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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제일가람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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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바람이 일었는가. 아침에 문득 일어나 개나리 봇짐 주섬주섬 쌓고 있자니
옆에서 불안한 맘으로 지켜보는 울 뱃살공주 눈매가 심상찮다.
세상의 이해 못할 일들을 얼마동안 겪은터라 여유로운 하늘을 이고 숲길을 걸으며
호젓한 그림을 마음속에 담아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이 나를 움직이게 했다.
그냥 한마디 "갔다올께." 던져놓고 훌쩍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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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법주사 그리고 팔상전...
고교시절에 한 번, 그 뒤 무심코 찾아가 스치듯 지나온게 한 번이니
머리에 남아 있을리 만무 하지만 언젠가 어느 책에서 사진으로 본 기억에 현실을
호도하며 자꾸만 떠 올려 지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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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일대기의 팔상도를 모신 건물이지만 목탑양식의 처마랑 층층이 쌓여있는
섬세함과 눈물겹도록 그려놓은 단층과 그 험난한 세월 속에서 용케도 살아남아
몇 백년을 지켜오며 후세들에게 교훈적 사실을 말없이 전해주는 어쩌면 상처 투성이의
가슴을 가득 안고 묵묵히 절제하며 그 내심의 아름다움을 지켜온 무생명이지만
생명보다 더 여유로운 여유를 부리며 구석 하나하나까지 멋스러움을 간직한 목탑과
교우 하고자 날카로운 눈매를 애써 피하며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다독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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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참나무, 전나무 가득 푸르름을 내 뿜고 있는 숲길과 그 옆으로 난 맑은 계곡물 흐르는
소리... 그 속에 송사리 버들피리 여유롭게 햇살 받으며 노니는 그 모습과 함께 큰 호흡
하면서, 망막속에 아름다운 풍경들을 하나하나 놓칠세라 각인시켜 가는 길.
아이들의 맑은 웃음 소리를 희망찬 즐거움의 음악이라 한 껏 여유 부리며 걸어 오르다
보니 어느새 금강문 앞에 다다른다.
뒤로 속리산 자락 높이 우뚝서 기상을 표효하고, 몇몇의 가람들이 산 속에 파묻혀 평평한
넓은 터를 다 잡고 그 터 위에 단아한 때론 화려하게 자리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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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한적인 고행을 통해 법을 받은 진표율사가 김제 금산사에서 법회를 열고, 다시
이곳 속리산으로 들어와 이어진 법주사 창건이야기는 뒤로 하더라도 미륵신앙의
중심 도량이던 이곳. 고려 공민왕과 조선태조와 병에걸린 세조의 기도처 였고,
정유재란때 충청도 지방의 승병기지 였던 까닭에 왜구들의 보복성 방화로 모조리
불타 버리는 액운을 맞게 된다. 그 후 어릴적 내가 제일 좋아하던 사명대사 유정의
지휘아래 다시 재건 하기에 이러르니(선조 35년, 1602년) 그나마 부셔 버리지 못한
팔상전 지대석과 암벽에 조각되어 있는 미륵상과 깨트리다 못다한 희견 보살상과
국보 5호인 쌍사자 석등이 아직 당당하게 남아 있는 이곳이 사무치도록 아름답고
후세에 남아있는 자로서 눈물겹도록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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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문을 들어서면서 경과 속의 경계를 풀어 버린다.
애써 눈을감고 방향을 왼편으로 돌린다. 팔상전이 궁금했지만 맛있는 음식은 아껴서
두고 먹고픈 어린 아이의 심정이련가.
어디서 온 것인지 이곳 법주사 경내와는 전혀 어울릴것 같지않은 역으로 비스듬한
바위 하나에 새겨진 미륵불상. 처음보는 이로 하여금 어쩌면 미소를 짖게도 만들지만
다리를 쪼그리고 앉아 있는 모양새가 우스꽝 스럽다. 우리 아들놈 보았으면 아마도
웃지못할 소리 하나 나올법한 자세를 갖추고 있다.
"우 하하~ 아빠 부처님 똥누는 모습에도 절 하나?" 아마 이렇게 물어오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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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애여래의상.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의 조각상이다.
11세기 고려시대 마애불상으로 뛰어난 조각 솜씨가 돋보이는 불상이다.
