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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4월 3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제1독서 : 이사 52,13―53,12
제2독서 : 히브 4,14-16; 5,7-9
복 음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기>
오늘의 묵상
김 재형 베드로 신부
오늘 우리가 거행하는 이 전례는
그 어느 때보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합니다.
일 년에 한 번, 늘 곁에 계시던 예수님의 ‘부재’를 가장 뚜렷이 체험하는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날을 ‘거룩한 날’이라 부르고, 수난기를 장엄하게 선포합니다.
바로 여기서 십자가의 신비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욕스러운 수난으로써 부활의 영광에 이르셨습니다.
그 치욕은 모욕이 아니라 사랑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하느님의 뜻이 드러난 영광이었습니다.
오늘 수난기에는 여러 인물이 나옵니다.
예수님을 배반한 유다와 그분을 배척한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
책임을 회피한 빌라도, 군중,
그리고 끝까지 함께한 여인들,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까지 …….
그들을 보며 우리 스스로 묻게 됩니다.
“나는 그들 가운데 누구와 닮아 있는가?”
우리 삶에도 빛과 어둠, 기쁨과 고통이 함께 존재합니다.
죄와 악이 우리를 상처 입히고, 두려움이 우리를 옥죄는 현실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십자가가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을 믿습니다.
십자가는 죽음을 넘어 부활로, 패배를 넘어 승리로 이끕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8,34).
그러므로 우리도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도,
오히려 그분의 존재를 가장 깊이 묵상할 수 있는 날입니다.
구원을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주신 그 사랑 앞에서, 우리 스스로 물어봅시다.
“예수님의 수난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
조 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사람들을 보면 화가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화낼 일도 아닌데 갑작스럽게 화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화내면 나만 손해입니다.
옛 우리 조상님들도 “화를 내는 사람은 자신을 먼저 해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분노가 신체를 병들게 합니다. 혈압이 오르고, 심박수가 올라갑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화내는 사람을 피하기 마련입니다.
자기 주변에 사람이 없는 사람은
부정적인 말과 행동을 하는 사람, 특히 화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들 곁에는 자기를 도울 사람도 없어지게 됩니다. 얼마나 큰 손해입니까?
화가 날 상황에서 “그러려니” 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특히 그 상대를 위해 기도하면서
부정적 감정이 자기를 덮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싸우고 화내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오히려 침묵이 옳습니다.
침묵 안에서 기도하고 사랑을 드러내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와 상관없다는 무관심과 무시는 잘못입니다.
이 안에서는 기도할 수 없기 때문이며, 사랑도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냥 자기 위주로 사는 이기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래서 철저히 기도하면서 사랑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은 교회 전례력 중에서 가장 슬픈 날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감사한 날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수난과 죽음으로 우리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 수난 성금요일 전례의 절정은 ‘십자가 경배 예식’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십자가는 승리의 십자가라고 말합니다.
주님과 함께 구원을 이루어가는 영광의 십자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십자가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고통, 실패의 경험들이 단순히 우리를 짓눌리는 형틀이었을까요?
주님을 통해 승리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를 오늘 요한복음의 수난기를 묵상하면서 분명히 알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무덤에 묻히시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그분의 사랑이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 군사들과 사람들의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까지 당하셔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당신의 신성으로 피하지 않으십니다.
꿋꿋하게 완전한 인간의 모습으로 그 고통과 시련을 받아들이십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맡기신 인류 구원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의 이 사랑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하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우리가 짊어질 수는 없습니다.
바로 나의 십자가를 사랑으로 짊어져야 합니다.
침묵 속에서 기도와 사랑으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 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라는 신비입니다.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합니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해야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안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이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아멘.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조 욱현 토마 신부
오늘 우리는 교회의 가장 엄숙한 전례, 주님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한다.
성금요일은 성체성사도, 미사도 없고,
오직 십자가와 말씀 앞에 침묵하며 서 있는 날이다.
