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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는 간 데 있고
제 4부 퇴직 이후
정년퇴직
2008년 2월, 만 62세. 유달중에서 정년퇴직을 했다. 역시 목포에서 퇴직한 민경선 선생과 함께 해직 모임인
전남 원회추(원상회복추진위원회)와 목포지회 주최로 유달산 중턱 갯돌 문화센터에서 퇴임 축하모임이 열렸다.
원회추? 호봉도 그렇고 해직 기간 동안 밀린 월급도 그렇고 당분간 원상회복이 되기는 글렀다.
별 공적도 없다고 퇴임식을 고사했지만 해야 한다고 우기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조창익 선생이 사회를 보고,
박광웅 의장님, 고진형 선생님, 전남 원회추 회장 박영석 선생님이 축사를 해주셨다.
축하 공연.
장주섭 선생이 축시를 낭독해주었다.
김재현 선생이 축가를 불렀다.
서울에서 달려온 윤석우 선생이 문경환 선생과 함께 축가를 불렀다.
대학 다니는 고재성 선생 아드님이 창을 불렀다. 그 아버지는 북을 쳤다.
기타, 트럼펫 연주가 이어졌다.
‘갯돌’ 패의 공연. 그러고 보니 ‘갯돌’과의 인연도 스무 해가 넘었다.
정명여고 한장순 선생님이 축하해주러 오셨다. 너무 반가웠다. 전교조 때문에 사연도 많고 고생도 많으셨다.
그분도 정년이 얼 마 남지 않은 무렵이었다.
떡을 썰어 나누어 먹고 두 시간 남짓 걸린 행사가 모두 끝났다. 비좁은 좌석에 쪼그려 앉아 고생들이 많으셨다.
목포는 물론이려니와 수고롭게 전남 각지에서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께 눈물 나게 고마웠다. 나는 평생을 동지들의
돌봄 가운데 은혜만 입고 살았다.
이제 인생의 이모작이 시작되었다. 학교를 떠나 퇴직을 했으니 조합원도 아니다. 그래도 나는 전교조를 떠날 수 없다.
배드민턴
김영희 선생의 버섯 판매책 임정선 선생은 좋은 배드민턴 파트너였다. 여성이라 해도 하체가 튼튼하고 지구력이
강하고 젊어서 실력이 나보다 훨씬 나았다. 배드민턴이 얼마나 재밌냐고? 안 쳐 본 사람은 말을 말더라고.
취미 생활 중에서 가장 건전하고 건강한 취미활동이 화분과 운동이다. 나는 40대부터 비교적 운동을 꾸준히 해온 셈이다.
혼자 하는 운동은 지루해서 주로 여럿이 짝을 바꾸어가며 함께 치는 테니스, 탁구, 배드민턴을 즐겼다.
그 중 배드민턴은 60대에 시작해서 퇴직 후까지 계속했다. 레슨도 제대로 받지 않고 서툰 솜씨였지만 종당에는 근육 파열로
기브스에 목발까지 짚었으니 갈 데까지 간 셈이다. 주로 유달중 청호중 체육관에서 쳤다.
예전에는 목포의 여러 학교에 테니스장이 많이 있었는데 하나둘씩 야금야금 없어져서 안타까웠다. 그 대신 예전 테니스장
에 체육관이 많이 들어서면서 테니스 인구가 배드민턴 쪽으로 많이 옮겨가는 추세라고나 할까.
실내에서 하는 배드민턴보다는 바깥에서 햇빛을 받으며 흙을 밟고 뛰어다니는 테니스가 훨씬 좋은 운동이라고 봐야
한다. 그러나 바람이 세거나 비가 오면 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게다가 코트가 한정이 있어서 쉽게 접근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다. 테니스에 비하면 배드민턴은 실내경기라 접근성이 좋고 특히 여교사들도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운동은 학생뿐 아니라 교사들에게도 건강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권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조직을 위해서도 운동은
친화력 단결력을 높여주는 좋은 처방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춘오
2009년 10월 17일, 김진수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전남들꽃연구회’ 창립기념일 행사가 열렸다. 멧돼지 바비큐가 있다는
꼬임에 귀가 솔깃해져서 최기종 선생의 차를 타고 광양까지 달려갔다.
‘유춘오’. 봄이 머무르는 언덕. 광양의 어느 선생이 사는 시골집이라 하던가. 김진수 선생이 목각으로 미리 새겨서 그 날
현판식으로 달았다. 그 현판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둥근 글자 한 획 한 획이 김진수 선생의 모나지 않은 성격을 빼닮았다고
느꼈다. 아무리 미술과라지만 글씨가 퍽 창조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백여 명 모인 행사가 두 시간 남짓 진행되었다. 뜰에 전시한 시화전, 학생들까지 등장하는 음악회, 시 낭송, 참석한 사람들
의 소감 발표. 나는 교사들의 모임이 그토록 우아하고 격조 높고 차분하면서도 그처럼 다양하고 다정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는 처음 보았다.
참가자들은 편히 앉아서 멧돼지 바비큐에 술잔을 기울이면서 점잖은 중년 선생님의 가야금 연주를 들었다. 가을바람이
산산했고, 모인 사람들의 인품이 향기로웠고, 가야금 울림이 맑았다.
거기에서도 반가운 동지들을 만났다. 그 중에서도 특히 한상준 선생과는 교분이 두터웠다. 강진 해직 . 도 교육위원을
역임하고 그 인연으로 교장이 되었다. 해직교사가 교장으로 사는 것이 행복한 일만은 아니었다. 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지리산 자락에 토담집을 짓고 틀어박히겠다고 했다. 집 이름을 도방하(都放下)의 방하(放下)로 짓겠다고 했다. 모두
내려놓겠다고? 하기야 일부러 안 그래도 내려놓을 때가 저절로 오는 법인데.
영광 성지고등학교
2011년 8월 30일, 고진형 선생이 영광 성지고등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다. 퇴임을 축하하기 위해 목포에서는 차 한 대를
동원했다.
무안에서 고진형 선생과 함께 해직된 청호중 박인숙 교감, 좋은 일 궂은 일 마다하지 않고 꼭꼭 참석하시는 서창호 교수님.
류훈영 선생과 나대서 선생은 정년을 두어 해 앞두고 청호중에서 함께 명예 퇴직했다. 퇴직 후에도 함께 자전거로
전국을 누비며 감미로운 은퇴생활을 즐기고 있다.
구신서 선생과 조창익 선생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좋다. 한 때 둘이는 전남 지부장 후보에 나섰다. 한 사람은
당선하고 한 사람은 낙선했다. 그러나 나는 누가 되든지 상관없었다. 우리 선거는 짜고 치는 고스톱이나 다름없었다.
