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이 88년 대학가요제에 무한궤도 멤버로 '그대에게'를 들고 처음 등장했을 때, 화질이 마치 흑백과 컬러의 중간처럼 보이는 예전 텔레비전 화면 속의 그는, 최근의 모습만으로는 잘 상상이 되지 않는 마르고 앳된 학생이었다. 하지만 지극히 쉽고 간단한 노랫말로 '언제 어디에서든 영원히 널 사랑해!'라고 시작부터 끝까지 당당하게 소리치는 그의 모습은 많은 대중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로부터 사반세기 남짓, 신해철의 삶과 음악은 우리가 살았던 한 시대를 그대로 표현했고 또 그는 언제나 전위에서 활동했다. 시대의 욕망이 신해철에게 곧장 투영되었고, 그의 음악은 그것이 나온 때의 한국사회를 정확히 반영하고 있었다.
요즘 20살 짜리 대학생이 과연 '그대에게'와 같은 사랑 노래를 만들 수 있을까? 시작하자마자 클라이막스가 나오듯 쉼없이 무조건 달리는 멜로디에, 전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사랑만을 위해 오로지 전진만 하겠다는 가사. 이것저것 늘어놓지 않고 단순하게 그냥 냅다 사랑한다고, 절대 널 포기할 수 없다며 온 힘을 다해 나한텐 너뿐이라고 선언하는 노래. 아마도 민주화의 기운이 사회에 가득했던 88년 어떤 낭만적인 한국 젊은이들의 사랑은 정말 이랬을 테고, 또 이런 음악이 대중에게 먹혔을 것이다. 그때는 지금처럼 20~30대가 연애, 결혼, 출산을 절망적으로 포기하는 시대가 아니었으니까..
현재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여자친구(또는 남자친구) 있냐?"는 말을 웬만해서는 잘 물어보지 않지만, 90년대 이전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처음 만나면 가장 기본 레퍼토리가 이거다.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무슨 일을 하냐?"라고 묻는 게 때로는 실례가 되기도 하듯이, 이제 애인 있냐고 물어보는 것도 20~30대에겐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는 질문이 된 것이다. 그럼에도 좀 친해지면 누군가 물어보는데, 너무나 당연하게 "아니오"라는 대답을 하면 그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그 나이에 연애도 안하고 뭐하냐"다. 우리 때는 잘났든 못났든 다들 연애하느라 바빴는데, 요즘 젊은애들은 도대체 뭐하는지 모르겠다고.. 88년에 신해철이 그대에게를 불렀을 당시는 바로 그런 시대였다.
또한 88년에는 그 이름도 찬란한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오랜 군사독재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그래도 조금씩 뭔가 나아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으며, '굶어 죽는다'라는 표현이 더이상 흔치 않게 된 시점에 올림픽을 개최한 것이다. 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88년에는 올림픽을 개최하면서 이 나라는 마침내 의심의 여지 없는 후진국에서 점차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약 10여 년간 그러니까 IMF가 터지기 전까지는 어쨌든 '발전'이라는 단어가 그리 어색하지 않았고, 궁색하고 부실할지언정 일종의 설렘과 긍정적 기운이 사회에 아직 돌고 있었다. 그리고 신해철의 '전성기'도 이 시기였다. 신해철의 음악을 들으며 수많은 젊은이들의 심장이 요동치던 시절.