막 움직이듯 피어오르는 연꽃과 연밥에 두 다리를 옆으로 늘어 벌린 모습에
머리는 옥수수알 가지런한 모습의 나발이나 마애불에서 흔하게 보던 광배가 없다.
움푹 파인 코와 튀어나온 눈에 볼록한 입술이 이쁘지만 약간은 심술굳은
모습이다. 양 귀는 어깨까지 늘어져 있고, 목에는 삼도가 새겨져 있는데 너무 강조한
탓인가 머플러 둘둘 말아 놓은듯 하며, 그 삼도위에 이중턱으로 군살까지 표현을 해
놓아 더불어 풍만하다.
수인의 모양은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려 손바닥을 보여주며 엄지와 중지를
모아 둥글게 하고 있으며, 왼손은 오른손을 받치듯 여유롭게 들려져 있다.
부처가 설법을 행하는 모습을 나타낸다는 '설법인'이라 한단다.
흘러 내리는 듯 한 옷 매무새가 자유 스러우며 달랑 들린듯 드러낸 발목 아래 발가락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엉거주춤 자세에 힘을 가하기 위함인가, 양 발가락에 함껏
힘이 실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 마지막 아래까지 힘을 넘치게 하여 끝선의 정점같은
느낌에 힘이 솟는듯 하나 잘록한 허리가 고행을 표현 하는 것인가? 배부른자의
모습으론 이해가 부족할 수 밖에 없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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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연지- 커다란 화강암을 둥글게 깍고 그 속에 물을 담을 수 있게 만든 작은 인공연못
같은 구실을 하는것이다. 이 석연지는 법주사 창건 초창기에 만들어 진것으로 추정 된단다.
미륵신앙 사찰들은 연못을 메워 절을 지은 창건설화들이 있어 이 석연지를 만들어
미륵전 앞에 놓았었다. 김제 금산사 큰마당 앞에 놓여 있던 것이랑 비슷한 것이니
달리 이설이 없을 법 하다. 그러나 우리의 토속 신앙과 불교가 접목 되면서 서로 자연
스레 융화되는 소박하고 부드러운 심성을 보는듯 하다.(국보 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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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의 삼성각이나 산신각이나 등등이 사찰 뒤쪽에 단촐하게 자리 잡아 있는 것으로
보아서도 민속신앙과 불교가 서로를 받아 들이는 현명하고 부드러운 처신들이 아닌가!
이는 유독 우리나라 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니 더욱 그런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봐, 우리나라는 종교분쟁은 고사하고 종교갈등도 없는 아름다운 나라임엔 틀림이 없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구 한말 서양 선교사들이 우리나라 전국의 용하다는 대표선수
무당들 백여명을 모아놓고 하느님에 대해서 설교를 시작했다.
처음엔 서양 귀신들 씨나락 까먹는 헛소리 하는양 듣다가 점점 하느님의 그 매력에 빠져 들었다.
설교가 끝난뒤 이구동성으로 하는말이 이랬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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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와~ 그 귀신 진짜 용하네, 그 귀신은 내가 모실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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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 받침돌에 작은 기둥을 올리고 그 위에 연지를 올려 놓았다.
풍만한 모습이며 커다란 복련 조각위에 억세게 자생하는 길상초 넝쿨 그 속에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목단꽃을 조각해 놓아 그 많은 뜻을 가늠케 한다.
석연지 위쪽에는 짧은 기둥을 세우고 연결 해 놓았다. 중간중간 이쁜 보살상들이 조각
되어 있었다 하나 무당들이 몰래 하나씩 가져가 버렸다 하니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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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배지붕에 정면5칸 측면 2칸 다포계 건물인 천왕문을 지난다.
보현보살과 지혜의 상징인 문수보살이 양 옆으로 금강역사와
함께 나란히 맞이 해 준다. 합장하고 팔상전의 아름다움에 넋을 빼앗긴 이몸이 가볍게
지나침을 용서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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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상전 -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유일한 오층목탑 (국보 55호)
맑은 하늘아래 빛을 발하고 화려 하지만 건방지지 않은 당당한 건축물 팔상전.