한 번은 서헌 선생을 술집으로 초청했더니, “선생님, 최성 선생도 함께 가면 안 될까요?” “물론 환영이제.” 전교조가
아니었더라면 중등 근무하는 서헌 선생과 초등 근무하는 최성 선생이 단짝 친구가 될 리 없었다. 아무튼 가장 젊고
씩씩한 두 선생은 전교조의 차세대 전투폭격기임에 틀림없다.
김대중 선생과 정금례 선생. 정 선생은 남편 문희경 선생과 함께 해직되었다. 나랑 그들 부부랑 명동성당에서 단식농성
하고 있는데 홍수로 영산강 제방이 터져 그들이 살던 집이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그들이 복직하여 진도에 근무할
때에도 나는 진도 집에까지 놀러가서 하룻밤 신세진 일이 있었다.
목포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임창옥 씨. 전에는 오랫동안 가톨릭회관을 운영했다. 전교조는 행사 때마다 가톨릭회관
신세를 많이 졌다.
교협 시절이었으니까 벌써 25년 전인가. 고진형 선생과 박인숙 선생이 가톨릭회관에서 강연하였다. 그 날 고 선생을
처음 봤다. 첫인상에 깜짝 놀랐다. 용모가 준수한데다가 속기가 전혀 안 보였다. 때가 안 묻었다는 뜻이다. 학처럼
맑고 깨끗했다. 나는 그 때 맑은 영혼의 울림을 들었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고 선생님도 만고풍상 다 겪었다. 전교조 창립 때 전남지부장으로 감옥행, 또 지부장, 전교조
부위원장, 전남 교육위원, 전남 교육위원회 의장, 목포공고 교사, 성지고등학교 교장.
아무튼 고 선생님은 전남 지부의 살아 있는 레전드요 신화요 우상이다. 그가 교육위원에 출마했을 때에는 전남 곳곳에서
그의 당선을 위하여 운동화 닳아진 동지가 한둘이 아니었다. 꽤 높은 지위에 올라갔음에도 고 선생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조직의 원칙을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고, 청렴강직한 분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세월은 무심히 흘러 어느덧 내가 퇴직하더니 곧이어 고 선생님의 퇴임식이었다. 정규학교의 커리큘럼과 다른 교육기관
이 영국에 서머힐, 타이에 무반덱이 있다면 한국에는 성지고가 그 효시였다.
입시 점수 위주의 무지막지한 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들이 귀의하는 대안학교의 교장으로는 전교조 출신 고 선생님
이 아주 적격이었다.
축하공연이 이어졌다.
정해숙 선생님이 축사를 하셨다. 정 선생님이 전교조 위원장을 하실 때 우리는 복직되었다. 지금 우리 학교의 절반
이상은 여교사인데 여권 신장을 위해서도 정 선생님은 상징적인 분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이수호 선생도 우리 집에서 묵었지만, 정 선생님도 윤영규 선생 사모님하고 우리 집에서 점심을 자신 일이
있었다. 나를 친정 조카처럼 사랑하시고 책도 여러 권 보내주셨는데 보답을 제대로 못해 항상 죄송스럽다.
일본 효고현 교원조합과 전교조 전남 지부는 꽤 오래 전부터 자매결연을 하고 교류를 해 왔다. 한 번은 그쪽 분들이
목포에 와서 민박을 하며 우의를 다지기도 했다. 우리 집으로 오셨던 분은 역사 선생님.
효고현 위원장이 축사를 하였다. 일본말로 하고 잠시 쉬면 한국말 통역이 뒤따랐다. 발이 넓은 고 선생님은 퇴임식도
거창하게 국제적이라고 쿡쿡 웃었다.
장만채 교육감이 축사를 하였다. 감개가 무량했다. 첫 주민 직선 교육감이었다. 예전에는 정부에서 임명했다. 한 번은
전남 교육감 아버지가 일제 강점기 경찰 고위직이었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막강한 인사권을 한 손에 틀어
쥐고 있어서 돈을 가마니로 쓸어 담는다는 소문도 돌았다.
우리는 예전의 형편없는 교육감들이 물러나고 도민 추천으로 뽑힌 순천대 장만채 총장이 직선 교육감에 당선하기를
간절히 소원하였다.
장만채 총장이 교육감으로 들어앉자 많은 변화와 개혁이 이루어졌다. 여러 교사들이 도교육청에 들어가 새로운 정책
수립을 도왔다. 구신서 선생은 정책연구소 팀장으로 활약했다. 박인숙 선생은 학생 인권조례 준비 위원장으로 수고
하다가 나중에는 장흥 공모 교육장으로 취임했다. 장 교육감이 다음에도 오래오래 교육감 자리에서 전남 교육의
혁신을 이끌어갔으면 하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퇴임식장에서 박해영 선생을 만났다. 완도교육청으로 몰려가서 전교조 교사 부당 전출을 항의하다가 함께 유치장에서
하룻밤 잤다. 거칠 것 없이 내지르고 뽀사버리는 시원시원한 성격이었다.
정맹자 선생과 함께 함평 사립에서 해직되었다. 정맹자 선생이 입에 침이 마르게 칭송하는 롤 모델이었다.
윤영규 위원장님은 돌아가시고, 정해숙 위원장님은 연로하시고, 목포지회장이었던 나도 2선으로 물러나고, 드디어
전남지부장이었던 고진형 선생님도 퇴임식을 마쳤다. 이로써 전교조도 1세대가 끝난 느낌이다.
‘요한의 서’였던가. 장용학 소설가는 예수 앞에 왔던 세례 요한처럼 자유도 다음에 와야 할 무엇의 전주곡에 지나지
않는다 했던가. 전교조도 이제 갈 데까지 간 것 아닐까. 혹시 전교조도 무언가 다음에 올 더 바람직한 구성체의 전주곡은
아닐까.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부응하여 전교조도 이제 확 바뀌어야 할 시점에 다다른 것은 아닐까.
노후 생활
(터키 에페소) (터키 성 소피아 사원)
2000년 1월에는 터키를 구경했다(부록 14). 2002년 10월에는 북경을 구경했다(부록 15). 퇴직하고 나니 아무래도 여유가
많아졌다.
해직교사 모임인 화백회에서는 참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경남 남해 휴양림, 내변산 직소폭포, 대천 해수욕장(부록16),
운장산 휴양림, 제주도.
89동지회에서는 백운산, 삼학도회에서는 암태 자은도, 코끼리떼에서는 경북 청송, 꽤 여러 곳 돌아다닌 셈이다. 사십 년
동안 교직에 얽매이고 전교조 한다고 수고했으니 이제는 좀 경치 좋은 곳 구경 다니며 맛난 것도 많이 먹어야 하지 않겠
는가. 곧 서산에 해 떨어지겄으니 말이다.
