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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정사 삼국지로 바라본 삼국지연의의 허구 5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22 15.03.11 10:0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1. 가정전투 위군의 총지휘관은 누구였는가 ?

 

- 연의 95회와 96회에 이 전투가 일부 그려져있다.

사마의가 맹달을 죽이자 명제는 그를 도독으로 삼고, 장합을 선봉에 임명하여 가정으로

출병하도록 명했다. 한편 제갈량은 참군 마속을 주장으로 삼고 왕평을 부장으로 삼아,

이만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가정을 지키게 하였다.

 

사마의는 가정에 도착하여, 장합에게 명해 왕평의 군사를 막게하고,

대군으로 산을 포위하여 샘물을 막았다. 물을 마실 수 없게 된 마속의 병사들 중에

산을 내려와 투항하는 자가 속출했다. 이때 사마의가 산에 불을 질렀다.

마속은 도리 없이 패잔병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도망칠 수밖에 없었다.

왕평의 병력은 많지 않았기에 구원할 수 없었다. 결국 가정은 위에 점령되었다.

 

연의에서 그려진 내용처럼 가정 전투의 총수가 사마의라는 것은 사실에 부합하는가 ?

 

그렇지 않다.

정사의 <마속전> <제갈량전> <장합전> 을 보면, 위군의 총사령관은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다. <마속전> 에 ' 위장 장합과 가정에서 싸우다 ' 라는 기록이 있고,

<제갈량전> 에는 ' 위의 명제가 서쪽으로 장안을 진압하고, 장합에게 명해 제갈량을 막게

하였다. 제갈량은 마속에게 여러 군사를 거느리고 가정에서 장합과 싸우게 하였다 ' 라고

쓰여있다.

 

이 전투를 기록한 관련 역사 자료에는 사마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사마의는 맹달을 쳐부순 다음에 어디로 갔는가 ?

진서 <선제기>  를 보면 사마의는 완성에서 배도겸행하여 신성으로 가 맹달을 멸망시킨 후에 완성으로 돌아갔다. 그는 촉군과 전투를 벌이지 않았다.

 

아마 나관중은 장합에게 제갈량을 격퇴하는 역활을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제갈량의 이미지가 손상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군의 총수역활을 사마의에게 주고,

장합을 선봉으로 격하했을 것이다. 그 목적은 물론 제갈량의 호적수를 격상시키는 것이다.

 

2.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당했는가 ?

 

- 연의 95회를 보면 가정에서 패퇴한 제갈량이 대군을 이끌고 퇴각하는 한편,

스스로 오천의 군사를 이끌고 서성으로 가서 식량 운반에 힘쓰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돌연 사마의의 십오만 대군이 서성으로 몰려온다는 비보를 접하게된다.

 

마침 제갈량 주변에는 문관뿐이고 대장은 한 명도 없었다.

인솔해온 병사 오천명 가운데 절반은 식량을 운반하러 떠났고, 성내의 주둔병력은

이천 오백명 뿐이었다.  제갈량은 군기와 군고를 치우게 하고, 성문을 열어두게 하고,

각 성문에 이백팔 명의 병사를 남기되 평민의 옷차림을 하게하고, 길을 깨끗이 하라고

명했다. 제갈량 자신은 도포를 걸치고 두건을 쓰더니 망루의 난간 앞에 편안히 앉아

향을 피우고, 거문고를 타기 시작했다. 옆에는  두 명의 동자가 각각 보검과 불진을 들고

서 있었다.

 

성 밑에 물밀듯 밀려든 위군은 이 모습을 보고 아무도 전진하려 하지 않았다.

" 제갈량은 평소 신중하여 모험을 한 적이 없없다. 아마 복명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 "

사마의는 이렇게 말하고 바로 군사를 후퇴시켰다. 이렇게 해서 제갈량은 간신히 난을

모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연의가 그리는 공성지계에 대해 삼국 시대에 관련된 수많은 사서들은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마의가 제갈량의 공성지계에 빠진 적은 없었다.

하지만 삼국시대에 공성지계를 사용한 것은 사실이다.

 

배송지 주의 <조운별전> 과 정사 <문빙전>  의 배송지 주에는 촉의 조운과 위의 문빙이

공성지계를 사용하여 각각 조조군과 손권군을 물리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나관중은 조운과 문빙의 공성지계를 자료로 제갈량의 공성지계를 창작하여,

감쪽같이 사마의가 당한 것처럼 만들었다. 그리하여 제갈량의 큰 지혜와 용기를 그리고,

사마의의 신중하지만 소심한 모습과 대비시킨 것이다.

