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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배우는 역사공부> 하서 김인후의 생애
김인후(金麟厚, 1510년 ~ 1560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이다.
전라도 장성 출신으로, 본관은 울산(蔚山)이며,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ㆍ담재(湛齋),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생애
김인후(金麟厚)는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총명(聰明)하고 시문에 뛰어난 자질을 보여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10살 때 모재 김안국(金安國)에게 『소학』을 배웠다. 1531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때 퇴계 이황(李滉)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1540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임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를 보필하고 가르치는 직임을 맡았다. 또한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하여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12월 부모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1544년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1545년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가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우리나라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이 되었던 태극음양설(太極陰陽說)에 대하여, 그는 이기(理氣)는 혼합되어 있으므로 태극이 음양을 떠나서 존재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도(道)와 기(器)의 구분은 분명하므로 태극과 음양은 일물(一物)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주장함으로써,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하였다. 또한 인심(人心)과 도심(道心)은 모두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수양론에 있어서는 성경(誠敬)을 주된 목표로 삼았다.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고,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그는 천문 · 지리 · 의약 · 산수 · 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변성온(卞成溫 )· 기효간(奇孝諫) · 조희문(趙希文) · 정철(鄭澈) · 오건(吳健)ㆍ양자징(梁子徵) 등이 있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일실(逸失)되어 많지 않다. 저서로는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백련초해(百聯抄解)』 등이 있다.
1796년(정조 20)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과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祭享)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 · 홍문관 · 예문관 · 춘추관 · 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생애 초기
출생과 가계
김인후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둘째 왕자인 학성부원군(鶴城府院君) 김덕지(金德摯)의 후예이다. 그의 5대조인 조선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 김온(金穩)이 서울에서 살았으나, 태종의 왕권강화 일환으로 외척 세력을 제거할 때 처가인 여흥 민씨 민무구 형제 옥사에 연루되어 화를 입자, 정부인 여흥 민씨가 아들 3형제를 데리고 전라도 장성현 대맥동으로 낙담하여 자리를 잡게 되면서부터 자손들이 장성고을 사람이 되었다.
1510년(중종 5) 7월 19일 장성현 대맥동에서 아버지 의릉참봉 김령(金齡)과 어머니 옥천 조씨 사이에 1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타고난 성품이 맑고 순수하며 생김새가 단정하고 기개와 도량이 넓고 두터워 부친 참봉공의 사랑이 더 하였다.
유년기와 소년기
5~6세 무렵부터 이미 문자를 이해하고 시(詩)를 지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14년(중종 9) 5살 때 부친 참봉공이 ≪천자문(千字文)≫을 가르치는데, 눈여겨보기만 하고 질문에 대한 답을 하지 않자 참봉공이 화를 내며 「자식을 낳은 것이 이와 같으니, 아마도 벙어리인 모양이다. 집안이 말이 아니겠구나.」 하였다. 얼마 후에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벽에 글을 쓰는데 모두 ≪천자문(千字文)≫에 있는 글자였다. 그래서 참봉공은 비로소 기특히 여기었다. 또 일찍이 아는 사람과 시를 짓는데, 「넓고 아득한 우주에 큰 사람이 산다.」라는 글귀가 있었다. 하루는 생파를 손에 들고 겉껍질에서부터 차근차근 벗겨 들어가 그 속심까지 이르고서야 그치니, 이를 본 참봉공이 장난삼아 하는 줄로 알고 나무라자, 그는「자라나는 이치를 살펴보려고, 그렇게 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515년(중종 10) 6살 때 정월 보름달을 보고 「상원석(上元夕)의 시를 지었다. 또 어떤 손님이 와서 하늘을 가리키며 하늘천(天)자로 글제를 삼아 시를 지어 보라고 하니, 즉석에서 대답하기를 『형체는 둥글어라, 하 크고 또 가물가물, 넓고 넓어 비고 비어, 지구 가를 둘렀도다. 덮어주는 그 중간에, 만물이 다 들었는데, 기나라 사람들은 어찌하여 무너질까 걱정했지.』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이 모두 놀래며 특이하게 여기었다.
1517년(중종 12년) 8살 때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의 숙부 돈후재(敦厚齋) 조원기(趙元紀)가 전라 관찰사로 있을 때 그를 보고 기특히 여기며 더불어 시를 짓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신동(長城神童) 천하문장(天下文章)」이라 칭찬했다.
1518년(중종 13) 복재(服齋) 기준(奇遵)이 남녘 시골에 내려왔다가 그의 이름을 듣고서 데려다 보고 칭찬을 하며 「참으로 기특한 아이다. 마땅히 우리 세자(世子)의 신하가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 「내사필(內賜筆)」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고 보배로 삼았다.
혼인과 가정생활
1523년(중종 18) 14세에 진안현감(鎭安縣監) 윤임형(尹任衡)의 딸 여흥 윤씨(驪興 尹氏)에게 장가들었다. 1524년 이듬해 큰아들 종룡(從龍)이 태어나고, 이후 사녀를 두었다. 1532년(중종 27) 조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시었다. 1537년(중종 32) 둘째 아들 종호(從虎)가 태어났다.
1549년(명종 4) 10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장성 맥동 본가 서쪽 원당산에 장사하였다. 묘지명은 송순이 썼다. 3년 동안 돌아가신 아버지 참봉공의 산소 옆에 묘사를 짓고 거처하였는데, 묘사 거실의 편액을 ‘담재’(湛齋)라 하고 이를 자호로 하였다. 1551년(명종 6) 6월에 아버지 거상중에 모친상마저 당하여 참봉공 묘 왼편에 장례 하였다.
수학
1519년(중종 14) 10살 때 전라도 관찰사로 와있던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찾아뵙고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모재(慕齋)는 그를 기특히 여기며, 「이는 나의 소우(小友)이다.」고 하였다. 그리고 하은주 시대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일컬었다.
1522년(중종 17) 시를 잘 짓던 그는 스스로 「시를 배우지 아니하면 설 수가 없다.(不學詩無以立)」는 말을 성인의 교훈으로 생각하고, ≪시경(詩經)≫을 탐독하였다.
1526년(중종 21) 면앙정(俛仰亭) 송순(宋純)을 찾아가 뵙고 수업하였으며, 그 후로도 계속 왕래하며 문안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527년(중종 22) 18세 때 기묘사화를 만나 화순 동복에 유배 중이던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를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는데, 신재(新齋)는 그에게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秋水 氷壺)라 일컬었다. 또 나주 목사로 좌천되었다가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 광주 서창에 돌아와 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을 찾아뵙고 학문의 폭을 넓혀 나갔다.
