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원문보기 글쓴이: 정중규
胡 蝶 之 夢 |
어느날 장자는 기이한 꿈을 꿨다. 나비가 되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다. 그러다 문득 깨어보니 꿈이었다. 가만있자. 그것이 과연 꿈이었던가. 혹시 모르지. 내가 조금전 나비가 돼 날아다니는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지금 내가 돼 있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인지.
한때 현실은 얼마나 견고해 보였던가.시간이란 불기가 현실을 프라이팬 위의 치즈처럼 흐물거리게 하기 전까지는. 희미한 기억만이 한때 거기 그런 현실이 있었음을 아련히 일러준다.
어렸을 적 집 앞의 경로당이 떠오른다. 안마당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돌 두 개 혹은, 고무신 두 짝을 골대로 세우고 고무공을 차던 그 뿌연 먼지와 소란. 그때마다 작대기를 들고 화난 얼굴로 섬돌을 내려서시던 할아버지. 그러면 우리는 공놀이를 거두고 구슬을 제각기 챙겨들고 모였다. 구슬을 돌에 두들겨 땅에 그은 경계선에 가장 가까이 가는 사람에게 선제공격의 기회가 주어졌다. 구슬을 들고 섬돌과 선을 번갈아 노려보며 손의 힘을 가늠하던 그 긴장된 순간들. 해거름이 깔리고 밥먹으라는 엄마들의 외침에도 아랑곳없이 우리는 그 전쟁에 몰두했다.
구슬을 땄을 때의 의기양양함과 잃었을 때의 절망감이 아직도 선연하다. 까만 모자를 쓰고 턱에 몇 가닥의 수염이 삐죽거리면서 그 전쟁은 시들해져 갔다. 흑백의 텔레비전이 잊혀진 그때를 비추고 지나갈 때가 있다. 아득한 기억의 여진에 가슴이 아려오면서도, 또 한편 그 옛날의 어이없는 정열과 집착에 실소가 배어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구슬 몇개와 종이로 만든 딱지 몇장에 내가 그토록 앙앙하고 연연했다는 것이 도무지 낯설다.
문득 내가 지금도 그토록 허망한 놀이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구슬이나 딱지가 재물이나 지위, 지식이나 사랑으로 바뀌긴 했지만 그 가치를 약탈하고 선점하기 위해 우리는 날마다 또 다른 전쟁을 치르고 있다. 구슬을 따먹는 데 열중하던 그때나 마찬가지로 일상의 전투에 몰두하고 있을 때는 그 의미를 생각할 겨를이 없다. 전쟁이 끝난 후에야 그것이 얼마나 우둔한 소모요, 무모한 파괴였는지를 회억하게 될 것이다.
죽음과 마주하면서 장자의 표현을 빌리면, 「쇠퇴와 소멸의 어두운 그림자가 덮칠 때」쯤 우리는 철이 들기 시작한다. 안타깝게도 그건 너무 늦다. 하나뿐인 인생을 그런 회한과 후회로 마감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미리부터 임종의 자리에서 바라보듯 그렇게 삶을 대하는 훈련을 한다면 그때 인생은 좀 달라지지 않겠는가.
죽음에 대한 근거없는 공포
여기가 장자의 사유가 출발하는 자리이다. 스피노자의 유명구를 빗대자면, 세계를 『영원의 상(相) 아래에서』 관조하는 것. 이 굴대를 붙들고 있으면 『장자』라는 책에서 느껴지는 기괴함과 낯섦이 절반 이상 덜어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장자의 글에는 죽음의 모티프가 넘친다. 그의 글을 죽음의 랩소디라고 불러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드라큘라의 공동묘지처럼 음울하거나 음산하리라고 지레 겁먹지 않았으면 한다. 장자에는 기이하게도 죽음에 대한 역겨움이나 공포가 거의 없다. 그는 죽음에 대해 공포나 불안은커녕 강한 호기심을 보였고, 한 술 더 떠 즐거운(?) 기대를 걸었다. 지난 호에 이런 대목을 소개한 적이 있다.