팔상전은 부처의 일대기를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려놓은 팔상도를 모신 건물이다.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와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 부인에게 태어나고, 궁궐의 네문
밖으로 나가 세상을 구경하고, 성을넘어 출가를 하며 설산에서의 고행과 보리수 아래서
마귀를 굴복 시키며 성불한 후 녹야원에서 설법을 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하는 장면
모두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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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황룡사 구층 목탑, 금산사 삼층 법당인 미륵전, 쌍봉사 대웅전 삼층 목탑과 함께
목탑의 원형을 보여 주었으나 지금은 금산사 미륵전과 함께 여기 팔상전만이 원형 그대로
남아있다.
각 면마다 가운데 계단을 두고, 다섯칸의 일층 가운데 입구를 두었다.
한층씩 올라 가면서 양 옆으로 반칸씩 줄어드는 재치를 보여주며, 오층에는 단칸으로
만들여져 있으며 각 층마다 창을 내어 빛이 자연스레 들어오게 하는 지혜와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각 지붕 모서리 끝이 멋을 내듯 살짝 들려 있고, 맨 끝 오층 지붕은
사모지붕으로 그 위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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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자연의 빛깔과 평평한 평지위에 무심코 서 있듯 팔상전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들려 올려진 지붕과 위로 갈수록 줄어드는 넓이에 상승감과 안정감을 느끼게 하지만
그것보다 내 눈을 끄는 것은 달랑 거리는 풍경 그림들이 각각의 층 에서 대각선으로
춤을추며 제자리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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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쪽면 -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내려와 룸비니 동산에서 마야 부인에게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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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면과 서쪽면 - 성을 넘어 출가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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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쪽면 - 설산에서 고행과 보리수 아래서 마귀를 굴복시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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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을벗고 안으로 들어선다.
석가래와 굵은 기둥들이 4층까지 닿아있고, 3층까지 한층으로 트여있는 그 가운데
네 기둥 사이를 막아 벽을 만들어 팔상도가 그려져 있다.
동쪽에서 남쪽으로 다시 서쪽으로 해서 북쪽으로 한바퀴 돈다.
탑돌이 하는 느낌이다. 초기 불교의 우요삼잡(右繞三잡) 예법이라 한다.
마지막 북면에 와불처럼 누워있는 불상을 친견하고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를 배례를
나도 모르게 올리곤 열반하는 장면을 곰곰히 들여다 보며 꺼꾸로 한바퀴 더 돈다.
원래가 꺼꾸로 인간인걸...
글도 단락 단락 잡아서 끝에서 부터 읽어보면 무지 재미가 있음을 느끼는 특이함이
내게는 있다는 다분히 의도적인 무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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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통제라! 아니나 다를까 대웅보전이 새단장 중이라 커다란 컨테이너 같은 공간속에
감추어져 있고, 그 불상들은 가 건물 절집에 잠시 이사 들어와 새집으로 이사갈 날을 고대하듯
오는 고객 맞으며 특유의 표정으로 올려져 있음에 아쉬워 가슴을 친다.
계단석에 원숭이 조각과 소맷돌에 넝쿨과 연꽃문양이 아름답다 소문 났거늘...
이넘의 발길은 어딘가 모자람이 당연한가 보다. 한 두 번도 아니거늘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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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사자 석등 - 사각의 전각속에 두마리 사자가 석등을 받치고 있는 모양이 하늘 우뚝
솟아있는 금빛 찬란한 청동미륵대불을 제치고 금방 눈에 들어온다.
청동미륵대불 이전에 크다랗게 시멘트로 올려진 그것을 나는 오래전에 기억을 하고 있것만
멀리서 맘 속으로만 합장을 하고 국보 제 5호라 일컷는 석등을 향했다.
신라 전형적인 석등에 기둥 부분을 두마리의 사자로 대신한 이름하여 "쌍사자석등"이다.
네면에 화창(火窓)을 둔 팔각의 화사석 위에 지붕돌이 전체에 비해 크고 사자의 크기에
비해서도 화사석이 크게 느껴지지만 두마리의 사자가 힘차게 뒷발을 딛고 턱과 앞발로
받치고 있는 근육질의 모습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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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각의 지대석 위에 연꽃무늬 하대석과 그 위에 발을 굳건히 딛고 선 사자와 아름답게
피어 오르는 이중으로 된 조각 앙련의 상대석 그 위에 화사석과 지붕돌이 놓여져 있다.
사자의 수염과 갈기 배를 서로 맏대고 으르릉 거리며 숨을 고르는 두마리의 사자.