오늘의 핵심은 오직 하나, 하느님의 사랑이 십자가 위에서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죄로 인해 스스로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아드님은 아버지의 뜻에 끝까지 순명하심으로써,
우리를 대신해 속죄 제물이 되셨다. 바오로 사도는 말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 2,6-8).
성 이레네오도 같은 믿음을 고백한다.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이가 죄인이 되었지만,
한 사람 예수의 순종으로 많은 이가 의롭게 되었다.”(Adversus Haereses 3,18,7).
인간이 보여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이다.(요한 15,13)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시면서 사람이시기에,
가장 극단적인 사랑의 형태인 죽음을 택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십자가를 두고 이렇게 말한다.
“십자가는 하느님의 심판대이자, 동시에 하느님의 학교다.
그 위에서 우리는 무엇이 사랑인지를 배운다.”(Sermones 218,3).
예수님께서는 숨을 거두시기 전에
당신의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셨다.
이는 단순한 가족적 배려가 아니라,
마리아가 교회의 어머니가 되심을 선포하는 행위였다.
교회는 성모의 모성 안에서 신앙을 지탱 받는다.
또한, 창에 찔리신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은
성사들의 원천이며 교회의 탄생을 드러낸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 장면을 주석하며 말한다.
“그분의 옆구리에서 나온 피와 물은 교회의 성사들을 상징한다.
우리는 그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Homiliae in Ioannem 85,3).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는
단순히 죽음의 종결을 뜻하지 않는다.
구원의 경륜, 곧 하느님 아버지의 계획이 충만히 성취되었음을 의미한다.
교리서는 이렇게 가르친다.
“그리스도의 모든 생애는 그분의 파스카 신비를 향하고 있으며,
십자가는 그 사랑의 절정이다.”(607항).
오늘 우리는 십자가 앞에 서 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느님 사랑의 극치를 본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이제 우리는 그분의 피로 새 생명을 얻었으며,
그분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희망을 받았다.
그러므로 오늘, 이 성금요일,
우리 모두 십자가 아래에 함께 서서
성모님과 더불어 주님의 사랑을 묵상하고,
감사의 마음으로 주님의 은혜에 응답하여야 한다.
조 재형 가브리엘 신부
지난 2월 23일에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3년 전에 서울대교구에서 사제를 파견했던 공동체입니다.
저는 두 번 엘파소엘 방문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제게 30일 피정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환영차 방문했습니다.
2년 전에는 신부님이 초대해서 포트워스 신부님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비자 문제가 있어서 작년 4월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뒤로 엘파소 한인 공동체는
한국인 사제가 없이 미국 성당에서 신앙생활 했습니다.
교우들은 제게 ‘판공성사와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엘파소로 갔습니다.
16명의 교우는 모두 성사를 보았고, 감사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날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은 오른쪽으로,
악하고 게으르게 살았던 사람은 왼쪽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힘들었고, 배고팠고, 헐벗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으로 가라.’
그러자 오른쪽에 있던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가장 배고팠고, 헐벗었고,
나그네 되었던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저는 1년 동안 한국어 미사를 하지 못했던 엘파소 공동체로 갔고,
미사와 판공성사를 해 주었으니, 오른편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엘파소 한인 공동체는 제게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인 공동체는 제가 앞으로도 와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은 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방문일정은 5월 26일로 정했습니다.
예전에 한비야 씨가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일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보람 있고 즐거운 일,
보람 있지만 힘든 일,
보람 없지만 즐거운 일,
보람도 없고 힘든 일’
이번 엘파소 방문은 보람 있었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은 보람 있지만 힘든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오늘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왔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게 하십시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은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돈 때문에 친구를 배반합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은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까지 위험하게 합니다.
