하면 병이 잘 생겨. 너무 (느슨하게 하면) 또 자꾸 혼침(昏沈)에 빠져 가지고 또 안되버린단 말이여. 이 화두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이지, 외우는 게 아니야, 알겠어? 너무 급하게 생각하지도 말고 너무 느리게 생각하지도 말고, 거문고 줄 고르듯이 해서 자연스럽게 '어째서 無라 했는고...?'하면서 그 이유를 생각하란 말이야. 자연스럽게 하는 거, 그게 좀 어렵지만 그래도 자꾸 해보면 요령이 생긴다 그 말이여. ⑧ 즉시 대답 못하면 이미 죽은 송장 큰스님 : (중략) 그러니까 이제 근본요령은 ‘어째서?’ 하는 데 있어. 응? 話頭하는데 뭘 알았다는 자신이 있는 사람 있으면 나서봐. 알았다는 자신! 아까 자[스님 6]는, '조주가 어째서 無라 했나?'하고 물으니까 모른다는 소리는 얼른 안하고 뭘 우물우물했는데, 속에 뭐 좀 있는 모양이야, 뭐 좀 있나? 스님 6 : 한 말씀드리겠습니다. 큰스님 : 뭣이, 임마, 벌써 아까 저기로 지나갔단 말이야. 아까 벌써 송장 되 지나갔어. [이제 와서] 한 말씀 드려봐도 소용없어. 안 들어. 알겠어? 그 소리? 니가 천하(天下) 무슨 소리해도 안 듣는다 이 말이여. 아까 벌써 지나갔어. 잿더미 속에서 다시 무슨 소리 할라하노? 왜? 기분 나쁘나? 지금은 무슨 소릴 해도 소용없어. 그래 어째서 無라 했는지, 어떤 것이 본래면목(本來面目)인지, 자신 있는 사람 있거들랑 언제든지 한 번 덤벼봐! 자신 없는 사람은 그 때가서는 때려 줄 테니까. 오늘 이만 하지. (죽비 一聲) 話頭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 소참법문 二 ① 화두(話頭)는 암호(暗號)로 된 밀령(密令) ... 그런데, 화두하면, 화두가 여러 가진데, 화두는 전체가 암호밀령이야, 암호밀령! 표현된 말하고 속뜻이 다르다 그 말이야. 겉에 표현된 그 모양으로서는 속내용을 모르는 거야.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라 했다고 해서 뜰 앞의 잣나무만 빙빙 돌다가는 그 사람은 '정전백수자'라 한 그 뜻을 모른다 그 말이야. 한가지 예를 들면, 운문종(雲門宗) 중흥조(中興祖)라 하는 설두중현선사(雪竇重顯禪師)가 공부할 땐데, 어떤 스님이 와서 정전백수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참 했는데, 그 옆에 중 되려고 온 행자(行者)가 보더니 씩 웃거든. 비웃는다 그 말이야. 그땐 손님이 있어서 아무 말 안하고 (있다가) 손님이 간 뒤에 행자를 불렀단 말이야. '이 건방진 놈아, 행자 녀석이 큰스님들끼리 법문(法門)하는데 니가 비웃어? 그런 생각 가지고는 당장 나가라!' '허 참 딱하십니다.' '뭐가 딱해?' '입은 앵무새 같은데, 눈이 멀었습니다. 정전백수자하면 그 뜻이 어디 있는지 좀 알고 말해야 하는데, 그 뜻은 東에 있는데 당신은 西에서 더듬으니 눈이 먼 게 아닙니까? 그게 하도 딱해서 웃었습니다.' '그럼 네가 그 뜻을 말해봐라.' 그래 게송을 하나 지어 말하는데, 白兎橫身當古路 토끼 한 마리가 몸을 비끼고 옛길을 가니 蒼鷹一見便生擒 푸른 매는 토끼를 보고 낚아채어 달아났는데 後來獵犬無靈性 뒤에 오는 사냥개는 바보가 되어 空向古椿下處尋 공연히 쓸데없이 나무만 빙빙 도는구나. '정정백수자'라고 한 뜻은 토끼에 있는데, 딴 데 있다 그 말이여. 매처럼 바로 아는 사람은 나무를 돌지 않고 토끼를 바로 잡아서 달아나 버리는데, 사냥개는 바보가 되갖고 '나무'라 했다고 자꾸 나무만 돈다 이 말이여. 그러니 정전백수자라 했지만 그 뜻은 나무에 있지 않고 토끼(처럼 다른 곳)에 있(다는 말이라.) 그 소리를 듣고 확연히 깨치고 평생을 도반으로 스승으로 삼았거든. 이 화두란 것이 '삼 서 근'이라 했다고 해서 삼 서 근을 물고 있다가는 그것도 큰 일 나는 것이고. 화두가 전부 암호밀령인줄 알아야 돼. 그 좋은 예가 양귀비(楊貴妃)에게 '소옥'이란 몸종이 있었는데, 간부(姦夫)인 안록산(安綠山)을 부를 때는 '소옥아, 소옥아' 하고 소옥이를 자꾸 불렀는데, 그 내용은 안록산이 들어오라는 암호야. '내가 소옥이를 부를 테니 당신이 들어오시오.'하고 짜놓고 부르는 것이야. 그러니 소옥이 한테는 볼일이 없는데, 아무 것도 모르는 소옥이가 오면 시킬 일이 꽉 찼으니 백 번 불러서 백 번 시키는 거야, 안록산이 들어올 때까지. 일체 話頭ㆍ公案이 그처럼 암호밀령으로 되어 있어. '어떤 것이 부처냐?' '삼 서 근'이라 하니 흔히 삼 서 근이 부처라고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이 쌨는데, '삼 서 근'만 부천가? 똥덩어리도 부처고 흙덩이도 부처고 전체가 부처지, 부처 아닌 게 어딨어? 하필이면 삼 서 근만 부처야? 그렇게 해석한다면 이건 남쪽을 북쪽으로 아는 사람이라 이 말이야. 그 뜻은 저 깊은 곳에 있는데, 그 깊은 뜻은 무심삼매(無心三昧)를 성취하지 않으면 절대로 모른다 이 말이야. 내가 정신변환(精神變換)을 이야기했는데, 보통 사람은 잠이 들면 캄캄한데, 정신변환이 되어 일체망상이 다 떨어져서 오매(寤寐)가 一如해서 자나깨나 똑같은 정신상태에 이르면, 아무리 잠이 깊이 들더라도 언제나 밝아 있는 정신상태가 되더라 이렇게 말했거든. 이 화두ㆍ공안(話頭ㆍ公案)이란 것은 무심삼매(無心三昧)를 거쳐서 진여자성(眞如自性)을 바로 깨쳐야만 알 수 있는 것이지, 번뇌망상으로서는, 의식(意識)상태에서는 암만해도 몰라. 그런데 화두 배워서 우리가 보통 활동할 때도 화두가 옳게 되지 않는 여기서, '개가 불성(佛性)이 없다는 게 무슨 별 뜻이 있을까?' 이렇게 한다면 영원토록 화두는 모른다 이 말이야. 화두는 의식상태, 지금 일상 활동할 때 화두가 잘 되도 모르고, 꿈에 몽중(夢中)에 화두가 완전히 되도 - 저 깊이 들어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몽중에 잘 안되. 수 십 년 전문적으로 공부해도 잘 안된다 이 말이야. - 그런 몽중에 완전히 화두가 되도 여기서도 모른다 이 말이여. 오직 어디서 알게 되느냐하면, 잠이 아무리 깊이 들어도 언제든지 밝아 있어 어둡지 않는, 이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조금 짐작하는 것이야. 그래서 표준이 거기에 있단 말이야. 수박이 겉이 푸르다고 속까지 푸르다는 사람은 수박을 모르는 사람이요, 수박 속은 못 본 사람이듯, '정전백수자' '마삼근(麻三斤)'이라 했다해서 겉만 보고 말하는 사람도 그와 같단 말이야. 그 뜻은 딴 데 있단 말이야. 그러니 그 내용을 알아라 이거라. 그 내용은, 자나깨나 장애를 받지 않고 분명하게 밝아 있는 정신상태가 아니면, 정신계발(精神啓發)이라 할 수 없고, 따라서 화두를 조금이라도 짐작할 수 없다 이 말이야. ② 위법망구(爲法忘軀):법을 위해 몸을 잊는다 ... 