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달인으로 정평이 났던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Pyrrhos)가 이탈리아에 와서 로마와 싸웠을 때의 일이다. 로마는 이때 아
직 이탈리아를 전부 제압하지 못한 상태로, 몇 해 전에야 삼니움을 굴복시켜 중앙 이탈리아를 막 수중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로마의 세력이 라티움을 넘어 남쪽까지 뻗어오자 이탈리아 남부 지역에 있던 그리스계 도시인 타렌툼(그리스어로는 타라스)과 분
쟁이 발생했고, 아무래도 열세였던 타렌툼은 피로스를 불러들여 로마와의 전쟁을 맡아달라고 요청했던 것이다.
피로스는 과연 대단한 장군이었다. 저 한니발이 뽑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명장이 바로 피로스였다고 전해질 정도다. (두번째가 스
키피오, 세번째가 자기 자신이라고 했다. 이는 다른 보고에서는 1위가 알렉산드로스, 2위가 피로스, 자기가 3위라고 바뀌어 나오는
경우도 있다.)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은 아직 피로스에게 많은 동맹자들이 모여들기 전에 접근해서 일전을 벌였으나 코끼리를 포
함한 피로스의 군대에 패배하고 말았다. 계속해서 피로스는 몇몇 도시를 함락시켰으며 지원군을 모아 세를 불렸고, 로마에서
50km쯤 떨어진 곳까지 진격해 왔다.
그러나 전투에서 한번 졌다고 해도 로마는 아직 얼마든지 대군을 규합할 수 있었다. 현재 병력만으로 로마를 점령하기는 무리라고
생각한 피로스는 뛰어난 웅변술로 유명한 키네아스라는 측근을 보내서 화의를 맺자고 했다. 그 화의는 필시 피로스가 이 전쟁의
분명한 승리자임을 전제한 것으로, 로마는 삼니움 등 여러 지역을 포기하고 타렌툼과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도시들을 건드리지
않으며 피로스와 동맹을 맺어야 한다는 등의 조건이 포함되었던 것 같다. 피로스는 또 '관대하게도' 로마가 이탈리아에서 일등적
지위를 보유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고도 했다.
로마는 당장 이 제안에 회답하지는 않았다. 적이 바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해 왔을때 맞아 싸우러 나가는 것과, 화의를 거절하는 것
은 다르다. 대화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데 굳이 더 싸워보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것이 현명할까? 게다가 상대는 그리스 전역에 이
름이 알려진 명장 피로스가 아닌가? 아직 그의 세력이 대단치 않을 때도 이기지 못했는데, 남부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와 부족들로
부터 지원을 받아 더 강해진 지금은 무슨 수로 이길 수 있을까? 피로스와 일단 휴전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졌고,
끝내 원로원에서도 이 문제를 표결에 부치기로 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듣고 은퇴해 있던 한 사람의 원로가 일어섰다.
그 사람의 이름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크라수스였다. 후세에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caecus, 맹인이라는 뜻. 그
는 노년에 실명하여 눈이 보이지 않았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 이름 자체가 전설이 된 '아피아 가도'는 바로 이 사람의 작품이
다. 삼니움 전쟁에서 아피우스는 사실상 로마의 두뇌가 되어 대전략을 세웠고, 두번의 집정관과 두번의 독재관을 역임한 공화국의
원훈 중의 원훈이었다.
그런 아피우스가 아들과 사위들의 부축을 받으며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서자 장내는 쥐죽은듯이 조용해졌다. 곧 아들이나 동생뻘
되는 의원들의 머리 위로 서릿발같은 아피우스의 연설이 쏟아져 내렸다. 그 내용은 대강 다음과 같았다.
"여러분, 지금까지 나는 내 눈이 멀게 되어 버린 것을 불행으로 여겨 왔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차라리 내 귀까지 같이 멀어
버리지 않은 것이 한탄스러워지는군요. 그랬더라면 이런 불명예스럽고, 로마의 명예를 더럽히는 휴전의 이야기 같은 것은 듣지 않
을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단 한번의 불운을 당했다고 해서 여러분은 갑자기 어떻게 되어버리기라도 했습니까? 그 불운을 가져온 자와, 그자를 불러들인 무
리를 적 대신 '친구'로 부르겠다고요? 루카니아와 브루티움인들로부터 선조들이 얻은 것을 돌려주겠다고요? 이것은 로마인을 마
케도니아인의 노예로 만드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여러분 가운데 누군가는 이 노예 상태를 '평화'라고 부르는군요.