명예는 지킬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은 희생과 나눔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신앙인에게 진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사다리를 타고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숨을 거두신 ‘성금요일’ 예식을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 생의 한가운데서
가장 부끄럽고, 가슴 아팠던 순간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분은 친구를 배반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고 짓밟은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다른 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아내 모르게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세상 구원이 여기에 달려 있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깊은 경배를 드립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일어나 갑시다.’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이 외로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환호 속이 아니라, 침묵과 조롱 속에서 걸어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돌길을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넘어지셔도 다시 일어나셨고, 쓰러지셔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패배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억울함의 길이 아니라 용서의 길이었습니다.
저주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주님,
저희도 저마다의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보람은 있지만 힘든 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때로는 외롭고 눈물 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셨기에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희망의 길입니다.
십자가 끝에는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거듭 치유되고 기적을 본다 해도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양 승국 스테파노 신부
성목요일 저녁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족례를 묵상하면서,
참된 신앙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신앙에도 거짓 신앙, 사이비 신앙이 있습니다.
무늬만 신앙인, 겉과 속이 다른 수박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달콤함과 신비스러움,
기적과 치유,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녕만을 추구하지,
고통이나 십자가는 철저하게도 외면합니다.
나와 내 가족의 승승장구만을 기원하지,
공동선이나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과의 연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이비요 수박 신앙인이 확실합니다.
수난이 시작되기 직전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허리를 굽히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 작지만 강렬한 행위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은
희생과 봉사, 헌신과 겸손에 뿌리내려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요즘 한국 가톨릭교회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의 구원 방주’ 문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가오는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세력 확장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SNS를 통한 적극적인 홍보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펼쳐온 행태는 신천지나 통일교 등
사이비 집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보잘 것 없으며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존재를 신격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생계가 달려있는 협력자들이 기생하고 있습니다.
치유니 기적이니 하며 모은 막대한 헌금은 대대적인 부동산 매입으로 이어집니다.
가톨릭교회 당국 그 누구로부터의 인준을 받지 않았음에도
수도자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 있고,
불행하게도 균형감각을 상실한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교님들이 지속적으로 당부해 오신 것처럼
교도권에 순명하지 않는 단체인 나주에서 봉헌되는
모든 미사나 성사는 무효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지속해온
각종 이벤트 행사들, 참으로 기괴하고 유치합니다.
모든 행사에 꼭 따라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불치병의 치유입니다.
그들이 충실하게 업데이트하는 영상물에는
추종자들이나 은혜 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으로 빼곡합니다.
사실 불치병이나 중병에 걸린 사람들, 말기 암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치유니, 기적이니 하며
미끼를 던지며 세를 불려가는 동시에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기회 닿을 때마다 강조를 합니다.
너무 치유나 기적, 특별하고 기이한 현상에 연연하지 말라고.
우리 가톨릭 신앙은 균형과 상식을 기반으로 한 종교이기에 그렇습니다.
신앙은 이성과 함께 가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끝도 없이 치유되고 또 치유되어 200세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까요?
중병에 걸리면 제일 먼저 병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첨단 의료 기술로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에게 희망과 새 삶을 건네고 있는
이 시대 또 다른 치유자 예수님이신 유능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병고 속에서도 낙관적인 마음 잃지 않고,
부단히 하느님 자비와 은총을 청할 것입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병과 맞서 싸우는 등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이제 때가 왔나보다 생각하며,
평생 기다려왔던 주님을 만날 시간을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치유되고 소생되며 기적을 본다 해도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루르드의 목격자 벨라뎃다 성녀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철저한 순명과 기도와 겸손한 은수생활로
지금은 하늘의 빛나는 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적이니 신비니 치유니 하며
먼 곳까지 왕복하시느라 고생하시는 분들,
고백성사 통해 따뜻하고 자상하며
균형 잡히고 상식적인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값싼 신앙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상표를 붙여 어색하고 조잡한 물건을 강매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부와 성공, 건강과 치유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뜻에 순명하기 위해 철저한 침묵 가운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예수님을
삶과 죽음을 이정표로 삼습니다.
