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는 마음 깉는 마음
함석헌
씨알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979년 8월 11일 이른 아침입니다. 오늘 오후 나는 스위스를 향해 나라를 떠나야 합니다. 거기서 열리는 퀘이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회의는 한 주일밖에 안되지만 그것을 마치고는 유럽과 미국에 있는 동포들도 찾아볼 겸 세계를 또 한 번 돌 작정입니다. 그러노라면 네다섯 달은 들어야 할 것이므로 잠깐 동안 여러분의 곁에 있지 못하게 되겠습니다.
씨알은 영원 무한을 몸속에 지니고 있는 있음이니 떠나고 깉어 있음이 어디 있으며 만나고 못 만나고가 어찌 있겠습니까마는 사람은 역시 사람인지라 자연 여러 가지 생각이 나서 이 붓을 들었습니다.
떠나고 만남은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입니다. 어느 의미로는 인생 전체가 떠나고 만남의 되풀이 연속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이에 있어서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러고 보면 인간관계는 교류전기(交流電氣)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전기에는 교류(交流), 직류(直流)의 두 가지가 있습니다. 직류는 +에서 -로 줄곧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고 교류는 흐름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입니다. 아주 빨리 되풀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알아보지는 못하지만 사실은 그 끊어졌다 이어졌다 하는 것이 무한번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건전지의 전기는 직류이고 그외의 우리 쓰고 있는 전기는 모두 교류라고 합니다. 물리학자가 아닌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할 순 없습니다만 그렇게 끊었다 이었다 하는 것이 하구장창으로 잇대어 두는 것보다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 모든 이치가 하나입니다. 사람의 정신적 사귐의 관계도 그렇습니다. 교류가 직류보다 좋습니다. 떠남은 아쉽지만 늘 붙어만 있으면 사람의 감정은 무디어버리고 식고 썩어버립니다. 떠나고 만남이야말로 생명의 신비론 자기발전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옛사람은 부즉불리(不即不離)라고 했습니다. 붙음도 아니요 떨어짐도 아니란 말입니다. 붙어만 있어도 못 쓰고 떨어져만 있어도 못 씁니다. 부즉불리가 되려면 자연히 즉리즉리(即離即離)가 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될수록 빨리 될수록 자주자주 떨어졌다 붙었다 하는 것이 이상적입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의 격언에는 “귀여운 아기는 여행을 시켜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를 귀히 여기셔서 나라를 잠깐 떠나게 하시는가 봅니다. 나를 깨우치시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떠남에 대하는 길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도령 식이고 하나는 방자 식입니다. 여러분이『뿌리깊은 나무』이번 달 호를 보시면 거기 안병무 박사가 내『새벽을 기다리는 마음』에 대한 서평을 쓰신 글이 있는 것을 보실 것입니다. 거기 내가 몇 해 전에 묵은해 보내고 새해 맞는데 대해 “하, 하, 하, 웃고” 보내자는 말을 하면서 이도령과 방자를 비교해 말했던 것을 인용하신 말이 있습니다. 거기서도 말했듯이 나는 이도령보다는 방자가 훌륭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도령은 아주 잘못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잘못은 철저치 못한 데 있습니다. 방자의 길은 허허 웃는 초탈한 태도인 데 반해 이도령의 길은 알뜰살뜰한 태도입니다. 한산(寒山)이나 방자가 초탈하는 데서 철저했듯이 이도령이 정말 춘향을 ‘뼈가 빠지도록’ 놓지 못해했다면 됐을 것인데 이도령은 아무리 애끊는 생각을 한다 해도 역시 종당엔 놓고 갈 것이 뻔한 것이었습니다. 그래 방자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입니다.
만나고 떠남에 정말 알뜰하잔 것은 현실을 공정함으로써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허허 웃자는 것은 현실을 부정함으로써 초월하자는 것입니다. 둘이 사실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부정함으로써 하는 초월은 비교적 쉽습니다. 긍정함으로써 하는 초월은 더 어렵습니다. 부정하는 초월에서는 세계가 나에 대하여 죽어야 하지만 긍정하는 초월에서는 내가 세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이것이 옛날 동양적인 도통(道通)과 기독교적인 새로 남이 다른 점입니다.
