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아나
모든 영화는 정치적이며 영화에 대한 모든 비평 역시 정치적이다. 영화는 결국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하는 문제이며, 그 시각의 차이에 따라 영화는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다. 다수의 대중들과 소통을 꿈꾸는 대부분의 영화는 현존하는 주류 질서의 지배 이데올로기에 복무한다. 그러나 소수의 영화들은 그 이데올로기 밖으로 튕겨져 나가면서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 그것은 위험한 일이다. 대중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사회의 안전한 틀이 깨지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는다. 따라서 상업적 제작/유통 시스템 안에서 이런 위험한 시도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시리아나]는 매우 위험한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전직 CIA 요원 로버트 베이어가 쓴 [악마는 없다]를 영화화했지만, 그 속에는 미국의 세계 지배에 대한 냉소적 시선이 깔려 있으며 미국의 국익을 해치는 폭로도 들어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트래픽]으로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한 스티븐 개건이 원작을 각색해서 감독 데뷔작으로 만든 [시리아나]는, 미국에 비우호적인 중동 산유국의 왕자, 그 왕자를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은 CIA 요원, 왕자의 사업에 참여한 에너지 분석가, 정유회사에서 해고된 뒤 테러리스트가 된 청년 등 각각 다른 영역에서 활동하는 인물을 따라 파편적으로 전개된다. 시간적 순서를 따라 내러티브가 질서 있게 선형적으로 펼쳐지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인물들의 파편화 된 이야기를 펼쳐 보인 뒤 그것들을 서서히 한 군데로 끌어 모은다.
그 중심에 석유가 있다. 미국의 중동 정책은 석유 이권을 확보하는 것이 최우선 목적이다. 중동의 왕위 계승자 나시르 왕자는 미국의 거대 에너지 기업 코넥스가 확보하고 있던 천연가스 채굴권을, 더 높은 입찰가를 제시한 중국에 넘긴다. 채굴권을 뺏긴 미국은 중동 왕에게 후계자로 나시르 왕자의 동생을 임명하라고 압력을 넣는다. 그리고 CIA는 은퇴를 앞둔 요원 밥(조지 클루니 분)에게 나시르 왕자 암살 임무를 맡긴다. 그러나 밥이 임무에 실패하자 조직은 밥을 버린다. 그리고 또 다른 방법으로 왕자의 암살을 시도한다.
에너지 분석가 브라이언(맷 데이먼 분)은 나시르 왕자의 파티에 갔다가 아들이 수영장에서 죽는 사고를 당한다. 나시르 왕자는 브라이언을 자신의 사업에 참여시키며 사고를 만회하려고 한다. 코넥스 정유회사는 칼린과 합병으로 더 많은 부를 창출하려고 한다. 변호사 베넷(제프리 라이트 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두 회사 사이에서 저울질한다. 밥이 이란에서 빼앗긴 미사일은, 정유회사에서 해고된 파키스탄인 와심(마자 무니르 분)에 의해 자살 폭탄 테러로 쓰여 진다.
이 많은 이야기들은, 꼭 보여줄 것만 보여주면서 빠르게 전개된다. 속도감 있는 내러티브는 수직적 질서로 계열화되는 것이 아니라, 수평적 만남과 충돌로 관객의 지적 몰입을 요구한다. 따라서 비대중적이다. 관객들의 정서적 몰입을 유도하는 동일성의 시도보다는, 이성적 논리로 지적 참여를 원하는 [시리아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본래 모습을 똑바로 보기 원한다.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음모와 부패로 뒤덮인 추악한 이 세계를,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 생존경쟁의 처절한 싸움터를, 냉정하게 보여준다. 이데올로기의 갈등은 대립적 계급들의 서로 다른 물질적 조건 속에서 잉태되는 것이다. 911 이후 아랍세계가 왜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자살테러까지 시도하면서 미국을 증오하고 있는지에 대한 미국 지식인들의 지적 반성이 [시리아나] 같은 영화를 가능하게 했지만, 그러나 그것 또한 역설적으로 미국 지배의 모순점을 보완해 주고 지속적인 이익 창출에 기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