성모님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 비범함을 사신 분입니다.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셨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상에 충실할 것과 매일의 시련을 잘 견디라고 권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결코 피눈물 흘리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나뒹구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어색하고 기상천외한 신앙 행태를 원치 않으십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송 영진 모세 신부
1)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성금요일 전례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기 전에 겪으신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전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보다 ‘왜?’가 더 중요합니다.>
사실 ‘십자가 신앙’은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것이고,
‘부활 신앙’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상징이 되고, 표징이 됩니다.
<반대로,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무의미한 물건이 될 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3-15)
2)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수난 이야기는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부활 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합니다.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이니까
수난 이야기보다 더 길고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반대가 되었을까?
그것은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의 상황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승천 후에,
세월이 꽤 많이 흐르고 나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당시 신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고,
아마도 수난 때의 참혹했던 일은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심정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이 희미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부활의 기쁨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말라고,
수난 때의 일을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어떻게, 얼마나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파스카의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어둠의 무서움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빛을 잘 간직하고,
병의 고통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건강을 잘 지킵니다.
3)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은 현재의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과거의 일이다. 십자가는 이미 끝난 일
아닌가? 그런데도 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이니 달게 받아들여라.”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투적인 말’은 당사자를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바로 그럴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랑,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안 되면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일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도,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함께 하면 해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주님께 배운 다섯 가지 근본적
“물음과 답”
이 수철 프란치스코 신부
“주님, 당신 얼굴
이 종에게 비추시고,
당신 자애로 저를 구하소서.”(시편31,17)
오늘은 주님 수난 성금요일입니다.
벌써부터 만개한 사랑의 파스카 봄꽃들이 주님 부활의 기쁨을 경축하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부활축제가 시작됨을 알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강론이 끝나면 십자가 경배가 시작되기 전
다함께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함께 노래할 것입니다.
“보라, 십자나무 여기에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우리는 참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늘 영원한 회개의 표지, 희망의 표지, 구원의 표지인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써놓고 많이 나눴던 <봄꿈>이란 시가 생각납니다.
"봄은 겨울에서 온다
죽음 같은 겨울 추위 중에
피어나는 부활의 봄꿈이
겨울 추위를 이겼다.”<2026.1.23.>
며칠전 주님 부활의 기쁨을 앞당겨 보여 주는,
봄비에 젖은 파스카의 봄 풍경에 감동하여 쓴
<봄비로 씻겨 주시니> 동시도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하늘님,
하늘 은총
봄비로 씻겨 주시니
온땅이 새롭다, 향기롭다
엄마가 씻겨준 아기몸같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곳곳에 피어나는 사랑의 파스카 봄꽃들이다.”<2026.3.31.>
주님 수난 성금요일,
말씀 묵상 중 파스카 예수님께 친히 배운
삶의 지침이 될 다섯 물음에 대한 답을 나누고 싶습니다.
주님과 일치된 삶과 죽음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첫째, “누구를 찾느냐?”
당신을 찾는 경비병들에게 예수님 친히 물었을 때,
이들의 “나자렛 사람 예수요.” 답은 옳았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나다.” 하며
탈출기 모세에게 계시된 신적 존재의 신원으로 자신을 계시합니다.
바로 세상 그 누구도, 어떤 우상도 아닌
이런 참 하느님이자 참사람이신 예수님을 찾는 우리들입니다.
이사야서가 예언한 주님의 의로운 종, ‘우리의 병고를 메고 갔으며,
우리의 고통과 죄악을 짊어지신 분,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벌을 받았고,
당신 상처로 우리를 낫게 하신 분, 많은 이들을 의롭게 하신 분’, 바로 예수님입니다.
또한 히브리서가 고백한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를 짓지 않으신 대사제,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신 인간미 넘치는 대사제’ 예수님입니다.
바로 자랑스럽게도 우리가 찾는 분은 이런 예수님입니다.