『여희(麗姬)는 애(艾) 땅 수비대 관리의 딸이었다. 진(晉)나라가 (국경을 침입하여) 데려가려 하자 그녀는 옷섶이 흥건하도록 울고불고 했었다. 그러나 막상 왕의 처소에 들어 비단금침을 두르고 산해진미를 맛보고 난 다음에는 처음의 그 어이없는 눈물을 후회했다』
우리도 그 처녀처럼 죽음에 대해 철없는 공포와 두려움을 갖고 있는지 모른다. 어찌 알겠는가. 죽어 저승에서 그토록 삶에 집착했던 것을 후회하게 될는지. 믿기지 않겠지만 그럴지도 모른다. 죽음을 겪어본 사람이 없지 않은가. 살아서는 죽음을 모르고, 죽어서도 또 죽음을 모른다. 죽음은 인간에겐 영원히 미지의 영역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레 무서워하고 혐오하는 데 익숙해져 있다. 생래의 보수적 성향이 죽음을 바라보는 집단무의식을 규정하고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장자와 해골의 대화
장자가 초나라로 가는 길에 굴러다니는 해골을 발견했다. 전쟁과 형벌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임자없는 해골은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유가가 격식있는 장례를 그토록 강조한 것은 사회가 그런 구호를 필요로 할만큼 사자(死者)에게 마음 쓸 여유가 없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아무튼 앙상하게 삭아가는 해골을 채찍으로 툭툭 치면서 장자는 예의 그 장난기를 발동시켰다.
『삶을 지나치게 탐해 절제를 잃어 이리 되었는가, 아니면 나라를 위해 애쓰다가 창칼에 쓰러졌는가. 나쁜 짓을 저지르고 부모 처자 볼 면목이 없어 목숨을 끊었는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 배고픔과 추위에 떨다가 이리 되고 말았는가. 아니면 이 험한 세상 다행히 온전한 수명을 누리다가 생을 마쳤는가』
해골이 대답을 할 리가 없다. 그걸 끌어다가 베개 삼아 누워 한숨을 청했다. 그런데 장자의 꿈 속에 해골이 나타났다.
『변사처럼 말도 잘 하두만. 자네가 짚은 것은 인간 세상의 괴로움일 뿐, 죽음의 세계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네. 어디 이 동네 얘기를 들어볼텐가. 여기서는 군주도 없고 신하도 없다네. 여기는 시간의 한계도 없어. 하늘과 땅을 무대로 영원의 시간을 산다네. 제왕의 즐거움도 죽은 자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지』
장자는 아무래도 믿기지 않아 다시 물었다.
『만약 염라대왕에게 부탁해서 다시 한번 그대에게 살과 피를 주어 네가 살던 고향집으로 돌려보내 준다면 어쩌겠나』
해골은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내 어찌 이 지고의 행복을 버리고 인간세상의 노역을 다시 겪으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죽음 너머의 세계에 대한 장자의 호기심 어린 눈과 기대를 읽을 수 있다. 그렇지만 현실과 환상, 직설과 은유를 넘나드는 그의 화려한 언어에 너무 깊이 말려들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장자는 사후의 세계가 실재한다고는 믿지 않았다. 해골이 읊고 있는 세계는 상상력의 미학적 공간일 뿐이다. 액면을 그대로 따라가더라도 그 세계가 기독교나 불교가 그리고 있는 그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사후의 세계를 관장하는 조직이나 위계가 없다. 초월적 인격의 전제적 지배도 없고, 삶에 곤고한 영혼들을 다시금 심판하겠다는 으름장도 없다. 해골의 기쁨은 조건없이 평등한 선물이다. 즉 생전의 지위나 재산, 그리고 인격과 품행에 상관 없이 죽은 자라면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그런 것이다. 천당이나 지옥에 대한 엄숙한 포고를 들었다면 장자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생사(生死)가 본시 꿈이거늘 하물며 생사 너머야』
천당이나 지옥 등 사후의 세계는 죽음에 대한 인간의 무지가 빚어놓은 것이다. 한 꺼풀을 벗기면 삶의 불확실성과 무의미성에 대한 두려움이 웅크리고 있다.
웃음으로 맞는 죽음
삶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에 대한 낙관적 기대도 비관적 탄식도 없다. 낙관이나 비관은 동일한 기원을 갖는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이다. 그럼 그것을 넘어선 사람은 죽음을 어떻게 대하는가. 여기서 장자의 그 특유한 해학이 시작된다.
장자가 죽으려 할 때 둘러 섰던 제자들은 오랜 주(周)문화의 전통에 따라 후히 장사를 지내고 싶다고 했다. 장자는 손을 저으면서 말했다.
