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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법문>
..... 기준이 되는 이 문제입니다. <주: 첫째 날 앞부분 일부말씀은 원본 녹음이 소실된 것으로 추정>
반야般若가 무엇인가? 반야般若 이것은 풀이해서 참 지혜智慧입니다. 참 지혜! 이것은 그냥 우리 인간이 축적한 그런 지식이 아니라 이것은 깨달아서 말입니다. 번뇌煩惱를 떠나버린 참다운 성자의 그런 참다운 마음에서 일어난 지혜가 이것이 반야란 말입니다. 따라서 일반 중생한테는 사실은 반야는 없고 성자한테만 반야가 있습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반야란 말입니다. 헌데 인도 말로 하면 이것(반야般若)은 '프라즈냐prajñā', 인제(그러니까) 이것은 인도 말을 따서, 인도 말이라 놔서 한문자漢文字로 해서 일반 반般자, 같을 야若자, 반야란 말입니다. 이것은 원래 음音은 인도 음입니다. 인도 음인데 한문자漢文字로 해서 즉 말하자면 반야라고 붙입니다. 아까 말했습니다만 '참 지혜' 또는 '해탈의 지혜'가 이것이 반야의 지혜입니다.
마하(摩訶, mahā, 대大ㆍ다多ㆍ승勝ㆍ묘妙) 이것은 '위대하다' 말입니다. '거룩하다' 는 뜻입니다. 마하가 말입니다. 위대하다 거룩하단 말입니다. 따라서 마하반야摩訶般若 이것은 거룩한 지혜가 마하반야입니다. 바라밀波羅蜜이라는 것은 이것도 역시 불교에서 많이 씁니다만 '도피안到彼岸'이라, 이를 도到자, 피안은 이쪽은 (차안此岸이고) 저쪽은 피안彼岸 아닙니까. 가사 냇이 있으면 말입니다. 냇이나 바다가 있으면 바다 건너 저쪽이 피안이란 말입니다.
이쪽은 차안이고 말입니다. 다시 더 풀이해서 말씀하면 우리 중생이 사는 번뇌에 쌓인 중생이 사는 그런 세계는 이것은 차안此岸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또는 중생이 고해苦海를 건너서 저쪽 즉 말하자면 저 언덕 이것은 피안인데, 피안은 즉 말하자면 해탈解脫의 경계 또는 극락세계極樂世界 이것이 피안에 해당합니다. 피안에. 따라서 바라밀이라는 것은 도피안이라, '피안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피안에 도달한다는 말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
따라서 한 번에 이 풀이를 말씀드리면 '피안彼岸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골수인, 즉 말하자면 경經'이란 뜻입니다. 심경心經 이것은 경 가운데서 제일 골수骨髓 제일 골목, 즉 말하자면 정수精髓 같은 그런 경이라, 심경이란 뜻입니다. 피안에 이르는 즉 말하자면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의 가장 귀중한 경' 이것이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摩訶般若波羅蜜多心經입니다. 부처님 경전은 무슨 경經이든지 이렇게 소중하지 않는 경이 있으리요마는 이 반야심경般若心經은 아까도 말씀마따나 가장 짧은 동시에 불교의 모든 철학을 거기에 함장函藏을 시켜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 바와 같이 녹음하면 말을 잘 못해, 못해서 이렇게... <주: 1987년 당시에 태안사 선방 수좌스님이 녹음하였습니다.> 지금 짧은 시간에 반야심경을 전부 다 풀이할 수는 없습니다만 여기에 써놓은 이것만 풀이하면 나중에는 그냥 술술 자기 스스로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반야의 골수이니까 말입니다. 바로 내용 풀이해 가십시다. 아까 말씀마따나 피안에 이르는 영생의 해탈에 이르는, 우리 중생은 지금 죽고 살고 또는 헤매고 말입니다. 번뇌를 일으키고 하는 우리는 지금 차안에 있는데, 우리 중생의 그런 고생스런 고생 바다를 건너서 말입니다. 영생의 저 언덕, 영생의 피안에 이르는 거룩한 지혜智慧의 즉 말하자면 가장 중요한 경經이란 뜻이란 말입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이나 똑같습니다. 똑같으나 관세음보살을 보다 더 의미로 해서 말입니다. 의미로 해서 깊이 새길 때 관자재보살이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주 전체의 성품과 현상을 조금도 빠짐없이<오디오 누락구간>) 모든 것을 자재롭게 조금도 이렇게 막힘이 없이 말입니다. 원만무결圓滿無缺하게 관찰觀察할 수 있는 보살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본다고 할 때 그냥 따지기도 하고 뭣도 하지만 우리가 막히곤 맙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항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입니다. 허나 그와 같이 막히지 않고서 상대유한적이지 않고서 절대적이고 말입니다. 부처님과 같이 그와 같이 모든 것을 다 알 수가 있고 다 할 수가 있고 천지 우주를 다 통달하는 일체를 다 아는 그런 자재自在로운 지혜 또는 자재롭게 모두를 다 관찰觀察하는 그런 보살이란 뜻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도인道人이 아니면 할 수가 없지요. 그러기에 원칙은 관세음보살은 우리 중생을 구제救濟한다는 자비로운 보살이라는 거기에만 국한이 안 되고 말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를 다 알아서 일체 모든 것을 다 (알고) 생사를 다 초월超越할 수 있는 지혜를 알아가지고서 일반 중생을 영원의 저 언덕으로 인도하는 그런 보살 이것이 관세음보살입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관세음보살은 중생의 모든 고난 소리를 다 들어서 말입니다. 고난 소리를 다 듣고서 그대로 알맞게시리 제도하는 보살이 관세음보살인데 우리가 의미로 풀이할 때는 방금 말씀마따나 일대사를 자유롭게 조금도 막힘이 없이 통달무애通達無礙하는 그러한 지혜를 갖춘 그런 보살이, 즉 말하자면 '위대한 도인이' 그 말이나 같습니다. 모든 것을 다 깨달아 버린 그런 도인이,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蜜多時에
깊은, 깊을 심深자, 아주 깊은 그런 피안에 이르는 그런 지혜를 말합니다. 지혜를 행할 때 말입니다. 반야 이것은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지혜 아닙니까. 그냥 중생이 따지는 그런 지식이 아니라 이것은 참다운 해탈解脫의 지식, 해탈의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반야하고 지식과는 우리가 구분해야 합니다.
아까 말씀마따나 일반 중생이 축적한 여러 가지 알고 모르는 즉 이것은 지식에 불과한 것이고, 반야 이것은 참다운 영생永生의 지혜란 말입니다. 즉 위대한 도인이 맨 처음에 이와 같이 영생의 그런 피안에 이르는 영생의 지혜를 닦을 때 행할 때에 관자재보살이 깊고 깊은 영생에 이르는, 즉 우리 중생의 고난을 떠나서 해탈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하는 그런 지혜를 닦을 때에 어떻게 했는고 하면,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비출 조照자, 볼 견見자 말입니다. 다섯 오五자, 쌓을 온蘊자 길게(오랫동안) 이렇게 쌓는다는 뜻입니다. 쌓을 온蘊자, 다 개皆자, 빌 공空자, 오온五蘊이, 다섯 가지 쌓여있는 것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추어 본단 말입니다.