둘째, “진리가 무엇이요?”
무지한 빌라도에 대해 저절로 웃음이 나옵니다.
진리이자 사랑이신 분을 앞에 두고 무지에 눈이 가려
주님을 모르고 진리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천명하신 주님이요, 주님 친히 고백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
진리에 속한 사람은 누구나 내 목소리를 알아듣는다.”
베리타스(Veritas), 진리를 모토로 한 대학도 많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진리의 연인”으로,
베네딕도 16세 교황은 “진리의 협력자”로 명명했고
불교의 대선사 성철은 “진리에 복종”을 모토로 삼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진리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셨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셋째, “당신은 어디서 왔소?”
무지한 빌라도의 물음에 예수님께서 아무 대답도 않으시고 침묵합니다.
대답해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어느 수행자와 성덕이 높은 수녀와의 대담을 잊지 못합니다.
“Where are you from?(당신은 어디서 왔느냐?)”
수녀님의 명품 답변에 감탄했습니다.
“I am nowhere”(나는 아무데로부터 오지 않았다.)“
바로 하느님께로부터 오셨다 하느님께로 가시니 장소를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니,
바로 예수님이 그러하고 우리 믿는 이들이 그러합니다.
넷째, “내 정주처요 안식처는 어디인가?”
바로 십자가와 부활의, 파스카의 주님 곁입니다.
바로 주님의 십자가 곁 또 하나의 애제자인 요한인 우리들이
평생 모시고 살아야 할 성모님이 계신 여기 이 자리가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안식처이자 정주처의 제자리입니다.
존재론적 복음 선포의 꽃자리입니다. 늘 상기해야 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여인이시여, 이 사람이 어머니의 자녀입니다.”
“이분이 네 어머니시다.”
다섯째, “내 임종어는 무엇이겠는지요?”
주님의 임종어가 모범입니다.
참다운 구도자와 수행자라면 정말 닮고 싶은 주님의 임종어 둘입니다.
“목마르다!”
진리 충만한 삶중에도 역설적으로 늘 진리에 목말라 했던 주님은
우리 수행자들의 영원한 롤모델입니다.
때로 주님께 목말라 눈떳고 눈뜨면 아팠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다 이루어졌다!”
얼마나 멋지고 아름다운 고백인지요. 주님께 불림 받은 자로서
그 사명의 책임을 다함으로 아버지의 뜻을 다 이루었다는 임종어입니다.
<아모로 파티(amor fati), 운명애>의 사랑으로
책임의 십자가, 운명의 십자가를 죽기까지 지고 순종하며,
치열히 가열차게 사셨다는 장엄한 임종어 입니다.
주님 수난 성금요일 파스카의 주님으로부터
친히 받은 다섯 가지 근본적 물음과 답입니다.
평생 늘 이 다섯 가지 물음과 답을 지니고 살 때
참으로 멋지고 아름답고 거룩한 삶과 죽음이 되리라 믿습니다.
“주님께 희망을 두는 모든 이들아
힘을 내어 마음을 굳세게 가져라.”(시편31,25). 아멘.
십자가는 또 다른 세족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우리는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라고 말씀하시며 숨을 거두신 그 현장에 서 있습니다.
성 금요일의 십자가는 단순히 한 의로운 인간의 비극적인 처형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만이 하실 수 있는 거대한 '낳음'의 현장이자,
인류의 찌든 자아를 씻어내는 '두 번째 세족례'의 현장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유다인들도 자신들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의 아들과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아들은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아들은 '죄를 없애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죄란 무엇일까요?
창세기에서 뱀은 배로 땅을 기어 다니는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는 인간이 오직 자기 자신,
즉 '자아'만을 위하며 땅의 것(욕망과 두려움)에만 집착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하느님께는 그런 마음이 없으십니다.