그럼 우리가 어떤 결심을 해야만 자기능력을 완전히 계발해서불보살ㆍ조사ㆍ선지식 (佛菩薩ㆍ祖師ㆍ善知識)이 되어서 미래겁이 다하도록 일체중생을 위해 일할 수 있겠느냐... 그것은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사람이 아니면 이 대도(大道)는 절대로 성취할 수 없어. 法을 위해서 몸까지 잊는단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야 사는 것이 전체가 자기 몸이 중심이 되어 있지 자기 몸 내버리면 무얼 위해 사느냐 이것이라. 몸에 따른 다른 활동은 말할 필요도 없고 모든 활동의 근본이 되는 몸까지 잊어버려야만 비로소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만약 조금이라도 이해관계라는 것이 앞에 가릴 것 같으면 절대로 무심삼매는 성취할 수 없는 동시에 대도를 이룰 수 없다고 본다 그 말이여. 그럼 어떠한 각오를, 결심을 해야 되느냐? 제일 좋은 예는 부처님과 같은 각오, 앞으로 만승천자(萬乘天子)가 될 것이지만 그것을 헌신짝처럼 차 버리고 대도를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위해 얼마나 큰 공을 이루셨나 그 말이여. 누구든지 부처님의 길을 믿고 부처님을 따르려면, 부처님과 같은 각오ㆍ결심을 가져야 되지 부처님을 믿고 따른다면서 부처님의 각오ㆍ결심과 반대적인 태도를 가진다면 절대로 부처님을 따를 수 없는 사람 아니냐, 부처님을 반대하는 사람 아니냐, 흔히 그렇게 말하는데, 그런데 요새 보면 불교를 믿는다 하지만 전부다 하루 일하고 하루 삯 받아 먹고사는 장사꾼이지, '내가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여 일체중생을 위해서 살아보겠다'는 이런 큰 결심, 큰 원력(願力)하에서 불교를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나는 이래 봐요. 그럼 어떠한 각오를 가져야 하느냐 하면, 오직 진리(眞理)를 위해 일체 이권ㆍ일체 모든 부귀영화를 다 버려야 된다 이 말이야. 오직 진리 하나만 위해서 살지, 그게 위법망구야. 법을 위해서 몸뚱이까지 잊어버린다 그 말이야. 그럼 그런 사람이 누가 있나 하면 근래에 와서는 순치황제(順治皇帝)같은 이가 좋은 예야. 알다시피 순치황제는 청태종(淸太宗)인데,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큰 영웅인데, 자기가 큰 대청제국(大淸帝國)을 건설해 보니 얼마나 큰 영광이냐 그 말이야. 그렇지만 생명이란 것이 70년, 80년, 100년 여기에만 국한되고 만다면 두 말할 것 없어. 그 동안이라도 무슨 발악을 해서든지 좀 편안하고 즐겁게 살려고 노력할 것 아니야? 그런데 불교에 관심이 있어서 우리의 생명이란 것이 현세(現世)에만 국한 된 것이 아니고, 과거에도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됐고 미래에도 영원에서 영원으로 계속 될 줄을 확신을 가졌단 말이야. 그러니 대청제국의 황제노릇은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한 찰라에 불과하단 말이야. 수십 년 동안 황제노릇해서 뭘 할거야. 애들 장난도 아니거든. 그래서 황제의 곤룡포를 벗어 던지고 야반도주를 했어. 그래 금산사(金山寺)란 절에 가서 부목(負木), 나무 해 주는 사람이 되서 스님네를 시봉하면서 공부를 했어요. 그래 결국엔 나중에 공부를 성취했거든. 그게 아주 좋은 표본이야. 그런 사람이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면 불교는 빨간 거짓말이다 그 말이여. 그의 출세시(出家詩)에 어떤 말이 있냐 하면, '我本西方一衲子어니 緣何流落帝王家?'라, 나는 본시 서방, 인도에서 밥 얻어먹으면서, 거지 노릇하면서 공부만 하던 수도승이었는데, 무슨 일로 타락해서 제왕이 되었느냐? 이것이야. 이것이 참으로 수도하는 사람의 근본입장(根本立場)이야. 천자되는 것을 타락 중에 제일 큰 타락으로 본다 그 말이야. 이런 결심만 하면 누구든지 다 돼. 그렇지 않다면 도를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거든. 참으로 불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법(法)을 위해서 몸을 잊는, 이런 철두철미한 신심을 가져야 돼.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혜가(慧可)스님이 달마스님을 찾아간 얘기는 다들 잘 알거야. 달마스님이 法을 펴기 위해 인도에서 소림굴(少林屈)에 와서 9년 동안 밥만 먹으면 면벽(面壁)을 하고 앉았거든. 이건 강태공(姜太公)의 곧은 낚시와 같은 거야. 강태공이 문왕(文王)을 낚기 위해 저 위수가에 가서 곧은 낚시를 띄워놓고 6년을 있었단 말이야. 곧은 낚시에 무슨 고기가 물릴거야. 뜻이 참으로 큰 데 있다 그 말이야. 달마스님이 9년을 면벽해 앉았는 것은 문왕과 같은 사람이 안 걸리면 절대로 안 돌아본다 그 말이야. 그 당시 신광(神光)이라는 스님이 있었는데, 세간지식(世間知識)에 있어서든지 불교지식(佛敎知識)에 있어서든지, 이 이상 더 나아갈 수 없는 이였어. 그래도 깨치지 못한 건 사실이거든. 하지만 자기를 깨치게 해줄 스승감이 없어서 고민하던 차에 인도에서 웬 중이 와 있는데, 좀 이상하다는 말을 듣고, 거기는 뭔가 좀 있는 것 같거든. 한 번 찾아가 보자 해서 찾아가니 그 땐 엄동설한(嚴冬雪寒)이었어. 그 추운데 합장을 하고 서 있으니 돌아나 보나. 밤새도록 눈이 와서 허리까지 차도 그래도 돌아보지 않거든. 그래 날이 새자 그때서야 슬쩍이 한 번 돌아보더니, "니 왜 이러고 있나?" 이거라. 시비조로 나온단 말이야. "제가 달리 온 게 아니라, 스님이 거룩한 줄 알고 스님께 대법(大法)을 배우려고 왔습니다." "이 미친놈아, 니까짓게 무슨 대법(大法)이야. 대법이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어려운 일을 능히 행하고,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그런 철두철미한 각오라야 되지, 하루 저녁 추운 눈 구덩이에 좀 서 있는 그런 생각갖고 대법? 그만 가거라!" 하고 쫓아낸단 말이야. 그만 쫓겨났어. 그렇다고 물러설 수 있나. 그래 도끼를 가지고 팔을 하나 끊어서 갖다 바쳤거든. 그러니까 그만하면 있어 보라 이거야. 뒷일을 봐야 알지 있어 보라 이거야. 됐다 소리 안한단 말이야. 그래 법을 성취해서 혜가스님이 안됐어? 이게 소위 입설단비(立雪斷臂)야. 아까 순치황제가 만승천자를 내버리고 金山寺가서 나무꾼 노릇한 거나, 혜가스님이 천하 고승이었지만 자기가 깨치지 못했기 때문에 참으로 깨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눈 구덩이에 섰다가 쫓겨났다가 팔을 끊는, 그런 신심(信心)이라야 돼. 