오온五蘊은 무엇인가? 오온 이것은 불교말로 하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입니다. 색色 이것은 빛 색色자, 이것은 물질物質을 의미합니다. 수受는 받을 수受자 이것은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상想 이것은 생각할 상想자, 이것은 우리 상상想像하는 것을 말합니다. 행行 이것은 우리 의욕意慾, 의지意志를 말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식識 이것은 우리 의식意識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 드리면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 이것이 오온五蘊인데, 색은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수ㆍ상ㆍ행ㆍ식 이것은 정신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물질과 정신을 한 번에 말할 때 '오온五蘊' 그러는 것입니다. 오온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천지 우주의 모든 것을 우리 중생이랑 통틀어서 유상有相 무상無相, 유정有情 무정無情 다 털어서(통틀어서) 한 번에 말할 때에 오온 그럽니다. 오온 말입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하여튼 다 통틀어서 말할 때에 오온 그런단 말입니다. 헌데 그 관세음보살 같은 그런 위대한 도인들이 영생에 이르는 그런 지혜를 닦을 때에 어떻게 했는고 하면 맨 먼저 정신과 물질이 말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본단 말입니다. 불교라는 것은 언제나 '내가 없다' 또는 '물질이 공이다' 하는 공空 지혜를 떠나서는 불교가 성립이 안 됩니다. 좋다 궂다 또는 너다 나다 하는 그런 것이 있을 때는 그때는 불교의 깊은 의미는 우리가 음미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내 앞에 네가 있고 내가 있고 말입니다. 또 선善이 있고 악惡이 있다 하더라도 그런 것은 중생 차원에서 보는 것이지, 관세음보살이나 도인들이 본다고 할 때는 그런 것이 사실은 텅 비어 있단 말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중생의 업장業障 정도로나 보는 것이니까 지금 밉다 곱다 또는 귀엽다 하는 것이지 정正답게 청정한 안목으로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없단 말입니다. 여기까지 못 느끼면 불교를 알 수가 없습니다. 즉,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은 다 비었다고 봐야 한다 말입니다. 생각을 해 보십시오. 우리가 가사 이렇게 분자分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분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 하면 그때는 천지 우주는 다 분자로만 보입니다. 원자原子를 볼 수 있는 현미경을 쓰고 본다 하면 그때는 천지 우주는 원자로만 보입니다.
부처님 같은 불안佛眼이라, 부처 불佛자, 눈 안眼자, 부처님의 안목眼目은 그때는 천지 우주를 광명光明으로 보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의 근본 근원은 어떠한 물질이나 무엇이나 다 순수한 광명 에너지가 꽉 차 있단 말입니다. 헌데 우리 중생은 현미경으로 알 수 있는, 현미경을 이용하지 않으면 전자電子도 못 보고 그때는 분자分子도 못 본단 말입니다. 헌데 우리가 쓰는 안목 이것은 아시는 바와 같이 불교에서 말하는 삼독심三毒心이라, 탐욕貪慾이나 또는 성내는 그런 불룩거리는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독심毒心에 가려서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바로 못 보기 때문에 꼭 '나와 같은 존재가 있다. 또 네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딱 벽을 세워 버립니다. 그런 경계에서 보는 것이니까 자꾸만 시비是非가 생기고 여러 가지 견해가 생긴단 말입니다. 헌데 참다운 진리를 아까 말씀마따나 영생의 해탈, 청정 그런 것을, 우리가 그런 반야를 얻을라고 생각할 때는 맨 먼저 무엇이 중요한가? 아무리 내가 귀엽지만은 결국은 나를 비롯해서 말입니다. 천지 우주가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 봐야 한단 말입니다. 그렇게 해야만이,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인생고人生苦의 그야말로 참 생生ㆍ노老ㆍ병病ㆍ사死나 그런 일체의 고액을 그때는 둘다 면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다 비어 있다고 못 보는 한에는 절대로 그때는 인생고액人生苦厄을 못 면합니다. 권력이나 또는 지위나 또는 그야말로 참 어떤 특이한 물질이나 이런 걸로 해서는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면치 못하는 것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순간순간 조금 그렇게 마음만 있을 뿐인 것이지 근본적인 해결은 못 되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참다운 아까 말씀마따나 영생의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또는 인생고를 떠나기 위해서는 먼저 아까 말씀마따나 오온이, 오온 이것은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즉 정신과 물질을 다 포함합니다만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다는 것을 비춰봄으로 해서 비로소 일체고액을 우리가 제도할 수가 있다 말입니다. 떠날 수가 있나니,
사리자舍利子야!
사리자는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제일智慧第一 사리자, 지혜가 제일 수승한 제자 아닙니까. 인도 히말라야 산에서는 사리조舍利鳥(샤리카Śārikā)라는 그런 새가 있는데 사리조라는 새는 굉장히 눈이 아름다워서 말입니다. 눈이 굉장히 그 영롱한 새인데 사리자 어머니가 아주 눈이 영롱하고 미인인데 말입니다. 미인인 사리舍利 눈 같이 어여쁜 그런 어머니한테서 나왔다고 해서 사리자, 즉 말하자면 그 아들子을 사리자라고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부처님 제자 가운데서 지혜가 제일 수승한 분인데, 어머니가 사리 눈 같이 아름다운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아들을 사리자라고 말입니다. 사리불을 그 사리라고 이르는 것인데, '사리자야!' 그러니까 반야심경 이것은 부처님께서, 어떤 경전이나 누구한테 부처님께서 말씀 했는가 그런 연기緣起 유서由緖가 있습니다.
반야심경은 부처님께서 직접으로, 그냥 듣는 (일반)사람한테 말한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한테는 그때는 아주 그 조금 저급한 법문도 말할 수가 있지만 이런 고도한 불교 철학이 가장 중요하게 들어있는 그런 법문은 역시 뭐라 해도 지혜제일, 지혜가 수승한 그런 사리불舍利弗만이 알 수가 있는 것이니까 사리불한테 이것은 하신 법문입니다. 사리자야 잘 들어라! 말입니다. 이른바 즉, 지혜란 말씀입니다.
색불이공色不異空이요.