『나는 하늘과 땅을 관으로 삼고, 해와 달을 옥구슬, 별들을 주렴으로 삼아, 만물의 호송 속에 떠나갈 것이다. 장례준비가 다 되었는데 뭘 더 보태겠단 말이냐』
제자들이 말했다.
『그리 하시면 까마귀나 솔개가 달려들어 뜯지 않겠습니까』
장자가 말했다.
『땅 위에 두면 까마귀 밥이 될 것이고, 땅 밑에 두면 개미 밥이 될 것인데, 굳이 이쪽 밥그릇을 저리 넘길 필요가 무어냐』
괴테는 임종시에 『빛을 좀더』하며 커튼을 열었고, 또 『좋구나』했다. 편견일까. 성취에 대한 자부와 삶에 대한 미련이 아직 묻어있다고 느껴진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에게는 나르시시즘의 흔적이 없다. 『친구한테 꾼 닭 한 마리를 잊지 말고 갚아라』라는 대목이 눈물겨웠다. 장자는 이보다 훨씬 가뿐하다. 너도 나도 잊고 위대한 농담 한 마디로 세상의 의자를 치웠다.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분이 있다. 시골 이웃에 신소리와 농에 능한 어머니 친구분이 계셨다. 건강이 좋지 않아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그 절명의 순간에 문득 어머니 손을 잡고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순자야, 내가 이제 곧 니 서방 만날 텐데 뭐 부탁할 거 없나』라고 말해 둘러 앉아 눈물을 찍고 있던 사람들이 그 와중에 폭소를 터뜨렸고, 그분은 한바탕 웃음 속에서 『애들 데리고 잘 살고 있다고 전해 다오』라는 어머니의 대답을 뒤로 하고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자주 그 일을 어이없는 웃음으로 회상하시지만 나는 그분이 한 세상 멋지게 살다 가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죽음과 웃음이라는 언뜻 기묘한 결합은 삶의 진지성을 결한 것일까. 거기에 태만의 흔적은 없다. 장자는 웃음이야말로 죽음에 보내는 가장 큰 예배요, 축송이라고 생각했다. 가령 장자의 이런 말을 상식은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세 사람의 친구가 삶을 잊은 곳에서 벗이 되었다가 하나가 죽었을 때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삼태기를 두드리고, 또 한 사람은 거문고를 뜯으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다면. 이건 약과다. 장자는 아내가 죽었을 때도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불렀다. 논리학자인 친구 혜시(惠施)가 문상을 갔다가 놀라서 물었다.
『아니, 이 사람아. 살을 섞고 자식을 낳아 함께 늙어 온 아내가 죽었는데, 울기는 커녕 깡깽거리며 노래를 부른다니 이건 좀 심하지 않은가』
장자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그렇지 않네. 처음 죽는 것을 보고 나라고 어찌 슬프고 아득한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생명(生)의 시원을 돌아보니 그게 본래는 없었던 게 아닌가. 더 거슬러 가 보면 생명은커녕 아무런 형체(形)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고, 형체는커녕 그걸 구성하는 기(氣)도 없었던 때가 있었네. 그 혼돈의 흐릿함 속에서 어쩌다가 기(氣)가 생겼고, 기가 변해서 형체가 되었으며, 형체가 변해서 생명이 있게 되었네. 지금 그게 또 변해서 죽음이 된 게 아닌가. 이건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번갈아 진행되는 것과 같은 거야. 아내는 지금 천지라는 거실에 편안히 누워있다네. 그런 걸 지금 울고불고 곡을 해서 시끄럽게 해야겠나. 그건 운명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 생각되어 그만둔 것일세』
장자도 처음에는 아내의 죽음 앞에서 놀랍고 슬픈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무엇에도 놀랄 것 같지 않은 그가 내비치는 이 인간적 연약함이 뭉클하니 가슴을 울렸다. 하지만 그는 곧 울음을 거두고 질그릇을 두들기며 노래를 시작한다. 혜시처럼 우리도 그 앞에서 아연한다. 그러면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엄숙함에서 가벼움으로, 일에서 놀이에로, 울음에서 웃음에로 이른 그 철학적 곡절이 말이다.