세상도 안 그래? 물건이 천 원짜리면 천 원을 내야하고 만 원짜리면 만 원을 내야 되는데, 백 원짜리 내고 만 원짜리 물건 사려하면 누가 주겠어? 줄 사람 있겠어? 이것은 무상대도(無上大道)란 말이야, 무가보(無價寶)야! 값을 칠 수 없는 보배를 얻으려하면 그만큼 돈을 내놔야 한다 그 말이여. 대도(大道)를 위해 대청제국(大淸帝國)을 차버린 순치황제와 같은 그런 큰 결심ㆍ큰 신심으로써 공부를 해야만 성취하는 것이지, 이건 신심이 하나도 없지, 신심(信心)이 없으니 노력도 하지 않지, 그러고는 자꾸 공부가 안된다는 소리만 하니 참으로 딱한 노릇이야. 앉은뱅이가 앉아서 용쓰는 식이야. 서울로 가려면 차를 타든지 비행기를 타든지 걸어가든지 해야 될텐데, 가만히 앉아서 자꾸 서울 안보인다는 소리만 하거든. 노력없는 성공이 어디 있어? 그러니 대법(大法)을 성취하려면 참으로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철두철미한 정신을 가지고 [노력해 보고 그래도 안되면] 佛法을 반대하든지 해야지, 신심이 없어 노력도 해보지 않고 불법(佛法)이 허망하다고 원망하지 말아라 이거라. 누구든지 참으로 대도를 성취해서 영원한 행복ㆍ절대적인 자유를 얻어서 일체중생을 위해서 영원토록 살아보고 싶은 그런 큰 원력(願力)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위법망구하는 철저한 신심을 가지고, 오직 이 법(法)을 바르게 빨리 성취하는 화두법을 잘 알아서 화두를 배워서 화두를 부지런히 부지런히 해서 공부를 성취해야 해. 소참법문 三 ① 일체(一切)를 버려라 一念心淸淨하니 일념심청정하니 處處에 蓮花開더라. 처처에 연화개더라. 一花一淨土요, 일화일정토요, 一土一如來라. 일토일여래라. 한 생각 마음이 깨끗하니, 곳곳에 연꽃이 피더라. 꽃 하나에 정토(淨土) 하나씩이요, 극락세계 한 곳에 아미타불이 한 분씩 계시더라. 이 게송은 중국의 유마거사라고 불리는 방 거사(龐 居士)의 게송인데, '마음이 청정하면 꽃이 핀다' 이 말이 아니고, 마음이 깨끗하니, 본래 꽃이 피어 있는, 본래 극락세계, 본래 아미타불을 보게 되더라 이 말이야. 온 시방세계(十方法界)가 정토(淨土) 아님이 없고, 부처님 안 계신 곳이 없는데, 중생이 번뇌 망상에 가리워서 그것을 못 볼뿐이다 그 말이여. 온 시방세계 어느 곳이든지 극락세계 아님이 없고, 아미타불이 안 계신 곳이 없어. 항상 무진법문(無盡法門)을 하시고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하고 계시거든. 그렇지만 중생은 그것을 못 본다 그 말이여. 그 못 보는 이유는 번뇌망상에 가리워서 못 볼뿐이지, 본래 사바세계 이대로가 정토다…. 비유로 말하자면 우리 불교에서 많이 비유하는 것인데, 우리 마음이란 거울과 같은데, 거울이 본래 아무리 깨끗하다 해도 거기에 때가 묻고 먼지가 꽉 앉으면 아무 것도 안 비친다 이 말이여. 그렇지만 그 물건이란, 모든 삼라만상이란 엄연히 그대로 존재하고 안 있어? 거울에 비치지 않을 뿐이지. 그와 마찬가지야. 시방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 정토인데, 중생이 보지 못하는 것은 거울에 때가 끼어서 못 보는 것과 같다 이 말이여. 그래 공부를 많이 해서 번뇌 망상을 다 쉬어버리면, 거울의 때가 다 없어져 버린단 말이여, 그러면 거울이 환하게 안 드러나겠어? 본 마음이 드러난다 그 말이여. 본 마음이, 본 거울이 드러나면, 그 때가선 모든 것이 다 비치거든. 그와 마찬가지로 누구든지 공부를 부지런히 해 가지고 번뇌망상을 다 쉬어버리면 자기 마음의 눈을 떠버린다 이 말이여. 눈을 뜨면 온 十方法界가 극락세계 아닌 곳이 없고 아미타불 안 계신 곳이 없다 이 말이여. 이것이 우리 불교의 근본 목표며 근본 원리야. 요는 어떻게 해야 마음의 눈을 뜰 수 있나, 광명(光明)을 볼 수 있나, 극락세계를 볼 있나 이것인데, 꼭 참으로 마음의 눈을 떠서 사바세계 이대로가 극락세계임을 보려면, 모든 것을 전부 다 버려버려야 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공부해야지 만약 조금이라도 求하는 생각이나 집착이 있으면 마음 거울의 때가 닦이지 않고 지워지지 않고 마음의 눈을 뜰 수 없다 그 말이여. 그런데 금방 말한 게송의 임자가 방거산데, 방거사 자체부터가 그렇거든. 천하갑부야. 발심(發心)을 해서, 자기 재산을 전부 팔아서 좋은 금은 보화와 보석?보물로 바꿨어. 바꾸니 큰 배로 두 배여. 그래서 배에 싣고서 동정湖 한 가운데 가서 한 배를 물에 집어넣었단 말이여. 뱃사공들이 가만히 보니 저 사람이 미쳤거든. 그걸 팔아서 딴 데 가서 돈으로 바꿔서 재산을 사려는 줄로 알았는데, 물 한 복판에 집어넣거든. 그래서 '아니, 그 아까운 보물을 물 속에 집어넣을 필요가 뭐 있소? 남은 보물을 없는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많은 사람들이 구제를 받을텐데, 왜 그러시오?' '허허, 내가 나쁘다고 내 버린 물건을 어떻게 남을 줄 수 있소?' 안 그렇겠어? 자기가 나쁜, 못쓰는 물건이라고 내버린 물건을 어찌 남을 줄 수 있나 그 말이야. 이 물질이란 것은 사람의 욕심(慾心)의 근본이 되어서 자꾸 사람의 마음의 눈을 가리고, 결국 업(業)을 두텁게 해서 참으로 진리를, 부처님을 못 보게 한다 이 말이여. 그러니까 재물이 중생들에게 없으면 죽을 것 같지만, 사실 알고 보면 비상(砒霜)보다 더 무서운 거라 이 말이야. 비상인줄 알고서 내가 안 먹으려 하면서 어떻게 남에게 죽으라고 줄 수 있나 이 말이야! 그래 남은 배도 마저 집어넣어 버렸어. 천하갑부가 알거지가 되버렸어. 두 손 뿐이야. 기록에도 '다만 조각배하나 타고 다닐만했다'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다 버려 버렸어. 그런 큰 결심, 천하갑부라는 그런 큰 재산을 팔아서 아무 미련 없이 완전히 내버릴 수 있는 그런 큰 결심이 있으면, 공부를 성취 안할래야 안 할 수 없어. 만약 그런 큰 결심이 없으면 아무리 공부한다해도 딴 생각하는 사람이지 공부하는 사람이 아니다 이 말이야. 부처님은 왕궁도 내버렸는데 그까짓 재물 좀 버린 것쯤은 천하 쉬운 것 같지만, 그게 쉬운 게 아니야. 그래 누구든지 참으로 대도(大道)를 성취해서 앉은 자리 선 자리 이대로 극락세계, 이대로 해탈(解脫), 이대로 부처임을 보려면 먼저 모든 것 - 마음속에 있는 것이든 마음 밖에 있는 것이든 - 을 다 버려버려야 되. 그러면 벌거벗은 몸뚱이뿐 아니야? 이렇게 돼야만 대도를 성취할 수 있거든. 그러면 방거사는 그 다음엔 어떻게 살았느냐. 저 산 있는데 가서 토굴 하나 짓고서 마누라와 아들ㆍ딸과 함께 산죽(山竹)으로 조리를 만들어 딸을 시켜 팔아서 쌀로 바꿔서 그렇게 먹고살았어. 