색 이것은 물질 아닙니까.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말입니다. 공空 이것은 마음心이라 해도 무방합니다. 공이나 마음은 불교에서는 같이 쓰입니다. 물질이 마음과 다름이 없고,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내내야 마음이라는 것은 형체가 없는 것이니까 그때는 공이나 마찬가지이지요. 물질이 공과 다름이 없고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정신 따로 몸 따로 합니다. 우리 범부凡夫는 몸 따로 또는 마음 따로 합니다. 허나 사실은 둘이 아닌 것입니다. 물질이 마음과 다름이 없고, 물질이 공空과 허공虛空과 다름이 없고, 또한 동시에 그 반대로
(공불이색空不異色이라,)
마음이 또는 공이 물질과 다름이 없으며, 따라서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물질이 곧 바로, 이것은 이 시是자 말입니다. 빛 색色자, 곧 즉卽자, 이 시是자, 빌 공空자, 이 시是자 이것은 '바로'라고 씁니다. '바로'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바로 공 말씀입니다. 따라서 물질이 곧 바로 공이란 말입니다. 이렇게 이원적二元的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이 바로 그대로 즉 말하자면 바로 마음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까도 말씀마따나 물질 따로 마음 따로 합니다. 보통은 다. 물질이라는 것은 물질인 것이고, 물질이라는 것은 또는 한 가지의 무생물이고, 마음은 하나의 생명체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구분합니다. 허나 사실 불교에서는 그렇게 안 보는 것입니다. 어떠한 미세한 물질도 역시 그 본질은 마음이란 말입니다.
지금 물리학에서는 분석하고 분석해서 다 들어가면 말입니다. 저 물질 끝트머리는 내내야 소립자素粒子 아닙니까. 소립자 그것이 물질이 아니라 다만 에너지(energy)의 하나의 형태로 보는 것입니다.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질량이 있는 물질은 없어지고 말입니다. 저 끝에 가서는 하나의 에너지 형태에 불과하단 말입니다. 에너지의 작용 때문에 결국은 소립자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물리학은 물질이 본래 공인 것을 거의 증명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헌데 불교에서는 보다 앞서서 어떠한 물질이나 아까 말씀마따나 원자나 또는 분자나 모두가 다 근본 요소는 결국은 다 마음이란 뜻입니다.
이런데서 불교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 모두가 마음뿐이라는, 결국은 불교철학이 성립된단 말입니다. 모두가 사실은 마음뿐인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순수 에너지 위에서 마음작용 따라서 그때는 물질이 보인단 말입니다. 물질이 별도 있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우리는 이 관념을 부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관념을 못 부수면 '일체유심조'나 '모두가 성불한다.' 그런 말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마음뿐인 것인데 마음 위에서 마음의 힘이 적당히 이렇게 모이고 저렇게 모이고 말입니다.
또는 마음을 가진 중생들이 마음 쓰는 그런 힘 따라서 물질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지금 이해하시기가 곤란스럽지만 사실은 그런 것입니다. 저는 가끔 예를 듭니다만 가사 화분이 이렇게 두 개가 있어서 양쪽에다 똑같은 그런 조건으로 해서 화분을 가꿉니다. 가꾼다고 생각할 때에 이쪽 화분한테는 좀 소홀하고 말입니다. 저쪽 왼쪽 화분에 대해서는 관심을 더 준단 말입니다. 하면은 관심을 더 둔 쪽의 그 화분이 훨씬 더 성장이 빠르다는 것입니다. 식물도 역시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식물도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 개인적으로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님한테 탁태(잉태)하기 전에 우리 존재가 무엇입니까? 부모님을 의지해서 나오기 전에 존재가 무엇입니까? 형체가 없단 말입니다. 식識이라는 마음이 결국은 부동浮動하다가 영혼靈魂이 부동하다가 부모님 연緣 따라서 엄마의 태에 들어가서 그때는 사람으로 커나간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몸이 원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천은 결국 하나의 식識, 불교에서 말하는 그런 의식 말입니다.
식識이 즉 말하자면, 사람이 죽어지면, 몸은 화장하면 내내야 재가 되고 또는 파묻으면 흙 되고 하겠지요. 없어지지만은 우리 마음 쓰는 마음 식識은 그때는 없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식識이 부동浮動하다가 그 식의 파장과 맞는 부모를 만나면 그때는 엄마의 태에 탁태托胎한단 말입니다. 그때는 그 물질이 아니지요. 탁태한 뒤에는 엄마의 배안에서 엄마의 자양분을 나눠먹고서 큰다 말입니다. 그래가지고 자기가 그때는 나온단 말입니다. 태초太初에 인간도 역시 물질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기세경起世經이라, 일어날 기起자, 인간 세世자, 태초에 인간이 나오는 것을 굉장히 상세히 풀이 했습니다.
그런 것이 어려우니까 지금 사람들은 그냥 이렇게 간과看過해서 잘 안 봐버립니다만 아무튼 우리가 중요한 것은 무엇인고 하면 일체가 사실은 마음뿐이란 말입니다. 물질은 흔적도 없는 것입니다. 다만 중생이 물질의 저 본질, 물질의 끄트머리가 마음인 줄을 못 볼 따름이란 말입니다. 못 봅니다. 항시 예를 듭니다만 일수사견一水四見이라, 하나의 물인데도, 똑같이 내가 마시는 물인데도 우리 인간이 본다고 할 때는 그것이 물인 것이고 말입니다. 귀신이 보면 그때는 물을 물로 안 보는 것입니다. 귀신은 그때는 물을 불로 본다 말입니다. 불로 보는 것이고, 또 천상사람도 있는 것인데 천상인간은 그때는 물을 유리로 보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볼 것인가? 부처님은 물을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감로수甘露水로 보는 것입니다. 광명光明으로 빛나는 그런 감로수로 본단 말입니다. 감로수 말입니다.
그와 같이 같은 물이지만 우리 식識의 정도 우리 식이 얼마만치 정화淨化가 됐는가 거기에 따라서 달리 본단 말입니다. 사람이 보면 사람만치 업장業障이 무거운 사람들은 그때는 물로 보는 것이고 말입니다. 거기에 사는 고기는 자기 집으로 보는 것이고 말입니다. 헤엄치는 고기들이사 집으로 보겠지요. 귀신은 불로 보고, 천상인간은 그때는 유리로 보고 말입니다. 부처님은 청정미묘한 하나의 광명, 광명이 충만한 감로수로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같은 물이지만 시각 따라서 달리 본다 말입니다. 우리는 그걸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는 것만이 절대로 옳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이것은 가상假象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법문 이것은 부처님께서 보신 그대로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 중생은 납득하기 곤란스러우나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행이도 현대 물리학은 방금 말씀마따나 물질의 근원에 가서 텅 비었다는 것을 증명한단 말입니다. 다만 그 비어있는 알맹이가 무엇인가? 그것만 지금 현대 물리학은 모릅니다. 부처님은 다 알고 있었지만, 물질이 곧 바로 마음이요 말입니다. 마음이요. 또한 마음의 작용 따라서 그때는 물질이 되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
마음이 곧 바로 물질이란 말입니다. 결국 이것이 둘이 아니지요. 마음밖에 어떤 물질이 안 된다고 하면 그때는 안 되겠지마는, 우리 중생이 보면 그것(마음)이 물체화物體化가 되긴 될망정 결국은 내내야 둘이 아니란 말입니다.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라,
이것은 우리 감수感受하는 감각感覺이나 또는 상상想像하는 우리 감정感情이나 말입니다. 또는 우리가 의욕意慾하는 행行이나 또 우리가 분별分別하는 식識이나 이런 것도 역시 또한 이와 같도다 말입니다. 그와 똑같이 역시 물질이 마음이요, 마음이 물질이란 말입니다. 둘이 아니라.
