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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들 원문보기 글쓴이: 천국중개사
할렐루야!
죄와의 싸움편 그리고 자기발견과 성결에 이어 오늘부터는 하나님의 공의라는 주제하에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많은 교회에서나 교역자들은 하나님은 사랑이심에 대해서는 많이들 가르쳐 왔습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도 되심에 대해서는 잘 가르쳐주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사람들이 그러지요. 너희들이 말하는 하나님은 사랑이 충만하신 하나님이라는데 왜 지옥을 만들어서 영혼들을 영원히 고통스럽게 하느냐고... 그것이 어찌 사랑의 하나님이 되냐고.
사랑의 하나님이 되시는데, 왜 너희들은 아픈 자들이 있고 가난한 자들이 있고 너희들의 기도에 그렇게 쉽사리 응답해 주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또한, 초신자일때나 어느정도 신앙의 경륜이 있어 성경꽤나 좀 본다해도 사실 의구심이 드는 것이 있지요. 구약에서는 왜 이렇게 하나님이 무서우실까... 왜 이렇게 사람들을 죽이실까.. 그런데 어찌 신약에서는 사랑의 하나님, 용서의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라 말하면서 죄인도 용서하신다는데 구약에서는 어찌도 이리 다르실까...
이런 고민 해보신분들이 있을 것이라 봅니다. 지금도 그렇구여. 이에 저는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드려보고자 합니다. 물론 공의의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를 전개해가다보면 그 안에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 되심을 우리는 분명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랑의 하나님안에는 역시 공의의 하나님도 되심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이구여.
하나님의 공의편을 하나하나 읽어가시면서 양식삼아가신다면 분명 성경상의 많은 것들이 풀어질 것이요, 하나님의 섭리도 밝히 깨우쳐지는 영안이 열리리라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그 공의가 얼마나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신지요 알게되니 가히 감사가 넘치리라 전 믿습니다.
이에, 하나님께서 영계를 치리하시고 사람을 섭리하시는데에는 영계의 공의와 사랑의 마음이 맞물려서 치리해 가신다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 7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잠시 언급이 나와있는데요, 어떤 분들은 공의라고 하지말고 정의라고 해야한다 하시만서도여, 저는 공의라고 표현하겠습니다.
참고로 데살로니가후서 1장 5절과 7절을 적어보겠습니다.
5절, "이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요 너희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얻게 하려 함이니 그 나라를 위하여 너희가 또한 고난을 받느니라"
7절, "환난 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에"
덤으로 많은 구약에서도 공의를 언급하고 있지만, 대표적인 예로 이사야 30장 18절을 적어보겠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
자 이젠, 하나님의 공의라는 것에 우리는 낯설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결코 제가 임의로 지어내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확인해 보았습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 하나님의 공의가 어떤 것인지 하나하나 풀어보려고 합니다.
공의가 적용되는 분야를 크게 나누면 육의 공의와 영의 공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육의 공의는 말 그대로 이 땅에 펼쳐지고 적용되어지는 공의입니다. 영의 공의는 하늘나라의 공의입니다. 하늘나라의 영의 공의는 이 땅의 육의 공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편의상, 이 땅의 육의 공의를 <공의1>, 하늘나라의 영의 공의를 <공의2>라고 칭하도록 하겠습니다.
공의1의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경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경쟁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유지하고 지켜야 하는 스트레스가 무척이나 많습니다. 때로는 상대를 속이기도 해야하고, 짓밟기라도 해서 더 높이 올라서야 하고 더 멀리 뛰어야 하는 일도 있지요.
공의1를 기준으로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존심을 결코 버릴 수가 없습니다. 자존심을 버리면 매우 큰일납니다. 존재감마저 상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누군가가 자신의 자존심을 건드린다면 이내 분이 나고 감정이 뒤틀리며 혈기를 내기도 합니다. 상대를 미워하기도 하지요.
공의1의 기준중 하나는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이 높아지려면 상대를 이겨야하고 짓밟아야하는 것입니다. 경쟁속에서 살아남는 처절한 몸부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오늘도 공의1안에서 돌고 돌며 사는 사람들은 경쟁의 스트레스에서 늘상 염려와 근심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은 공의1을 지배하고 다스리는 공의2를 알고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높아지려면 낮아지라는 공의2의 기준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4절에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하는 공의2에 대해서 잘 제시되어 있습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누가복음 14장 11절에도 제시되어 있네요.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신명기 28장의 말씀은 소위 축복장이라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자녀들에게는 어떤 복을 내려주시는지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꾸어줄지언정 꾸지 아니하며 꼬리가 되지 아니하고 머리가 되는 복이 임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높아지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낮아지는 것입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자가 큰 자요, 높아지는 것입니다.
교회안에서나 직장안에서나 섬기는 자들은 처음에는 바보처럼 보입니다. 어리숙해 보입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이용당하기 딱 십상이죠. 얕잡혀 보일수도 있구여. 자기깐에는 섬기고 낮아진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나아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초라해지고 멍청해지는것 같은 자아감에 이내 분을 내고 상황을 엎어버립니다.
그러지 마십시요. 주님이 도우시고 높이시는 자는 낮아지고 섬기는 자입니다. 직장에서 높아지지 않았다구여? 교회에서 인정받는 자리에 못앉았다구여? 그렇다하여 서러워하지 마십시요. 분명 우리들이 공의2의 기준을 갖고 겸손함으로 낮아지려하고, 섬기려 한다면 반듯이 주님은 우리를 인정하시고 높여주십니다.
행여나 이 땅에서 높임과 인정을 받지 못한다해도, 이 땅에서 그를 내려다보고 이용하기만 했던 사람들은 저 천국에서는 세세토록 그를 높여야 할 것입니다. 공의2가 공의1를 지배하고 다스린다라는 하나님의 공의를 믿으시고 직장에서나 교회에서나 가정안에서나 낮아지고 섬기려고 하십시요.