 

3. 조운의 이미지는 관우, 장비를 넘어서고 있는가 ?

 

- 연의에서 조운의 이미지는 때로 관우와 장비마저 넘어서고 있다.

이것은 작가 나관중이 연의에서 조운의 이미지 만들기에 크게 성공했기 때문이다.

연의에 등장하는 조운은 실제 역사상의 조운과 많이 다른 모습으로 비친다.

 

7회에서 97회까지 총 91회에 걸쳐, 나관중은 사실에 근거한 풍부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픽션의 세계를 펼쳐, 조운을 발군의 호장군으로 만들고 있다.

 

7회에 등장하자마자 그는 용맹한 문추와 대여섯 차례나 겨루어 무승부를 거둔다.

이 당시의 조운은 아직 연소한 장군에 지나지 않았다. 이리하여 조운의 데뷔 무대는

훌륭한 솜씨를 피력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후 공손찬과 원소에게 투신하지만 뜻에 맞지 않아 각지를 헤맨 끝에

결국 유비군에 가담하게 된다. 여기서 겨우 소원을 이루어,

일신을 바쳐 유비에게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그의 미덕은 유비 휘하에서 충분히 발휘되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홀로 어린 주인을 구하다), 명예와 이익에 동요되지 않고

(가정에서 상을 거부하고 계양에서 형후와의 결혼을 거부한다), 깊은 충의에 간언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에 납치된 아두를 장강에서 다시 빼앗고, 유비에게 간언하여

공신에게 성도의 백성이 소유한 전답과 집을 주는 것을 그만두게 하였다)

 

조운이 병사했다는 소식이 제갈량과 후주에게 도달했을 때,

두 사람 모두 나라의 동량을 잃었다고 탄식한 것도 본심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실제 역사상 조운은 한말에 활약한 용장들 중에 특히 두드러진 편은 아니었다.

무용에 있어서 유비도 ' 일신에 담력이 가득찼다 ' 고 평하였고 조운 스스로도 호위장군을

자청했지만, 무예와 명성 면에서는 관우, 장비, 마초, 황충 등에 미치지 못하였고

공적 면에서도 위 네 명이나 위연 등을 따르지 못했다.

 

유비는 조운을 그다지 중용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부하로 두고는 있었지만,

단독으로 일을 맡긴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공적도 눈에 띄지 않는다.

 

경요 3년 (260년) 에 후주 유선은 관우, 장비, 마초, 방통, 황충에게 후의 작위를 수여하였지만, 조운은 여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다음 해에 강유 등이 불공평하다고 진언하자, 유선은 겨우 순평후에 봉했다. 정사에서 조운에 대한 기술은 채 삼백 자가 되지 않는다.

 

물론 역사상의 조운은 확실히 빛나는 점을 많이 가지고 있다.

지혜와 용기를 겸비하고 책략에 뛰어났던 것, 뛰어난 판단력과 견식을 가지고 있어던 것,

충의로써 간언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것, 외곬으로 아첨하지 않았던 것, 공평무사로

겸허했던 것등이다.

 

물론 이에 반박하는 의견도 있지만 무엇보다 조운의 이미지가 실제 역사 속의 활약이나

평가보다 좋은 것은 리얼리티와 오리지날리티가 일치된 선명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며 독자의 미의식이 변화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전통적 충의관에 사로잡혀있던 명.청대의 독자들에게 가장 멋진 인물은 관우였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경제적 기반이나 정치 제도의 변화에 따라 사람들의 생각과

미의식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용맹하고 지혜로운 조운의 미덕이 점점 오늘 날의

독자에게 이해와 칭찬을 얻은 것이다.

 

4. 제갈량은 진창을 습격하였는가 ?

 

- 연의 98회에서 위장 학소가 중병에 걸린 것을 안 제갈량은 위연과 강유에게 삼일 내에

진창을 공격할 준비를 갖추라 명함과 동시에 관흥, 장포에게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밤낮없이 행군케하여 진창을 급슥하도록 한다. 

 

학소는 즉시 방비를 서둘렀지만 촉의 첩자가 성내에 잠입해 불을 질렀기 때문에

성내는 대혼란에 빠졌고, 학소는 그 충격으로 급사했다.