사리자舍利子야!
잘 들어라.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
이와 같은, 이렇게 같은 이 시是자 이지만 아까는 '바로'라고 풀이할 수 있었던 것을 '이것이'라고 지정명사로 풀이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시제법공상', 이와 같은 모든 법이, 제법諸法 이것은 일체 우주의 만법萬法을 말합니다. 제한된 것이 아니라 이것은 일체 우주의 만법을 제법諸法 그럽니다. '이와 같은 모든 만법萬法이 다 비어 있는 상相에서 본다고 할 때는' 그 말입니다.
제법공상諸法空相 이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반야심경을 천만 번 외워도 아까 말씀마따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나 말입니다. 이런 중요한 대목을 놓치면 별로 의의가 없습니다. 인생고人生苦를 떠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오온五蘊이 정신과 물질이 다 비어 있음을 비춰봐야 한다. 이와 같은 중요한 대목과 또한 동시에 오온법五蘊法이 즉 앞에서 말한 이와 같이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존實存 실상實相에서 본다는 그런 말, 우리 중생은 실상을 못 보고, 실존을 못 보고 가상假相만 봅니다. 이와 같은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는, 비어있는 그 실상, 실상에서 본다고 하면
불생불멸不生不滅이요.
생도 없고 멸도 없단 말입니다. 어째서 그런고 하면 그때는 영생하니까. 가상假相을 본다고 할 때 우리는 상대적인 것만 본다고 할 때는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고, 여러 가지 분별이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가 물질이라는 것은 결국은 우리가 봐서 물질인 것인데, 물질도 내내야 결국은 마음이니까 말입니다.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그런 것들이 다 비어버려서, 다 비어버린 실다운 모습, 참다운 실상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영생永生과 똑같습니다. 영생 가운데서 무슨 생生이 있고 또는 멸滅이 있겠습니까.
사람 몸뚱아리 몇 천 번 나고 죽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생명은 그때는 죽지 않고 낳지 않습니다. 인연 따라서 몸뚱아리만 낳고 죽고 하는 것이지 생명 자체는 그때는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습니다. 불생불멸不生不滅이라, 이와 같이 남도 없고 원래 생겨남이 없으니 또 멸滅도 없단 말입니다. 중생은 근원을 못 보고서 그냥 겉만 본단 말입니다.
겉만 보기 때문에 엄마한테 의지해서 나올때 나오면 나온다 하고 모양이 없어지면 그때는 죽었다고 합니다. 사실은 생명은 죽음이 없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공부를 많이 해서 공부가 툭 틔어서 본질을 보면 그때는 격세즉망隔世卽忘이라, 이렇게 한 번 생을 바꿔도 바뀜이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수원수생隨願受生이라, 자기 멋대로 그때는 태어난단 말입니다. 천상에 올라가려면 천상 올라가는 것이고 또는 인간으로 오려면 오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육근청정六根淸淨이라, 그때는 우리 눈, 우리 몸을 구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가 청정해야지요. 청정하려면 오랫동안 삼매三昧에 잠겨야 한다 말입니다. 오랫동안 삼매에 안 잠기면 그때는 우리한테 있는 찌꺼기가 안 녹습니다. 찌꺼기가 녹아버려야만이 아까 말씀마따나 탐심 진심도 안 일어나고 동시에 그때는 나我라는 생각도 없고 또한 동시에 우리 몸뚱아리나 물질을 떠나서 몸뚱아리나 물질을 구성한 근본 요소를 우리가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텅 비어있는 모든 법이 다 공했다는 그런 실상實相에서 본다고 생각할 때는 생生도 없고 멸滅도 없고, 또한 동시에
불구부정不垢不淨이란 말입니다.
아니 불不자, 더러울 때 구垢자, 아니 불不자, 맑을 정淨자, 더러운 것도 없고 또는 맑음도 없단 말입니다. 상대를 떠나버려서 오직 영원히 청정한 것만 있다는 것입니다. '참된' 말입니다. 또는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
아니 불不자, 더할 증增자, 아니 불不자, 감할 감減자, 더함도 없고 또 감하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가 '모든 중생이 다 불성佛性이 있다' 이런 말을 합니다만 잘못 생각하면 석가모니한테는 불성이 많이 있고, 우리한테는 불성이 적게 있고,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습니다만 사실은 석가모니한테나 우리한테나 누구한테나 불성은 똑같이 있습니다.
다만 발견하는 정도가 얼마만치 많이 발견했는가? 석가모니께서는 천지 우주에 충만한 불성을 다 발견한 분이고, 우리 중생은 다 발견을 못했단 말입니다. 그것뿐인 것이지, 불성 자체에서는 석가모니한테나 독사한테나 말입니다. 뱀한테나 강도한테나 있는 불성이 똑같습니다. 따라서 불성은 사람이 하나 죽는다고 해서 불성이 줄어드는 것도 아닌 것이고 말입니다. 또한 석가모니가 열반涅槃에 든다고 해서 불성이 안 줄어듭니다. 천지 우주가 다 파괴된다고 해도 불성은 안 줍니다.
원자폭탄 핵무기가 우주를 다 진멸시킨다 하더라도 불성은 그때는 조금도 더함도 덜함도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거품 같은 물질만 이렇게 변동되는 것이지 순수 에너지 생명 자체인 불성은 그때는 조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즉, 더함도 없고 또는 감함도 없단 말입니다.
시고是故로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이런 고로 모든 법이 다 비어있는 것을 비추어 보는 그런 안목에서는 무색無色이라,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이 지금 들어보시니까 굉장히 이것이 의미가 참 심장한 법문 아닙니까. 이렇게 좋으니까 매일 매일 외이곤 하는 것입니다. 특히 신중불공神衆佛供 모실 때나 중단(신중단)에서 많이 하는 것인데 이 반야심경 외이면 말입니다. 저급한 신들은 못 알아먹으나 고급 신들은 알아먹고서 굉장히 환희심歡喜心을 내고서 그런 신들이 상相을 터는 것입니다. 상을 말입니다. 이것저것 모두가 공空이라 해 버렸으니 상相을 안 털 수가 있겠습니까.