진실은 언어 너머에
바깥을 바라보다가 문득 그렇게 바라보는 나를 바라볼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는 눈이 두 개이다. 두번째 눈은 저 너머 의미의 공간에서 스스로를 돌아보는 반성적 힘이다. 이 눈을 통해 우리는 상황속으로의 피동적 매몰과 의지의 맹목적 견인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그게 쉽지 않다. 작은 일은 몰라도 생사가 걸린 문제라면 의미와 반성의 눈을 적용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그런데 장자는 그 모험을 하고 있다. 삶을 통째로 들어 절대적 객관의 렌즈에 들이댄 것이다.
나는 원래 없었던 생명이 아닌가. 없었다가 있었던 생명이니 있다가 없은들 무에 대수로울 것이 있는가. 지극히 단순하고 어이없는 이 연쇄 유추가 그를 슬픔과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었다. 남의 일이니 그럴 수 있다고 말하려는가. 그는 아내의 죽음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장자에게 있어 구원은 몇 눈금의 시각의 이동, 선가(禪家)의 표현을 빌리면 발뒤꿈치를 돌리면 얻어진다. 관건은 자기중심적 관심을 떠나 세계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때 세계는 미망과 환상의 거죽을 벗고 시린 가을물처럼 투명하게 드러난다.
그 세계가 어떤 것인지는 안타깝지만 그려낼 수 없다. 세계의 실상은 궁극적으로 언어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선배인 노자(老子)의 첫머리에서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도(道)를 도라 하면 진정한 도가 아니고, 이름(名)을 이름이라 하면 진정한 이름이 아니다』. 어째서 이런 불가해한 주문이 노장(老莊)의 교설이 되었는지 그 과정이나 주변은 설명해 주어야 할 것 같다. 우선 이거 하나를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다. 투명한 눈에 있어 세계는 분리되지 않는다.
무한소급과 무한분할
본래 평등했던 세계는 인간의 유용성이라는 도구적 관심의 희생이 되어 구획되기 시작했다. 책상을 탁자나 꽃병, 혹은 교사와 학생으로부터 구분하는 것은 책상의 본성이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책상은 독립된 실체로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교실이라는 일체된 공간 속에서 의자와 칠판, 필통과 가방, 학생과 교사와 더불어 존재한다. 그렇지 않은가. 책상과 그것이 기대고 있는 교실바닥을 구분하는 유일한 근거는 유용성이다. 목수는 책상을 짜면서 교실바닥까지 들고가지는 않는다. 학생들은 책을 펴고 팔을 거는 특정한 물체 위에서 가끔 벌을 서기 위해 그 물질의 덩어리를 구분할 필요가 있다.
도구적 연관을 떠난다면 대상은 대상으로 성립할 수 없다. 아울러 그 대상을 한정하는 꼬리표인 개념 또한 개념으로 성립할 수 없다. 만일 대상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면, 다음과 같은 무한분할과 무한소급의 함정에 빠진다. 책상은 그것을 구성하는 다양한 부품으로 갈라질 수 있으며, 다시 각 부품들은 그보다 작은 재질과 부속으로, 그것들은 또 그보다 더 세세한 재질과 성분으로 분할될 수 있다.
이 무한소급을 축소가 아니라 확대쪽으로 밀고가면 어떨까. 교실이라는 공간은 건물의 한 부분에 불과하다. 건물은 학교 전체의 일부분이고, 학교는 그 지역의 일부이고, 그 지역은 한 도시의, 그 도시는 한 국가의, 그 국가는 지구의 일부이다. 또 지구는 태양계의, 태양계는 은하계의, 은하계는 우주의 한쪽 끄트머리이고, 우주는 또 다른 섬우주의, 섬우주는 또또또… 무한소급과 무한분할의 다양한 층위 가운데 어느 것을 중심으로 삼을 것인가. 그것을 정하는 객관적인 표준이 가능한가. 합의된 한정이 없이는 막막한 미궁으로 빠질 것이고, 만일 합의를 통해서 표준이 성립된다면 그것은 객관적인 표준이랄 수 없다. 이것이 딜레마이다.