위연, 강유군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진창은 촉군의 수중에 있었다.

 

역사상 제갈량이 제2차 북벌에서 진창을 포위하고 전투를 치른 것은 확실하다.

다만 연의에서 묘사된 결과와는 전혀 다르다. 정사의 <제갈량전>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 제갈량이 진창을 포위했지만, 조진이 이것을 막아냈다. 량은 군량미가 다하여 돌아갔다. '

 

제갈량은 진창을 공격했지만, 위의 조진이 사전에 학소를 수장으로 보냈기 때문에,

몇 번의 공격에도 함락시키지 못한 채, 군량미가  바닥나고 위의 원군이 들이닥쳐

어쩔수 없이 한중으로 후퇴했다.

 

명제는 학소가 진창을 사수한 것을 칭송하며 열후의 작위를 주었다.

학소는 병사했지만 그것은 진창전투 이후의 일이다.

 

요컨데 역사자료를 바탕으로 만든 나관중의 픽션이다.

이것은 물론 제갈량의 비범한 군재를 드러내기 위한 의도의 하나였다.

 

5. 조진은 제갈량의 편지를 보고 분사하였는가 ?

 

- 연의 100회에는 위의 대도독 조진의 죽음이 나온다.

제4차 북벌에서 제갈량은 위군도독 조진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촉군의 공격은 없다며,

사마의와 내기를 하였던 조진은 그 때문에 너무 창피한 나머지, 병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즉시 제갈량은 편지를 써서 투항한 위군의 병사를 통해 조진에게 전하였다.

 그 편지에는 조진을 배우지 못한 후배라 칭하며, ' 무슨 낯으로 고향의 부로를 대하며,

무슨 뱃심으로 고향집의 대청에 오르랴 ' 라고 하는 모진 야유가 적혀 있었다.   

조진은 이것을 읽자마자 분함으로 가슴이 막혀 그날 밤 진중에서 죽었다.

 

실제 역사는 어떠했을까 ?

230년 7월, 위군은 대사마 조진의 주장에 의해 사차 북벌을 준비하던 제갈량의 촉군에

대항하고자 세 갈래로 군사를 나누어 사마의, 조진 등의 통솔 하에 한중으로 몰려갔다.

조진 자신은 대군을 이끌고 북쪽의 자오곡으로부터 한중으로 쳐들어간다는 작전이었다.

 

조진은 8월에 장안을 출발해서 자오곡에 들어갔다. 그런에 이 곳에서 한 달이 퍼붓는

폭우를 만난다. 한 달이 넘도록 계곡에서 나오지 못했다. 게다가 다리가 끊기는 바람에

더이상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더구나 제갈량은 삼엄한 경계태세로 대기하고 있었다.

마침 명제가 화흠 등의 진언을 받아들여 조진에게 후퇴를 명했기에, 어찌되었든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수 있었다.

 

다음 해, 즉 건흥 9년 (231년) 2월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으로 출격하였다.

제4차 북벌이 시작된 것이다. 제갈량이 기산을 포위하였을 때, 명제는 대사마 조진의

병이 중하다는 것을 알고 대장군 사마의를 형주에서 장안으로 불렀다.

그리고 장합, 비요, 곽희 등의 장수를 이끌고 제갈량에게 대항하도록 명령했다.

그 후 머지않아 제갈량은 기산공격에 성공하였고, 조진은 낙양에서 병사했다.

 

결국 조진의 사망은 제갈량의 제4차 북벌과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이며,

더욱이 제갈량이 진영을 습격하고 서신을 보내 분사시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진은 확실히 촉을 공격했지만, 이것은 제4차 북벌 이전이었고 그나마 비로 퇴각했기에

제갈량과 싸운 적은 전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역사상의 조진은 낙양에서 병사한 것이다. 연의에서 제갈량의 조진을 분사시켰다는

부분은 나관중이 제갈량을 우상화시키기 위하여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다.

 

6. 장합은 제갈량의 계략에 빠져 죽은 것인가 ?

 

- 연의 101회에는 위의 대장 장합의 죽음이 그려져있다.

건흥 9년 (231년) 봄에 제갈량은 제4차 북벌에 나서 사마의를 연달아 격파하였다.

하지만 군량미를 조달할 수 없었기에 도호 이엄은 제갈량에게

급히 오가 촉을 공격하려 한다는 거짓 보고를 하였다.