따라서 신들이 상을 털어버리면 또한 동시에 상을 턴 그 상이 없는 그런 자비심慈悲心 때문에 자비심으로 해서 그때는 우리 중생을 굽어보고서 중생衆生을 가호加護한단 말입니다. 또는 어떤 우리 환경이 약간 기분이 사나울 때나 말입니다. 암울할 때는 그런 때도 역시 반드시 우리 분위기가 오염되어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그마만치 우리 분위기를 구성한 순수한 에너지가 그때는 조건이 안 맞아서 오염이 있어 놔서 이런 때에 반야심경을 외이면 그런 경우도 그것이 효험이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우선 자기 생명을 구성한 자기 가슴이 청정히 되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을 정화한다 말입니다. 불교 법문은 모두가 다 우선 나를 정화淨化하고 남을 정화하는 것입니다. 선과 악의 구분은 어디가 있는 것인가? 악惡은 이것은 우선 자기를 훼손하고 남을 훼손한단 말입니다. 선善은 그 반대로 우선 자기를 정화시키고 남을 정화시킵니다. 반야심경이 뒤에 이렇게 길고 시간이 제한되어 놔서 제가 허두만 썼습니다. 허두만 썼는데 여러분들이 가셔서 잘 읽고, 지금 반야심경 번역본이나 주석본이 굉장히 나와 있습니다. 중국어 판도 역시 인도 말을 중국어로 번역한 한문(본도 나와 있습니다.)
(불교는) 법문 심도深度를 할 때에 3단계로 구분합니다. <삼시교판三時敎判> 맨 처음에는 있을 유有자, 가르칠 교敎자, 유교有敎라, 유교입니다. 그러니까 반야심경 같은 이런 법문은 상당히 마음이 세련되어서 마음이 정화가 되어야 아는 것이지, 바로 무식한 분들은 좀 못 알아먹습니다. 그러니까 무식 대중한테는 이런 법문을 않고서 그냥 유교라, 있을 유有자 말입니다. 유교는 무엇인고 하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따로 있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자타自他 시비是非를 구분한 법문이란 말입니다. 부처님께서 초기 법문은 모두가 다 있다 하는 일반 중생차원에서 한 법문입니다.
지금도 역시 이런 법문이 어려운데 하물며 부처님께서 가신지가 2500년 이상 되었는데, 그 당시가 그야말로 굉장히 사회인들이 다 무식했겠지요. 그런 때는 이런 고도한 법문을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초기에는 그냥 우리 중생 차원에서 있다 없다 하는, 네가 있고 내가 있고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그런 차원에서 인과因果를 믿고서 악을 행하면 그때는 죄를 받는 것이고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 것이고 그와 같이 선악 인과를 따져서 하는 그런 법문 이것이 유교有敎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일반 세간에서 하는 유위교有爲敎, 일반 도덕이라는 그런 것은 유교有敎에 해당합니다. 기독교나 또는 유교儒敎나 그런 쪽은 보통은 다 유교有敎의 범주에 들어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또 물질도 있고 또 보석도 있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그런 것이 유교이고 말입니다. 허나 유교 이것은 실상實相을 바로 못 본단 말입니다. 가상假相만을 볼 수 있는 중생차원에서 마친 그런 교敎이기 때문에 이것은 참다운 것은 못 됩니다.
허나 부처님께서 참다운 가르침을 하기(설하기) 위해서는 그때는 지금까지 말한 유교는 이것은 참이 아니다. 일체 정신과 물질은 비어 있다. 그와 같은 법문 이것이 반야심경 같은 즉 말하자면 공교空敎라, 빌 공空자, 가르칠 교敎자, 공교란 말입니다. 허나 텅 비어 있다는 공교空敎 밖에 모르면 그때는 불교를 바로 또 안다고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비어 있다 하더라도 텅 비어 있는 그 내용은 이것은 허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만약 불교가 텅 비어 있다는 그것밖에 몰라 버리면 그때는 불교는 하나의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지고 마는 것입니다.
불교를 믿는 분들이 더 깊이 못 들어가면 반야심경 정도에서 딱 그쳐버리면 자칫하면 허무에 빠져버린단 말입니다. 헌데 텅 비어 있는 그것이 아주 비어 있는 허무가 아니란 말입니다. 텅 비어 있는 그 가운데는 일체 공덕功德이 다 갖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자비慈悲나 지혜智慧나 행복이나 또는 기능이나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단 말입니다. 그런 공덕이 하도 많으니까 일일이 다 우리가 열거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간추리면 4가지 또 범주로 말합니다.
상常ㆍ락樂ㆍ아我ㆍ정淨이라, 항상 상常자 말입니다. 상이라.항 상 상常자 이것은 일체 부처님의 지혜, 공지혜空智慧, 공空에 들어 있는 그 생명이 그때는 영생한단 말입니다. 영생하는 그런 의미를 상常에다 빚대서 말합니다. 상이라, 항상 상常자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상주부동常住不動이라. 영생하는 그런 생명이 있다는 것이 상常인 것이고, 또는 락樂이라, 안락 할 락樂자, 그 불성 가운데는 부처님 지혜 가운데는 일체 모든 행복이 다 들어 있단 말입니다. 행복이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가치관의 전도顚倒 때문에 상대유한적인 물질 가운데 행복이 있다고 어거지(억지)를 씁니다만 사실 그 가운데는 없습니다. 순간순간 우리 정신의 혼미昏迷뿐입니다. 역시 참다운 행복은 불성 가운데 있는 우리 마음 가운데 있는 영원성밖에는 없습니다. 그야말로 불변하는 불멸의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불변의 행복 그것이 안락 락樂자, 락樂입니다. 락이라.