누가 보면 미친 사람 아니야? 그 많던 재산 다 버리고 저- 산... 저- 얄궂은데 가서 산죽을 쪄서 조리를 만들어서 어린 딸한테 시켜서 팔게 해서 양식으로 바꾸어 먹으니 미친 사람 아니냐 이 말이야. 그렇게 철저한 생각이 아니면 어떻게 대도(大道)를 성취할 수 있겠어. 그럼 나중에 끝이 어떻게 됐냐면, 석두(石頭)스님ㆍ마조(馬祖)스님을 찾아가서 대도를 완전히 성취했으니, 조사(祖師)스님들과 똑같은 이야. 나중에 갈 때도 아주 자유자재하게 갔어. 그 때 식구들은 다 나가고 딸만 있었는데, 방거사가 "내가 해가 중천(中天)에 뜨는 12시쯤 되면 갈테니까 때가 되면 기별해라"했더니 한참 있다가 "아버지 밖에 나와 보십시오. 이상한 게 공중에 떠있습니다." '그래?'하고는 밖에 나와보니 아무 것도 없거든. 다시 방에 들어와 보니 딸이 합장(合掌)하고 서서 가버렸어. 그대로 죽어버렸다 이 말이여. 그러자 방거사가 딸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내 딸의 기봉(機鋒)이 참으로 빠르다'고 칭찬해 줬거든. 그 뒤 화장(火葬)해놓고 일주일 뒤에 영제를 지냈는데, 그 당시 자사(刺史;주지사)가 그 소문을 듣고 오자 자사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법문(法門)을 해주고는 가버렸어. 그 때 아들은 마침 밭을 메고 있었는데, 자사가 '이 사람아, 자네 아버지가 지금 막 돌아 가셨네.'하니 '아, 그래?'하면서 밭을 메던 호미를 밭에 탁 꽂으면서 벌떡 일어서 버리거든. 그런데 안 움직여. 가보니 또 가버렸어. 그런 대자유(大自由)가 있었단 말이여. 그러니까 비록 재산은 전부 다 물에 집어넣어 버리고 홀홀단신, 알거지가 되어 조리를 만들어 쌀로 바꿔먹기를 평생했으니, 물질적으로 보면 하나도 가진 게 없는 거지였지만, 도(道)로 봐서는 천하에 이 보다 더 큰 부자는 없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영가(永嘉)스님 말씀도 그 말씀 아니야? '窮釋子口稱貧이나 實是身貧道不貧이라', 모든 것을 다 버려버렸으니까, 입으로는 가난하다해도, 몸은 가난해도 도는 천하부자다 이 말이야. 우리가 출가(出家)한 중이 되었던지, 발심(發心)한 보살이 되었다면, 몸은 가난해도 도는 부자가 되어야지, 도는 가난하고 몸은 부자가 되면, 이건 불법(佛法)하고 반대여. 그렇지만 요새 보면 반대로 나가거든. 도는 가난하고 몸은 부자다 이 말이야. 이 공부를 성취하려면 첫째 해탈(解脫)이 있나 없나 이게 문젠데. 해탈이 왜 없어! 몇 해전에도 법관 세 사람이 판사를 여남은 명 데리고 와서 물을게 있다고 그래. 그래 뭐냐니까, 확실히 불교에 해탈이 있냐 이거라. 이 사람이 정신이 있나 없나? 해탈이 없을 것 같으면 불교가 2천년 3천년 이대로 내려올 턱이 있냐고. 그래 설명을 좀 해 줬더니 잘 알겠다더구만. 아까 방거사 일화에서처럼 분명히 자유자재(自由自在)한 대해탈경계(大解脫境界)가 있다 이 말이야. 그러기 위해서는 첫째로 모든 것을 내버리고 공부를 해야되지, 마음속으로든지, 마음 밖으로든지 온갖 것을 다, 살림살이를 잔뜩 재워놓고 공부를 하면 자꾸 거울에 먼지가 더 앉는단 말이라. 때가 더 묻어서 더 캄캄해져 버려. 캄캄해 갖고 꽃은 무슨 꽃이, 극락세계는 무슨 극락세계가, 아미타불은 무슨 아미타불이 비치냔 말이야. 하나도 안 비친단 말이라. 참으로 한 생각 마음이 청정(淸淨)해서 온 처처(處處)에 연꽃이 피고, 온 처처가 극락세계고, 온 처처에 아미타불이 꽉-차 있는 것을 보려면, 본래 꽉 차 있어, 못 볼뿐이지. 마음을 닦아야 되는데, 마음을 닦으려면 모든 것을 다 버려야 된다 이건데. 버리려면 방거사처럼 물질적인 것이든지 정신적인 것이든지 다 버려야지, 이건 쪼끔 놔두고 저건 쪼끔 놔두고 이런 식으로 해서는 미래겁이 다하도록 공부를 성취하지 못한다 그 말이여. ② 견성(見性)의 올바른 이해 : 선문정로(禪門正路) 그건 각자가 알아서 할 일이고. 그 전엔 내가 흔히 말할 때, 선방(禪房)에 와서 두 철 세 철도 안 지나서 견성했다고 한다고 그랬는데, 요즘은 그건 아무 것도 아니야. 일본(日本)에는 어떤 풍조가 있냐면, 일본 사람들이 미국 가서 참선(參禪) 가르친다고 선방을 많이 짓고 이러는데, 미국 가서 어떻게 가르치냐면, 견성해갖고 참선을 해. 그 되긴 됐지? '오모리'라고 화원대학 학장(學長)인데, 임제종(臨濟宗)사람이야. 그 사람이 미국 가보니 자기가 봐도 기가 막히거든? 보니 '견성단'이라 해서 見性한 사람은 그 쪽에 앉아서 참선을 하고 견성하지 않은 사람은 패를 나눠서 참선을 시키거든. 그래 견성단에 앉아 있는 사람한테 물어봤데. "당신이 견성을 했다는데 무얼 아느냐?"하니, "나는 '무(無)!' 하는 것밖에 모른다."이거라. 화두를 무(無)자를 주거든. 이래가지고 화두를 배워서 '무(無)!' 할 줄 알면, 견성했다고 인가(印可)를 해버려. 너는 견성했으니까 참선해라 이거라. 세상이 이렇게 자꾸 변하는 판이야. 그 내용이 '대법륜(大法輪)'이라고 일본에서 나오는 불교전문잡지(佛敎專門雜誌) 안 있어? 거기 9월호인가 10월호인가에 나와 있어. 미국에 가면 전부 그런 식으로 가르치고 있거든. '무(無)!' 할 줄 알면, '니 견성했다.' 이러고 참선을 가르친단 말이야. 이런 식으로 불교가 자꾸 거꾸로 나가는 판이야. 그래서 하도 보다보다 못해서 이전 스님네의 법문이나 이런 것들을 뽑고 해서 '선문정로(禪門正路)'를 지었는데, 내 말이 아니고 예전 조사(祖師)스님네의 말, 부처님의 말을 기준해서 견성(見性)의 내용이 어떻다는 걸 조금 말했어. 생전에 출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옆에서 들어 아는 사람이 자꾸 꼭 생전에 출판해야 된다고 해서 올해 출판했는데, 그걸 보면 견성(見性)이란게 어떻다는 걸 대강 알 수 있을 것이야. ③ 수좌오계(首座五戒) 그럼 당장 우리가 버리고 뭐 어쩌고 하는 것 보담도, 어떻게 해야 공부를 좀 할 수 있는지, 누구든지 공부를 하려면 근본 방침을 알아야 되는데, 공부가 안된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는데, 공부가 안된다는 것은 공부를 안한다는 말인데, 공부를 하는데 공부가 안될 턱이 있나? 내가 공부하는 사람을, 실지로 참-으로 공부하는 사람을 아직 못 봤어. 견성(見性)한 사람, 뭘 알았다는 사람은 참 많은데, 실지로 공부 열심히 하는 사람을 아직 못 봤어. 이전부터 흔히 하는 소리지만, 어떤 수좌가, "스님, 공부가 안되서 큰 일 났습니다." "공부를 하는데 안될 턱이 있나? 니가 공부를 안해서 안되지. 서울을 목표로 해서 자꾸 가다보면 결국은 서울 갈 거 아니가? 가야山에 앉은뱅이처럼 가만히 앉아서 서울이 안 보인다 하면, 그건 미친 사람 아니가? 