학문 연구와 학맥
그는 어린 시절부터 시문을 잘하여 명성이 전역에 떨쳤으며, 기묘 사림의 조원기 · 기준 · 송순 · 박상등의 아낌을 받고,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던 김안국 · 최산두에게 수학하였는데 그들은 기묘년에 화를 당한 인물들로 그가 결코 기묘사화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스승 김안국은 조광조와 함께 김굉필에게서 학문을 같이 배웠는바, 이는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김안국으로 이어져 내려온 조선 성리학의 도통을 이어받은 직계 인물이므로 도통의 직계이다. 따라서 조광조와는 스승의 형제나 다름없는 사숙질(師叔姪)이 된다. 이와 같이 그는 성리학의 도통을 계승한 인물로 후대 사림들로부터 학문과 덕행의 사표가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광조(趙光祖) · 김정(金淨)등 기묘 사림들이 화를 당하였어도 그들의 자치주의 노선을 밟을 수밖에 없었고, 또 정면으로 뛰어들어 그 어려운 유업을 짊어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후 그는 문신으로서 처음으로 조광조등 기묘 사림을 죽인 중종에게 기묘사화의 잘못됨을 개진하며, 무고하게 희생된 그들의 신원 복원을 청하였던 것이다. 이는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1528년(중종 23) 봄에 서울에 올라가 성균관에 입학하여 선비들에게 칠월칠석날을 기리는 시험을 보였는데, 그도 응시하여 장원이 되었다. 홍문관 대제학 이행(李荇)이 기특히 여기며 사람이나 글이 모두 옥이라고 하면서도, 다만 혹시 남의 손을 빌리지나 않았나 의심하여 그를 성균관에 있게 하고 일곱 가지 글제를 내어 시험을 했는데 모두 그 자리에서 지어 권을 바쳤을 뿐더러, 시문의 운치가 모두 뛰어나니 이행은 크게 경탄해 마지않았다. 그 중의 「염부」, 「영허부」는 문집에 있다. 그때 지은 시권 《칠석부(七夕賦)》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1531년(중종 2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같이 합격한 동방(同榜)은 화담 서경덕, 대곡 성운, 휴암 백인걸,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이 있다. 이듬해 할아버지 훈도공(訓導公)이 돌아가셨다.
1533년(중종 28) 성균관에서 퇴계 이황과 교우 관계를 맺고 함께 학문을 닦았다. 기묘사화를 겪은 지가 얼마 되지 않아 선비들이 학문을 소홀히 하며, 도학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하는 풍조였는데, 퇴계(退溪)와 한번 보고 서로 깊이 뜻이 맞아 끊임없이 토론하고 연구하며 서로 도와 학문과 덕을 닦은 소득이 있었다. 후일 퇴계(退溪)는 「더불어 교유한 자는 오직 '하서'(河西)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을 정도로 그와의 돈독한 우의를 표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퇴계(退溪)가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자 그는 정표로 ‘증별시(贈別詩)’를 지어 주었다. 이와 같이 성균관에 있으면서 이황을 비롯한 휴암 백인걸 · 임당 정유길 · 금호 임형수 · 미암 유희춘(柳希春)을 비롯한 많은 현능들을 만났다.
1536년(중종 31) 스승 최산두의 부음을 듣고 상복을 입고 머리에 가마(加麻)를 하고 스승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며, 기일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우리나라에서 스승을 위해 상복을 입고 치제(致齋)를 올린 것은 그가 처음이라고 세상에 밝혀졌다.〕
1539년(중종 34) 여름 4월 예조에서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시를 잘 짓는다 하여 이미 제술관을 많이 뽑았사오나, 성균관 과시에서 큰 명성을 얻은 김인후 등을 차출하여 이에 대비케 함이 어떠하옵니까?」하니 그렇게 하라 전교 하였다.
1540년(중종 35) 문과(文科) 급제 후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함께한 12인의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을 보면, 평생 교우한 퇴계 이황, 송재 나세찬, 임당 정유길, 금호 임형수 등으로 거의가 희대의 명사들로서 서로 학문적 교류가 각별했다.
관료 생활
1540년(중종 35) 10월에 별시 문과 병과에 급제하여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다.
1541년(중종 36) 3월 홍문록(弘文錄)에 뽑히다. 4월에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전을 입게 되어 호당(湖堂)에 들어갔다. 함께 뽑힌 12인과 「호당수계록(湖堂修契錄)」을 만들어 교유하면서 사상적 토론을 통해 학문을 닦았다. 겨울 10월에 홍문관 정자 겸 경연정경 춘추관 기사관에 제수되었다.[3]
1542년(중종 37) 가을 7월에 홍문관(弘文館) 저작(著作)이 되어 학식과 덕망이 높은 사람들이 맡는 요직인 청요직에 올랐다.
1543년(중종 38) 1월 동궁(東宮)에 불이 발생되어 안채가 잿더미가 되고, 방화범이 누구인지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논란이 벌어졌다. 2월 스승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의 부음을 듣고 가마(加麻)를 하고, 이후 기일(忌日)에는 치제(致齋)를 올렸다. 스승을 애도하는 글 '만사(輓詞)'가 문집에 전한다.
1543년 여름 4월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兼世子侍講院) 설서(說書)가 되어 동궁(東宮)에서 덕을 기르는데 세자보도 책임을 전적으로 그에게 맡기니, 세자는 그의 학문·도덕의 훌륭함을 깊이 알고 정성스런 마음과 공경하는 예로 다하고, 자주 불러 강론을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의 덕이 천고에 뛰어나 후일 요․순 시대의 다스림을 기약할 수 있겠다 생각하고 지성껏 이끄니 서로 뜻이 맞음이 날로 두터웠다. 또 그가 입직해 있을 때는 세자가 간혹 몸소 나와 나라의 어려운 국정에 대해 논의하다 이슥해서야 파하였다.
세자는 본래 예술에 능하였으나 일찍이 남에게 표현하고자 아니하였는데 유독 그에게 손수 그린 『묵죽도』(墨竹圖)를 하사하여 뜻을 보였다. 이것은 임금 될 사람으로서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친절이었다. 이후에도 『주자대전』(朱子大全) 한 질을 하사할 정도로 그에 대한 배려가 남달랐다. 이와 같은 인종의 그에 대한 신뢰와 배려는 충성심으로 굳고 깊게 자리 잡게 되었으며, 이 일화는 군신 관계의 모범으로서 후대에 이르기까지 인구에 널리 회자되었다.
1543년(중종 38) 여름 6월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승진되었다.
1543년(중종 38) 겨울 12월에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에 제수되고, 춘추관의 겸직은 그대로 띠었다.
기묘명현의 신원 복원
1543년(중종 38) 여름 6월에 홍문관(弘文館) 부수찬(副修撰)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으로 승진하여 그해 1월에 동궁(東宮)에 불이 나는 등 전국이 뒤숭숭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시사를 논하는 자리에서 그는 홀로 개연히 상소문을 올려 중종에게 수신 · 자성의 도를 진술하는데, 그 대략은 다음과 같았다.
『바른 선비들을 《소학(小學)》의 무리라 하여 배척하는 낡은 정치 풍토가 만연해 있는 조정의 기강과 풍속을 바로 잡을 것과, 기묘년에 희생된 사람들이 한때 잘못한 일은 있더라도 그 본심은 터럭만큼도 나라를 속인 것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무거운 죄를 입었습니다. 그 후에 죄를 지은 사람 중에 비록 죽어도 남은 죄(大逆不道)가 있는 자들이 세월이 오래되어 더러는 복직된 자도 있사온데 기묘년 사람들은 오히려 상의 은혜를 입지 못하였사오니, 신은 홀로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더 나아가 기묘년 사람들이 숭상하던 ≪소학(小學)≫, ≪향약(鄕約)≫ 등은 버려지고 쓰지 아니합니다. ≪소학≫과 ≪향약≫은 성현의 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선비들이 시속에 빠져 읽어서는 안 될 글이라 하며 버리니 매우 온편하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라고 지적 하는데 그 사연이 매우 간절하고 절실하였다.
