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의 모델은 춘천출신 가수 지망생 윤기순(당시 18세)양이라한다. 소양강 처녀 노래말을 탄생시킨 작사가 반야월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을 거슬러 올라간 1968년으로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명보극장 앞 네거리에서 을지로 3가 방향으로 한 10여m 내려가다 보면 '한국가요반세기가요작가동지회'라는 사무실이 있었다. ....
이 작가동지회 사무실에는 윤기순(尹基順)이라는 18세 소녀가 여사무원으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여기서 일을 하게 된 동기는 장차 가수가 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시쳇말로 그녀는 가수의 화려한 꿈을 안고 서울에 온 강원도 촌구석에서 가난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난 가사를 돕는데 책임이 막중한 그런 소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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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기순의 아버지는 소양강에서 민물고기(주로 빙어·잉어·붕어·장어 등)를 잡아 생계를 꾸려 가는 어부였다.
윤기순의 부모는 서울에서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민물고기 매운탕을 끓인다, 토종닭을 잡는다는 등 부산을 떨고 있을 때의 여가를 틈 타, 윤기순은 반야월 선생에게 "회장님. 저기 조그마한 갈대 숲 섬이 보이시지요. 거기 가면 아주 경치도 좋고 놀기도 좋아요. 우리 저 섬으로 놀러가요."하고 청하는 것이었다.
노는데에 일가견을 가진 그들로서는 마다할 일이 아니었다.
일행은 나룻배를 타고 섬으로 건너갔다. 그야말로 시상(詩想)이 절로 떠오르는 주위 경치에 일행은 시상을 가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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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야월 선생은 이때의 느낀 감정을 메모해 두었다가 다듬고 다듬어 <소양강 처녀>라는 가사를 만들었다.
1969년 봄, 반야월 선생은 이 가사를 가지고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방문하여 신곡으로 쓰라고 내어 주자, 회사 문예부의 상담역이던 작곡가 이호 선생은 자기가 작곡하겠다고 자청했다. 가사가 마음에 들어 곧바로 악상이 떠오른 모양이었다.
노래에는 가수 지망생 중에서 김태희가 선택되었다.
당시는 음반 한장(보통 12곡)에 옴니버스 스타일이어 10여 명의 가수가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12곡의 취입이 끝난 뒤 회사는 어느 곡을 타이틀곡으로 정할 것인가 하는 고민 끝에, 오아시스 전 직원을 모아놓고 노래를 들려준 후 무기명 투표로 타이틀곡(PR곡)을 결정하기로 했고 여기서 김태희의 <소양강 처녀>가 뽑혔다.
LP음반이 나오자 김태희(본명 박영옥)의 아버지는 답례로 반야월 선생에게 양복 한 벌을 선사했다는 후일담도 있었고, 편곡은 박시춘 선생이 먼 친척 조카뻘이 되는 김태희를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는 것이었다.
어쨌거나 <소양강 처녀>는 대 히트를 했다.
그녀는 〈소양강 처녀〉로 1970년도 가요 신인상을 수상했다. 당시 톱 가수 남진의 〈님과 함께〉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와중에서도 1O만장이 넘는음반 판매고를 기록, 가요계를 놀라게 했다.
첫댓글 난 현제의 소양강 처녀보다 왠지 그옛날 들었던 이노래가 더 좋다 ㅎ김태희의 노래
더 감성적인거 같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