또는 나 아我자, 아我라, '아' 이것은 그냥 우리 같은 작은 상대적인 아我가 아니란 말입니다. 일체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我란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부사의不思議한 그런 재주나 지혜나 또는 기능을 다 부리는 아我란 말입니다. 불교 말로 하면 신통神通도 하고 또는 기적도 부리고 말입니다. 그와 같이 신통 기적을 다 부릴 수 있는 그런 모든 재주를 다 부리는 그런 것이 즉 말하자면 아我란 말입니다. 나 아我자. 또는 맑을 정淨자, 정淨이라. 이것은 조금도 번뇌가 없는, 흐림이나 또는 어떤 마음의 어둠도 없고서 조금도 번뇌의 흔적이 없는, 본래 청정한 그런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 영생하는 상常과 또는 행복이 다 갖추어져 있는 락樂과 말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고 알 수 있는 그런 아我와 말입니다. 또는 조금도 번뇌가 없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청정한 정淨과 말입니다. 이와 같은 이것(상락아정)이 불성 가운데, 텅 빈 마음 가운데 (있는 공덕이며) 바로 이것이 불성佛性인 것입니다. 천지 우주는 다만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모든 것이 꽉 차 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영생하고 또는 행복을 다 갖추고 있고 또 일체 것을 다 할 수가 있고 알 수가 있고 말입니다. 또는 청정하고, 이렇게 갖추어 있는 이것이 순수한 우리 마음자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마음을 닦으면 원래 갖추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차근차근 그때는 이러한 것에 접근되어 가는 것입니다. 석가모니나 자고로 위대한 도인들은 이러한 사덕四德을, 상락아정常樂我淨을 다 갖춘 분들이고 말입니다. 중생은 이런 것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어떤 권력, 지위, 어떤 이성, 이것저것 다 갖추어진다 하더라도 우리 마음속에, 우리 마음이 원래 갖추고 있는 역량이 방금 말씀마따나 상락아정이기 때문에 영생과 영생의 행복과 또는 일체 신통과 청정한 것이 원래 우리 마음의 본성이기 때문에 여기까지 못 가면 우리는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세상을 다 주어도 우리는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지구가 다 자기 것이 되어도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역시 인간은 원래 조그마한 부처인지라, 원래 모두를 갖춘 원만한 부처이니까 말입니다. 원만한 부처가 못 되는 한에는 항시 불안스러운 것입니다. 따라서 불안스러울 때는 벌써 행복이 아니지요. 따라서 각各 성자만이, 저번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만 요한복음서에도 예수님께서 '진리만이 그대를 자유롭게 하나니' 이런 것이 있단 말입니다.<요한복음 8:32> 사실 진리만이 우리를 행복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행복 또는 영생의 지혜 이런 것을 갖춘 것은 결국은 우리 본성本性 우리 불성뿐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은 불성에 가고자 하는 하나의 교언敎言에 불과한 셈이지요.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이 항시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허망한 것이다. 가상假相임을 분명히 우리는 인식해야 하는 것입니다. 먼저 우리가 보는 견해가 가상임을 인식을 못하면 그때는 반성 못하는 것이고 헤매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느끼고 보는 것이 허망무상한, 불교 말로 해서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말입니다. 이걸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림자를 쫓고 허망한 것을 쫓아서 생명을 낭비를 합니다만 우리 눈으로 보이는 것이 허망한 것을 느껴가지고서, 허망한 것이 아닌 것을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영생하는 상常 또는 안락安樂 또는 신통자재 하는 그런 아我 또는 청정무비한 정淨, 즉, 상락아정만이 실존하는 영생의 지혜고 행복인 것입니다. 우리 본성이 바로 불성이고 말입니다. 지금 못났다 하더라도 우리 본성은 석가모니와 똑같은 불성입니다. 그 가운데는 아까 제가 말씀마따나 상락아정을 다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상락아정의 영생의 행복 지혜를 얻기 위해서 부지런히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날 법문>
색色ㆍ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정신과 물질 아닙니까. 빛 색色자, 색色 이것은 물질에 해당하고, 수상행식受想行識 이것은 정신에 해당 합니다. 즉 우리의 감각感覺, 상상想像, 또 의욕意慾, 또는 분별시비分別是非하는 식識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 불교에서는 오온법五蘊法 그러면 우주만유의 법을 총망라해서 '오온법' 이라 합니다. 오온법 말입니다. 방금 말씀마따나 정신과 물질을 한 번에 다 포함했단 말입니다.
따라서 중생들은 모두가 다 오온법으로 해서 구성되어 있습니다. 헌데 우리 눈앞에 분명히 있게 보이는 내가 있고 네가 있고 분명히 있게 보이는 그 오온법이 다 비었다고 본단 말입니다. 비었다고. 어제도 말씀한 바와 같이 부처님의 법문 차원이라는 것이 3차원으로 구분하는 것인데, 맨 처음에 요 차원, 이것은 중생 정도에 맞추어서 모든 것이 선도 있고 악도 있고 너도 있고 나도 있고 말입니다. 이런 저급한 차원에 맞추어서 하는 법문 이것이 유교有敎라, 있을 유有자, 유교란 말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바로 보면 그것이 있지가 않단 말입니다. 그림자 같고 또는 허깨비 같고 말입니다. 수중월水中月이라, 물속에 비친 그런 달 같고 그런 것이지, 우리가 보듯이 꼭 내가 있고 네가 있고 그러지가 않단 말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걸 느껴야 합니다.
그 몽환포영夢幻泡影이라, 꿈 몽夢자, 허깨비 환幻자, 거품 포泡자, 그림자 영影자, 몽환포영 같이 우리 현실을 못 보면 그때는 불교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 불교는 인생고를 제도하는 인생고를 떠나는 그런 가르침이고 말입니다. 인생고를 떠나려고 한다 그러면 방금 말씀마따나 일체만유가 우리가 보는 실존적인 것이 사실은 실존이 아니라 이것이 몽환포영夢幻泡影이요. 꿈이요 허깨비요 그림자요 또는 물속에 비친 달이요. 전부다 그와 같이 봐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이 그런 것이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당시 지금 같은 과학도 무엇도 없고, 아주 참 문맹만 그렇게 충만해 있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이상 되는 인도 사회에서 부처님께서 '모두가 비었다' 그런 말을 알 수가 있습니까? 지금 사람들도 잘 모르는데 말입니다. 알 수 없으니까 초기에는 부처님께서 있다 없다 선도 있다 악도 있다 네가 있다 내가 있다 그와 같이 그냥 중생차원에서 말씀했단 말입니다. 허나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좀 익어져서 결국 수행을 거친 다음에는 비었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은 그와 같이 비었다 하는 그런 정도에서 말씀한 법문입니다.
허나 다만 비어 있으면 그때는 그것이 허무虛無가 되어서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 같은 것이 되어 버리지요. 다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빈 실상實相이 그때는 그것이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중도! 부처님 법문은 맨 처음에 있을 유有자 유교, 그 다음에는 빌 공空자 공교, 그 다음에는 부처님께서 꼭 하시고 싶은 말씀 실상實相 그대로 하신 말씀이 중도中道란 말입니다. 중도!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 이것은 비었다 하는 그런 가르침과 중도를 아울러서 합한 이것은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어제 말한 바와 같이 공空이 즉 색色이요 색色이 즉 공空이란 말입니다. 색 이것은 물질을 말한 것이요, 공 이것은 정신을 말한단 말입니다. 즉 물질이 곧 마음이요, 마음이 곧 물질이란 말입니다. 허나 우리 중생은 마음이 안 보인단 말입니다. 마음이. 중생과 성자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면 일반 중생은 마음은 못 보고 그냥 형체만 본단 말입니다. 형체만 보고, 도인들은 형체를 봄과 동시에 형체의 근원인, 형체를 이룩한 순수한 그런 힘 순수 에너지를 본단 말입니다.
그것이 마음인데, 따라서 성인들은 근원적인 순수한 마음을 보고서 마음에 비추어서 물질을 다루기 때문에 그때는 오류가 없단 말입니다. 없으나 중생은 겉만 보고서 피상적으로 즉 말하자면 수박 겉핥기식으로 그냥 알맹이는 모르고서 겉만 봅니다. 겉만. 겉만 보니까 사물을 바로 못 본다 말입니다.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이렇게 코가 있고 눈이 있고, 형체만 인간은 본단 말입니다. 사실은 알맹이, 우리 마음이 나면은 나라는 것을 모르고 없다고 말하니깐 있는거죠. 그런 표현 아닙니까, 내내야 우리 마음이 나단 말입니다.