이 딜레마를 본격적으로 논한 사람들이 있었다. 논리학파라고 부르는 변론가(名家)들이 그들이다. 그들의 논의 가운데 이런 것이 있다. 『먼지보다 큰 것은 없고, 천지보다 작은 것은 없다』
이것은 궤변인가. 이것은 인간 인식의 상대성과 객관성에 대한 난제를 보여주는 한 실례이다. 먼지는 그보다 작은 층위에 분석의 잣대를 설정하면 엄청나게 큰 것이다. 또한 천지라 하더라도 우주전체라는 층위에서 보면 먼지보다 하잘것없을 것이다. 장자는 명가를 따라 이 모순 앞에서 결국 세계를 재는 객관적이고 표준적인 준거는 없다고 손을 들었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인가
사람들은 이에 대해 엉터리라고 코웃음칠 것이다. 어째서 표준이 없는가. 베이컨이 네 가지 우상을 경계하라고 했지만 그것이 인간 종족에 보편적이라면 이미 우상이 아니지 않은가. 우리 모두는 그런 합의 하에 사태를 판단하고 행동을 결정하고 있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그러지 않으셨던가. 땅 위의 것과 하늘의 것, 물 속의 것이 모두 인간의 삶과 행복을 위해 봉사하는 도구라고. 동물보호란 배부른 소리이고 자연보호 또한 궁극적으로 인간이 거할 삶의 환경을 쾌적하게 해 보자는 것 아닌가. 에누리 없이 말하건대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인간종족의 유용성이야말로 유일한 표준이다. 그 너머의 것은 돌아볼 필요가 없다.
이 반론에 장자는 무어라고 말할 것인가. 장자의 눈은 스스로를 타자처럼 바라보는 반성적 명상의 눈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의 눈은 에고를 넘어 있다. 천지의 주인은 인간이 아니다. 수많은 동물과 식물, 그리고 바람과 물이 섞여 운화(運化) 하는 광대한 공간을 한줌도 못되는 인간의 좁은 소견으로 판단하고 재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아니된다. 장자는 자연이라는 절대의 지평에서 사유하고 있다. 그는 인간의 눈으로 자연을 보지 않고 자연의 눈으로 인간을 응시한다. 인간은 만물의 척도가 아니다.
설결(齧缺)이 왕예(王倪)에게 물었다. 『스승께서는 시비의 객관적 준거(同是)를 알고 계십니까』 『어떻게 알겠느냐』 『그럼 모르신단 말씀이군요』 『그 또한 내가 어찌 알겠는가. 허나 가령 내가 안다는 것이 정녕 모르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며, 내가 모른다는 것이 정녕 아는 것이 아님을 어찌 알리. 물어보자꾸나. 습기 있는 곳에서 잠을 자면 요통에 걸리기 십상인데 어디 미꾸라지도 그렇던가. 나무 꼭대기에 서면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떨리는데 어디 원숭이도 그렇던가. 이 셋 가운데 누가 올바른 거처를 아는가. 또 사람은 고기를 먹고 사슴은 풀을 뜯고 지네는 뱀을 맛있어 하고 올빼미는 쥐를 즐기는데, 이 넷 중 누가 참 맛을 아는가. 또 성성이는 원숭이와 짝하고 고라니는 사슴과 어울리며 미꾸라지는 고기들과 노닌다.
사람들이 모장과 여희를 예쁘다 여기지만 그들을 보면 고기는 물 속으로 깊이 숨고 새는 하늘로 푸드덕이며 사슴은 꽁무니가 빠지도록 도망치니 이 넷 중 누가 천하의 올바른 아름다움을 아는가. 내가 보건대는 인성(仁)과 정의(義)의 단서와, 옳고(是) 그름(非)의 갈래는 이렇게 엉클어지고 혼란되어 있으니 그 다툼을 어찌 제대로 가려내겠는가』
이 대목은 의미심장하다. 장자가 인간이 아닌 자연을 잣대로 삼은 이유는 훨씬 심원한 데 있었다. 인간중심주의는 인간 내부의 분열과 갈등의 징표임을 그는 간파했던 것이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임을 주창한 것은 소피스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또한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명제가 필연적 연관을 갖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곧 독점과 권력을 향한 인간 사이의 혈투의 무대 속으로 던져진다.
그것은 흡사 정치권력을 둘러싼 쟁투와도 같다. 공동의 적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는 권력을 둘러싼 동지들 사이의 핵분열과 이합집산이 일어나는 것처럼. 하여 인간 사회는 자신이 세계의 중심임을 내세우는 수천수만의 에고의 각축장이 되어 버렸다. 이해가 서로 다르고 득실이 상충하는 곳에 일치된 합의를 기대하기는 무망하다.
