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로빙 왕조의 몰락은 분명히 왕국의 지속적인 분할 상속 그리고 그로 인해서 발생된 내전으로 왕권이 약화 되고, 지방 유력자들의 입지가 상승하면서 그들의 권력이 강화 되기 시작한 것으로 시작 했다. 비록 클로타르 2세와 다고베르트 1세가 왕국을 하나로 통합하고 지방분권적인 정부들을 네우스트라시아의 궁정을 중심으로 하나로 끌어모으려고 노력 했지만 이미 강해진 귀족권과 개인의 이익을 도모한 귀족들의 방해가 이어졌고 결국 국왕의 개혁은 다고베르트 1세의 요절로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 연이어 어린 왕족들이 왕위를 차지하고 왕국은 다시금 분할 되었다. 게다가 고대 게르만의 전통인 축첩제로 인해 서로 어머니가 다른 이복형제들이 왕위를 서로 나눠가지면서 하나의 왕후가 섭정위를 가지는 경우가 드물어지기도 했다.
{ 다고베르트 1세. 그는 메로빙 왕조에서 마지막으로 명예로운 치세를 이어나간 인물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
물론 어린 왕과 왕후들이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왕후들은 교회나 몇몇 유력자들과 손을 잡고 반항적인 지방 정부를 쥐어잡으려고 노력 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궁정 속 투쟁과 각 지방 정부(왕의 궁정)의 궁재들이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서로 내전을 벌이면서 왕국의 중앙-제어력은 나날이 떨어졌고 결국 어느새 국왕은 궁재들의 꼭두각시로 전락 했다.
{ 그리모알드 2세. 헤르스탈의 피핀(일명 피핀 1세)의 아들이며 장차 그의 가문원이 카롤링의 일족이 된다. 또한 그는 후기 메로빙조의 유명한 궁재였다. }
이런 현상은 역시나 메로빙조 프랑크 왕국 형성과 함께 내포된 문제라고 볼 수 있겠다. 왕국은 건립 시기부터 이미 여러 독립적인 지방 정부를 거느리고 시작했다. 왜냐면 초기 프랑크 왕국이 쓸 만한 독자적인 정부 인프라가 없었다. 대신 국왕들과 프랑크인들이 구-로마의 정치 인프라에 익숙했고 구-로마 유력자들도 개종한 게르만인들에게 협조를 했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은 각 지방마다 자치적인 정부를 성립 시켰다. 그런데 이를 토대로 분할상속이 이뤄지면서 지방 정부의 분권화는 가속화 되었다. 이후 국왕들의 여러 차례의 내전은 분명히 귀족과 유력자들의 권리를 상승 시켰을 것이다. 또, 국왕이 지방을 통치하기 위해서 파견한 '주백'들은 그 지방의 '갈로로만 귀족'들과 혼인 하며 교류했고 점점 그 곳의 토착 세력으로 발전 해나갔다. 이는 그들의 지방 토착화를 의미했고 나아가서는 그들이 지방 분권화를 가속화 할 장본인으로 발전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리고 이는 정말 현실로 들어났다.
{ 투르의 그레고리. 투르의 주교인 그의 가문은 대대로 네우스트라시아 남부와 리모주 일대 등 프랑스 중부 지방의 거대한 세력을 자랑하는 갈로로만 유력자의 가문이었다. 그들 가문은 프랑크인 지배자에게 충성 했고 그 덕이 그레고리가 투르의 주교가 될 수 있었다. }
사실 어쩌면 이 몰락은 메로빙조 프랑크 왕국의 불운이란 점도 크다. 다고베르트 1세 이후 상당히 많은 어린 국왕들이 연이어 배출 되는데 하필 이 시기는 귀족들이 이전 국왕들에게서 상당히 많은 권리를 얻어낸 직후였다. 물론 클로타르 2세나 다고베르트 1세는 개인적인 능력으로 어찌어찌 그들을 다룰 수 있었지만 어린 국왕들은 그러지 못했다. 왕후들이 섭정을 통해서 보완한다고 하지만, 이미 강력해진 궁재와 귀족들을 모두 컨트롤 하기엔 무리였다. 만약 다고베르트 1세가 요절하지 않고 그의 아들들이 무사히 성년이 되서 귀족들에게 통치자로써의 좋은 면모를 보여줬다면 메로빙조의 운명은 달라졌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혹했고, 궁재와 섭정위를 잡기 시작한 귀족들의 분쟁 속에서 결국 국왕의 권력이 나락에 떨어졌고 그들의 왕국내 비중이 바닥을 찍으면서 후기 메로빙조 치세에는 '무위왕'이라는 오명의 존재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알아둘 점이라면, 카롤링조의 선전가들은 이를 두고 그들의 무능력함을 '멍청하고 게으른 이들'로 비난하며 카롤링 국왕들의 능력을 찬양 했다. 물론 겉보기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또 정말로 난관을 극복할 능력이 없었을 수도 있다)정말 그들이 무능력함으로 점철한 국왕들이었을진 의문이다. 비유하자면 이들의 포지션은 세기말의 조선의 국왕이었던 것이다. 그런 포지션에서 무언가를 해낸단 것은 기적에 가깝단 사실을 모두 잘 이해하는데, 이 상황도 그것과 다를게 없다. 실제로 몇몇 국왕들은 궁재들에 대항해서 충성파를 모으고 재판권을 통해서 궁재를 억누르려고 하는 등의 시도를 한 사례들이 있다. 물론 안타까운 결과들이 많았지만 그들이 무조건적으로 무능력하다고 볼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은 난세를 타개할 능력과 운이 없었을 뿐이었다.
메로빙조가 교황의 인가를 받은 피핀 3세의 요구로 인해서 무너질 때, 왕국의 많은 것들이 변했다. 토지를 매개한 통치 체제, 새로운 군대의 중심인 기병, 그리고 왕가의 정통성은 더이상 고결하고 신비로운 긴머리 혈통이 아니라 신의 가호를 받은 혈통에게서 나왔다. 사실 카롤링조의 성립 과정은 매우 개인적인 능력에 기댔다고 봐도 무방하다. 사실 이런 궁재와 귀족들의 경쟁구도에서 승패가 갈리는 변수는 '능력'임은 틀림 없다. 카를 마르텔의 뛰어난 군재와 정치적 능력은 수많은 반항 세력을 굴복 시켰다. 반항적이고 자치적인 지방 분권화 정부들을 무너트린 것이다. 물론 이미 지방내에서 중앙집권적인 정부는 무너지고 개인의 세력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결정적으로 메로빙조와 달리 카롤링조는 분명히 혈통적인 운을 가지고 있었다. 궁재 시절의 피핀 1세를 시작으로 아르눌프 가문과의 통합, 피핀 2세의 집권과 권력 장악, 기구한 서자에서 최상위 통치자로 군림한 카를 마르텔, 결국 국왕으로 등극한 피핀 3세, 그리고 모든걸 물려 받고, 자신의 모든걸 뽐낸 샤를마뉴. 이 모든 것은 그저 가문의 운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있는, 요소이자 그들과 사회 흐름이 만들어낸 새로운 통치 체제의 산물이었다.
{ 카를 마르텔. 그는 정말 다난다사한 삶을 살았고 결국 모든걸 극복하고 '권력의 정점'에 선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가 프랑크 왕국에 세운 큰 묘목은 장차 카롤링조 프랑크 왕국이란 거대한 나무로 성장 했다. "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