버팀목 처럼 건강한 뒷 다리가 자신있게 당당해 보인다. 점점 나는 외소해 보이면서...
그래도 나는 자꾸만 띁어 본다. 지붕돌 낙수면 아래 빗물이 스며 들어오다 멈추게
홈을 파 놓았다. 상대석 연꽃 무늬의 아름다움보다 그 위에 두 줄로 된 얇은 굄대가
전체를 더욱 조화롭게 만드는 역할에 가로와 세로의 자연스런 조화가 슬기롭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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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을 모신 원통보전 -
우리 중생의 고뇌를 씻어주시는 (주원융통) 관세음보살!
어릴적 엄니의 한숨과 함께 뇌아리던 그 보살님이시다. 어쩌면 우리 중생들에게 가장
얄팍하게 필요한 보살님이 아니실런지...
건물자체가 멋스러운 팔작지붕도, 단아한 맞배지붕도 아니라 특이하게도 사모지붕이다.
커다란 모자를 눌러쓴 모습에 머리가 눌린듯한 건물 모양세에 무거워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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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부에는 보살상을 모셔두고 천정은 우물 반자를 두었으나 보살상 위에 따로히 닫집을
두지않고 우물 네 개를 튀여서 크게 만들어 특별한 자리임만을 나타내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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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리는 발길이 아쉬워 대웅보전 포장건물만 자꾸 돌아다 보며 작은 전각 그늘아래
힘겹게 향로를 들고 있는 희견보살을 찾는다.
성불(成佛0의 큰 뜻을 가지고, 몸과 뼈를 태우며 아미타 부처님 앞에 공양하는 보살상으로
사람에게 어떠한 어려운 시련이 있어도 강한 의지로 나아가란 큰 뜻의 희견보살상과
자기학대로 고행을 통해 법을 깨달은 진표율사의초창기 창건때 그 고행이 서로 상통
됨으로 조성 해 놓은것이 아닌가 한단다.
머리에는 향로를 이고 법의를 여러벌 걸치고 부처님을 향해 한 발 나아가려는 모습에
얼굴은 마모가 심하여 잘 알아볼 수 없으나 윗 부분만 보아선 이상하리 만치 무서운 얼굴이다.
자신의 몸을 불태웠으니 그 표정도한 무궁무진한 의문을 가져본다.
모 책에는 가섭존자 상으로 볼 수 있다 한다. 석가모니의 제자 가섭이 미륵불이 하생할때
가사와 발우를 미륵에게 바치라는 수기를 받았기 때문이란다.
여러벌의 법의를 걸치고 발우를 받들어 몇 천년을 처연덕 스럽게 서 있는 돌 조각에
그 많은 깊은 뜻이 내포 되어 있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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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솥 쌀 40가마를 한꺼번에 담을 수 있다 한다.
3000명의 승려들의 물통과 밥솥. 법주사의 화려했던 그 시절을 말해 주는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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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간지주와 철당간 - 고려때 처음 세워진 것으로
흥선 대원군 명으로 당백전을 만드는데 사용한 후 여러번 다시 세워 졌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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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동미륵대불(1990) 새로 조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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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 화창으로 본 법당안
첫번째가 향 공양이요, 두번째가
부처님을 위해 불을 밝히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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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초시님 정말 잘 보고갑니다
박초시님,안녕 하세요?..속리산,법주사 갈때마다 넘 좋아요..청동 미륵 대불 처음 세웠을땐 그 자리가 엄청 어색해 보이더니 세월의 때가 적당히 묻으니 이젠 좀 덜 어색 해 보이더군요...글 잘 보았습니다..^^
뱃살여사님은 초시님 비위 맞추기가 어려울거 같애요............아는게 넘 많은 남잔 피곤하거든요 ~
에혀....부럽기만 하다..^^
덕분에 공부 잘 했십니더...나는 언제 함 가볼꼬...!
후...정말 구경잘했습니다. 전 속리산에 대한 기억은 회사에서 극기체험을 위해 등산했던것이 기억에 남습니다. 아래서 부터 구보로 해서 제일 힘들었던곳이 할딱고개인것 같네요.......
상감마마 덕분에 속리산도 가고,,,공부도 하고,,,마마~~!! 성은이 망극하나이당..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