언어와 현실의 괴리
자연의 다른 식구들과 달리 인간이라는 종은 그 다툼의 무기로 언어를 갖고 있다. 그런 점에서 언어는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 장자가 바라보는 말은 서양철학의 진리관에서처럼 사물에 대한 객관적 명명이 아니다. 서재에서는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장바닥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장자는 고함소리와 책상치는 소리에 뒤섞이는 현장에서의 언어를 바라보고 있다.
무릇 말이란 바람에 울리는 소리와는 다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의도하고 있다. 의도에서 출발한 말은 (편견의 소산이므로)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진정한 의미의 「말」은 과연 있는 것일까. 말은 불가능한 환상인가. 그렇다면 우리들의 말은 새의 짹짹거림과 어디가 다른가. 둘 사이에 정녕 구분이 있는가, 혹은 없는가.
길(道)은 어디에 가려져 참과 거짓이 있게 되었고 말(言)은 어디에 가려져 옳고 그름이 있게 되었나. 어디에 간들 길이 아닌 곳이 있으며 어디에 있은들 말이 못설 자리가 있으리오만, 길은 우리의 부적절한 이해로 하여 가려졌고 말은 우리의 부화(浮華)한 요설로 하여 가려졌다. 유가(儒家)와 묵가(墨家)의 시비는 이렇게 갈라졌다. 이쪽이 옳다 하는 것을 저쪽이 그르다 하며 저쪽이 옳다 하는 것을 이쪽이 그르다 한다. 그들이 옳다 하는 것이 실은 틀렸고, 틀렸다 하는 것이 실은 옳은 것임을 통찰하기 위해서는 정신의 투명한 빛(明)에 비추어보아야 한다.
너와 내가 논쟁을 벌이고 있다 하자. 네가 이기고 내가 졌다 하여 네가 옳고 내가 그르다 하겠느냐. 반대로 내가 이기고 네가 졌다 하여 내가 옳고 네가 그르다 하겠느냐. 도대체가 둘 중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르냐, 아니면 둘 다 옳거나 둘 다 그르냐. 당사자인 너와 내가 모른다면 사태는 깜깜 바람벽 앞이다. 누가 옳은지를 누구에게 판정해 달라 할까. 너의 의견에 기우는 사람에게 부탁할까. 편견을 가진 사람이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을까.
나의 의견에 기우는 사람에게 부탁할까. 그 또한 편견 아래서 공정하게 판정할 수 있을까. 너와 나와는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에게 부탁할까. 그가 어떻게 판단을 할 수 있으리. 둘 다를 수긍하는 사람에게 부탁할까. 그가 무슨 판단을 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너도 나도 제 3자도 시비를 판정할 수 없다. 달리 더 누구를 기다려 볼까.
사람을 설득하려 애써 본 사람은 안다. 논리적 정합성과 합리적 계산은 단단한 자기이해와 편견 앞에 거의 무용지물이다. 혹 고개를 끄덕이더라도 그건 상황이나 권력의 압력에 굴복한 양보이기 십상이다. 심복되지 않는 응어리는 그의 가슴 밑바닥에 남아 후일의 반격을 예비한다. 인간은 무서운 동물이다. 장자는 말했다.
『인간의 마음은 산천보다 험하고, 그 깊이는 바다보다 측량하기 어렵다』. 아니 합리성이나 공정성도 함부로 자임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이들 객관적 표준들 또한 무한소급과 무한분할처럼 다층적 지평과 전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목표 아래서 타당한 논의도 한 걸음을 넓히거나 옮기면 옹색하거나 구차해지기 쉽다.
논쟁은 그러나 엄격한 한정을 가질수록 구체성을 다지기 때문에 논변에서는 포괄적이고 웅대한 전망이 불리하다. 그리하여 현실은 표피적이고 즉물적인 차원을 장악한 편협한 지식에 의해 장악되는 비극이 연출된다. 장자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개탄했다.