연로하신 어머님 봉양하고 가끔은 광주 사는 손자 손녀도 들여다보아야 하겄제. 언젠가는 사회에 봉사활동도 해야겠는
데 아직은 좀 여유가 없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인간세계에 머무를 시간을 많이 주시고 좋은 동지들에 에워싸여 행복한 세월 보내게 해주셔서 더욱
감사드립니다요. (4부 끝)
특별부록 (3부 우수영중학교 참조)
즐거운 도서실
해남군 우수영중학교 교사 조명준
나는 1997학년도에 해남군 해남 중학교에서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 중학교로 전근 발령을 받아 업무 분장으로 도서계를 맡았다. 국어과 교사는 아무래도 도서계 업무를 맡을 확률이 컸다. 나도 국어과라 도서계 업무가 처음이 아니었다. 완도 여중과 해남 중학교에서 이미 도서계를 맡은 경험이 있었다.
내가 근무할 당시 완도 여중은 신설 학교여서 장서가 빈약하고 도서실이 따로 없었다. 겨우 자물쇠 장치가 된 책장 몇 개가 복도에 진열된 수준이었다. 비록 열악한 상황이었지만 나는 한 권이라도 더 학생들에게 책을 읽힐 욕심으로 학급 도서부장들에게 일주일마다 20권씩 책을 가져다 보고 반납하도록 운영했다. 책이라 해 봐야 장정과 제본이 어설픈 싸구려 책이 대부분이어서 이 반 저 반 학생들이 돌려보자 얼마 안 가서 너덜너덜 표지가 떨어지고 심하면 제본이 풀어져 공중 분해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나는 떨어질 때 떨어지고 없어질 때 없어지더라도 책장을 자물쇠로 잠가 놓는 것보다는 한 권이라도 더 학생들이 가져다 읽는 것이 나으리라고 생각했다.
목포 여중에 근무할 때에는 도서실이 따로 있었는데 도서계는 안 맡았지만 언덕 위에 외따로 떨어진 그 도서실을 구경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연륜이 깊은 학교라 꽤 넓은 그 도서실에는 볼 만한 책도 상당히 많았을 터인데 출입문에 커다란 두꺼비 자물통이 굳게 잠긴 채 녹이 벌겋게 슬어 있었다. 그 때 나는 우리나라 학교 도서관의 실태를 보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팠다.
해남 중학교에서는 한 해 동안 도서계를 맡았다. 도서실은 내가 맡기 전 해에 최신식으로 지어졌다. 내가 맡았을 때에는 창고 같은 교실에 처박혀 있던 책들이 새 서고로 옮겨져 무질서하게 쌓여 있었다. 내가 맡은 해에 열람대가 새로 들어오고 새 서가도 몇 개 들어왔다. 나는 틈나는 대로 몇몇 학생들의 도움을 받아 책의 먼지를 털고 번호를 매겨서 책장에 배치하는 데 온 정력을 쏟았다. 도서실 문 언제 여느냐고 학생들의 성화가 빗발쳤지만 도서 정리와 서가 정리에 한 해가 거의 다 가 버리고 끝내 도서실 문을 열지 못한 채 그 학교를 떠나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의 해남 중학생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정규 수업에다가 보충 수업에다가 학급 담임까지 맡았으니 도서실을 제대로 돌볼 겨를이 없었다. 이런 폐단을 없애려면 사서 교사를 많이 양성하여 규모가 큰 학교부터 도서실 전임으로 배치하는 일이 시급하다.
우수영 중학교 도서계를 맡자마자 며칠 안 되어 도서실을 옮겼다. 기존의 도서실은 교사 동쪽 끝의 한적한 곳에 있었는데 복도까지 교실 안으로 잡아넣어서 보통 교실보다는 공간이 좀 넓었다. 그런데 그 교실에 새로 어학실을 만들 예정이니 도서실을 교장실 옆의 보통 교실로 옮겨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곳이 도서실로는 가장 알맞아 보이지만 어학실을 설치할 공간이 거기밖에 없다니 조금 아쉬워도 별 도리가 없었다. 학생들을 동원하여 20 명이 앉을 수 있는 동그란 원탁형 열람대 두 조와 다섯 개의 서가와 3000여 권의 책을 교장실 옆 교실로 옮겼다.
신안군 섬으로 전근 간 내 앞 도서계 교사도 독서 지도에 꽤 많은 열정을 쏟은 눈치였다. 곳곳에서 고심한 흔적을 발견했는데 그 중 하나는 상당량의 학교 도서를 학급 문고에 대여해서 학생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는 교실에 배치한 일이었다. 나는 그 방법도 물론 좋지만 역시 학교 도서는 도서실에 모두 모아 놓고 학생들이 골라 보는 것이 더 좋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학급별로 한 명씩 선정된 도서부원들로 하여금 학급 문고에 흩어져 있는 학교 도서들을 도서실로 가져오도록 했다.
도서실 서가 정리가 대강 끝나자 나는 도서 대출 방법 문제로 한 동안 고심했다. 내가 거쳤던 완도 여중과 해남 중학교의 경험을 돌이켜보고 목포 여중에서 보았던 굳게 잠긴 도서관 문을 상기했다. 결론은 완전한 자유 개가식! 교사들은 그냥 아무 때나 자유로이 가져다 읽고 다 읽으면 스스로 꽂아 놓는다. 학생들은 아무 때나 보고 싶은 책을 골라 자기 스스로 대출 대장에 기입하고, 반납할 때에도 스스로 대장에다 기입하고 꽂아 놓는다. 그 전 해에도 학생들은 도서부원을 통하여 대출 대장에 쓰고 빌려 가는 개가식이었다는데 나는 완전한 자유 개가식 방법을 채택했다.
서른 해 가까운 교직 생활 중에 내가 뼈저리게 느낀 것은 학교가 불신과 감시와 위협과 체벌 대신 믿음과 사랑과 기쁨이 충만한 곳이 되었으면 하는 점이었다. 가능하다면 시험도 감독 교사 없이 치르고, 학교 매점도 판매원 없이 사는 학생 스스로 물건 값을 금고에 넣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실제로 나는 그 비슷한 실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수학여행을 갔을 때 학생들이 가져온 용돈을 담임에게 맡겼다가 필요할 때 찾아 쓰도록 하는데,
“나는 돈을 세어 보지 않을 테니 너희들이 맡긴 금액을 잘 기억했다가 찾아가거라.”
고 말하였다. 나는 학생들이 내미는 돈을 세어 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쓸어 넣었는데 수학여행이 끝났을 때 그 주머니는 텅 비어 있었다. 물론 한 푼도 남거나 모자라지 않았다.
나는 도서실 운영도 그런 방식으로 하고 싶었다. 게다가 내 앞 도서계 교사의 전언도 내게 용기를 더해 주었다. 96학년도에 없어진 학교 도서는 몇 권 아니라는 것이었다.