때는 기묘년으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조야에서는 당시 일을 꺼리고 두려워하며 감히 꺼내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문신으로서 처음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을 개진하였는바 이는 감히 죽기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홀로 할 수 없는 일로, 도통적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사림의 입이 떨어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에 대해서는 허락하지 않고, 다만 폐기토록 지시한 ≪소학≫·≪향약≫에 대해서만 철회토록 허락하였다.
1543년(중종 38) 8월 그는 기묘명현(己卯名賢)의 신원 복원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 같은 상황을 더는 견딜 수 없어 하며 양친의 연로를 들어 돌아가 봉양할 것을 간절히 청원하여 귀향하였다. 귀향하는 그에게 퇴계도 시를 지어 송별했다. 그해 겨울 12월 부모 봉양의 걸양(乞養)을 청하여 고향과 가까운 옥과 현감에 제수되었다. 이때 호남관찰사로 와 있던 규암(圭庵) 송인수(宋麟壽)와 더불어 학문을 닦고 글을 주고받으며 정이 매우 두터웠다.
1544년(중종 39) 11월 중종이 승하하고, 그가 가르치던 세자가 인종으로 등극하여 처음으로 성리학 숭상과 현량과를 복원하고, 기묘년에 희생된 선비들인 조광조ㆍ김정ㆍ기준 등의 신원도 복원하였다.
1545년(인종 원년) 여름 5월에 조정에서 제술관(製述官)으로 부름에 드디어 나아갔다. 당시 인종이 새로 즉위하여 내외가 모두 태평성대를 기대했으며, 그에게 인종의 경연의 보도 책임을 맡기고자 하였다. 그 사이 인종이 건강을 잃자 그는 의약에 함께 참여하기를 청한 바, 약원에서 직책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당하자 그는 세상의 기미(幾微)가 반 사림적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고 부모 병환을 들어 본래의 임소로 돌아왔다.
사직과 은거
1545년(인종 원년) 가을 7월 인종이 등극한지 8개월 만에 갑자기 승하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목을 놓아 통곡하며, 더는 살고 싶지 않은 듯이 하여 매우 깊은 심장병이 발작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가 이내 소생하였다. 곧이어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발생하자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 장성으로 돌아와 다시는 벼슬할 마음을 끊고, 산림에 은둔한 채 술과 시로 울분을 토로하며 세월을 보냈다.
1546년(명종 원년) 고향에 묻혀 절의를 고수하던 그가 택할 수 있는 길은 학문 연구와 후학 양성뿐이었다. 4월에 ≪효경간오(孝經刊誤)≫ 발문을 지었는데, 이는 옥과 현감으로 봉직할 당시 유희춘(柳希春)이 한양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본 읍에 들러 주자(朱子)의 「효경간오」(孝經刊誤)라는 책을 보여 주자, 이를 매우 흐뭇해하면서 친히 베껴놨던 것인데, 이제 그 책 말미에 발문을 붙여 그 뜻을 넓혀서 배우러 오는 자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1548년(명종 3)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 점암촌(鮎巖村)에 우거하며 초당을 세우고 편액을 훈몽(訓蒙)이라 걸고, 여러 학생들을 훈회하였는데, 반드시 먼저 ≪소학≫을 읽고 다음에 ≪대학≫을 읽게 하였다. 순창 점암은 나무와 돌이 빼어나게 좋으며, 강 언덕에 반반한 바위가 있어 능히 수십 인이 앉을 만 하였는데, 제자 양자징(梁子澂)을 비롯한 조희문(趙希文) 등과 더불어 ≪대학≫을 강의 하였다. 세상이 이를 '대학암'(大學巖)이라 일컬는다. 또 상류에는 낙덕암(樂德巖)도 있다. 이와 같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한 체 산림에 은둔하여 후학 양성과 시와 술을 벗 삼아 세월을 보냈는데, 오히려 마음이 태평스러웠다.
인종에 대한 절의
이후 그는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는 생활로 일관했다. 조정에서 성균관 전적 · 홍문관 교리 · 성균관 직강 등의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을사년 이후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그만두고 손님도 만나 보지 않으며,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간 적이 없었다. 또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부르짖으며 밤을 지세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고 한결 같았다. 또 인종을 그리고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와 「조신생사(吊申生辭)」의 시를 지었다.
유소사(有所思)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 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을 반도 다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임아
내 마음 돌이라서 구르지 않네.
세상사 흐르는 물처럼 잊혀 지련만
한창 때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나니
눈 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가 희었소.
슬픔 속에 사니 봄가을 몇 번이더냐?
아직도 죽지 목해 살아 있다오.
백주는 옛 물가에 있고
남산엔 해마다 고사리가 돋아나누나.
오히려 부렵구려, 주왕(周王) 비의 생이별은
만난다는 희망이나 있으니.
1547년(명종 2) 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가을에 공조 정랑(工曹正郞)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다. 또 가을 9월에 전라도 도사(全羅道 都事)에 제수되었으나 사헌부 반대로 체직되었다. 체직 다음날 18일에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이 일어나 사림계 인사들이 극형에 처해지고 유배되었는데, 이들은 그의 사상적 동지요 절친한 벗들로 그들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이 때에 영응(永膺) 이지남(李至男)이 와서 배우기를 여러 해였었는데, 일찍이 ≪초사(楚辭)≫를 배우고자 하므로 그는 읽다가 마치지 못하고 문득 비분(悲憤)을 이기지 못하여 시를 써 주었는데 다음과 같았다.
옥빛에다 난의 향기
그 가정에 맞는 인품
대숲 밖 오두막집에 이소경을 익히누나.
굳이 풍아의 말에 치달릴게 뭐가 있담.
주나라 시 삼백 편은 진실로 화평하네.
대개 그는 을사년 이후로 평일에 늘 울읍(鬱悒)하여 궁한 사람이 돌아갈 데가 없는 듯이 하였으며, 그 음풍(吟諷)하는 사이에 나타난 것이 많이 이와 같았다.
1549년(명종 4) 여름·가을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순창(淳昌)에 계시던 부친 참봉공 상을 10월에 당하여 12월에 장성집 원당골에 장사하고 산소 옆에 묘사를 짓고 거쳐하던 중 1551년(명종 6) 6월 어머니상마저 당하여 참봉공 묘 왼편에 장례하였다.
1553년(명종 8) 7월에 성균관 전적(成均館 典籍)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9월에는 홍문관 교리(館校館 校理) 지제교(知製敎) 겸 경연시독관(經筵侍讀官) 춘추관(春秋館) 기주관(記注官)에 임명되어, 부름에 응하여 길에 올랐다가 병이 났다고 글을 올려 사직을 청하고 돌아왔다. 겨울 11월에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에 임명되었으나, 병이 위중하여 견디기 어려운 실정을 간절하게 아뢰며 나아가지 않았다.