여느 대학밴드와 같이 '무한궤도'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신해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솔로데뷔 앨범을 내고 성공가도를 달린다. 본인도 말했듯이 무명시절이 없는 인기가수가 되었고, 유명 라디오 프로그램의 DJ까지 맡는다. 20살이 되자마자 대학가요제 대상을 받고, 20대 초반에 성공적인 솔로데뷔를 했으며, 20대 중반을 최고 인기의 록그룹 '넥스트(N.EX.T)' 리더와 공중파 라디오 DJ로 화려하게 수놓은 신해철. 그는 이즈음 아시아의 승천하는 용으로서 국제무대에서 큰 주목을 받던 대한민국과 많이 닮아 있다. 그때는 신해철처럼, 한국 사회도 젊었다. 거침이 없었고, 어떤 희망이 있었으며, 최후의 낭만이 어느 정도 남아 있었다. 신해철의 20대는 넥스트의 주옥같은 명반들과 함께 찬란히 빛났고, 그것은 곧 우리가 살았던 한 시대의 힘찬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N.EX.T - 아리랑(Arirang) [1997년 무주·전주 동계 유니버시아드 대회 폐막식 음악 中]
하지만 1997년 말에 넥스트는 해체하고, 우리는 끝내 IMF 구제금융에 들어선다. 그러나 이게 끝은 아니었다. 신해철은 영국으로 음악유학을 떠나 새로운 음악을 준비하고, 한국의 유권자들은 놀랍게도 정권교체를 이뤄낸다. 이후에도 신해철은 나름 활발히 음악활동을 계속 했으며(MONOCROM · 비트겐슈타인), 한동안 수많은 화제를 뿌렸던 라디오방송 '고스트스테이션'도 진행했다. 그리고 IMF 외환위기라는 전대미문의 특수상황 속에서 탄생한 김대중 정권은, 정말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민주정부 2기 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지며 지금으로선 아득하게만 느껴지는 10년 간의 '인디안 썸머'를 맞이한다.
이때 중요한 기점이 바로 2002년 월드컵이었다. 신해철은 '붉은악마'와 함께 공식 응원앨범을 통해 그 유명한 "대.한.민.국! 짝 짝 짝 짝짝!" 구호를 선보이며 월드컵 열기의 최전선에서 주효한 역할을 한다. 월드컵 기간 내내 신해철이 만든 응원구호가 온 나라에 연일 울려퍼졌고, 요즘도 한국대표팀의 국가대항 스포츠경기가 있을 때면 어디서든 자연스럽게 등장하는데, 이 역시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커다란 선물인 셈이다. 서울올림픽 이후 14년, 국민들은 월드컵을 통해 많은 자신감을 얻었고 명실상부한 선진국의 꿈을 꾼다. 그런 강력한 기운으로 대한민국의 기존 질서와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상고출신 노무현을 과감하게 선택했고, 신해철은 2002년 대선 당시 노무현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며 직접 선거유세에 참여하기도 했다.
신해철 - Into The Arena [2002년 한일 월드컵 붉은악마 공식 응원앨범 中]
그러나, 1997년이나 2002년과 같은 행운이 2007년에 또다시 찾아오진 않았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희망은 노무현의 실패와 함께 막을 내렸고, 그 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는 극단적인 퇴행의 시대가 계속되고 있다. 신해철은 노무현의 죽음 앞에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눈물을 흘렸고, 최근에 새 앨범 소식이 전해지긴 했지만 한동안 이렇다할 눈에 띄는 활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게다가 2009년에 신해철은 사교육 광고에 출연함으로써 괜한 의구심을 샀고, 그것 자체의 떳떳함이나 논리적 타당성과는 무관하게 신해철이 가지고 있던 기존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는 행동일 수밖에 없었으므로, 대중들은 일종의 상징적 실망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일들은 신해철에 대한 팬들의 지지나 이해와는 또다른 차원의 문제였고, 어떤 식으로든 일반 대중의 힐난을 피하기는 어려웠다(이런 측면에서 '서태지 팬덤과 사회적 인식', '신해철 팬덤과 사회적 인식'은 꽤 많은 차이가 있지 않을까 싶다). 그는 88년부터 10년 동안의 전성기와 98년부터 이후 10년 간의 인디안 썸머를 지난 뒤, 한국사회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하자 점차 대중의 관심·음악적 중심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퇴행의 가속화가 한창 비극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 새 앨범을 들고 의욕적으로 다시 대중 앞에 서려고 했으나, 결국 이렇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다.