우수영 중학교 학생들은 마음씨들이 티 없이 맑았다. 울돌목에 진도대교가 세워진 후로 조금 관광객들이 늘기는 했지만 우수영은 한적한 시골 농어촌이었다. 보통의 학교들은 교실을 비울 때에 문을 잠그거나 지키는 당번을 두는데 우수영 중학교는 교실을 비울 때에도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다녔다. 그래도 무얼 잃어버렸다는 소문이 들리지 않았다.
교사들도 그렇고 학생들도 그렇고 분위기가 너무 자유롭고 좋았다. 한 학년에 두 학급씩 통틀어 여섯 학급 200 명도 못되는 작은 학교인지라 대규모 학교에 비하면 너무나 가족적인 분위기였다. 이렇게 가족적인 분위기의 소규모 학교라는 상황도 도서실을 자유롭게 운영하기에는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나는 담임도 맡지 않고 주당 수업이 15 시간에다가 국어 보충 수업이 두 시간 정도였으니, 학급 담임을 맡은데다가 수업 20 시간에 국어 보충 수업이 서너 시간이었던 해남 중학교보다 훨씬 유리한 조건이었다. 비교적 부담이 적은 수업 시간도 도서실 일을 보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었다. 나는 아예 도서실로 보따리를 쌌다. 교무실에는 회의 때에나 참석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업 시간과 청소 시간만 제외하고 학생들은 아무 때에나 도서실에 들어와서 자유롭게 책을 꺼내 보고 빌려 가고 싶으면 스스로 대출 대장에 적고 가져갔다. 비록 3000여 권에 불과한 장서였지만 완전히 자유로운 도서 열람과 대출은 학생들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또 꼭 책이 아니더라도 도서실로 놀러 오는 학생들이 차츰 늘어났다. 그들에게는 도서실이 책을 빌리는 곳을 넘어서서 신선한 자유의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도서실로 놀러 오는 이유는 책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다.
첫째, 남녀 학생들이 자유로이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내가 부임했을 때에는 남학생과 여학생들을 따로 분리하여 학급을 편성했다. 나는 지금도 분리 편성이 혼성 편성보다 시대의 추이에 뒤떨어진 방식이라고 생각하지만, 자기 교실에서는 들리지 않는 여학생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우람한 남학생들의 걸걸한 음성을 들을 수 있으니 도서실은 남녀 학생들의 사교장 구실도 겸하는 셈이었다. 게다가 상급생과 하급생들이 자연스럽게 어울리니 가족적 분위기가 더욱 다정하게 살아났다.
둘째, 학생들에게는 도서실을 맡은 내가 허물없었다. 나는 국어 시간에 들어가서도 무슨 이야기이든지 자유롭게 말하고 쓰도록 이끌었다. 여자 친구와 만난 이야기도 좋고, 집 서랍에서 부모님 몰래 천 원짜리 뽑아다가 과자를 사 먹었다는 이야기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을 테니 자유롭게 발표하라고 공언해 두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차츰 나를 어려워하거나 조심하지 않게 되고, 곁에 있거나 말거나 별로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으며, 차츰 만만하게 여기고 기어오르려는 경향마저 엿보였다. 그런 선생이 앉아 있는 한 도서실은 학생들에게 자유가 보장된 공간이었다.
남학생은 도망가고 여학생은 쫓아다녔다. 그들은 내게 어지럼증을 일으킬 작정인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뛰어다녔다.
“야, 이곳은 조용히 책을 읽는 곳이야. 계속 소란을 피우면 다시는 도서실에 못 오게 하겠어.”
아무리 위협하고 을러대도 소용이 없었다. 한번 속을 뽑힌 뒤로는 무서울 까닭이 없는가 보았다.
셋째, 도서실에는 책말고도 보거나 만질 거리가 많았다. 나는 학교 신문을 발간했다. 여섯 학급에서 한 명씩 뽑은 도서부원들에게 신문 일을 겸임하게 하고 그들에게 도서신문부원이라는 호칭을 선사했다. 신문부원이라 해 봤자 경험이 없는 그들의 역할은 그리 크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나오는 신문을 세어서 자기 학급에 나누어주는 일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눈으로 보고 배우면서 차츰 그들의 역할은 늘어갔다.
학교 신문을 편집하기 위해서 교무실의 컴퓨터를 한 대 도서실로 옮겼다. 학생들은 내가 컴퓨터를 치고 있으면 우우 몰려와서 지켜보았다. 물론 컴퓨터실에는 여러 대의 컴퓨터가 있었지만 실제로 신문 편집을 구경하는 것도 그들에게는 심심풀이 이상의 눈요기였다. 그들은 구경하는 것에서 만족하려 하지 않고 학생들의 원고를 뒤적거려 보기도 하고, 빈 시간을 이용하여 컴퓨터를 쳐보려고 눈에 불을 켰다.
나는 서무실에서 용도 폐기된 286 컴퓨터 한 대를 얻어 왔다. 신문 편집용 486 컴퓨터는 나와 신문반원들만 만지게 하고, 다른 학생들은 286을 쓰도록 했다. 그것도 될 수 있으면 타자 연습만 하도록 했다. 학생들은 수업 끝 종이 울리면 서로 재빨리 달려와 컴퓨터를 차지하려고 기를 썼다.
음악실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는 전자 오르간도 한 대 도서실로 옮겼다. 나는 한가할 때면 오르간을 치면서 피로를 풀었다. 도서실과 오르간 소리는 비교적 잘 어울렸다. 학생들은 책만 읽는 게 아니라 가끔은 음악 감상도 하는 셈이었다. 또 오르간을 만질 줄 아는 학생들은 틈만 나면 전원을 꽂고 건반을 눌러 봤다. 음악실은 아니었지만 건반을 눌러 보는 것도 그들에게는 좋은 소일거리였다.
나는 나이 드신 과학 선생님의 지도를 받아서 붓글씨 연습을 시작했다. 국어 교사에게 붓글씨는 훌륭한 교양 과목이었다. 언제부터 생각하다가 드디어 기회를 붙잡은 것이었다. 처음에는 과학실에서 썼지만 조금 진도가 나가자 도서실에 붓글씨를 연습할 책상을 마련하였다. 학생들은 내가 커다란 붓으로 헌 신문지에 글씨를 쓰는 광경을 자주 보게 되었다. 한 달 두 달 끈질기게 신문지에 코를 박고 있는 국어 선생을 보자 답답했던지,
“선생님, 글씨 쓰기가 그렇게 재미있어요? 나는 하나도 재미가 없을 것 같은데.”
“오냐, 재미가 옥실옥실하다. 재미없으면 어떻게 이 짓을 한다냐?”
학생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멀거니 바라다보지만 말고 심심하면 먹이나 갈라고 먹 가는 요령을 가르쳐 주었더니 나중에는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먹을 갈아주는 학생이 늘어났다. 먹을 갈고 내가 쓰는 한문책을 들여다보면서 무슨 글자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했다. 또 내가 안 쓰면 저희들이 서툰 솜씨로 붓글씨를 써 보기도 했다.