하느님은 오직 사랑만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성 목요일에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과
오늘 십자가 위에서 옆구리를 열어 피와 물을 쏟으신 것은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입니다.
주님은 당신의 피와 물로, 땅에 붙어 자아라는 감옥에 갇힌 우리의 '발'을 씻겨
하늘로 들어 올리시는 '피의 세족례'를 거행하신 것입니다.
1942년 8월 5일,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에서 일어난
야누슈 코르차크(Janusz Korczak) 박사와 192명 아이들의 마지막 행진은
이 피의 권능을 명백히 증명합니다.
나치가 고아원 아이들을 트레블린카 가스실로 끌고 가려 할 때,
아이들은 처음엔 극심한 공포라는 '죄'에 짓눌려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아이들은 구석에 몰려 바들바들 떨며 비명을 질렀고,
박사의 옷자락을 붙들고 "살려주세요, 무서워요!"라며 울부짖었습니다.
오직 자기 생명을 지키려는 본능(뱀의 발)에 묶여 아수라장이 된 상태였지요.
그때 코르차크 박사는 도망칠 수 있는
사면권을 찢어버리고 아이들 한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아이들의 공포를 씻어주기 위해 기적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얘들아, 이제 가장 좋은 옷을 입고 배낭을 메거라.
우리는 지금 소풍을 가는 거란다."
박사는 겁에 질린 아이들의 눈을 하나하나 맞추며 속삭였습니다.
"선생님이 너희 곁에 끝까지 함께 있을게.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아름다운 나라로 가는 거니
무서워할 것 하나도 없다."
이 '피 끓는 사랑의 선언'이 떨어지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조금 전까지 땅바닥을 기며 살려달라고 울던 아이들이,
마치 새로 태어난 이들처럼 당당하게 일어섰습니다.
목격자 예호슈아 페를레(Joshua Perle)는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것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고아들의 행렬이 아니었다.
아이들은 박사님이 만들어준 초록색 '국왕 매트 1세'의 깃발을 앞세우고,
깨끗한 옷을 입은 채 노래를 부르며 행진했다.
그들의 얼굴에는 공포 대신 말할 수 없는 평화와 존엄함이 감돌았다."
아이들은 박사가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바쳐 동행한다는 것을 믿었을 때,
비로소 자기 생명에 집착하던 '뱀의 발'을 떼고
하느님 자녀로서의 ‘날개’를 회복하여 그 위엄을 회복했습니다.
이 희생적인 죽음만이 타인을 두려움이라는 죄의 무덤에서 해방할 수 있습니다.
(출처: 베티 진 리프턴, 『아이가 있는 곳이 천국이다: 야누슈 코르차크의 생애』)
자아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세상 것에 집착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니 죽어도 된다는 믿음,
그리고 누군가가 그것을 보여준다면 자아는 힘을 잃고 죽습니다.
이것이 발 씻김입니다.
우리나라 영화에 이런 예도 있습니다.
1597년 명량해전을 앞두고 이순신 장군이 보여준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12척의 배로 133척의 왜군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
부하들은 '두려움'이라는 죄에 압도되어 죽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뒤로 물리고 머뭇거렸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는다는 역설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장수들을 불러 모아 엄명합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고 하였다.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
장군은 비겁하게 뒤에서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대장선 한 척을 몰고 적진의 한가운데로 홀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저들을 깨우려면, 내가 죽어야겠지!"
부하들은 멀리서 지켜보았습니다.
장군이 홀로 적들을 무너뜨리며 피 흘리는 그 '죽음의 헌신'을 목격하자,
그들의 가슴 속에서 '두려움'이라는 낡은 자아가 죽고
'용기'라는 새로운 생명이 잉태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도 저분처럼 할 수 있는 존재다.”
이 믿음이 두려움의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장군의 죽음을 각오한 선구자적 행동은
부하들의 발을 땅(두려움)에서 떼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배를 몰아 적진으로 돌진했고,
결국 불가능해 보이던 승리를 일구어냈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쏟은 땀과 피가 부하들의 비겁한 발을 씻어준 세족례가 되었고,
그들을 진정한 전사로 다시 낳은 것입니다.