반편의 지식인
매미는 얼음을 얘기할 수 없고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를 말할 수 없으며, 반편의 지식인은 진정한 길을 말할 수 없다. 매미는 시간에 잡혀 있고, 개구리는 공간에 잡혀 있으며, 반편의 지식인(曲士)은 자신이 배운 바에 고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자는 재미있는 언어이다. 반편의 지식인으로 번역한 장자의 원어는 곡사(曲士)다. 곡(曲)이란 굽어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은 또한 「수없이 다양한」이란 뜻을 갖고 있다. 곡례삼백(曲禮三百)이란 의례와 에티켓의 구체적 절목들이 3백개나 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또한 행동의 지침에는 익숙하면서도 정작 그 근본적 원리나 정신은 소홀하다는 폄의를 함축하고 있다(이것은 『중용』에서 유추한 용법이다).
곡사의 곡(曲) 또한 이 세 가지 의미를 복합적으로 함의한 절묘한 말이다. 곡사의 지평은 구체적이고 한정적이다. 자신의 편협한 경험이나 자기집단의 이해가 그럴듯한 명분으로 포장되고, 그것을 공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그는 가능한 모든 논리와 언변을 동원한다. 시비를 가릴 땐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주저없이 날고, 붙잡은 것을 지킬 땐 하늘에 맹세라도 한 듯 꿈쩍하지 않는다. 인간사의 비극과 사회적 혼란이 이로부터 생겼다.
이를 어떻게 광정(匡正)할 것인가. 법가는 노골적으로 권력의 강제를 들고 나왔다. 전제권력의 힘을 빌려 곡사들의 발호와 이들의 아무런 소득없는 논쟁을 잠재우고 일사불란한 국가동원체제를 구축하려 했다.
그렇지만 전제권력의 자의와 이기라는 근본 전제를 해결할 수 없는 취약성을 갖고 있었다. 유가는 어떻게든 이 전제를 확보하려 했다. 군주의 도덕적 무장이 무망하다면 적어도 현명한 신하와 관료들에게 권력을 위임하기라도 해야했다.
이들 그룹의 전략은 양면적이다.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도덕적 모범을 보여 풍속을 변개시켜 나가는 자율적 교화와, 또 한편으로는 편협한 지식인들이나 파렴치한 상인들을 적절한 권력으로 통제하고 교정해나가는 타율적 강제를 병치시켰다. 우리는 유교를 대략 전자의 측면에서 바라본다. 그러나 후자 또한 유교의 한 날개였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교는 한 사회에 도(道)가 있느냐 여부를 가르는 기준으로 다음과 같은 기술을 하고 있다.
『굽은 나무가 곧은 나무 위에 있어서는 안되고, 곧은 나무가 굽은 나무 위에 서야 한다』
삶은 유쾌한 나들이일뿐
공적 책임감과 실무적 역량을 갖춘 인사가 그렇지 않은 인사들의 위에서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구조적 체계가 유도(有道)의 건전사회의 관건이라는 것이다. 여기서도 곡(曲)과 직(直)이 대비되고 있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이들은 모두 인간의 이기와 욕망을 인정하고 그들을 순화 조정시키려는 프로그램들이다. 장자는 그렇지만 자기이해와 권력의지가 충돌하고 있는 한 논변의 귀일은 물론, 인간세상의 평온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근본적 회의주의자였다. 세상사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한 해결은 없다. 논변을 그쳐야 논변이 보일 것이고, 세상을 넘어서야 세상이 보일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 혹은 인간이 우주의 무대 뒤로 사라진 그 막막한 공간을 떠올려 보라. 혹은 적극적으로 자연이라는 전체적 운행의 그 중심축(道樞)을 파지하여 천지와 더불어 호흡하라. 하늘의 균형(天鈞)은 너와 나, 현실과 꿈 사이의 견고한 벽을 허물고, 그리던 영원의 평화를 찾아줄 것이다. 그때 삶은 유쾌한 나들이(逍遙遊)로, 세상은 한바탕 축제의 무대로 화한다. 장자는 어느날 기이한 꿈을 꾸었다.
어느날 내가 꿈을 꾸었다. 나비가 되어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로이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그러다 문득 깨어보니 아하! 꿈이라. 가만있자. 그것이 꿈이었던가. 혹 모르지. 내가 조금전 나비가 되어 나비가 되어 날아다니는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나비가 지금 내가 되는 꿈을 꾸고 있는 중인지. 나와 나비는 자연이 마련한 분수 안에 있다. 그 사이의 걸림없는 이동을 만물의 영원한 회귀(:物化)라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