1554년(명종 9) 늦가을 9월 성균관 직강(成均館 直講)에 임명되었으나 글을 올려 사양하였다. 10월에 명종은 본도 감사에게 특명을 내려 「식물을 제급케 하고,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는데 그는 글을 올려 사양했다.
이와 같이 그는 조정의 부름에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고,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켰다. 낙향해서는 자연에 귀의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체념하였는바 오히려 마음은 태평스러웠다. 이러한 마음을 표현한 시(詩)가 『자연가』(自然歌)로 이때 지었다.
자연가(自然歌)
청산도 절로, 절로, 녹수도 절로, 절로.
산도 절로 물도 절로, 산수간 나도 절로.
아마도 절로 삼긴 몸이라, 늙기도 절로, 절로 하리라.
1555년(명종 10) 12월 참찬관 박민헌이 말하기를 “경연관으로서 신 같은 무리는 「서경」(書經)에 나오는 글들을 잘 모르니, 모름지기 유학자 이황과 김인후를 구하여 아침, 저녁으로 더불어 강론한다면 도리를 알게 될 것입니다.」라며 그들을 불려 강론에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사관은 '김인후는 재행(才行)이 있으나 영진(榮進)하는 것에 마음에 두지 않고, 독서(讀書)하는 것을 좋아하고 글을 잘 지었다. 해진 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도 담담하였는데, 만년(晩年)에 성리학(性理學)을 좋아하여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생각하였다. 여러 번 불렀으나 병이 많다는 이유로 나오지 않았으니, 억지로라도 올라오게 하여 진현하고 강론하는데 참석시키면 인도하는 공(功)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유신(儒臣) 이황·김인후 등을 등용하여 논사(論思)하는 위치에 두지 않고 그들로 하여금 시골로 퇴거하도록 하였으니, 어찌 크게 잘못된 정사(政事)가 아니겠는가?.라고 논한다.
생애 후반
생애 후반은 을사사화 이후로, 하나는 성리학(性理學) 연구이고, 다음은 시문학(詩文學) 활동이며, 나머지는 후학 양성(後學 養成)이다.
성리학 연구
을사사화 이후 은둔한 그는 몸을 추스른 후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학문의 경지가 더욱 정교하고 치밀하게 깊었다. 또 그의 학문 기조는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와 기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1547년(명종 2) 중국의 학술이 크게 무너져 육상산(陸象山), 왕양명(王陽明)을 숭상하고 참으로 주자(朱子)를 아는 자는 적었다. 그래서 선생은 시를 지어 문인(門人) 기효간(奇孝諫)에게 제시(提示)하기를,
천지라 그 중간에 두 사람이 계시나니,
중니(仲尼. 공자)는 원기(元氣)라면 자양(紫陽. 주자)은 참이로세.
아무쪼록 잠심(潛心)하여 부디 딴 길로 가지 말고,
늙어빠진 이 한 몸을 흐뭇케 하여다오.
라고 하였다. 그는 대개 생각하기를 문자가 생긴 이래로 여러 성인들이 표준을 세워 있었으나 그 쇠운(衰運)에 미쳐서는 공자(孔子)가 없었으면 여러 성인의 도가 전하지 못했을 것이요, 공자(孔子) 이후로 여러 현인들이 전통을 이어왔으나 그 어두워짐에 미쳐서 주자(朱子)가 없었으면 공자(孔子)의 도가 밝혀지지 못했을 것이니 공자(孔子) , 주자(朱子) 두 부자의 사업과 공렬은 천지의 사이에 우뚝하고 빛나서 여러 성인, 여러 현인들이 이보다 더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詞)와 시에 나타내어 후학의 길을 열어 주었으니 선생의 식취(識趣) 범위는 이 시에서 그 대강을 볼 수 있다.
1549년(명종 4) 봄 2월에 ≪주자대전≫(朱子大全) 중에서 ≪대학 강의(大學 講義)≫를 얻어 보고 「대학강의 발문(大學講義 跋文)」을 지었다. 그 무렵 성리학자들의 관심이 「천명도」(天命圖)에 집중되어 있었는데, 추만 정지운(鄭之雲)이 「사단은 이에서 생기고, 칠정은 기에서 생긴다.」로 표현해 이를 도식화하고 해설을 붙인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하였는데, 이를 받아 본 그는 이를 대폭 수정 보완해 인성의 본질을 파헤치는 탁견을 제시한 ≪천명도≫」(天命圖)를 그렸다. 이 논의에 퇴계 이황도 적극 참여했는데, 이황도 역시 그의 도학 문자를 보고 의견과 해설의 정밀함에 대해 깊이 공경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심오한 토론은 뒷날 이황과 기대승 간의 「사칠 논변」(四七 論辯, 사단과 칠정에 관한 이황과 기대승의 토론)이 일어나게 된 사상적 배경이 됐다.
1552년(명종 7) 양산보(梁山甫)가 ≪효부(孝賦)≫의 장편을 지어서, 그가 일찍이 시운을 따라 글을 지었는데, 송순이 직접 생각을 정리하여 원 글의 뒤에 품평하였다. 문집에 실려 있다.
1556년(명종 11) 화담 서경덕(徐敬德)은 '심학'(心學)으로써 당시 숭상하는 바가 되었는데, 그는 일찍이 「독주역시(讀周易詩)」를 지었는데, 그는 이 시를 보고서 「성인의 말씀은 곧 천지의 도이니 영이라고 할 수 없다.」고 차운하였다. 이는 서화담이 공부하는 사람들을 계도하는 방식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지 않고, 하학 공부를 소홀히 하면서 단번에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름길로 이끌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이를 깊이 걱정하여 마침내 그의 시에 화답을 해서 바로잡은 것이다.
여름 5월에 무장 고을 유생 안서순(安瑞順)이 정륜(鄭倫), 김응정(金應貞)과 함께 상소하여 을사년에 무고함을 입은 명현의 원통한 상황을 진술하여 아뢰는데, 윤원형이 안서순과 나주출신 정륜은 모의하여 역적을 두둔한 죄로 참형하고 집안의 재산을 몰수하였으며, 진사 김응정(金應貞)은 소장을 썼다하여 멀리 귀양을 보냈다. 또 윤원형이 기필코 그를 연루시켜 사림에 화를 씌우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를 않았다.
1557년(명종 12) ≪태극도설(太極圖說)≫ ≪서명(西銘)≫ 등의 글이 지닌 깊은 뜻을 생각하고 찾아서 읽기를 천 번에 달했다. 이에 이르러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와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를 저술하고, 또 배우는 자들에게 글로 써서 보이기를 「염계의 도설은 도리가 정미하여 글월은 간략하되 뜻은 만족하고, 장자의 명은 규모가 광활하여 뜨지도 않고 새지도 않으니 만약 천자가 고명하면 먼저 태극에서부터 공력을 써야 할 것이나 그렇지 못하면 서명을 이해하고서 태극에 미처 가야 한다. 태극은 덕성의 근본이요 서명은 학문의 법도이니 요컨대 어느 한쪽도 폐해서는 아니 된다.」라 하였다. ≪서명사천도≫와 ≪태극도설≫ 은 잃어버려 세상에 전하지 않는다.