내 마음이 나인 것을 우리 중생은 이 몸뚱아리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내 몸이다 해 가지고서 그냥 거기에 집착을 한다 말입니다. 중생과 성인의 차이는 거기가 있습니다. 성자라는 것은 근원을 보고서 마음을 본체로 해 가지고서 마음을 거기에 입각해 버리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마음이 안 보이는 것이니까 말입니다. 겉만 보고서 따지니까 그때는 사람 사람끼리 분열이 생기고 불화가 생기고 싸움이 생긴다 말입니다. 그러기에 반야심경에서 그 인생고人生苦, 생生이요, 사死요, 또 서로 헤어지는 고통, 또는 보기 싫은 사람과 만나는 고통 말입니다. 이런 고통들을 이길려고 생각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가?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이라, 즉 오온이, 물질과 정신이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그림자 같다, 이것이 허망하다. 이와 같이 비었다고 비추어 봄으로 해서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이라, 우리가 일체 고액을 그때는 없앤단 말입니다. 어제는 그 대목까지 했습니다. 무리해서 나름 하더라도 한 시간 동안에 이걸 다 못하는 것이니까.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즉 공에서 본다 하면, 모든 것이 텅 비었다고 하는 그런 것에서 본다 하면, 그때는 수受라, 수 이것은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우리 감각感覺을 말합니다. 수는 말입니다. 상想 이것은 헤아리는 상상想像인 것이고, 행行 이것은 천류遷流라고도 그렇게도 부르고 의욕적인 우리 의식을 또 말합니다. 또 의지 말입니다. 의지를 말하는 것이고, 식識 이것은 분별分別하는 그런 우리 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아무튼 우리 마음 작용을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 그렇게 말합니다.
성자聖者가 바로 보는 그런 공 가운데는 아까 말씀마따나 성인들은 공空을 보고 우리 범부들은 공空을 못 봅니다. 공 그것이 사실은 실체의 근원인데 말입니다. 그런 공 가운데는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그런 색色 즉 물질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 같은 우리가 보는 그 물질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 학승들한테는 그런 말을 안 했지만 저 위에 있는 분들에게는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만
현미경을 쓰고 본다고 하면 그야말로 참 이렇게 안 보인단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전자현미경을 쓰고 본다면 이렇게 보일 수가 없습니다. 마치 누런 안경을 쓰고 보면 밖이 다 누렇게 보이고, 푸른 안경을 쓰고 보면 푸르게 보이듯이 우리 중생은 중생의 업業으로 중생의 업을 쓰고 보는 것이니까 너요 나요 또 좋다 궂다 하는 것이지 중생의 업을 떠나 버리면 그때는 그렇게 안 보인다 말입니다. 일체만유一切萬有의 실상實相 일체만유의 본 모습, 본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도인이 본다고 하면 텅 비어있단 말입니다. 그러기에
공중무색空中無色이라, 도인이 보는 공 가운데는 색 즉 물질도 없고 또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이라, 우리가 감수感受하는 아프다 또는 좋다 하는 촉감도 없고 그런 것도 없고 말입니다. 또는 상상하는 것도 그것도 중생의 망상에서 오는 것이고, 우리가 하고 싶다 하는 그런 의욕적인 것도 그때는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우리가 분별시비하는 것도 없는 것이고 이와 같이 그런 마음 작용도 없고,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라,
따라서 눈으로 보는 시각視覺, 귀로 듣는 청각聽覺, 코로 냄새 맡고 있는 우리 후각嗅覺, 혀로 우리가 맛을 보는 미각味覺 말입니다. 몸으로 느끼는 촉각觸覺 말입니다.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하는 우리 식활동識活動 이것도 결국은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허깨비 보고서 있다고 합니다. 허깨비 보고서, 또한 동시에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이란 말입니다.
또한 우리가 눈으로 보는 색, 주위환경 여러 가지 물질 이것도 없고, 또한 들리는 소리도 없고 말입니다. 또 후각嗅覺으로 느끼는 향기도 없고, 미각味覺으로 오는 맛도 없고, 또는 촉각觸覺 우리 몸으로 촉감觸感해서 오는 촉각觸覺도 없고, 또 우리 의식意識으로 분별分別하는 일체 좋다 궂다 하는 그런 어떤 법法도 없단 말입니다. 법 이것은 이런 법률이나 그런 법이 아니라 이것이, 우리 의식에서 판단하는 모든 그런 작용作用 모든 그런 시비 분별 이것이 여기 있는 법이란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로 본다면,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이지만 바로 본다면 사실 이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없기 때문에
무안계내지無眼界乃至라,
우리 눈으로 보는 색色이라는 것은 결국은 본래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의 업業으로 해서 우리가 만들어서 씌워(덧씌워) 붙인 것이지 원래 눈으로 보면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시각이라는 것이, 내지乃至는 '및', 이것은 '및' 그 말입니다. 이 표현은 이렇게 앞뒤로 해서 이것은 하나의 괄호(처음과 끝, 범위)에서 열고 닫는 데 쓰는 것이 내지입니다. 무안계無眼界, 눈으로 보는 그런 세계도 없고, 또는 말 마친 뒤, 내지乃至
무의식계無意識界라,
우리 의식으로 판단하는 그런 경계도 없단 말입니다.
무무명無無明이라,
또 무명도 없다 말입니다. 무명도. 무명無明이라는 것은 진리를 모르는 것이 무명 아닙니까. 무명입니다. 무지無知나 무명無明이나 같은 뜻입니다. 바로 보면 없으니까 내내야 무지나 같지요. 공空에서 본다면 그때는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무지가. 무지라는 것은 내내야 우리가 이것저것 판단을 잘 못하는 것이고 또는 실상을 몰라서 무지라 하는 것인데 실상을 다 봐버린 도인道人들의 안목에서 우주가 텅 비어서 말입니다. 청정무구淸淨無垢한 그런 불성佛性밖에 없는 그 자리를 봐버린 사람들이 어디가 무슨 무명이 있겠습니까.