 

제갈량은 양의, 마충에게 사수 일만을 이끌고 검각의 목문도에서 기다리게 하였다.

자신은 대군을 지휘하여 차례로 후퇴시키며 위연과 관흥에게 후방을 맡겼다.

위의 선봉 장합은 사마의의 충고를 듣지 않고 추격에 나섰다.

위연과 관흥이 연달아 나타나서 장합의 앞길을 막았지만 짐짓 당할수 없다는듯

연달아 후퇴하였다. 방심한 장합은 그대로 목문도 입구까지 추격하였다.

 

위연이 되돌아와 다시 공격하고 후퇴하는척 하자, 장합은 기세등등하여 말을 달려

목문도의 중간까지 추격하였다. 날은 이미 저물었는데, 돌연 포성이 울리며 촉군이

나타나 나무와 바위로 퇴로를 막았다.

양쪽에서 비오듯 화살이 날아와 장합과 백여 기의 부하들은 모두 사살되었다.

 

정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건흥 9년 3월에 제갈량은 다시 한 번 기산에 출병하였고, 위는 사마의와 장합 등에게

군사를 이끌고 대항하게 하였다. 제갈량은 기산을 공략한 후에 왕평에게 수비를 맡기고,

몸소 주력부대를 이끌어 연달아 위군을 격파했다.

 

사마의는 더이상 싸워봤자 이득이 없다고 생각하고, 험한 지형에 의지하여 수비를 강화했다. 그러나 부하에게 ' 촉을 호랑이처럼 두려워한다 ' 는 조소를 당하고 공세에 나섰지만

대패하고 말았다. 마침 그 때 촉군의 군량미조달에 문제가 생겼고, 더구나 수송을 담당한

이엄이 제갈량을 교묘히 속여 군사를 후퇴시켰다.

 

위군에서는 장합이 뒤를 쫓았다. 그러나 청봉까지 쫓아와 제갈량과 일전을 벌이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군량미가 떨어져 후퇴하게 되어 촉군은 또 한 번 절호의 기회를

놓쳐 버렸다. 그 때문에 나중에 제갈량은 이엄의 관직을 박탈하고 서민으로 강등했다.

 

실제의 역사에서 장합은 제갈량의 계략에 의해 의해 사살된 것은 아니었으며,

장합이 제갈량을 추격한 것은 사마의가 명했기 때문이었다.

장합이 사마의의 충고를 무시하고 추격하다 목숨을 잃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장합은 ' 성을 포위하면 반드시 한쪽을 열어라. 도망치는 적은 쫓지말라 ' 는

병법을 준수하여 사마의에게 추격을 그만둘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사마의는 장합의

의견을 무시하고 추격하게 하여 결국 그의 목숨을 빼앗은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7. 제갈량은 목우류마의 계략으로 군량미를 빼앗았는가 ?

 

- 연의 102회에 목우류마 이야기가 등장한다.

북벌을 추진하던 제갈량은 식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인을 시켜 몰래 목우류마를

제작하게 하였다. 목우류마가 완성되자 고상에게 명하여, 천 명의 병사에게 이것으로

검각에서 기산의 본영까지 군량미를 운반하게 하였다.

 

이것을 안 사마의는 장호와 악침에게 명해 목우류마  몇 두를 빼앗게 하고,

숙력된 장인을 불러 이것과 비슷하게 삼천 두를 만들게했다. 이어 목우류마를 이용하여

잠위 등에게 끊임 없이 농서의 군량미를 운송시켰다. 제갈량은 이에 목우류마 탈취계획을

세운다. 왕평에게 위군으로 가장한 병사 천 명을 주어, 잠위의 수송부대를 급습한 뒤

목우류마의 혀를 모두 비틀어버렸다.

 

곽희가 이끄는 대군이 다시 탈환했지만 아무리 해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이 때 위연과 강유가 습격하여 곽희의 군사를 패퇴시켰다.

왕평은 군사에게 명하여 목우류마의 혀를 원래대로 돌려놓았고 당당히 가지고 돌아갔다.

 

곽희군이 추격했지만 제갈량이 배치한 장의군의 귀면수신 오백 신병에게 막혀 도주했다.

군량미를 탈취당하고 곽희군마저 대패했다는 소식에 사마의가 직접 구원에 나섰지만,

그 역시 요화에 쫓겨 숲속을 빙빙 돌며 도망친 끝에 투구를 떨어뜨리고 간신히 목숨만

살려 도망치고 말았다.