넷째, 도서실에서는 자유로운 대화가 오고 갔다. 물론 저희들끼리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하고도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 이야기, 친구 이야기, 집안 이야기...... 처음에는 내가 물어야 대답을 하는 쪽이었지만 자기들 생각에 나와 어느 정도 벽이 없어졌다고 판단되면서부터는 묻지 않아도 곧잘 먼저 말을 걸어 왔다.
“선생님, 어제 문저리(망둥어)를 다섯 마리나 잡았어라우. 아그작아그작 날로 씹어먹었더니 징허게 맛있습디다, 히히히.”
한때 문저리를 열심히 낚았던 내 별명이 문저리 선생이었다. 수업 시간에 내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그 학생이 나를 놀리려고 하는 말이었다.
“선생님, 어제 야구 중계 보셨어요? 아따, 해태 투수 아무개 공 기막히게 잘 던집디다.”
“음악 선생님 신랑 미남이랍니까?”
“잘 모르것다. 다음에 음악 선생한테 물어보고 와서 가르쳐 주마.”
“선생님, 진짜로 사회 선생님이 선생님의 선배 맞아요? 보기에는 선생님이 사회 선생님보다 더 연세가 들어 보이시는데.”
“선생님, 흰머리 뽑아 드릴께 가만 계셔요. 우리 아버지는 하나 뽑으면 50원씩 쳐주는데 선생님은 얼마 주실래요.”
이렇게 도서실은 책을 읽는 구실과 아울러 교실에서는 맛볼 수 없는 여러 가지 기능을 겸하고 있어서 학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들에게 도서실은 남녀 학생들이 자연스럽게 만나는 장소였고, 신문 편집이나 붓글씨 쓰는 장면을 구경할 수도 있었으며, 컴퓨터나 전자 오르간을 살짝살짝 만져 볼 수도 있는 곳이었고, 다른 학생들이나 교사와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기도 했다.
내가 도서계 담당 교사의 역할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상담 교사 역할도 해야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은 2학기 들어서부터였다. 물론 1학기 때에도 어렴풋이 그런 생각을 가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느낌은 확연해졌다. 그러고 보니 6학급짜리 우수영 중학교에는 양호 교사, 무용 교사도 없고 사서 교사, 상담 교사도 없었다. 물론 나는 상담에 대해서 전문적인 강습을 받거나 연수를 한 일이 없었지만 상담이 별 것인가? 학생과 교사가 마음의 벽을 허물고 서로를 신뢰할 수 있다면 이미 바탕은 마련된 것이 아닌가? 서로 허물없이 가벼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주고받는 가운데 학생들의 억압되거나 뒤틀린 심사가 풀어지고 부드러워진다면 상담의 효과를 꽤 많이 거둔 것 아닌가? 그런다고 내가 전문적인 상담 교사가 될 수는 없었지만 2학기부터 나는 상담 교사의 역할까지 염두에 두면서 학생들과의 대화를 풀어 나갔다.
도서실의 붓글씨를 연습하는 책상 주위에는 학생들이 의자에 앉아서 먹도 갈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충분했다. 학생들은 심심하면 도서실에 들어오고, 더 심심하면 슬그머니 내 주위에 앉아 교대로 먹을 갈거나 슬슬 말을 걸어 왔다. 처음에는 책에 관한 질문이 많았다.
“선생님도 학생 때 책 읽기 좋아하셨어요?
“음, 꽤 좋아했지. 밥 먹을 때나 변소 안에서는 물론이고 수업 시간에 몰래 책상 밑에 소설책을 펴놓고 읽다가 들켜서 꾸중을 들은 일도 여러 번 있었지.”
“어떤 책이 재밌어요?”
“그야 네가 읽어봐서 구미가 당기는 책이 재미있는 책이지.”
“선생님께서 좋은 책 좀 추천해 주셔요.”
“물론 추천해 줄 수도 있지만 직접 네가 몸으로 부딪쳐 봐. 자꾸 읽다 보면 어떤 책이 좋은 책인지 저절로 알게 돼. 우선 많이 읽는 것이 첫째야.”
“도서실에 추리 소설 있어요?”
“네가 직접 찾아보렴.”
“선생님도 추리 소설 읽어 보셨어요?”
“그럼. 중학생 때 ‘괴도 루팡’이나 ‘셜록 홈즈’ 재미있게 읽었지. 하기야 모든 소설이 모두 추리 소설의 요소를 얼마쯤 갖추고 있지. 주인공은 왜 그런 운명에 놓이게 되었는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선생님, ‘퇴마록’ 읽어 보셨어요?”
“아니, 아직 못 읽어 보았다.”
“한 번 읽어보세요. 생각보다 재밌던데요.”
“선생님, 여기 한번 들여다보세요. 야릇한 내용이 나와요. 아이들이 자꾸 여기만 뒤적거리며 킥킥거려요.”
그러나 화제가 책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었다. 조금씩 교사에 대한 경계심이나 두려움이 엷어지고 친근감이 더해지자 화제는 자유분방하고 풍부해져서 끝 간 데 모르게 확산되었다.
“선생님,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국어 시간에 선생님 이야기하는 것 보고 놀래 버렸어요. 무슨 이야기를 그리 많이 아신다요?”
“그거야 내가 인생을 오십 년이나 살았으니 너보다 경험을 훨씬 더 많이 했을 것 아니냐. 책도 너보다는 더 읽었을 것이고.”
그 학생은 귀찮을 정도로 끈질기게 도서실을 들락거렸다. 그 학생의 등록 상표는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 였다. 만날 때마다 ‘한 가지만 물어 봅시다’였는데, ‘한 가지’를 백 번도 넘게 물어 본 다음에야 일 년이 끝났다. 아예 ‘한 가지’를 물어 보는 재미로 학교를 다니는 것 같았다. 하기야 우리 학교들에는 ‘한 가지’를 부담 없이 물어 볼 교사가 그리 흔하지 못한 실정이다.
수련(가명)이는 먹을 요령 있게 잘 가는 선수였다. 또 먹 가는 일에 별로 싫증을 내지 않는 눈치였다. 자연히 먹을 자주 갈게 되었다. 게다가 책도 많이 읽고 쫑알쫑알 얘기도 잘하는 꿈 많은 소녀였다. 부모님이 생선 횟집을 하는데 딸을 어찌나 사랑하던지 고기잡이배 이름도 ‘수련호’로 짓고 식당 이름도 ‘수련 식당’이라고 붙였단다.
“엄마하고 날마다 싸워요. 엄마가 손님들에게 정가보다 적게 받으려 하면 내가 나서서 기어코 제 값을 받아요.”
“그래? 좀 싸게 줘야 다음에 또 오는 거야.”
“엄마 몰래 삐삐를 마련했거든요. 그런데 그만 며칠 못 가서 들켜 가지고 빼앗겨 버렸어요. 아이, 속상해!”