[출처: 뉴시스]
신해철의 영정 사진 앞에서 이런 생각도 한번 해본다. 바로 베토벤과 그의 시대에 관한 상상이다. 앞세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 그리고 뒷세대인 쇼팽이나 리스트와는 달리, 베토벤은 시민혁명의 힘찬 기운을 온전히 다 누린 음악가였다. 고전주의 작곡가인 하이든과 모차르트는 혁명 전 귀족의 핍박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낭만주의 작곡가인 쇼팽이나 리스트는 혁명 이후의 반동과 부르주아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베토벤은 오로지 혁명의 설레임과 흥분·변화의 밝고 강력한 힘만이 가득한 세상을 보았고, 그는 자신의 세계관과 성격에 부합하는 인생을 살아나갔으며, 또 그렇게 위대한 음악을 만들었다.
혁명을 이뤄낸 시민사회가 가진 최고조의 희망이 베토벤의 음악 속에 오롯이 담겼으며, 그것은 지금까지 그 어떤 음악가도 베토벤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영광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다. 비록 진정한 혁명의 좌절 · 반동의 시대가 시작될 무렵 청력을 대부분 상실하고 외부세계와 단절되기는 했지만, 어쨌든 베토벤의 삶과 음악은 그 자체로 찬란한 혁명의 산물이었다. 반면에 신해철은 한국사회의 희망과 발전, 좌절과 퇴행을 양쪽 모두 겪었다. 88 올림픽부터 2002 월드컵까지, 군사독재부터 민주정부를 거쳐 반동정권까지, 그는 전위에서 이걸 다 경험하며 음악을 만들었다. 노무현의 실패와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렸고, 요즘 젊은세대의 포기와 체념을 보며 가슴 아파했다. 신해철의 삶과 음악에는 말 그대로 '흥망성쇠'가 고스란히 다 담겨 있는 것이다. 과연, 베토벤과 신해철 중에 어떤 삶이 더 완전한 삶일까?
아무튼 신해철의 죽음으로 우리가 살았던 어떤 한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한국인들의 평균적인 수명을 생각했을 때 신해철은 그리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최근 몇 년 사이에 건강이 급격히 나빠진 걸로 보인다. 누구라도 한눈에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심하게 들쭉날쭉한 40대 신해철의 체중 변화는 모두가 염려를 할 수밖에 없는 부정적 신호였고, 오래된 팬으로서 보기에 종종 노무현 추모공연처럼 공개된 무대 위에서 행한 그의 퍼포먼스가 예전같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몇 살 더 나이가 많은 이승환의 외모와 퍼포먼스를 신해철과 비교해 보면 이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제반 상황과는 별개로, 신대철도 제기한 바 있는 '의료사고' 의혹은 철저히 규명되어야만 할 것이다]
이제 신해철도 하늘나라로 갔고, 그와 함께 했던 시대는 절대 다시 돌아올 수 없다. 그의 데뷔 이후 사반세기 남짓한 세월, 한국사회는 아시아의 비상하는 용으로서 급격한 사회 발전을 겪었고 IMF 구제금융 속에서 놀라운 정치 변화를 이룩하기도 했다. 하지만 압축 성장으로 인해 기본적으로 부실한 사회시스템과 길지 않은 민주화 역사 때문인지 그 결과는 슬프게도 '좌절'로 남았고, 지금은 반동과 퇴행의 시대를 걸어가고 있다. 현재 초저성장 장기불황 시대에 접어든 대한민국은 앞으로 인구감소와 재정위기를 피할 수 없으며, 향후 몇십 년 동안 지속적인 쇠락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아마도, 어린 눈으로 신해철의 데뷔와 전성기를 지켜본 팬들은 그의 죽음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짧디짧은 성공과 길고긴 실패'도 처음부터 끝까지 다 경험하게 될 것이다. '신해철세대'는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http://arthurjung.tistory.com/466
첫댓글 아는 형이 돌아가신것 같은.. 좀 울림이 있는 사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