1558년(명종 13) 서울로 과거보러 가던 고봉 기대승(奇大升)이 찾아와 태극도설(太極圖說)을 논하였다. 10월 기대승이 문과에 급제하고, 그해 11월 휴가를 얻어 귀향하던 중 일재 이항(李恒)에게 들러 ≪태극도설≫을 재 강론했는데, 이황이 「태극(太極) 음양(陰陽)이 일물(一物)」이라고 주장하고, 기대승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여 종일 토론하였으나 의론이 귀결되지 못했다. 이에 기대승이 그를 찾아와 뵙고 어느 쪽이 옳고 그른가를 물어 그는 기대승의 설이 맞다고 했다. 그리고 종일토록 강론을 하다가 파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의 주해를 저술하여 퇴계 이황 및 그에게 강의하고 질문한 것이 왕복으로 묶어 수백 언 이었는데 퇴계 이황은 누차 자기 의견을 버리고 그의 설을 많이 따랐다.
여기서 소재 노수신은 『마음이 몸을 주재한다.』고 하였는데, 그는 이에 대해 비판하며, 『마음이 몸을 주재하지만 기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몸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는 「주경설(主敬說)」을 주장하였다.
송나라 채구봉(蔡九峯)의 ≪홍범설시도설(洪範揲蓍圖說)≫은 밝고 또 차비한데도 뒷사람들이 오히려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그는 채구봉(蔡九峯)의 설로 근본을 삼고, 자기의 설을 부가하고 진술하여 매우 정성스럽게 새로 만들어 이름을 ≪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라 하고, 제자 양자징(梁子澂)에게 전수하니 이에 '주·채(朱蔡: 朱子蔡沈)'가 전수한 깊은 뜻이 비로소 밝혀졌다.
1559년(명종 14) 일재가 「태극과 음양은 일물이라」는 뜻의 글을 극론하여 고봉을 통해 글로 보내자, 그는 일재에게 편지를 보내, 『기군에게 보낸 서간에 대해 감히 의(議)하지는 않겠습니다만 대개 이(理)와 기(氣)는 혼합하여 천지간에 가득 찬 것은 무엇이고 그 가운데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는 동시에 저마다 갖추지 않은 것이 없으니, 태극이 음양에서 분리되어 있다 할 수는 없겠지요. 그러나 도(道)와 기(器)의 분별은 계한(界限)이 없을 수 없으니 태극 음양이 일물이라 할 수는 없을 상 싶습니다. 주자(朱子)가 말하기를 「태극이 음양을 탄 것이 사람이 말(馬)을 탄 것과 같다.」 하였은즉 결코 사람을 말이라 할 수는 없겠지요.』라 하였다.
그해 겨울 고향에 내려와 있던 기대승과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의 설을 강론하는데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고봉은 퇴계의 『사단칠정 이기호발설』 에 대해 깊이 의심하여 그에게 질문하니, 그는 세밀한 분석과 변론을 극히 투철하고 정밀하게 해주었다.
또 소재 노수신(盧守愼)이 정암(整庵)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困知記)≫를 바탕으로 「도심은 고요하여 움직이지 않고, 인심이 느껴서 드디어 통한다.」고 주장 하자 그는 이에 대해 강하게 비판하며 「성인의 인심 도심은 대개 모두 동처(動處)를 지적하여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의 사후 퇴계와 고봉은 그의 설을 존중하고 노소재의 설을 적극 공격하였는데, 그의 전론은 유실되어 전하지 못한다.
1560년(명종 15) 정월 그는 세상을 버렸다. 3월 후학 기대승이 삼가 술과 과일을 준비하여 영전에 전(奠)을 올렸다.
1560년 8월 고봉은 그동안 그에게 이와 같은 소득을 얻어 「사칠설」(四七說) 및 「장서」(長書)를 저술하여 퇴계에게 받들어 드렸던 것이며, 이후 퇴계와 더불어 사칠 호발의 시비에 대해 왕복 변론한 것이 자못 수 만언이었는데, 그의 가르침을 받아서 구별한 것이었다. 고봉이 퇴계에게 질문하자 퇴계도 『담옹(하서의 별호)이 비록 적적하게 두어 마디 말을 했으나, 역시 이미 그 말의 본 뜻이나 내용을 보았다 하겠다.』고 하였다.
1566년(명종 21) 그런데 고봉 기대승은 그 동안 그를 통해 얻은 전설(前說)을 다 버리고, 이후 한결같이 퇴계 이황의 설을 따르니, 논리적 일관성을 잃어버려 앞뒤가 갈라져서 두 사람이 말 하는 것 같았다. 이것이 세상에 전하는 '퇴계ㆍ고봉'의 「사칠 왕복서」이다.
그는 수양론(修養論)에 있어서도 성경(誠敬)의 실천을 학문의 목표로 삼고, 도덕 사회를 이룩하려는 데 그 뜻을 두었다. 그러면서도 결코 일찍이 도(道)를 안다고 자처하지 않았으며 항상 부족한 듯이 여겼다.
시문학 활동
성장하여 시문을 지으면 맑고 화려하고, 고상하고 빼어나 당시에 비길 만한 사람이 드물었으며, 그의 용모만 바라보고도 이미 속세의 사람이 아닌 것을 알았다. 그가 뜻하는 바는 예의와 법도를 실천하려는 것이었으므로 감히 태만하지 않았다.
일찍이 화순 동복의 최산두 문하를 출입하면서부터 시문학 방면에도 이름을 얻었는데, 이후 서울에서 글 잘 짓기로 이미 이름이 들어났으며, 낙향해서는 당시 전라도 일대에 덕망 있는 사림계 인사들과 교유를 하였는데, 특히 담양 소쇄원 주인 양산보와는 도의 지교를 맺고 더욱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면앙정(俛仰亭)을 중심으로 당대 유명한 인사들인 송순ㆍ임억령ㆍ김윤재ㆍ김성원ㆍ기대승ㆍ정철 등의 문사들과 담양의 소쇄원(瀟灑園)ㆍ식영정(息影亭)ㆍ환벽당(環碧堂) 등의 누정을 중심으로 호남 시단을 형성하여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 당시 그가 쓴 〈소쇄원 48영〉과 〈면앙정 30영〉 및 그 밖의 여러 율시 등은 누정 문학의 최고봉으로 널리 칭송 받았으며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후학 양성
순창 점암촌(鮎巖村)의 초당 훈몽재(訓蒙齋)에서의 강학에 이어 고향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소문을 듣고 찾아온 학도들에게 전심하여 순순(諄諄)히 가르침을 베풀되, 반드시 ≪소학≫을 먼저 읽히고 다음에 ≪대학≫을 읽히는데, 한결같이 주문공(朱文公)의 성법(成法)을 따랐다. 그의 두 아들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역시 ≪소학≫을 10년이나 읽도록 하며 딴 책으로 바꾸어 주지 않았다.
제자로는 당대 내로라하는 석학들인 변성온(卞成溫) · 기효간(奇孝諫) · 조희문(趙希文) · 정철(鄭澈) · 오건(吳健) · 양자징(梁子徵) · 남언기(南彦紀) · 노적(盧適) · 윤기(尹祁) · 신각(申覺) · 서태수(徐台壽) · 김종호(金從虎) · 안증(安璔) · 김제안(金齊顔) · 양산해(梁山海)등이 있다.