(출처: 이순신, 『난중일기』 1597년 9월 15일 자)
결국 하느님 자녀로서 죽음으로 나아가지 않으면
새로운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킬 수 없습니다.
피 없이 탄생하는 생명은 없습니다.
오늘 십자가 아래에서 우리는 이 신비를 완성하신 예수님을 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셨지만, 돌아가셨습니다.
이것이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입니다.
이것을 믿게 하시기 위해 직접 십자가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현대의 성녀 에디트 슈타인(St. Edith Stein),
즉 십자가의 데레사 베네딕타 성녀의 사례를 보십시오.
그녀는 1939년 6월 9일 자신의 영적 유서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주님께서 저를 위해 마련하신 죽음을
저는 기쁜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주님, 저의 삶과 죽음을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특별히 유다 민족의 구원을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받아 주소서."
그녀가 아우슈비츠로 향하는 수송 열차에 실려
웨스테르보르크(Westerbork) 임시 수용소에 머물 때였습니다.
수용소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죽음의 공포가 수천 명의 유다인을 짓눌렀고,
특히 어린아이를 둔 어머니들은 정신적 공황 상태에 빠졌습니다.
어머니들은 며칠 동안 넋이 나간 채 아이들을 돌보지 않았고,
아이들은 굶주림과 오물 속에서 울부짖었습니다.
공포라는 '뱀의 저주'가 어머니들의 모성마저 마비시켜버린 것입니다.
이때 에디트 슈타인이 나섰습니다.
그녀는 마치 성 목요일의 예수님처럼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녀는 공포에 질린 어머니들을 대신해 아이들을 씻기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의 머리를 빗겨주고, 옷에 묻은 오물을 닦아주며,
어머니들의 손을 잡고 기도했습니다.
그녀의 얼굴에는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천상의 평화가 감돌았습니다.
성녀의 이 '피 끓는 세족례'를 목격한 어머니들은 전율했습니다.
성녀가 죽음의 길에서 보여준 의연한 희생은 마비되었던 어머니들을 깨웠습니다.
어머니들은 다시 일어나 아이들을 안아주었고,
하느님 자녀의 존엄함을 회복한 채 가스실로 향했습니다.
성녀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공포의 노예였던 이들을 당당한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낳은 것입니다.
(출처: 성녀 십자가의 테레사 베네딕타의 『영적 유서』,
1939; 월터 허브너, 『에디트 슈타인의 생애와 순교』)
예수님은 우리에게 멋진 교훈을 주러 오신 분이 아닙니다.
당신의 옆구리를 열어 우리를 낳아주러 오신 참된 어머니이십니다.
자녀를 낳는 어머니의 피 흘림이 있어야 새 생명이 태어나듯,
예수님의 피 흘림이 있었기에 우리는 비로소
'자기를 위하는 마음'이라는 죄의 태반을 끊고
아직 묶여 있는 이웃을 바라볼 수 있고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시편 강해』에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라는 침상 위에서 교회를 당신의 신부로 낳으셨다.
그분의 피는 우리를 씻기는 물이 되었고,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생명이 되었다."
(출처: St. Augustine, Enarrationes in Psalmos, 127).
이번 성 금요일, 주님의 수난을 슬퍼만 하지 마십시오.
그분이 흘리신 피의 무게만큼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죽어줄 용기를 가집시다.
죽어야 삽니다. 살려고 하면 죽습니다.
낳아서 자녀를 주님께 봉헌해야 그분 앞에 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비참한 패배의 장소가 아니라,
사랑이 증오를 이기고 생명이 죽음을 삼켜버린
가장 찬란한 승리의 보좌이자,
영원한 생명이 태어나는 거룩한 자궁입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