니가 공부를 안하기 때문에 안되는 것이지, 공부를 하는데 안된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그래요? 저는 한다고 하는데..." "아니야. 내가 공부하는 5계(五戒)를 줄 테니까 한 번 실행해 봐라." "무엇입니까?" 그땐 고등학교가 평준화(平準化)되기 전이었는데, 서울에 고등학교가 많지만 경기고등학교가 공부를 제일 잘 했거든. 그 경기 다니는 아이들한테 물어봤어. "경기고등학교 다니는 아이들이 서울대학교에 합격을 제일 많이 하는데, 그 비결이 뭐꼬?" "비결이 있습니다." "뭐꼬?" "두 시간 더 안 자고 공부하는 겁니다." "두 시간 더 안 자고 공부하는 거! 애들이 하는 소리야!" "두 시간 이상 자고 서울대학교 합격하려면 안됩니다." 세시간 자고 공부해도 결국은 서울대학교 떨어진다 이 말이야. 두 시간 더는 안 자고 열심히 공부해야 서울대학교에 붙지, 한시간 더 자서 세시간만 자도 서울대학교 못 들어간다 이거야. 이것이 그 비결이야. 그 기막힌 소리야, 애들이 하는 소리지만. 공부한다-이래 갖고 데리고 온 애들을 보면 기진맥진해 있어. "저러다가 애들 병 안나나?" "그렇지만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놓고 봐야 안됩니까?" 설사 죽더라도 서울대학교에 들어가 놓고 죽어야지 똥통대학교에 들어가서 살면 뭐하냐 이거라. 보통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려고 해도 두 시간 더는 안자고 공부해야 되지, 세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여섯 시간 열 시간, 잘 잠 실컷 다 자고 학교는 무슨 학교. 그건 안된다 그 말이여. 그와 마찬가지로 이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는 걸 서울대학교에 비교할 수 있을까? 잘 잠 다 자고 공부해 갖고 무슨 공부를 성취할거고? 그러니 니 잠부터 한 번 줄여봐라! "어찌하면 됩니까?" "서울대가 아니니까, 조금 낮춰서 세시간만 하지. 세시간 더는 자지 말고 니 한 번 해봐라!" "세시간 더 안자고 하면 수면(睡眠)이 너무 부족한 게..." "임마, 수면부족 아니여! 세시간만 자면 의학적으로 보든, 여러 가지로 봐서 절대로 병 안나. 내가 절대 보증 해!" "그럼 어떻게 해서든지 세시간 더는 안 자고 공부하면, 공부가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게 해 봐라! 니가 실천을 못해서 그렇지 실천을 하기만 하면 된다 그 말이여. 둘째는 무슨 말이든지 말을 하지 말아야 되. 세시간 아니라 한 시간밖에 안 자더라도 자꾸 이야기나 하고 지낼 것 같으면 무슨 공부가 될거야? 그러니까 무슨 말이든지 벙어리처럼 말을 하지 말란 말이야. 니 이야기할 때 화두(話頭)되더나? 그러니까 세시간 더는 자지말고 무슨 말이든지 말을 하지말고 공부해봐라. 그러면 공부가 잘 될거야." "또 없습니까?" "또 있지. 셋째는 부처님의 경(經)이든 조사(祖師)스님의 어록이든, 무엇이건 책을 보지 마라. 세시간 더 안 자지, 말 안 하지, 책 안 보지. 입 딱 봉했지, 눈 딱 봉했지. 그럼 속에 화두밖에 안 남을 테니, 공부가 안될래야 안될 수 없을 것 아니야?" "……" "또 있다." "무엇입니까?" "요즘 보면 풍속이 내일 죽더라도 먹고 보자는 판이여. 만날 먹는 판이야. 선방이나 강원(講院)이나 할 것 없이 만날 먹는 판이다 그 말이여. 먹느라고 공부를 못해. 하루 세 때 밥 먹지, 간식 잔뜩 먹지. 이래 놓으면 식곤증이 나서 자꾸 졸기만 한다 그 말이여. 니 자꾸 많이 먹으면 조나 안 조나?" "실지로 그렇습니다." "설사 이불 펴고 안 잔다 해도 앉아서 만날 졸면, 화두 있드나? 그러니까 간식하지 마라 그 말이여. 갈수록 자꾸 어렵거든? 무슨 간식이든 간식을 안해야 되. 나는 평생 간식을 잘 안 하는 사람인데, 평생 간식을 잘 안 해도… 그래서 장 이렇게 몸이 안 좋은지 몰라도. 간식하지 말란 말이야." "……" "또 하나 있어." "......" "돌아다니지 말란 말이야. [결제]살림 중에는 억지로 견디다가, 살림 중에도 도망 안 가나? 해제만 하면, 어떨 때 여름에 해제하는 날 보면 소나기가 쏟아지는데도 소나기를 맞으면서 달아나거든. 그렇게 도망가고 싶어하면서 어떻게 석 달 동안 참았는지…. 공부란 것은, 공부 시작할 때가 결제(結制)고 공부 마칠 때가 해제(解制)인데. 해제했다고 석 달 동안 돌아다니면, 공부한 것 다 도망가버려. 그러니, 첫째는 세시간 더는 자지말고, 둘째 아무 얘기도 하지말고, 셋째 무슨 책이든지, 부처님 경이든 조사어록이든 할 것 없이, 책 보지 말고, 넷째 간식하지 말고, 다섯째 돌아다니지 말라. 그게 5계(五戒)여. 5계를 잘 지키는데도 공부가 안 되거든 내 목을 베어가라 그 말이여. 그것만 잘 지키면 공부가 안될 리 없어. 어째?' "......" "이놈아, 이래도 공부 안된다 할거가?" "아이구 예, 5계 한 번 지켜보겠습니다." 그래 그 후로 解制가 돼서 올라 왔어. "5계를 여름에 잘 지켰나?" 참, 5계가 안된다 이거라. 세시간 더 안자는 것도 어렵지, 말 안하는 것도 어렵지, 책 안 보는 거야 좀 쉬운데 말이야. 안보면 되는데, 먹는 것 말이여, 세 때 먹는 것 말고도 옆 사람이 자꾸 간식(間食)을 먹으니, 스님이 얼마나 나를 미워 하길래 옆 사람은 먹게 하고 나는 못 먹게 했는가? 기가 막히더라 이거야. 돌아다니지 말라는 것도, 해제하면 몸도 어쩌고 해서 가봐야 되니, 아무래도 못 지키겠다 이거야. "이 쌍놈, 죽일 놈아, 5계도 못 지키면서 공부가 되니 안되니 그딴 소리하고 있어? 앞으로 공부가 되니 안되니 그 소리할래, 안 할래?" "다시는 그 소리 안 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5계를 한 번 지켜봐라!" 그 뒤에도 더러 여기 있었어. 더러 오기도 했는데, 5계를 몇 해를 지키려 해도 못 지키겠대. 그 뒤에도 더러 5계를 줬는데, 어떤 수좌는 요만한 판자에 5계를 적어서 메고 다녀. 그래도 못 지켜. 5계를 수 백 명한테 줬어도 지키는 사람 한 사람도 못 봤어. 결국은 지금까지 공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한 사람도 못 봤다 그 말이 되버리거든. 그래도 공부가 되니 안되니 하는 그런 소리 할 수 있을까? 벌써 결제(結制)하고 한 달이 됐는데, 두 달이 남았긴 하지만, 두 달도 퍼뜩 같애. 결제때 5계 법문을 하려다가 기운도 없고, 결제법문하고 5계 법문 할라하니 안된다 말이라. 그래 오늘 내 늦긴 좀 늦었지만, 우리 5계를 한 번 지켜봅시다. 또 선방만 5계 지키란 말 아니야. 강원도 경(經) 읽고 할라면 잠 잘 것 다 자고 공부 될 것가? 서울대 들어가는 비결이 말이여, 두 시간 더 안 자고 하는 거, 많이 물어 봤어. 