“흐흐, 안 됐다. 학생이 뭐 그리 삐삐 칠 데가 많을까?”
“나는 공부 열심히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돼요. 테레비 앞에 오래 안 붙어 있으려 해도 어떤 날에는 끝날 때까지 앉아 있거든요.”
“너만 그러냐? 나도 그런다. 전번에 케이블 테레비를 달았는데 바둑에 푹 빠져 가지고 새벽 세 시까지 보는 거야. 안 되겠길래 석 달 만에 다시 떼어 가 버리라 했다. 너도 학생이니까 바보상자에 너무 오래 매달려 있으면 곤란할 거다.”
“아이구, 식당 일 힘들어 죽겠어요. 요리 접시는 내가 다 들고 다닌다니까요. 세상에, 얼마나 일을 많이 했던지 처녀 팔뚝에 알통이 다 생겼다니까요. 한 번 보실래요?”
수련이는 먹을 갈다 말고 일어서서 옷소매를 걷어 부치고 알통을 만들어 보였다. 아닌 게 아니라 제법 도톰한 알통이 불거졌다.
“됐다 됐어. 그게 얼마나 장한 일이냐. 요즘은 여자들도 일부러 돈 주고 바디 빌딩인가 한다더라.”
달마다 한 번씩 찍는 학교 신문의 제호는 ‘울돌목’이었다. 1면에는 학교 소식과 ‘이달의 시’를 싣고, 2면부터는 ‘한 권의 책’, ‘우리 고장 가 볼만한 곳’ 등과 교사 학생들의 글을 실었다. 학생들의 글은 일기, 기행문, 행사문, 감상문, 논설문, 편지, 독후감 등을 실었는데 지면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어떤 달에는 4면으로 끝나기도 하고 어떤 달에는 10면을 넘기기도 하였다. 학교 신문에 실린 독후감은 학생들의 독서 의욕을 직접적으로 자극했겠지만 독후감이 아니더라도 신문에 실리는 글들은 전반적으로 학생들의 책에 관한 관심을 높이고 도서실에 대한 친근감을 더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3학년 도서신문부원 김현기는 매우 침착 성실하고 중후한 성품이었다. 청소 시간이면 제일 먼저 와서 묵묵히 밀걸레질을 시작하여 끝마무리까지 하고 제일 늦게 갔다. 아침에 도서실 문을 열고 저녁에 도서실 문단속을 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하루는 공손하게,
“선생님, 저도 신문 만드는 일을 도우면 안 될까요?”
“두 손 들어 환영이지. 가만 있자,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옳지, 컴퓨터 자판 연습을 열심히 하면 되겠다.”
진학반이었지만 틈틈이 짬을 내어서 1학기 동안 부지런히 자판 연습을 했다. 2학기부터는 학생들 원고의 대부분을 현기가 컴퓨터에 입력시켰다. 덕분에 내 짐이 많이 덜어졌다. 그만큼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학생을 만난 것도 내게는 커다란 행운이었다.
3학년 윤희는 자타가 공인하는 독서왕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상당히 많은 책을 읽었다는 소문이었다. 늘 그림자처럼 조용히 들어와서는 말없이 서가를 맴돌다가 살짝 책을 빼 가곤 했다.
“선생님! ‘토지’ 15권 못 보셨어요?”
“잘 찾아 봤냐?”
“한 달째 들여 봐도 안 나와요.”
“왜 이빨이 빠졌지? 우리 집에 있는 책이라도 빌려줄까?”
얼마 후 집에 있는 책을 가져와서 아침에 빌려주었더니 오후 수업이 다 끝날 때쯤 되돌려 주었다. 의아하여 왜 벌써 가져왔느냐고 물었더니 다 읽었다는 대답이었다.
“수업도 많은데 어떻게 다 읽었어? 너, 속독법 하니?”
“조금은 알아요. 책에 따라 대강 뜻은 짐작할 만큼 읽어요.”
“독후감 노트 있니?”
“아니요.”
“책을 많이 읽는다고만 잘하는 게 아니여. 꼭 독후감 노트를 마련해서 메모해라. 그러지 않으면 나중에 후회할 일이 생긴다고.”
도서실이 학생들로 붐볐다. 대출하여 가지고 교실이나 집에서 읽어야지 도서실에서는 시끄러워 조용히 책 읽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영희야! 제발 좀 조용하라니까? 이 옆 교실이 교장실인 줄 알지? 너희들이 자꾸 이렇게 떠들면 내가 교장 선생님께 혼난다니까. 도서실이 저쪽 구석지 교실로 쫓겨나면 네가 책임질래?”
“호호호, 염려마세요. 내가 교장 선생님께 달려가 말려드릴게요.”
어떤 학생은 수업 시작종이 울려도 도서실을 떠나지 않았다.
“얘! 종 쳤다. 수업 들어가야지?”
“이 시간만 여기 남아서 책 읽으면 안 될까요? 제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인데요.”
“네 심정은 이해한다만 다른 선생님들이 왜 학생들을 수업 시간에 도서실에 있게 하느냐고 물으면 무어라고 대답하겠니? 어때, 나의 곤란한 처지를 이해할 수 있겠니?”
순이를 잊을 수 없다. 책은 꽤 부지런히 읽는 아이인데 학과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어디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눈치였다. 하루는 가만히 다가와 예쁘게 포장된 빼빼로 상자를 내밀었다.
“왠 과자냐?”
“오늘은 남자 친구한테 빼빼로 선물하는 날이래요. 막상 사기는 샀는데 줄 만한 아이가 없어서 선생님한테 드리는 거에요.”
“그래? 다음에 여자 친구한테 과자 선물하는 날에는 내가 하나 마련하마.”
나는 그 순이에게 과자를 선사하지 못했다. 그 대신 졸업식 날 장미를 한 송이 선사했다.
정이는 유전적으로 지능이 좀 낮은 아이였다. 도회지였더라면 특수반에 다녀야 할 형편이었지만 우수영에는 특수반이 없었으므로 그냥 함께 섞여 다녔는데 너무 온순해서 남에게 폐를 끼치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늘 활기가 부족하고 반쯤 넋 나간 얼굴로 복도를 헤매고 다니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어쩌다 그 애의 퀭한 눈길이 도서실로 향하면 나는 웃는 얼굴로 맞이하면서 언제든지 자주 놀러 오라고, 공부하기 싫으면 아무 때나 도서실에 와서 놀라고 다독거렸다. 지능은 떨어져도 눈치는 뻔했다. 일이 있으나 없으나 도서실에 자주 어슬렁거렸다. 나는 졸업식 날 순이와 아울러 정이에게도 장미 한 송이를 선사했다.