 

정사의 <제갈량전> 을 보면 건흥 9년과 11년에 북벌에서 촉군은 식량 문제의 해결책으로

목우류마를 만들어 전선으로 군량미를 보내고 있다. 확실히 제갈량은 목우류마로 군량미

를 수송하였다. 하지만 위와 촉의 전쟁사료를 아무리 조사해 보아도,

제갈량이 목우류마의 계략으로 사마의군의 군량미를 빼앗았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8. 사마의는 상방곡에서 제갈량에게 화공을 당했는가 ?

 

- 연의 103회 마지막 북벌에서 제갈량은 사마의와 대결하였다.

사마의는 패배를 하자 수비를 견고히하며 나오지 않았다. 제갈량은 마대에게 명하여

상방곡 (호로곡) 에 깊은 도랑을 파고, 불타기 쉬운 마른 장작을 쌓고, 주위의 산에는

띠집을 짓고 지뢰를 묻게 하였다. 그리고 고상에게 명하여, 목우류마를 급히 몰게 하여

군량미를 수송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한편 사마의는 부하에게 명하여 목우류마를 약탈하고, 수송대 병사 수십 명을 붙잡아

문초하였다. 그리하여 제갈량이 상방곡에 군량미를 쌓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몸소 두 아들과 함께 군사를 이끌고 상방곡을 습격하여 저그이 군량미를 태워

크나큰 타격을 입히고자 하였다.

 

제갈량은 위연으로 하여금 사마의를 유인하게 하였다.

사마의가 두 아들과 상방곡에 들어오자마자 정상에서 횃불을 던지고, 계곡의 입구를 막고,

불화살을 쏘아대고, 지뢰를 폭파시켰기 때문에 온 계곡이 순식간에 불구덩이에 휩싸여

하늘을 불태울듯 했다. 사마의는 말에서 내려 두 아들을 껴안고 울며 외쳤다.

그러자 갑자기 강풍이 불며 분지를 뒤엎는듯한 큰 비가 내려 맹렬히 타오르던 불이 꺼져버렸다. 사마의는 그 기회에 군사를 지휘하여 도망쳤다.

 

마침 장호, 악침의 부대가 구원을 왔고 마대의 군사가 열세였던 탓에

사마의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연의에서 이 이야기는 아주 자세히 그려져있고, 만일 천우신조가 없었다면

제갈량의 최대 라이벌 사마의는 두 아들과 함께 상방곡에서 그 생을 마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정사 <제갈량전> 이나 관련 자료를 보면, 건흥 12년 (234년) 2월에 제갈량은 3년 가까운

준비를 마치고 십만 대군을 이끌어 야곡에서 출격하여 마지막 북벌을 개시하였다.

북벌군은 무공을 점거하고, 위수 남안의 오장원에 본영을 두었다.

 

위의 사마의도 대군을 이끌고 강을 등진 채 진지를 구축하여 위수의 남쪽에서 대치했다.

사마의는 촉군이 원정으로 지쳤고, 군량미 수송에 고심하고 있다는 두 가지 약점을 포착하여 지구전으로 나아갔다.

 

제갈량은 단기전이 주목적이었지만, 전투가 지구전이 될 것이라 내다보고 각 지역에서

병사들에게 농사를 짓게하여 장기전에 대비하였다. 양군의 대치는 백 여일이나 계속되었지만 제갈량은 시종 사마의와 싸울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머지않아 제갈량은 진중에서 맥없이 죽어버렸다.

 

역사적으로 사마의는 마지막 북벌에서 그 때까지의 교훈을 살려 제갈량과 직접 싸우지

않고 수비에만 치중했다. 제갈량이 병사할 때까지 전투가 없었기에 이 시기에 제갈량이

사마의에게 화공을 가했다는 것은 애시당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또 사마의는 제갈량과의 지구전을 계획하였기에 두 아들을 신변에 두었을리 없었다.

사서 역시 사마의의 두 아들, 사마사와 사마소가 이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없다.

 

현재 섬서성 오장원 북쪽에 위치한 고당진에는 확실히 입구가 좁고 내부가 넓은

호로곡이라는 표주박형의 계곡이 존재한다. 그러나 후한과 삼국시대에는 이 곳에

상방곡이라는 지명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결국 상방곡에서 사마의가 포위되었다

천우신조로 목숨을 건졌다는 이야기는 제갈량을 우상화하기 위한 픽션에 불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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