좋은 대학에 들어가려 해도 두 시간 더 안 자고 공부해야 되는 판인데, 무상대도(無上大道)를 성취하려 하면서, 부처님 경을 읽고, 참선을 할라 하면서, 세 시간, 그것도 많이 생각해서 세 시간이지, 나중에 할 수 없이 5계 중에 시간을 하나 늦추자, 어떻게? 네 시간 하지. 네 시간으로 늦추어 봤단 말이야. 그것도 못 지켜. 올 여름 결제 때도 네 시간 했는데, 여섯 시간 하자고 한다 하길래 안된다고 했어. 그러니까 수좌(首座)스님하고 얘기해서 다섯 시간 한 모양이야. "어쨌어? 다섯 시간 했제?" [ "네 시간 방 짭니다." ] "네 시간 하는가?" 그때 다섯 시간 한다 길래 말이야. 난 말 같잖은 소리엔 대답도 안 해. 그러니까 네 시간 꼭 하지? [ "예!" ] 옳지! 네 시간 자면 아주 충-분해. 우리 다 해 봤어. 우리 젊을 때 사실 세 시간 더는 안 자봤어. 몇이서 짜거든? 세 시간 자서 잠이 부족해 병나는 법 없어. '세 시간 더는 안 자고 공부한다.'는 그런 결심은 여간해서는 못하는 거거든. 그러니 이것만 해 보면 말 안 하는 것은 따라 가 버려. "강원은 몇 시간 자노? 일곱 시간 자나?" [ "여섯 시간 잡니다." ] 여섯 시간? 일곱 시간 안 자고? 요새 여덟 시간은 자야 된다 카는데? 강원은, 이건 명령은 아닌데, 내 이만큼 얘기 해 줬으니까, 몇 사람이라도 짜고 말이여, 한 세 시간 하든지, 네 시간 하든지, 네 시간 하면 충분해. 아무리 애들이라 한참 잘 때지만. 나는 일곱 시간 자는 줄 알았더니 여섯 시간 자는구나, 하하하. 우리가 웃고 말 일이 아니라, 우리가 참으로 깊은 산중에 들어앉아서 시주물을 먹고 있으면서 공부를 안 하면 생함지옥(生陷地獄)하는 것 아니야? 본래 5계는 세 시간이지만, 선방에서는 네 시간 한다 하니까 , 그래도 '그래라' 이 말은 안 해. 네 시간하고, 얘기하지 말고, 그런 동시에 책 같은 것 보지말고, 간식하지 말고. 요새는 어느 선방이고 할 것 없이 먹자판이래. 내 지금 말한 5계, 첫째 세 시간 더는 자지 말자, 얘기하지 말자, 잡담하지 말자, 강원에는 경(經) 익히는 게 근본이니까 경 이외에는 딴 책보지 말자. 그전에는 내가 다니면서 강원 애들 책상을 뒤졌거든. 보면 유행가도 나오고 소설도 나오고, 온갖 것이 다 나와. 몽땅 모아서 불에 다 태우고 그랬어. 요새는 기운이 없어서 그것도 못해. 자기가 알아서 하겠지 싶어서 냅둬. 그것도 하려면 힘들어. 간식하지 말자, 간식 안 하는 그게 큰 공부여. 또 설사 해제가 됐다 해도 돌아다니지 말고. 이렇게 5계를 어떻게 해서든지 철저히 지켜 갖고, 하나 아니면 반쪽이라도 참으로 공부하는 '공부인'이 나와야 될 것 아니가? 자, 우리 노력해 봅시다! 首座五戒 退翁性徹 一. 3시간 이상 자지 말라 잠이 많으면 마음이 법(法)에 들어가지 못하며, 제천(諸天)이 기뻐하지 않고, 악몽(惡夢)이 많아지고, 몽정(夢精)을 하게 된다. 기상시간이 되지 않았더라도 잠이 깨면 그 즉시 일어나서 수행하고 졸음이 오면 빨리 움직이며 경행(經行)하라. 열심히 정진한다면 짧은 시간 내에 졸음은 극복된다. 一. 벙어리처럼 지내며 잡담(雜談)하지 말라. 말은 수행상(修行上)의 큰 장애니, 5분 동안의 이야기는 하루동안의 마음 집중한 공(功)을 깨뜨린다. 입만 열면 공부가 끊어진다. 佛說 "두 가지 태도가 있으니, 법(法)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거룩한 침묵을 지키는 것이다." 一. 문맹(文盲)같이 일체 문자(文字)를 보지 말라. 널리 배워서 아는것이 많으면, 자성(自性)은 오히려 어두워지는 것이니, 무엇이든지 읽지도 외우지도 회상하지도 말라. 진정으로 견성(見性)하고자 한다면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던 일체의 언어문자(言語文字)를 깡그리 쓸어 내버려서 털끝만큼도 없게 해야 한다. 도를 닦는데 있어서 경륜(經論)을 익히고 외우는 것만큼 장애가 되는 것은 없으니, 이를 단연코 버리고 용맹정진(勇猛精進)해야 한다. 洞山曰, "심의식(心意識)으로 현묘(玄妙)한 종지(宗旨)를 배우려 한다면, 서쪽으로 가려 하면서 오히려 동쪽으로 가는 격이다." 一. 포식ㆍ간식(飽食ㆍ間食)하지 말라. 중생들의 탐애심(貪愛心)이 모두 음식(飮食)이 원인이 되어 일어난다. 그러므로 건강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이 몸이 마르지 않게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한다. 佛說, "음식을 먹는데 두 가지 태도가 있으니, 하나는 망상(妄想)과 욕심(慾心)으로 먹는 것이요, 하나는 지혜(智慧)와 도심(道心)으로 먹는 것이다. 적게 먹을수록 마음은 더욱 밝아지고 많이 먹을수록 마음은 더욱 손상된다." 一. 돌아다니지 말라. 마음은 절대로 움직이지 말고, 몸은 규칙적으로 움직여라. 조주스님이 이르시되, "너희가 만약 벙어리가 되어, 총림(叢林)을 떠나지 않고, 20년 30년 동안 이 도리를 참구(參究)해도 얻는 것이 없다면, 내 머리를 끊어가라." ④ 원수를 불보살로 섬기자 ....[ 그렇지만] 내가 그르다고 생각해 봐. 때리는 게 아니라 설사 목을 부러뜨려도 내가 죄를 짓고 잘못했으니까 그런 식으로 은혜를 베푼 게 아니냐 이 말이여. 실지로 나를 잘 깨우치고, 잘 반성시키고, 어떻게 해서든지 바르게 지도하기 위해서 그 사람이 몽둥이를 들고 욕도 하고 해쌌는데, 그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 있나 그 말이야. 그 막중한 은혜는 뼈를 갈아 가루를 낸다하더라도 도저히 다 갚을 수 없다. 그래 내가 게송을 하나 만들어 줬어. 그 사람이 보더니, '제가 참 실행이 될지 어떨지 알 수 없지만, 이 방향으로 노력하며 살아야 안되겠습니까?'하면서 그 뒤로부터는 노력을 많이 하는 모양이야. '내가 당신보고 법문이나 하는 체하면서 게송이나 만들어 주고 하지만 실행은 당신보다 못할지도 몰라.'하니까 '스님이 그럴 리가 있습니까? 이를 근본으로 삼고 앞으로 잘 노력해서 누가 뭐라든지 간에 상대를 선지식(善知識)으로 보고, 아무리 해를 줘도 은혜로 생각하고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고... 하필 결제하는 날, 좋은 날, 칼로 째고 창으로 찌르고 하는 그런 말을 하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가 살다보면 비오는 날도 있고 날씨 좋은 날도 있고 그런데, 비가 오는 궂은 날, 나쁜 일을 당하는 그 때가 어렵거든. 그 땐 어떤 태도를 갖고 살아야 되느냐... 그래서 이런 소리를 해보는 것이야. 아까도 얘기했지만 부처님이 장 하신 말씀이 '원수를 부모같이 섬겨라' 이것의 근본 내용이, 於我에 極惡者가 是眞善知識이니, 刀杖毁辱恩은 粉骨未足酬로다. 