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9장은 요한복음 8장에 대한 해설이고, 요한복음 10장은 요한복음 9장에 대한 해설입니다. 요한복음 9장은 예수께서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고치는 표적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께서 표적을 행했습니다. 그런데 표적을 행한 것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요한복음 5장과 같이 안식일의 율법적인 의미(하고, 안 하고의 문제)에만 집착하는 유대인이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죄인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그가 한 일에 대해서 시비를 하는 장면입니다.
시비는 직접 예수와 바리새인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병 고침을 받은 자와 논쟁, 그 부모와의 논쟁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 논쟁을 통해서 예수께서 병든 아이의 눈을 뜨게 한 사건이 무엇을 표적 하는지 의미를 밝히는 것으로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요한복음 8:12절의 “내가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에 대한 주석으로 그 내용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9장은 요한복음 8:12절의 주석입니다.
본문 1~2절을 보면 제자들이 나면서부터 소경 된 자를 발견하고, 이 사람이 이렇게 소경 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 즉, 죄와 병과의 관계를 묻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주 육신적인 질병을 앓으면 죄와 관련되었다고 연결하고, 질병을 죄에 대한 형벌로 곧장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질병과 죄는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죄에 대한 징벌로 병을 받습니다. 그래서 죄를 용서해 준다는 것과 병고의 상태로부터 구원해 준다는 사실이 동의어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가령 시편 103:3절을 보면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보면 죄를 사함과 병 고침의 동의어로 쓰고 있습니다. 이 시편 103편은 예수님이 특별히 좋아하는 시편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주기도문이 이 시편 103편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또 예수님의 많은 죄 사함의 비유와 하나님 나라의 비유는 시편 103편을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마가복음 2:1-11절에 나오는 예수님과 중풍 병자 사건에서 병 고치는 사건을 용서로 표현합니다. 이것도 시편 103편에 근거합니다. 죄 용서하는 것이 곧 병 고침입니다. 이렇게 죄와 병고는 동의어로 쓰이기도 하고, 원인과 결과로 연결되어 있기도 합니다.
우리 모든 병고는 계속해서 죄로부터 유발합니다. 하나님의 생명으로부터 분리된 상태로부터 병고가 시작됩니다. 모든 병고는 죄로부터 유발이 됩니다. 모든 병고는 죄가 우리에게 가져오는 죽음의 증상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질문이 가능합니다. 눈먼 자가 누구의 죄 때문이냐? 답은 병고는 죄로부터 유발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여기까지만 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병고는 죄와 1:1로 연결이 되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혼자 사는 것이 아니고 연대성 속에서 살기 때문에 이웃의 죄가 나에게 고난을 가져오기도 하고 이웃의 선이 나에게 유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나의 죄가 이웃에게 고난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나의 선함이 이웃에게 복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온 피조물이 연대성 속에 있어서 천재지변도 어느 정도 이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피조 세계가 연대성 속에 있으므로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고난을 받고 피조물의 황폐함이 인간에게 고난을 줍니다. 많은 사람이 고난이 닥치면 스스로 내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불교 용어로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는가? 하는 생각이 곧장 나옵니다. 꼭 나의 죄 때문에 내가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부모의 죄가 아닙니다. 예레미야 31:29~30절을 보면 “그때 그들이 말하기를 다시는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아들들의 이가 시다 하지 아니하겠고 신 포도를 먹는 자마다 그의 이가 신 것 같이 누구나 자기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죽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연좌제를 성경은 반대합니다.
3절을 보면 이에 대해 예수는 그 사람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 사람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고 이 사람이 소경 된 것은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14절). 결국 안식일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 논쟁이 붙습니다. 이 사람이 안식일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반응은 죄인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느냐? 눈을 뜨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느냐? 입니다.
이 논쟁이 유대인들 간에 붙었다가, 나중에 바리새인과 소경과 똑같은 논쟁이 벌어집니다(17~34절). 이 논쟁 속에서 우리는 세 가지 부류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부모입니다. 둘째 소경입니다. 셋째 바리새인입니다.
먼저 부모입니다. 부모도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의 눈을 뜨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부모도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자로 그리스도임을 압니다. 이분은 분명히 하나님에게서 오신 자인데,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리스도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 19:18~19, 35:5~6절에서 종말에 메시아가 하나님에게서 와서 절름발이를 고치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는데, 그가 자기 아들 소경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그리스도입니다. 다만 그 부모는 그 신앙고백을 하기를 회피하는 자들입니다. 공개적으로 하기를 회피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예수는 그리스도다고 한 자들은 출교하기로 결의했기 때문입니다(22절). 이 부모는 유대 공동체로부터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둘째 소경은 부모와 달리 예수가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로 인정했고(17, 33절), 출교를 당했습니다. 당시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유대교에서 종교적으로는 구원의 가능성에서 배제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엄청난 피해가 오느냐면 유대 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완전히 삶의 터전을 잃게 됩니다. 팔레스타인도 그렇고 디아스포라 세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 공동체의 일원으로서만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출교를 당하면 삶의 터전을 잃습니다. 그래서 부모와 같은 태도를 보이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구원은 체험하고 능력을 알고도 공개적으로 나타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출교를 무릎 쓰고 신앙고백을 합니다. 이 사람은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 메시아로서 인정하고 고백하여 출교당하는 것이 구원의 가능성으로부터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원을 얻는 길이라고 여겼습니다.
35~41절을 보면 이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대화 가운데서 더 깊은, 더 올바른 신앙으로 인도합니다. 35절을 보면 예수님이 눈을 뜨게 된 사람이 쫓겨났다는 말을 듣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라고 묻습니다. 36절을 보면 소경이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37절을 보면 예수님이 소경에게 “네가 그를 보았고 내가 그 사람이다”라고 말씀합니다. 38절을 보면 소경이 “주여 내가 믿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36절의 “주여”는 “선생이여” 정도라면, 38절의 “주여”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신앙고백의 대상이고, 자기의 병을 고쳐준 분임을 안다는 충분한 의미가 있는 “주여”입니다.
38절을 보면 절을 합니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예배했습니다. 예수님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그 사람에게 계시하자, 소경은 그를 주로 부르고, 주에 대한 마땅한 태도로 무릎을 꿇고 예배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께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이 자기의 눈을 뜨는 것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지자 그리스도인 것까지 고백한 사실입니다.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의 아들임을 예수님 스스로 계시했을 때 예수를 올바로 이해하고 그에게 예배합니다.
셋째,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가 안식일을 범했다는 이유로 예수가 죄인인 것을 제삼, 제사 확인하려고 한 사람들입니다. 무엇에 의해서 예수가 죄인인 것을 확인하려 했습니까? 하나님의 계시인 모세의 율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빛인 율법에 따라서 판단합니다. 자기들의 율법에 따라서 예수님의 하신 일을 판단하려는 사람들입니다. 즉 마음이 닫힌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눈을 감아 버린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계시를 보지 못했고, 알지 못하고, 그리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적대자가 되었습니다.
요한복음 8:12절을 보면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분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종말에 있을 생명의 물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빛을 가져오는 분이십니다. 첫 번째 출애굽을 이루신 예수님이, 이제는 제2의 출애굽을 구원을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궁극적으로 구원을 완성하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토록 목마르지 아니한 생명수(요한계시록 22:1~2), 영원한 진리의 거룩한 빛입니다. 빛 되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계시를 가져오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눈이 뜨여짐으로, 빛과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그리고 그 앞에서 절하는, 즉 무릎 꿇고 진정한 예배자로 서는 모든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