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뛰기, 높이뛰기, 100미터, 200미터, 400미터 육상 선수였던 한 소년이 있었다. 특히 높이뛰기에 재능이 있었던 이 소년에게 농구는 생소한 운동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소년은 농구가 하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서울로 상경한다. 한양대 졸업반 김성현(191cm)의 농구 인생은 이렇게 시작됐다.
김성현의 주가는 지난 2003 농구대잔치 연세대전에서 폭등했다. 기존의 멤버로만 해도 최강이었던 연세대에 대한민국 농구의 미래인 하승진까지 합류, 폭주 기관차처럼 파죽지세로 연승가도를 이어가고 있던 연세대였다. 그러나 한양대는 연세대의 대학팀 상대 40연승을 저지했고 김성현은 내외곽을 넘나들며 30점을 넣어 한양대 승리를 이끌었다.
“농구하고 싶다고 부모님께 여러차례 말했는데도 들어주시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몰래 학원 빠져가며 농구하다가 들통이 났었죠. 혼도 많이 났어요. 하루는 농구하고 싶다는 낙서를 종이에 하고 휴지통에 버렸는데 그걸 부모님이 보셨어요. 그래서 농구를 할 수 있게 됐죠” 김성현의 말이다. 그는 전북 장수군에 위치한 장계 초등학교 4학년 시절도 평가전에서 높이뛰기 종목 3위를 차지할 만큼 운동신경이 좋았다.
김성현은 결국 삼선중에서 농구를 시작하게 된다. 당시 경복고 감독이었던 신동찬 감독과 김성현의 어머니 이혜경씨(농구선수 출신)는 동창생의 인연이 있었고 농구하길 갈망했던 소년에게 농구입문의 길이 열렸다. 김의 초반 농구인생은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몸에 힘이 붙기 시작한 경복고 2학년 때부터 그는 주변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덩크슛을 펑펑 꽂아 넣었고 흑인 같은 탄력을 이용해 높은 타점에서의 장거리 3점슛과 리바운드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일취월장하며 거칠 것 없어보이던 그에게도 시련이 찾아왔다. 한참 몸을 만들고 게임 감각을 익혀야 할 1학년 시절 김성현은 오른쪽 발목부상을 당했고 6개월을 허송했다. 6개월의 공백은 대학에 갓 입학한 루키에게 적잖은 후유증을 안겨주었다. 2학년까지 교체선수로 등장하는 것 외에 이렇다할 인상적인 플레이를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3학년 이후부터 김성현은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를 유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고 대학 마지막 대회였던 2003 농구대잔치 자신의 이름 석자를 프로팀 관계자들이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 놓았다.
김성현의 강점은 높은 타점에서 나오는 3점 슛과 빠른 슛 타임 그리고 덩크라고 볼 수 있다. 한양대 김춘수 감독은 “프로에 가도 그만큼 탄력 좋고 슛 좋은 포워드는 찾기 힘들걸요! 단점을 찾아본다면 아직 몸싸움에 능하지 못한 것 정도라고 할 수 있죠. 그래도 방성윤이하고 매치 시켜도 해줄건 다 합니다”라고 칭찬했다.
김성현은 “제가 어떤 선수들처럼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하지만 잘하든 못하든 프로에서 은퇴할 때 열심히 했던 선수라는 말을 듣고 싶습니다. 추승균 선배처럼 꾸준하고 자기 몫을 묵묵히 할 수 있는 그런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라며 눈을 반짝였다.
첫댓글 ㅎㅎ^ 간간히 라도 보여줄수 있음 좋겠네요.. 현선수에게 뭔가 보고 배울수 있었음 좋겠슴돠~
드래프트 당일 연습겜에서 속공때 덩크 했다는 선수...
중학시절...일대일해서 제가 이겼다는....ㅋㅋㅋ 제 짝이였는데...보기 좋네요...정말 농구하고 싶어서 상경했다고 말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추승균같은 선수라.. 열심히 해야겠네요 ^^;;
추승균도 한양대 출신이죠..
농대때도 속공에서 노마크 났을때 했었죠
하지만 김현중에게 지대로 파리채 블록슛당한 적도 있었다는 지난 번 농대에서 김성현.^^;;김현중의 엄청난 운동능력을 엿볼 수 있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