어아에 극악자가 시진선지식이니, 도장훼욕은은 분골미족수로다 나에게 극히 악하게 하는 자가, 나를 어떻게 해서든지 못살게 하는 사람, 나를 해롭게 하는 사람이, 참다운 선지식(善知識)이다 그 말이여. 불보살의 화현(化現)으로서, 나를 잘 가르치고 지도해 주기 위해서 하는 것 이니, 선지식이다... 그럼 말 다 된 것 아니여? 칼로 찌르거나 몽둥이로 때리든지, 무슨 소릴하든지간에 그 은혜는 뼈를 가루 내더라도 다 갚을 수 없다. 내가 항상 하는 소리가 '우리 불교 사전에는 용서(容恕)란 없다.'는 것이야. 용서란 나는 잘했는데 저쪽은 잘못했거든? 그래 잘한 내가 잘못한 저쪽을 용서한다 그 말 아니야? 보통 '용서할 줄 알아라'하는데, 나는 정신없는 소리라고 봐요.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자기는 잘했다는 말 아니야? 그러니 우리 불교 사전에는 용서라는 말이 없다 그러거든. 언제든지 내가 잘못했지 저쪽 잘못은 없단 말이여. 저쪽은 언제든지 선지식이고 나는 중생이고, 모든 잘못된 책임이 나한테 있는데, 어떻게 남을 용서해?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감사(感謝)를 해야 되. 용서란 없고 무슨 일을 당하든지 간에 감사를 해야 해. 저 사람이 나를 한 대 '탁' 때리면, '저 사람 같지 않은 것, 그만 내가 용서하지' 하면 언제든지 내가 옳은 거거든. 그건 잘못된 생각이야. 저 사람이 나를 툭 쥐어박으면, '내가 뭔가를 잘못했을 거야, 잘못했으니까 내 허물을 고치려고 이런 주먹 법문을 해 주었구나.'하고 생각해야 되. 그러니 '참 감사합니다.'해야지, '용서'하면 세상에선 최고라고 알고 있는데, 언제든지 내가 잘못한 걸로 알고 저쪽을 불보살로, 선지식으로 보라 이 말이야. 그러니 감사를 해야지 어찌 용서를 하겠나 이 말이야. 그러니 우리는 무슨 일을 당한다 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지, 용서한다는 것은 도저히 꿈에도 생각할 수 없는 거거든. 그리고 옳고 그른 것, 그것은 참 모호한 것이야. 누구든지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 자기가 그르다는 사람 하나도 없단 말이야. 그래서 싸움 나는 것 아니야? 한 쪽이라도 내가 잘못했다, 내가 생각을 잘못했다 하면, 모든 분쟁이 없어질 것인데. 그렇지만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참 안된다 그 말이여. 그래서 아까도 얘기 안했어? 나이가 80, 90이 되도 자기가 잘못했다는 자기 반성할 줄 모르면, 아직까지 철 안든 사람이다 그 말이여. 철이 들면 자연히 모든 게 내 잘못이요, 내 옳은 것이 없어져 버려. ⑤ 내가 잘했다는 생각을 버리고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운명을 바꾼 이야기 이건 고담(古談)에 나오는 얘긴데, 한 1300년 전에 당(唐)나라에 '배도(裵度)'라는 정승이 있었는데, 참- 유명한 정승이야. 밖으로 나가면 將帥가 되고, 안으로는 큰 재상이 되고, 만고(萬古)의 명재상(名宰相)인데, 이 사람은 등이 동생과 딱 붙어서 쌍둥이로 태어나서 누가 兄이고 누가 동생인지 모르는데, 중간을 칼로 갈라서 하나는 형이라 하고 하나는 동생이라 했어. 한날 한시에 태어났으니, 얼굴도 같고 생년월일시(生年月日時)도 같으니, 행복한 사람이 되든지 불행한 사람이 되든지, 똑같이 생활하고 말 것 아니야? 그런데 안 그래. 그 뒤에 커서 배도(裵度)는 天下에 유명한 명재상이 되어 만고에 그 이름이 드러나 있지만, 동생은 지지리도 생활이 곤란하여, 개울가에서 평생을 뱃사공으로 곤궁(困窮)하게 살았어. 그럼 배도는 얼굴도 똑같고 생년월일도 똑같은데, 어째서 운명이 그렇게 달라졌나…. 그 이유가 있어. 그가 조금 커서 열 댓살 돼서 상(相)을 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니 큰일났다. 니 얼굴이 뵈기는 좋아 뵈는데, 얼마나 운명이 나쁜지 니만 평생 고생하고 말 것이 아니라, 니 이웃까지 다 못살게 된다. 너 때문에.' 사주(四柱)를 보더니 또 그러거든. 한 두 사람이 그러는 게 아니야.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여러 군데 물어보니 다 그래. 그래 이 사람이 생각을 했어. 내가 운명을 잘못 타고났든지, 사주팔자를 잘못 타고났든지 해서 내가 고생하는 것은 괜찮은데, 나 때문에 이웃까지 다 망한다 하니, 그게 자꾸 마음에 걸린단 말이야. 보통사람 같으면 사주(四柱)고 팔자(八字)고 숨기고, 남이야 망하든 말든 어디 사람 많은데 가서 나도 한 번 살아보자. 이렇게 했겠지만, 그 사람은 양심이 있어서, 그게 자꾸 마음에 걸려서, 옆 사람에게 피해를 안 주려고 저 깊은 산 속에 갔어. 그래 생활하면서 자기반성을 해보니, 좋은 일[善]한 것과 궂은 일[惡] 한 것이 반반(半半)이야. '여기서 나도 공부를 해서 착한 사람이 되야 겠다.'하고, 종이도 붓도 없으니 나무를 두 개 깎아 놓고 좋은 일하면 오른 쪽 나무에 표를 하고, 나쁜 일 했다는 생각이 들 땐 왼쪽 나무에 점을 찍어 표를 했어. 그렇게 생활을 하는데, 처음엔 자기 생각에 착한 일 한 것 밖에 없어. 그래서 착한 쪽의 점수가 자꾸 올라가거든, 나쁜 쪽은 점수가 적고. 그래 어느 정도 점수가 올라간 뒤에 가만히 생각을 해보니 그전에 좋은 일 했다는 것이 전부 나쁜 일이야. 생각이 모자라서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철이 들고 보니, 나쁜 일이지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단 말이야. 이때까지 했던 것이 다 헛일이구나. 나무를 새로 깎아서 새로 점을 찍었어. 이제는 나쁜 쪽에 점수가 올라가.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는 좋은 쪽의 점수가 올라가. 그러다가 또 시일이 지나간 뒤에 보니까, 자기가 좋은 일이라고 한 것이 전부 다 나쁜 짓이야. 이렇게 여러 번 반복을 했어. 혼자 살면서도 여러 가지 선악(善惡)이 있거든. 이렇게 하다가 나이가 한 40이 되니 몇 달이 지나도 자기가 잘했다는 생각이 안 들어. 잘했다는 곳에 점을 찍을 수가 없단 말이야. 그 때가 이제 요새말로 철이 좀 든 때야. 아무리 자기는 잘한다고 했어도 가만히 생각을 해 보니, 잘했다는 곳에 점을 찍을 수가 없단 말이야. 전부 잘못한 것이지, 잘했다는 생각을 낼 수가 없어. 사람이 되려면 그 만큼 되야 돼. 그래 결국 가서는 무엇을 성취했냐하면, 자기가 잘한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을 성취했어, 전부 자기 잘못이지. 그래 생각해 보니 한 20년 산중에 살았으니 세상 구경이나 한 번 하고 죽자는 생각이 들어서 유랑길에 나섰어. 