도서실은 학생들만 오는 게 아니었다. 교사들도 가끔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하여 도서실을 방문했다. 어떤 선생은 수업이 없는 시간이면 조용히 도서실에서 책을 읽기도 하고 어떤 선생은 붓글씨를 써 보기도 했다. 나는 교회와는 인연이 멀었지만 음악 선생은 부드러운 화음으로 찬송가를 연주해 주기도 했다. 또 우리들은 한가로이 책 이야기, 교육 이야기, 아이들 양육 문제, 인생 문제 등을 부담 없이 나누었다. 가끔은 차도 마시고 빵이나 과자도 나누어 먹었다. 그러니까 교사 휴게실이 없는 우수영에서 도서실은 교사 휴게실 기능까지 어느 정도 아우른 셈이었다.
국어과 우 선생은 학년 초부터 나와 함께 도서실 귀퉁이에 책상을 마련하고 거기에서 교재 연구를 하고 함께 교과 지도 협의를 했다. 또 그 자리에서 도서실에 오는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도서 정리나 학교 신문 편집 등 내 일을 거들어 주었다. 여러 모로 나의 훌륭한 후견인이었다.
때맞추어 군 교육청에서는 우리 학교 도서실에 냉난방 겸용 에어컨 및 온풍기를 한 대 보내 주었다. 덕분에 그 해 겨울 도서실에는 훈훈한 공기가 가득 찼다.
돌이켜보면 나는 97학년도에 우수영 중학교 도서실에서 수많은 책과 수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에 둘러싸여 그 어느 해보다 벅찬 행복을 누렸다. 도서실은 키가 맞지 않은 책들이 어수선하게 꽂힌 서가와 열 명씩 앉을 수 있는 원탁형 열람대 두 조와 사물함, 에어컨, 캐비닛, 컴퓨터, 전자 오르간, 붓글씨 책상, 우 선생의 책상 등이 빼곡 들이차서 어지러웠지만 --- 거기에는 활기와 믿음과 사랑과 막힘없는 대화가 어우러져 자유와 행복이 해맑은 시냇물에 여울지는 햇빛처럼 일렁거렸다.
나는 생각한다. 우리 학교에서 교사와 학생들이 자유를 만끽하고 편안한 심정으로 두 다리를 쭉 뻗을 공간이 도서실 말고는 불가능한가. 교실이나 복도, 운동장이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 되는가.
나는 또 생각한다. 열린 교육, 열린 교육 하는데 교사와 학생들의 마음이 열리지 않고서는 교육이 열리지 않으리라고, 교사와 학생들의 마음이 열리는 비결은 사랑과 믿음뿐이라고. 97학년도의 도서실이 그러했던 것처럼.
98학년도에는 또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97학년도의 도서실에 최신식 설비를 갖춘 가사 실습실이 들어서면서 도서실은 또 2층 동쪽 끝 교실로 밀려난 것이다. 학생들이 또 나를 놀려댔다.
“선생님! 배경이 좀 시원찮은 것 아녀요? 그러니까 선생님이 도서실 맡으면서부터 한 해에 한 번씩 쫓겨 다니는 거지요.”
아닌 게 아니라 현재 우리나라 학교들에서 도서실의 위상이 이런 것인가 싶어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도서실이 어학실이나 가사 실습실에 비해서 푸대접을 받을 어떠한 이유도 발견하기 어렵다. 오히려 도서실이 학교 시설 중에서 심장부 구실을 해야 옳다. 가능하다면 학교마다 도서실에는 전담 사서 교사가 있어야 한다. 도서실이 보통 교실 서너 칸의 넓이라면 더욱 좋다. 거기에 열람대가 즐비하고, 서고에 양질의 책이 넘쳐 나고, 두어 학급이 동시에 수업을 진행할 수 있다면 더욱 좋겠지. 도서실에 책뿐만 아니라 복사기, 오디오 비디오에다 컴퓨터까지 갖추어 각종 첨단 문화를 경험하고 최신 정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면 오죽 좋을까. 거기에 무대라도 마련하여 때로는 연극도 하고, 유능한 강사를 초빙하여 강연회도 가질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있겠는가. 그러나 아직은 아니다.
아직은 도서실들이 초라하다. 초라해도 좋다. 거기에서 작은 즐거움이나마 찾아야 한다. 쫓겨 다녀도 좋다. 구석지로 밀려난 도서실까지 잊지 않고 쫓아다니며 도서계 선생의 배경이 시원찮아서 쫓겨났다고 놀려대는 학생들이 있는 한 도서계 선생은 행복하다. 가게가 번화가에 있으면 어떻고 변두리에 있으면 어떤가. 그래서 나는 현기증 나게 수선을 피우는 학생들에게 둘러싸여 오늘도 여전히 행복하다. 나는 모든 학교의 도서실, 또는 모든 교실의 교사와 학생들이 풍요롭고 따스하고 너그럽고 자유로운 공기를 들이마시며 나와 같은 작은 기쁨을 누리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한국교육신문 공모 교단 수기 최우수작 1999.1.1)
부록 14 (기행문 ‘미스 김의 터키’ 중 일부)
블루 모스크
보스포루스 해협을 경계로 동쪽은 아시아이고 서쪽은 유럽이다. 유럽 쪽 터키를 ‘트라키아’라고 부르는데 전 국토의 3%쯤 되고, 아시아 쪽 터키를 ‘아나톨리아’라고 부르는데 전 국토의 97%를 차지한단다. ‘아나톨리아’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해가 뜨는 땅, 동방의 땅’이라는 뜻이란다.
인구 천만 명이 넘는 현재의 이스탄불은 세 구역으로 나뉜다. 아시아 쪽 이스탄불은 최근에 발전한 곳이고, 유럽 쪽 이스탄불은 골든 혼(금각만)을 경계로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두 구역으로 나뉜다. 여러 유적이 밀집한 구시가지가 동로마제국의 수도였던 곳이고, 상가 등이 들어선 신시가지는 구시가지보다 늦게 발전한 곳이라 한다. 유럽 쪽 이스탄불을 둘로 나누는 금각만은 뿔처럼 튀어나온 곳에 저녁놀이 비치면 금빛으로 아름답다 해서 붙인 이름이란다. 금각만(골든 혼)에는 세 개의 다리가 놓여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연결한다.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유적이 널린 구시가지에 도착한 우리는 모처럼 점심을 한식식당에서 먹었다. 오랜만에 구경하는 고향 맛이라 반갑기는 했지만 반찬 가짓수도 그리 많지 않고 감칠맛도 별로 없어서 그냥 시늉만 낸 싸구려 식당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하기야 만리타국에서 고향 맛을 제대로 느끼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콩나물 총각김치 맛보여준 것만 해도 고맙게 여겨야겠지.
점심을 마친 우리들은 터키를 대표하는 이슬람 사원 블루 모스크를 구경했다. 터키 이즈닉 지방에서 만든 값비싼 푸른색 타일로 꾸며서 블루 모스크라 한다던가. 미스 김 말이 요즘은 사원이라 부르지 않고 ‘성원’이라 부른다던가.