최후
1560년(명종 15) 음력 1월 16일 고향 장성으로 은거한지 15년여 만에 병이 위급하여 자리를 바로 하더니 51세의 나이로 여유롭게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사흘 전 기운이 평화롭지 못하여 약물을 들면서 집안사람에게 이르기를 『내일은 보름이니 정성들여 생주를 갖추어, 자녀들로 하여금 사당에 제물을 올리도록 하라』 하였다. 15일 보름날에는 병을 무릅쓰고 일찍 일어나 의관을 단정히 하며 꿇고 앉아 제사의 시각을 기다리면서 자녀들에게 당부하기를 『내가 죽으면 을사년 이후의 관작일랑 쓰지 말라』고 하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인종에 대한 절의를 지키고자 하는 선비다운 굳은 절개와 고고한 기품을 드러냈다.
조정에 부음을 아뢰자 명종이 부의를 보내도록 특명하였다. 그의 뜻에 따라 3월에 장성현 대맥동 원당산 부모 산소 아래 자좌 오향 벌에 장사지냈다.
그는 평소 자제를 가르칠 적에도 효제·충신을 먼저하고 학문을 뒤에 했다. 또 자제들에게 훈계하기를 『뿌리와 가지는 한 기운으로 통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얼마나 많은 근면과 고생으로 가풍을 세웠던가. 학문에 나아가고 일신을 수신하여 이를 반드시 이어가야 하는 거니, 장인(匠人)들도 기술을 가업으로 삼느니라.』 하였다.
저서와 작품
그는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의약·복서·율려·도수에도 정통하였다. 태극에 관한 이론도 깊어 『천명도』를 완성하였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잃어버려 많지 않다. 16세기 누정 문학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며,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다.
《하서집(河西集)》
《주역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事天圖)》
《홍범설시작괘도(洪範揲蓍作卦圖)》
《가례고오(家禮攷誤)》
《천명도(天命道)》
《백련초해(百聯抄解)》
가족 관계
고조부 : 김달원(金達源), 충좌위(忠佐衛) 중령사정(中領司正)
고조모 : 서흥 이씨(瑞興 李氏), 판사재시사(判司宰寺事) 춘경(春景)의 딸
증조부 : 김의강(金義剛), 사온서(司醞署) 직장(直長)
증조모 : 남양 홍씨(南陽 洪氏)
조부 : 김환(金丸), 금구훈도(金溝訓導)
조모 : 직산 김씨(稷山 金氏), 석숭(石崇)의 딸, 세자좌사경(世子左司經) 지효(知孝)의 손녀 부 : 김영(金齡), 의릉참봉(義陵參奉)
모 : 옥천 조씨(玉川 趙氏), 훈도 조적(趙勣)의 딸 부인 : 여흥 윤씨(驪興 尹氏), 현감 윤임형(尹任衡)의 딸 장자 : 김종룡(金從龍), 자부(子婦) 성산 이씨(星山 李氏) - 일재 이항(李恒)의 딸 손자 : 김중총(金仲聰), 손부(孫婦) 태인 박씨(泰仁 朴氏)
계자 : 김종호(金從虎), 자여찰방(自如察訪), 자부(子婦) 남원 진씨(南原 晉氏) - 승지 진벽(晉璧)의 딸 손자 : 김남중(金南重), 선교랑(宣敎郞), 손부(孫婦) 행주 기씨(幸州 奇氏)·함풍 이씨(咸豊 李氏)
녀 : 조희문(趙希文), 홍문관 교리
녀 : 양자징(梁子澂), 현감
녀 : 유경렴(柳景濂), 찰방
녀 : 여(女), 요사(夭死)
후손
근대사의 거목으로 고려대학교를 설립하고 동아일보를 창간하였으며 대한민국 제2대 부통령을 지낸 인촌 김성수와 영원한 법조인의 사표로 일제강점기 인권변호사로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가인 김병로, 삼양사를 설립한 기업인 수당 김연수, 한국 지성의 거목으로 고려대 총장과 국무총리를 역임한 남재 김상협등이 후손이다.
사상과 업적
시대적 상황
그는 중종 5년에 태어나 명종 15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 시기는 연산군의 혼란된 조정을 중종반정으로 바로 잡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회복하고자, 중종 초기 문치의 기운을 열고 국가의 기강을 세우고자 하였으나, 중종의 등극과 함께 '신비'를 폐출하면서부터 내부적으로는 외척 세력 간 다툼이 치열하고 왕권을 둘러싼 갈등이 노골화되었던 시대였다. 이 때에 일어난 기묘사화와 을사사화는 이러한 시대적 성격을 잘 대변하여주고 있다 하겠다.
기묘사화는 중종반정 후 새로운 기풍을 일으키고자한 사림의 이상과 훈구 대신들의 현실적 욕구가 서로 부딪치게 되어 사림이 화를 입게 된 사건이고, 을사사화는 윤원형을 비롯한 명종의 외척 세력이 자신들의 세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인종의 근신들을 해친 사건이었다.
그는 정신적으로는 사림 사상을 계승한 도학자로서 복재의 사랑을 받고, 모재의 문하에서 수업하였으며, 신재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는 인종의 신하였기에 윤임이나 윤원형 어느 편에도 가까이하지 않았고, 그러한 집권 세력들과 같은 조정에 있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다. 자신의 지조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니 이는 그들과 연속된 싸움이었다.
그러나 인종과는 남다른 깊은 정을 나누며 서로 생각하고 느끼는 것이 같아서 세자와 신하로서 뿐 아니라 세자의 보호자로서 유일한 벗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종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의 입지를 펼칠 수 있는 상황을 허락해주지 않았던 것이니 그로서는 불우한 시대를 만나 그 높고 깊은 경륜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높은 인격과 학문적 경륜과 치세의 뜻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 이상을 펼쳐보지 못한 채 시와 술을 벗 삼고 세월을 한탄할 수밖에 없는 불우한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도학(道學)
하서의 학문은 의리를 실천하는 데에 있다. 이는 조선조 도학자들의 학문적 특징이며 또한 성리학을 공부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도학이란 성리학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지만, 이는 중종의 등장과 함께 조정에 참여하게 된 신진 사림들이 내세웠던 학풍이었다. 그 정신은 요·순 임금이 행하였던 정치를 실현하고자 한 것인데, 이와 같은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은 유학의 근본정신을 배우자는 데에 있었다.
이와 같은 도학이 성리학으로 전회하게 된 계기는 기묘사화인데, 호남에 있어서도 기묘사화는 사상과 의식을 발전시키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그것은 조광조가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 오게 됨으로써 그 정신적 정통성이 호남으로 수용되었으며 또한 기묘 사림들이 호남과 인연을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기묘 사림의 문하에서 성장하고 그 정신을 계승함으로써 호남 유학의 발전적 토대를 쌓게 되었다. 그를 가리켜 도학·문장·절의가 남다르다고 하는 것은 그의 학문이나 정신이 그와 같았다는 것을 말하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후의 사상적 계승과 발전적 특징이 그와 같은 현상을 나타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인품이 그대로 계승 발전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의 사상에 대해 살펴보면 도학 사상은 기묘 사림 의식에서 온 것이지만, 그의 학문적 특징은 이를 사상적으로 정립하고, 이론적으로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는데 있다. 그와 같은 사상적 정립을 이루도록 한 것이 바로 그가 만든 「천명도」였다.