그대들이 언제나 외쳐왔던 말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아직 젊고, 우리의 부친들이 한창이셨을 때, 저 위세를 떨치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만약 이탈리아로 와서 우리와 대결했더라면 그는 지금 천하무적이라는 칭송을 받고 있기는 커녕 우리에게 패배당하여 도
망치거나, 혹은 굴복하여 로마를 더 영광스럽게 만들어주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것입
니까.
여러분은 지금 그 모든 말들은 허세였을 뿐임을 몸소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이 두려워하는 카오니아나 몰로시아의
무리(*에페이로스를 뜻함)는 줄곧 마케도니아의 먹잇감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피로스로 말하자면, 고작 알렉산드로스의 호위병
의 하인에 불과한 자입니다.(*피로스가 프톨레마이오스의 사위가 되고 그 지원을 받은 일을 빗댄 말) 이 자가 지금 이탈리아에서
떠돌고 있는 것은 그리스인들을 도우려고 함이 아니라, 사실은 적들에게 쫓겨 고향을 떠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조그
만 일부분조차도 지키지 못한 그 병사들을 가지고서 지금 우리에게 이탈리아의 패권을 주겠다던가 하는 따위의 말을 하는군요.(*
피로스는 마케도니아의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해 몇년간 전쟁을 했으나 리시마코스의 배신으로 인해 그동안 얻은 땅을 도로 잃어
버린 일이 있었다.)
여러분, 이런 자와 친구가 되면 그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했다가는 다른 침략자들까지 불러들
이는 결과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모욕을 당하고도 피로스를 응징하지 않은 채 그냥 돌려 보낸다면 남들은 우리를 손쉽게 굴복시킬
수 있는 상대라고 경멸할 것이며, 타렌툼인이나 삼니움인들도 우리를 조롱할 것입니다."
부축을 받아 원로원에 들어서는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 Cesare Maccari 작.
아피우스의 연설에는 당근은 하나도 없고 그야말로 채찍만 있는 것 같다. 거만한 클라우디우스, 안하무인의 클라우디우스라는 위
명같은 악명은 이런 강철같은 인물이 대를 이어 쌓아올린 것이다. 로마인은 비난만 당하고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사상 최강
의 장군이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사람의 군대가 고작 하루, 이틀 거리에 있는데 명예와 존엄을 생각할 것인가?
그리고 마침내 결정의 순간이 오자, 로마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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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이의 후예들>은 두개의 큰 전쟁 이야기를 주축으로 삼겠다고 구상하고 있습니다. 다음편부터 나올 것이 그 중 하나인 피로
스 전쟁입니다. 그리스에서 건너온 전쟁 전문가 피로스와 그의 군대는 로마가 '이탈리아 통일'에 이르는 과정에서 거의 마지막으
로 만난 난제였습니다. 이후로 한니발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로마가 이렇게 위기에 몰린 적이 없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
다.
그런데 그것은 뒤집어보게 되면, 그리스 세력이 로마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였다는 뜻도 됩니다. 어쩌면 마지
막 기회였다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탈리아를 장악한 이후로는 로마가 지나칠정도로 강해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
런 의미에서 피로스 전쟁은 동시대 사람들에게는 지중해 세계의 변방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이었지도 모르지만, 그 후의 역사가 진
행된 과정을 생각해 보면 알게 모르게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번 글에서 나온 이야기, 레퍼런스 이야기, 그리고 피로스 전쟁의 또 다른 이야기들을 엮어서 <트로이의 후예들> 다음 편을 계속
해서 엮어보겠습니다.
첫댓글 이탈리아의 그리스인들이 사태를 너무 낙관적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왜 꼭 당해야 정신들을 차리는 지 원....
대표적으로 타렌툼도 그렇고, 저 시기에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은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하면서 약점을 많이 노출시킵니다. 오히려 삼니움인이 전쟁에는 더 적극적이었던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고, 남부 이탈리아인들은 (멀리있는)로마가 과연 근본적인 위협일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슷한 맥락에서 마그나 그라이키아 사람들의 수수께끼같이 '유약한' 태도의 원인을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해안의 그리스계 도시들과 내륙의 루카니아, 브루티움인들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은 관계여서, 외부에서 적이 나타난다고 해도 그게 정말 가까이 있는 사이가 나쁜 이웃을 타도하고 적대하는것보다 우선시해야 할 '공통의 적' 인지 잘 알수도 없고, 독자적으로 뭘 해 보려고 해도 동원할수 있는 인력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