어느 가정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남자는 아리따운 스튜어디스랑 결혼을 했지요. 남들은 부러워 죽습니다. 그러나 본인은 정작 아내와 화평하지 못합니다. 잦은 부부싸움으로 서로의 마음은 상처를 받았고 같이 있는 것조차 싫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아내의 말에 자존심이 상하면 이내 분을 내고 같이 소리를 지르게 됩니다. 자신의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데서 아내와 대화의 벽이 생기고 있습니다. 아내 역시 허영과 높임 받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함으로 인해 더더욱 서로는 각자의 자존심과 허영을 상대로부터 인정해달라 소리가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분들은 믿지않는 가정입니다. 이 분들은 이 땅에 살아오면서 보고 듣고 배운 공의1의 기준이 꽉차 있어서 자신이 상대로부터 인정받고 높임받으려면 더 크게, 더 세게, 더 강하게 소리치고 다그쳐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상황을 더더욱 악화시킬 뿐입니다.
이분들이 하나님의 영계의 공의 즉 공의2에서 높아지려면, 인정받으려면 낮아져야 한다라는 것. 섬겨야 한다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다면 가정은 이내 화평으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을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권위적으로 대하는 동료나 상사가 있다해도 같이 맞받아치지 마십시요.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고 친절을 행하되 주님안에서 건전히 무시할 수 있는 마음의 훈련을 터득하십시요. 때가 되면 어둠은 물러가고 주님께서 높여주십니다.
자 또한 더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공의1에서는 한대 맞으면 나도 한대 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바보가 아니고 그래야 공평한 것입니다. 아니 자신이 더 힘이 세거나 악발이 나왔다면 한대 맞고 두대는 때려줘야 직성이 풀리겠지요. 공의1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이렇습니다.
행여나 자기 자녀가 밖에서 한대 맞고 들어오면 무척 다그치지요. 넌 손발 없냐, 넌 내가 밥 안먹었냐. 왜 맞고 들어와, 넌 바보야. 한대 맞으면 넌 반듯이 두대를 때린다는 각오로 싸우란 말야. 이렇게 아이에게 가르치면서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악한 가르침인지 깨우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공의1에서는 한대 맞으면 최소 한대라도 앙갚음해줘야 바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공의1로 살지말고 공의2로 살으라고 하십니다.
마태복음 5장 39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하십니다. 이 말씀은 상대가 때리면 무작정 맞아야 한다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악한 자와의 화평하는 법이 무엇인지 그 공의2의 기준을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자신이 이렇게 공의2의 기준으로 다른 편 뺨을 돌려댈때, 그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주신다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비멜렉의 종들에게 우물을 빼앗겸음에도 불구하고 슬하의 종들과 함께 몽둥이 들고 가서 자기 것임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양과 소를 취하여 그들에게 주고, 게다가 일곱 암양 새끼마저도 따로 주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악한 자의 마음을, 공의1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육에 속한 사람들의 마음을 밝히 알았던 것입니다. 이에 그는 선한 마음으로 화평을 구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공의2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실제 이야기입니다. 예민한 자존심이 있는 어떤 사람이 집을 옮기는 과정에서 부동산 주인과 대화를 하는 도중, 전세권을 놓고 이야기하다 무시받는 말투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했는지 도무지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가서 따지고 싶은데, 나이드신 분이기도 해서리 명분이 서지 않습니다.
그는 결국 결심했습니다. 찾아가서 부동산 주인에게 자신이 기분나빴다라는 것을 말하기로여. 그리고 갔습니다. 부동산 주인은 다소 황당해했습니다. 자신의 주장은 굽히지 않았으나 상대가 기분나빴다니 사과는 했습니다. 그러나 진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돌아오는 과정에 생각해봅니다. 왜 자신은 누군가가 자기 자존심을 건드리면 참지 못할까, 꼭 이야기해서 반듯이 풀어야 직성이 풀릴까, 상대도 잘못했다라는 것을 왜 꼭 지적해주고 싶을까... 결국 그는 그저 참는 것은 자신이 너무 아프고 바보같기에 다음에도 이런식으로 따져서 직성을 풀어야 겠고, 행여나 주먹다짐이 있다해도 풀건 풀어야 한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공의1의 기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한대 맞으면 반듯이 한대 갚아주어야 직성이 풀립니다.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신을 지키는 일이요, 부당한 대우앞에 마땅한 것입니다. 그들은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가 분명하기에 그것이 좋다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한가지 빠진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바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공의2에서의 화평하는 마음입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중에도 화평이 있습니다. 공의1에서는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로 선과 악을 가름하려고 하나, 공의2에서는 화평하는 마음을 이루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해주시겠다라는 것입니다.
자 정리해봅시다.
이 땅의 공의1에서는 높아지려면 상대와 경쟁하며 이겨야 하는 것입니다. 인정받으려면 어떻게든 상대를 깍아내려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드러내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공의2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낮아지면 됩니다. 그냥 섬기라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높이신다라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공의1에서는 억울하고 애매하거나 부당한 대우앞에서는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를 가려서 자기 주장을 해야 한다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직성이 풀리고 업신여김 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공의2는 그렇지 않습니다. 옳고 그름으로 선악을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화평하는 마음을 이루어서 상대를 품으라는 것입니다. 그럼 주님이 나를 품어주시는 것입니다.
대략 육의 공의과 영의 공의가 어떤 건지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영의 공의는 육의 공의를 지배하고 다스립니다. 반듯이 이깁니다. 주님께 영광돌리는 길입니다.
공의2의 기준을 갖고 승리하시는 복된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쯤으로 해서 다음 시간으로 이어지겠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