블루 모스크는 술탄 아흐메드 사원이라고도 부르는데 오스만투르크 제국 14대 술탄 아흐메드 1세 때 1616년에 지었단다. 다른 곳은 첨탑이 두 개 네 개인데 블루 모스크만 여섯 개란다. 사원을 지을 때 미나렛(첨탑)을 황금으로 입히는 대신 여섯 개를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
넓고 높고 화려한 사원 안에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경건하게 기도를 올리는 장엄한 광경에 감회가 깊었다. “무늬만 이슬람이에요.” 미스 김 말로는 터키는 다른 이슬람국가들과는 달리 아타튀르크 때부터 종교의 자유를 명시해서 이슬람 색채가 많이 희미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블루모스크 예배당에 엎드린 숱한 무슬림을 보면서 아직도 터키에서는 이슬람교의 영향력이 크고 깊으리라는 짐작을 해보았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세계는 바야흐로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 문명이 충돌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나는 종교도 믿지 않으니 기독교나 이슬람교와 별 관계가 없지만 블루 모스크를 나오면서 세계 평화를 위해서는 기독교 문명과 이슬람문명이 의좋게 공존하기를 속으로 가만히 기원했다. 이슬람교의 원조는 아브라함의 동생 이즈마일이라 했는데 한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종교도 화합이나 화해를 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무슨 종교나 본래 사랑 자비 선행을 가르치지만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적인 시선은 뿌리 깊은 모순 아닐까.
블루 모스크의 정원 한쪽에는 수돗물이 있었다. 거기에서 무슬림들은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에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기 위하여 손발과 얼굴을 경건하게 씻고 있었다. 하루에 발 한 번도 씻을까 말까 한 나는 아주 많이 부끄러워졌다.
부록 15 (기행문 ‘지구촌 잔치 베이징’ 일부)
지구촌 잔치 베이징
내가 가 보았던 상하이, 백두산, 인도네시아 발리, 터키도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지만 북경 자금성만큼 넓은 면적에 많은 사람들이 와글거리는 광경은 처음 보았다.
중국 사람들도 평생 중국을 다 못 보고 죽는다던가. 자금성에는 물론 중국 사람이 가장 많았지만 한국말도 심심찮게 들렸고 금발 서양인, 가무잡잡한 중동인, 히잡을 두른 무슬림, 새까만 흑인들도 쉽게 눈에 뜨였다. 그야말로 인종 전시장이자 세계의 관광객들이 모조리 몰려든 모양새였다.
사람들은 자기의 삶을 언제 실감나게 확인할 수 있는가. 그것은 상대적으로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이다. 그것도 숱한 사람을 한꺼번에 만날수록 자기의 살아있음이 절실하게 깨달아진다. 나는 잉잉거리는 벌처럼 소음을 깔고 휩쓸려 다니는 자금성 전대미문 미증유의 군중들 속에서 벅차오르는 삶의 희열을 느꼈다.
그것은 경탄할 만한 삶의 축제였다. 멀고 가까운 지구촌 사람들이 돌고 돌아 몰려든 지구촌의 잔치마당이었다. 서로가 서로를 구경하며 놀라워했다. 자기처럼 인류로 태어나 같은 하늘을 이고 같은 시대를 헤쳐 나가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사실에 저절로 신명이 나고 흥이 돋았다.
악수라도 하고 싶었다. 보듬고 까칠한 볼딱지라도 비벼대고 싶었다. 팔짝팔짝 뛰는 당골네만 없지 영락없는 굿판이었다. 아니, 아니, 북소리만 없지 모두 폴짝폴짝 뛰는 무당인지도 몰랐다. 자금성만 한 바퀴 돌면 만사형통이었다. 굿판이 끝나면 기분이 후련해지고 온갖 잡귀와 잡념이 물러간 듯하였다.
북경은, 날마다 지구촌 사람들이 모여 벌이는 거대한 굿판이었다.
부록 16 (기행문 ‘솔솔 부는 봄바람’ 중 일부)
돌아가는 길
아침 먹고 좀 쉬었다가 리조트 특실을 나와 대천 항구로 갔다. 해수욕장에서 2킬로쯤 떨어진 곳인데 실은 거기가 수산물 시장도 크고 먹거리도 훨씬 풍성해보였다. 항구에서는 유람선도 다니는데 시간이 안 맞아 포기하고 죽도 항구를 구경했다. 언덕에서 바라본 선창은 배들이 다정하게 모여들어 봄 바다의 따스한 분위기가 완연하였다.
죽도에서 나와 무창포로 갔다. 전 박사의 말에 의하자면 무슨 주꾸미 도다리 축제를 한다 했는데 벌써 잔치가 끝난 모양이었다. 백사장 여기저기에 모닥불을 피운 듯 검게 그을린 흔적들이 많이 보였다.
잔치는 화려하고 가슴 설레지만 잔치가 끝난 뒷마당은 어쩐지 쓸쓸하고 애잔하고 서럽다. 우리들의 나이가 바로 잔치 끝나가는 나이다. 두보 시인은 인간 칠십 고래희라고 읊었지만 우리 나이가 벌써 고희를 바라보는 늙은이가 되었다. 스무 살 서른 살 마흔 살이 인생으로 치자면 축제 기간이다. 예순 일흔이면 잔치가 끝나고 마당에 흩어진 허섭스레기들을 치울 때다. 자기의 인생을 매조지하고 돌아갈 준비를 해야 할 때이다.
부처께서는 색즉시공이요 공즉시색이라 하셨으니 우리는 존재이면서 존재가 아니었다. 존재처럼 착각했지만 실은 영구불멸하고 부동불변하는 존재가 아니라 시공을 타고 흘러가는 변화의 한 과정, 반짝 나타났다 스러지는 한 때의 현상에 불과했다. 우리의 영원한 고향은 ‘없음’이다. 우리는 살짝 ‘없음’에서 ‘있음’으로 얼굴을 내밀었다가 다시 영원한 고향인 ‘없음’으로 되돌아간다. 그래서 죽는 것을 ‘돌아가신다’고 하지 않던가.
누군가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영생불멸이다.’라고 일갈했지만 사실 곰곰 따져보면 죽지 않고 무한정 살아간다는 것도 그것처럼 끔찍하고 두려운 일이 또 있을까 싶다. ‘있음’이란 오래 버틸수록 닳아지고 추레해지고 퇴색하고 흉해지기 마련이다. 자, 이제 우리는 무창포 해수욕장처럼 잔치를 마치고 백사장을 곱게 쓸어 깨끗이 매조지하고 개울을 건너뛰듯 가볍게 ‘있음’에서 ‘없음’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그게 과연 생각대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는지.
있어야 할 때에 있어야 할 것이 있는 것이 ‘있음’이요,
없어야 할 때에 없어야 할 것이 없는 것이 ‘없음’이라,
어디서 무엇이 되어 우리 다시 만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