가다가 길이 무너진 곳이 있으면 길을 고쳐 놓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이 있으면 짐을 져주고, 농사철엔 농사도 도와주고, 때가 되면 밥 좀 얻어먹고, 사방팔방(四方八方) 다니면서 남 거들어 주는 일만하고 돌아 다녔어. 그러면서도 자기가 잘한다는 생각이 없었어. 이렇게 한 10년을 돌아다니니 사람들 사이에 소문이 났어. '그 사람이 미쳤는가 안 미쳤는가 알 수가 없어. 남 도와주는 일만 하는 걸 보면 미친 것 같지는 않고 필시 성인(聖人)인 것 같애.' 일 도와주고 때되면 한 술 얻어먹기나 하지, 삯을 받나,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려하나. 인사를 하려 하면 내 잘한 게 아무 것도 없다고 달아나 버린단 말이야. 그 사람이 성인 일거라는 소문이 당(唐)나라 천자(天子)의 귀에까지 들어갔어. '나도 한 번 만나보자!' 천자가 만나봤어. "내가 들으니 온 천하가 네가 어질고 착한 성인이라고 하는데, 네가 뭘 잘하기에 성인이라고 하느냐?" "폐하, 그것은 잘못 들은 것입니다. 저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밥이나 얻어먹는 거지지 아무 것도 잘한 게 없습니다. 그 소문은 잘못된 것이지 절대로 제가 잘하고 옳게 해서 그런 소문이 난 것이 아닙니다." 하면서 천부당만부당하다고 펄펄 뛰는데,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진정(眞情)으로 그러거든. "그래도 널 참으로 성인이라고 하는데."하니, 엉엉 울면서 "저는 억울합니다. 절대로 잘한 게 없습니다."하면서 도망을 가. 천자가 가만히 보니 조작도 아니고 진정(眞情)이고…. 참말로 성인이야. 그래 대궐 문을 닫아서 도망 못 가게 했어. "당신은 참으로 지지리도 못난 사람이고 나쁜 일만 한다고 하는데, 내가 봐도 당신은 진짜 성인이야. 당신 같은 사람이 이 나라를 맡아 정치를 하면 이 나라는 요순(堯舜)시대가 될 테니, 정승(政丞)을 맡아 해라." 그만 눈이 둥그레져서, "폐하, 저 같은 사람이 정승하면 백상들이 다 죽습니다. 백성 다 죽이려면 저를 정승하게 하십시오." "당신 말로는 백성들이 다 죽을 거라지만, 내가 볼 땐 백성들이 다 살꺼야. 죽고 사는 건 나중에 보고 일단 정승을 해 봐라." 그리고는 요새말로 억지 감투를 씌워서 정승을 시켰는데, 시키고 보니 명재상(名宰相)이야. 당나라가 요순시대가 되버렸어. 그때 오원제(吳元濟)라고, 반란군이 나와서 나라를 어지럽히니, 누구도 난리를 평정(平靜)하지 못해. 그래 배도(裵度) 더러 도원사(都元帥)를 시켜서 보내니, 배도가 "이 태평성세(太平聖世)에 당신이 이렇게 소란하게 하면 쓰나? 빨리 서로 和解를 하자. 하는데, 그 첫 번째 조건이 당신 측의 그 누구를 막론하고 허물을 묻지 않겠다, 벌을 주지 않는다 이거야. (하지만) 당신의 군대가 城에 들어가서 누구에게든 욕을 하거나 때리거나 재물을 빼앗거나 하면 엄벌을 하겠다.'하고 4대문(四大門)에 방을 붙였어. 오원제(吳元濟)측에서 생각해보니, 이건 싸우려는 게 아니라 도우려는 거야. 배도와 싸워봤자 결국 지겠거든. 애라 미리 항복하자! 그래서 천하가 태평하게 됐어. 나라 밖에서는 큰 장사(將帥)가 돼서 적군을 평정했어. 그래 근본이 어디에 있냐면, 내 옳은 것은 하나도 없는 거기에 있다 말이야. 우리도 이를 근본으로 삼고 귀감(龜鑑)으로 삼자는 말이라. 철이 났다면 언제든지 저쪽이 옳고 내가 그른 줄 알아야 돼. 내가 그르니 내가 잘못한 사람이고, 저쪽이 옳으니 저쪽이 선지식(善知識)이다 그 말이야. 그런 동시에 용서란 할 수 없고, 오직 감사할 뿐이야. 내 옳고 니 그른 것을 버리고 반성해서, 내가 그르고 니가 옳다는 걸 노력해야겠다 이거라. 말은 쉬워도 당장에 되는 게 아니야. 하지만 노력은 해봐야 안 되겠어? 방향은 분명히 잡아놓고 봐야 안돼? 그래 어떻게 해서든지 부처님 말씀대로 방향을 잡아놓고 살면, 결국엔 그 방향으로 가고 마는 게야. 한가지 덧붙일 것은 실천 관곈데, 흔히 "스님, 날 해롭게 하는 사람, 원수를 부모같이 섬겨라... 말은 간단하고 참 쉬운데, 해볼라 하면 참- 어렵습니다. 저는 아무리 해도 안됩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하는데, 살다보면 은연중에 마음에 걸리는 사람, 나를 해치는 사람이 있거든? 우리는 부처님 제자니까, 장 예배를 드리고 축원을 하는데, 나는 축원(祝願)을, 나를 제일 해롭게 하는 사람 안 있겠어? 예를 들어 김가(金家)면, '김가를 가장 행복하게 해주십시오.'하고 자꾸 축원을 한단 말이야. 이것도 말 안 되는 소리지? 그 사람 생각만 해도 뜯어먹고 싶고 뼈를 갈아먹고 싶은데 말이여, 그 사람을 행복하게 해달라고 어떻게 부처님께 축원을 해? 그것도 당연한 소리여. 그런데, 억지로 거짓말이라도 그렇게 하면, 한 번하고 두 번하고, 자꾸 여러 번 하면, 거짓말이 참말이 되어서 나중에 오래 오래하면 결국은 진정으로 그 사람을 위해 축복을 빌게 돼. 실제로 해보면 그렇게 된단 말이야. 그러면 날 해롭게 하고 날 못살게 구는 그 사람이 선지식으로 안 보일 수 없고, 내 옳은 건 없어져 버리고, 모든 사람이 다 불보살이고, 모든 걸 다 감사(感謝)하게 생각할 수 있다 이 말이야. 우리 한 번 해 보까? 그렇게 하다보면, 앉아도 감사하게 되고, 넘어져도 감사하고 코를 깨도 감사하고 머리를 깨도 감사하고 실지로 그렇게 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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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강을 건너고도 큰산을 3개 넘어야 깨달음이라 하시네요 숙면 일여 그것이 완성일까요? 강건너 가져온것을 잠재의식 까지 가져 가야 뼈속 까지 깨달게된다는 말이라 생각 됩니다 강건너 왔다고 다온줄알지말고 공부시작이란 말씀이겠죠()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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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또읽어도새롭고 큰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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寤寐不忘! 참으로 거룩하고 자상하신 말씀입니다. 다만 보이고 들릴뿐인 중생에게 섬광처럼 밝은 말씀을 올려주신 산방한담님께 깊은 감사를 드리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