절의(節義)
절의 정신은 절개와 의리를 말하는데 의리란 올바름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는 본성이 발현된 것으로 인의 구체적 실체이다. 그의 의리는 자신의 올바름을 지키려는 어진 본성에서 나왔기에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에는 의를 실천 할 수 있는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그의 불의에 맞선 절의 정신은 실천적 도학으로 계승되어 호남 사림들로 하여금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 구국의 대열에 앞장서게 하여 임란 의병ㆍ구한말 의병ㆍ광주학생독립운동ㆍ5·18 광주 민주화 운동 등으로 나타났다.
문장(文章)
그의 문장(文章)은 도(道)를 싣는다. 도(道)는 하늘의 마땅히 그러한 바를 따르는 것으로, 문(文)은 그와 같은 도(道)를 실현하는 실체의 모습을 담은 것이다. 따라서 그의 문장(文章)이 깊은 의미를 갖는 것은, 그의 도가 그만큼 깊었음을 말한다. 그의 문장은 이와 같이 도가 나타난 것이었기에 도를 높이려는 선비들은 자연히 그의 문장을 따르게 되었다.
평가
눌재 박상 : 어릴 적에 그를 보고서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예로부터 기동(奇童)치고 끝이 좋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이 사람은 마땅히 잘 마칠 것이다." 하였는데 과연 그 말이 증험되었다.
전라 관찰사 조원기 : 8살 때 전라 관찰사 조원기가 신동이라는 소문을 듣고 그를 전주 감영으로 불러 함께 시구(詩句)를 주고받으며 연구를 지었는데, 그의 뛰어난 재주와 높은 수준의 글 솜씨를 보고 "장성(長城)의 기동(奇童)이요, 천하의 문장"이라 칭찬했다.
복재 기준 : 9살 때 그의 인물됨을 칭찬하며 "참으로 이 애는 기동(奇童)이다. 너는 마땅히 동궁의 신하가 될 것이다."고 하면서, '내사필' 한 자루를 선물로 주었다. 그는 그 뜻을 알고 항상 잘 간직하여 보배로 삼았다. 이때 복재가 말한 세자는 인종으로 훗날 그는 인종의 스승과 신하가 되었다.
모재 김안국 : 10살 때 찾아가 전라감사 김안국을 찾아가서 『소학』을 배웠는데, 김안국은 그를 보고서 "이는 나의 소우(少友. 어린 벗)이다."라 하며, 그 뒤로도 늘 중국 고대 하은주 시대의 "삼대(三代)의 인물"이라 극찬하였다.
신재 최산두 : 18살 때 찾아가 학문을 강론했는데, 신재(新齋)는 그에게 깊이 탄복하여 매양 "추수 빙호(秋水 氷壺)-가을의 맑은 물과, 얼음을 담은 맑은 옥항아리 같다."라고 일컬었다.
퇴계 이황 : "평생 함께 교유한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뿐이었다."고 술회했다.
송강 정철 : "동방에 출처(出處) 바른 이 없는데, 유독 '담재옹'(湛齋. 하서 별호) 이 한 분 일레."라고 칭도(稱道)하였다.
율곡 이이 : "그 출처(出處)의 바름이 해동(海東)에서는 더불어 비교할 이 없다."고 일컬으며, 심지어는 "청수부용, 광풍제월(淸水芙蓉, 光風霽月. 맑은 물에 뜬 연꽃이요, 비 갠 뒤의 맑은 바람과 달이다.)"이라 비유하며 칭송하였다.
송천 양응정(梁應鼎) : "'후지'(김인후 字)는 오늘날의 안자(顔子)이다."라고 하였다.
우암 송시열 : 1682년 그의 신도비문에 "우리나라 인물 중에서 도학과 절의와 문장을 겸하여 탁월한 이를 그다지 찾아볼 수 없으며 이 세 가지 중 한두 가지에 뛰어나는데, 하늘이 우리 동방(東邦)을 도와 선생을 종생하여 이 세 가지를 모두 다 갖추게 되었다."고 칭송하였다.
정조 : 1796년 문묘 종사 교지에 "학문의 조예가 초절하고 기상이 호매하였으며, 《대학》과 《서명》의 은미하고도 깊은 뜻을 처음으로 밝혀내었고, 경을 생활화함으로써 마음을 바르게 하는 공부와 도학 연원의 정통을 이어받아 실로 유학의 종장이라 할 수 있다."고 하였다.
정조 : 1796년 문묘 종사 교지에 "조선 개국 이래 도학(道學)·절의(節義)·문장(文章) 어느 하나도 빠뜨리지 않은 사람은 오직 하서 한 사람 뿐』이라며, 「하서는 해동의 염계요, 호남의 공자다."라고 극찬하였다.
그의 성리학 이론은 16세기 조선 성리학계를 이끈 대표적 이론으로 자리 잡아,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으며 우리나라 유학사에 있어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조선 중기 도학자로 「호남 남쪽에는 김인후, 북쪽에는 이항, 영남에는 이황, 충청에는 조식, 서울에는 이이가 버티고 있었다.」는 역사적 평가에서 보여주듯 그의 학덕은 크고 넓었다.
후대 사림 : 그의 평생에 걸쳐 인종(仁宗)에 대한 절의(節義)와 출처([出處)의 올바름을 추앙하였다.
조선 중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본격화 되어 사림 정치가 뿌리 내려가던 시기에 조선 사회 발전의 사상적 초석을 마련한 도학자로, 실천적 지성의 대표 인물로 후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상훈과 추모
장성 필암서원 및 옥과 영귀서원에 제향(祭享) 되었다.
성균관 문묘에 종사(從祀) 되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綠大夫)·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겸(兼) 영경연(領經筵)·홍문관(弘文館)·예문관(藝文館)·춘추관(春秋館) 관상감사(觀象監事)를 가증되었다.
부조(不祧)를 명 받았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라 하였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以正服人)을 '정'(正)이라 이른다.」
전국의 230여개의 향교([鄕校)에 제향(祭享) 되었다.
장성 필암서원은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전국의 47개 서원중 하나이다.
장성 필암서원은 일제강점기나, 한국 전쟁 때에도 피해를 면하였다.
장성 필암서원은 1975년 4월 23일 사적 제242호로 지정되었다.
장성 필암서원에서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그의 학덕을 기리는 춘향제(春享祭)와 추향제(秋享祭)가 각 기관ㆍ사회 단체장ㆍ유림ㆍ주민들의 참석 하에 열리고 있다.
추숭(追崇) 사업
가장 · 행장 · 신도비명
1561년 (명종 16) 『가장』(家狀)을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이 지었다.
1672년 (현종 13) 『행장』(行狀)을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가 완성하였다.
1675년 (숙종 원년) 『묘표』(墓表)를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이 완성하였다.
1682년 (숙종 8)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이 완성하였다.
1742년 (영조 18) 신도비를 세웠다.(비문은 도암 이재(李縡) 쓰고, 전서는 퇴어 김진상(金鎭商)이 썼다.)