알뜰 초월의 표본은 아무래도 예수입니다. 그리고 현대에서 그것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준 것은 간디입니다. 도통의 경지는 비록 거기 이르지 못했더라도 어느 지경에 이르면 짐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시옵니까?”는 그 자리에 가기 전엔 도저히 상상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전의 대부분은 아마 거짓일 것입니다.
하여간 이젠 긴 말씀을 드릴 수는 없습니다. 떠날 시각이 가차없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요한복음」13 장을 다시 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자기 것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끝까지란 어떤 정도일까?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는 데서부터 “이것이 내 살이다, 이것이 내 피다” 하시는 말, 심령이 몹시 어지럽다고 하시던 말, 그리고 유다가 빵조각을 들고 어둠 속으로 사라져버린 후 막았던 동뚝이 무너지듯 쏟아져 나오는 생명의 말씀, 그리고 나중의 “다 이루었다” 하실 때까지를 미처 숨을 내쉴 겨를도 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도대체 그것은 어떤 마음이요 어떤 고민 아픔이요 어떤 영광의 찬송일까? 그런 생각을 하노라면 모든 설교자의 말이 다 맛이 없어지고 모든 예술가가 미워집니다. 그런 지경에 방자의 익살이 들어갈 틈이 있을까? 그렇습니다. 방자놈이 인생에 갖은 아픔, 슬품, 업신여김을 당치 않았다면 그 부지일소(附之一笑)하는 초탈의 “하하하”가 나왔을 수 없을 것입니다. 나는 장자도 좋아하고 노자도 좋아해 없이는 못살 것입니다. 그러나 남들은 어쩐지 나는 “나를 보자 아버지를 본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나를 믿는 것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라” 하는 이 예수밖에는 내 주가 없습니다. (우리 공동번역에 “나뿐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까지”라고 한 것은 잘못이다. 둘이 아니라 하나가 있을 뿐이다.)
어제는 그 바쁜 중에 판문점에를 갔고, 땅굴 방문을 했습니다. 나는 자유의 집에 올라갔었습니다. 그러나 내 자유는 새삼 더 자란 것도 없습니다. 올라갈 때도 내가 올라갔고 내려올 때도 내가 내려왔습니다. 나는 건너편 판문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내 나라에 대한 생각은 더해진 것도 덜해진 것도 없었습니다. 거기서 사람들이 나와 이쪽을 바라보고 사진을 찍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렇지만 밉지도 무섭지도 않았습니다.
또 거기서 내려와서 땅굴 제3호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이쪽에서 탐사 하노라고 판 3백 미터 저쪽에서 파 들어온 5,630미터 중의 2백 미터를 들어가 보았습니다. 땅 밑 73미터 바위층을 뚫은 것입니다. 나는 보고 놀라지도 않았고 겁이 나지도 않았습니다. 암벽에는 전기 착암기로 뚫은 무수한 다이나마이트 구멍자국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내 가슴엔 만 분의 1밀리도 뚫린 것 없었습니다.
새로 얻은 것이 있다면 가장 낡은 인간의 어리석음, 완고함이 있을 뿐입니다. 굴 안은 참 시원했습니다. 그렇게 상처를 입었지만 사랑하는 어린 것에게 뺨을 맞은 엄마의 태연함 같은 우리 대지의 어머니의 태연함에서 오는 시원인 듯 느껴졌습니다. 굴 밖을 썩 나서니 풀무간에 들어가는 듯 말복 더위가 조여드는 듯했지만 역시 청천백일이 좋았습니다. 나는 홀로 입속에서 “인간이란 이렇게 어리석은가?” 했습니다. 녹음이 물결치고 푸른 임진강이 영원의 행진곡을 아뢰는 그것을 놓고 땅 밑 73미터를 들어가 적군을 폭파할 것을 생각하면 3년도 더 되는 세월을 거기서 굴을 파고 있었을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 우주의 감옥을 제가 택해 죄수가 된 것입니다. 미운 생각은 아니 나고 불쌍해 견딜 수 없었습니다. 싸움은 백곰과 푸른 독수리가 하는 싸움인데 너는 무슨 죄로 거기에 말려들었느냐, 이 민족아!
계획이란 어리석은 것입니다. 모래 위에 쓰는 글자가 그대로 있다면 세계를 한 바퀴 돌아 크리스마스 무렵 고와도 내 님 미워도 내 님인 이 땅으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정말, 정말, 안녕!
씨알의 소리 1979. 9월 87호
저작집; 9- 293
전집; 8- 4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