1777년 (정조 원년) 『묘지명』(墓誌銘)을 본암(本庵) 김종후(金鍾厚)가 완성하였다.
문집 간행
1568년 (선조 원년) 2월 ≪하서집 河西集≫ 초고본을 간행하였다.(서문은 문인 조희문이 찬하였다.)
1686년 (숙종 12) 4월 ≪하서집 河西集≫ 중간본을 간행하였다.(서문은 송시열, 발문은 박세채가 찬하였다.)
1796년 (정조 20) 9월 ≪하서집 河西集≫ 3차 중간을 하교하였다.(문묘 종사시 유집)
1802년 (순조 2) 5월 ≪하서집 河西集≫ 3차를 간행하였다.(발문은 돈암 이직보가 찬하였다.)
서원 제향 및 사액
1564년 (명종 19) 옥과 선비들이 「영귀정사」(詠歸亭祠)를 건립하여 제향(祭享)하였다.
1570년 (선조 3) 순창고을 선비들이 「화산사」(華山祠)를 건립하여 제향(祭享) 하였다.
1590년 (선조 23) 호남 선비들이 그의 고향 인근 장성 기산리에 서원(書院)을 건립 하여 제향(祭享) 하였다.
1597년 (선조 30) 정유재란때 서원(書院)이 소실되었다.
1624년 (인조 2) 추담(秋潭) 김우급(金友伋)등 지방 사림들의 노력으로 병란을 지나 서원을 기산리(岐山里) 서쪽 증산동(甑山洞)에 복설하였다.
1659년 (효종 10) 3월 「필암」(筆巖)이라 사액(賜額)이 내려졌다.
1662년 (현종 3) 현종이 어필로 「필암서원」(筆巖書院)이라 선액(宣額)하고, 예조정랑 윤형계(尹衡啓)를 예관(禮官)으로 보내 사제(賜祭) 하였다.(사제문은 신형(申炯)이 찬하였다)
1672년 (현종 13) 봄 3월에 필암서원(筆巖書院)의 면모를 일신하는 작업이 이루어져 마침내 현재의 위치인 해타리(海打里)로 옮겼으며, 마을 이름도 필암리(筆岩里)로 바뀌었다. 이건(移建)은 원장 송준길(宋浚吉)의 협조하에 남계 이실지(李實之. 1624~1702), 기정연(奇挺然. 1627~?), 박승화(朴升華. 백우당 증손)등의 노력으로 완료되었다.
1786년 (정조 10) 2월 장성 필암서원에 제자이자 사위인 고암(鼓巖) 양자징(梁子澂)을 종향(從享) 하였다.
1827년 (순조 27) 순창 유림의 공의(公議)로 순창군 쌍치면 둔전리에 「어암 서원」(魚巖 書院)을 창건하여 제향(祭享)하고, 율곡 이이, 송강 정철, 자연당 김시서를 종향(從享) 하였다.
포증(褒贈)
1668년 (현종 9) 4월 이단하(李端夏)가 소를 올려 선생의 도학 · 절의를 진술하고 포증(褒贈)할 것을 청하여 이조판서(吏曹判書) 및 양관대제학(兩錧大提學)에 증직되었다.
1669년 (현종 10) 8월 시호(諡號) '문정(文靖)'이 내려졌다. 「도덕박문을 일러 문(文)이요, 관락영종을 일러 정(靖)이라」 한 것이다.
1796년 (정조 20) 9월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을 가증하고 또 부조(不祧)를 명하였다.
1796년 (정조 20) 10월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개시하였다. 「도덕박문(道德博聞)을 문(文)이라 하고 이정복인(以正服人)을 정(正)이라」 이른다 하였다.
문묘 종사
1771년 (영조 47)에 전라도 유생 양학연(梁學淵) 등이 상소하여 문묘(文廟) 종향(從享)을 청하였으나, 통하지 못하였다.
1786년 (정조 10) 8월 팔도 유생 박영원(朴盈源) 등이 소를 올려 문묘(文廟) 종향을 청하였으나, 윤허를 입지 못하였다.
1786년 (정조 10) 10월 팔도 유생 정헌(鄭櫶) 등이 소를 올렸는데, 가벼히 의(議)하기가 어려워서 불허하였다.
1789년 (정조 13) 4월 팔도 유생 심익현(沈翼賢) 등이 소를 올렸는데, 경솔히 의(議)하기 어렵다며 불허하였다.
1789년 (정조 13) 8월 팔도 유생 신광례(申光禮) 등이 또 소를 올리자, 경솔히 의할 수 없으니 이왕의 준례에 보면 가히 알 것이다 하였다.
1790년 (정조 14) 3월 팔도 유생 이악겸(李岳謙) 등이 상소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1796년 (정조 20) 6월 방외(方外) 유생 김무순(金懋淳) 등이 선생의 종향을 소청(疏請)하였는데, 윤허하지 않았다.
1796년 (정조 20) 7월 경기·호서·호남 삼도의 유생 이종호(李種祜) 등이 상소하여 문묘 종향을 청하였으나, 「난신(難愼)히 해야 한다」라 하며 윤허하지 않았다.
1796년 (정조 20) 8월 경외(京外)의 유생 정대현(鄭大賢) · 경외 유생 이규남(李奎南) 등이 상소하여 종향하자고 청했하자, 윤허하지 않았다.
1796년 (정조 20) 9월 관학(館學) 유생 심내영(沈來永) 및 관학(館學) 유생 이광헌(李光憲) 등이 문묘 종향을 상소하자 「신중히 한다는 뜻은 전자의 비답에 언급하였으니 너희들은 물러가 학업을 닦으라」고 하였다.
1796년 (정조 20) 9월 관학(館學) 유생 홍준원(洪準源) 등이 문묘 종향을 청하여, 윤허를 입었다.
1796년 (정조 20) 11월 예관을 보내어 사제(賜祭)하였다. 이달 기유일 문묘에 승배(陞配)하고 중외에 교서를 반포하였다.
일화 (전설)
상촌 신흠의 문집 《상촌집(象村集)》에 그가 죽은 후 몇 년 지나 이웃에 사는 '오세억'(吳世億)이라는 사람이 갑자기 숨이 끊어진 지 반나절 만에 긴 한숨을 내쉬며 다시 깨어나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죽어서 천제가 있는 자미궁이란 곳에 갔더니, 그곳의 자미선으로 있는 그(하서)가 명부를 보며, 『올해는 네 수명이 다하지 않았는데 네가 잘못 왔구나. 나는 네 이웃에 살던 김 아무개(김인후)다.』 라고 말하고는 종이에 글을 써 주었는데 그 글은 이랬다. “이름은 세억(世億)이요, 자는 대년(大年)인데, 구름 헤치고 천상에 와 자미선을 찾았네. 훗날 77세 되면 또다시 만나리니, 세상에 돌아가 이 말 함부로 전하지 말라.”』고 하였다. 세억(世億)이라는 사람은 한자를 몰랐지만, 능히 이 글을 세상에 전했다.
붓 바위(필암) 전설 : 고향 황룡면 맥동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로 붓 모양으로 되어있다. '이 바위의 기운을 받아 하서가 태어났다.'고 한다. 조선 영조 때 병계 윤봉구의 글씨 「筆巖」이라는 두 글자가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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