그와 같이 본 근원을 못 본데에 가서 무지 즉 무명이 있는 것이고 말입니다. 텅 비어서 일체 것을 다 떠나버린 훤히 비춰보는 그런 마음자리에서는 그때는 무지나 무명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또 무지도 없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중생 경계에서 무지야 또는 지혜智慧야 뭐다 하는 것이지 지혜고 무지고 다 털어버리고 그야말로 참, 본 근본을 딱 읽어버린 그런 경계에서 무슨 무지가 있겠습니까. 무명도 없고,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이라,
무명이 없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무명을 다 없애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경계가. 무명이 있다고 하는 데에서 상대법에서 무명이 있다고 하니까 무명을 뗄려고 애쓰는 것이지 아! 무명이 원래 없는데 어떻게 무명을 없앨 필요가 있겠습니까. 무명을 다 해버리는, 무명을 다 없애 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내지무노사乃至無老死라,
또한 동시에 우리가 늙고 병들고 죽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를 초월超越해 버리는 즉 말하자면 생生이 있고 사死가 있고 그와 같이 상대유한적相對有限的인 그런 모양의 세계에 가서 죽음과 또는 생이 있는 것이지 모양 떠나버리면 순수한 에너지의 세계, 순수한 생명의 세계에는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즉 불생불멸不生不滅한 낳지(나지)도 않고 또는 죽지도 않는 그런 세계에서 무슨 늙고 병들고 하는 것이 있겠습니까. 이7런 늙고 또는 죽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이라,
따라서 늙음과 또는 죽음을 다 없애버리는 것도 없단 말입니다. 생사生死라는 것이 인생고人生苦 가운데서 제일 무서운 고생 아닙니까. 여러 가지, 무슨 권력이 무엇이고 또는 무엇이고 하지만 우리가 구해서 얻지 못하는 것도 고통이란 말입니다.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인가 하면 역시 우리 목숨이 죽는다 하는 죽음의 공포같이 무서운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벌써 죽음을 떠나버린 생사를 떠나버린데 가서 무슨 죽음의 공포가 있습니까. 역시 그때는 늙어서 죽는다는 것을 다 없앤다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라.)
또한 동시에 부처님 법문 가운데서 고집멸도苦集滅道라, 고집멸도 이것은 사제법문四諦法門인데 부처님 일대 가르침을 가장 체계 있게 말씀하신 가르침 이것이 이제 고집멸도입니다. 이것이 사제법문 아닙니까만은 이걸 아는 분들은 다 이것을 위대하다고 하는 그런 법문 아닙니까. 사제법문 말입니다. 고집멸도苦集滅道라, 고苦 이것은 인생고인 것이고 말입니다. 즉 생로병사生老病死, 인생고 가운데서 가장 무거운 것은 생로병사 아닙니까.
낳고(나고) 늙고 또는 병들고 죽고 말입니다. 누구나가 다 태어났다 늙고, 누구나가 다 병들고 죽는 것인데 그야말로 이와 같은 큰 고통은 없지요. 또는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고통, 또는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 말입니다. 구해서 얻지 못하는 고통, 이런 등등의 고통 이것이 인생고인데 우리가 바로 보면 인생은 사실 고통뿐인 것입니다. 안 늙는 사람 누가 있고 또 평생 한 번도 안 아픈 사람 누가 있습니까. 따지고 보면 결국은 고통뿐이란 말입니다. 고통뿐인데 사람들은 '고통이 아니라 안락이다.' 이와 같이 생각하니까 그때는 조금만 고통스러우면 그냥 고생스럽다고 생각하고 짜증을 낸다 말입니다. 따지고 보면 사실은 삶이 고통뿐인 것입니다.
인생은 고苦다. 인생은 고다. 이것이 고집멸도의 이제 맨 처음에 나옵니다. 허나 인생이 고가 생기면, 고의 원인은 무엇인가? 우리가 어디가 아프면 반드시 아픈 근원이 있겠지요. 고苦의 원인原因 이것이 집集입니다. 집集의 내용은 무엇인가? 이것은 탐貪·진嗔·치痴 삼독심三毒心과 우리의 행위行爲란 말입니다. 우리가 탐심貪心부리고 우리가 성내고 우리가 사물을 바로 못 보고 말입니다. 그런 어리석음 때문에 우리가 행하는 행동 그것이 집集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어리석음이 없고 말입니다. 탐욕심도 없고, 분노가 없다고 그러면 그때는 고苦도 없단 말입니다.
인간으로 우리가 어찌 태어났는가? 우리가 정말로 번뇌가 없다고 그러면 사람이 태어날 수가 그때는 없는 것입니다. 극락極樂에 올라가서 그야말로 영생永生해 버린다 말입니다. 또는 그렇게는 못 된다 하더라도 천상 가서 그때는 안락스럽단 말입니다. 허나 사람 정도의 결국은 탐욕심과 사람 정도의 분노심과 사람 정도의 무명이 있단 말입니다. 사람 정도의 그 어리석음, 탐욕심 또는 분노 이런 것이 아직 있기 때문에 이런 업業에 끌려서 그때는 사람으로 태어난다 말입니다.
부모한테 우리 영혼靈魂이, 업식業識이 즉 말하자면 업에 가린 그런 우리 영혼이 부동浮動하다가 거기에 알맞은 부모를 만나가지고 그때는 딱 거기에 엄마 태안에 들어가서 잉태한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업이 없으면 아까 말씀마따나 극락으로 가서 그때는 영생하는 것이고, 또는 천상으로 올라가서 안락스러울 것인데, 업이 무거워서 탐심도 많고 또 성내는 마음, 또 바로 못 보는 어리석은 마음, 이런 업이 무겁기 때문에 인간 정도로 무겁기 때문에 결국은 인간 정도에 맞는 그 정도에 맞는 부모 만나 가지고서 그때는 딱 거기에 붙어 버리면 인간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우리 불교는 여실如實하게 그것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 현대 생리학 보다 훨썩 더 세밀하게 아주 설명되어 있습니다. 즉 이와 같이 인생고라고 하지만 고는 그냥 우연한 고가 아니라 아까 말씀마따나 인간의 탐심貪心, 진심嗔心, 또 어리석은 마음 치심癡心 아닙니까. 이것과 여기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행동 이것이 즉 말하자면 집集, 고를 모으는 원인이란 말입니다. 불교는 이와 같이 인과因果가 분명합니다. 인과! 고苦라는 과果가 있으면 반드시 그 원인原因이 있단 말입니다. 원인을 집이라 하는 것이고, 그러나 인생이 고와 집만 있다고 하면 인생이라는 것은 결국은 바로 죽음만 같지 못합니다. 안 태어난 것만 같지 못한다 말입니다. 허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인생이 고가 있고, 고를 모으는 여러 가지 삼독심 같은 번뇌나 우리 행위, 업이 있지만 또한 동시에 영생하는 고를 떠나서 영생하는 행복이 있단 말입니다. 영원히 안락스런 행복 이것이 멸滅입니다. 즉 말하자면 번뇌를 다 멸해버린 상태란 말입니다.
탐욕이나 또는 진심, 아까 말한 분노하는 그런 마음이나 또는 어리석은 마음이나 이런 마음을 다 없애버리고서 안락스러운 그런 경계가 이것이 멸滅입니다. 멸滅이 없다고 하면 불교는 의의意義가 없지요. 따라서 멸滅 이것은 불교의 이상향理想鄕입니다. 불교의 이상향 이것은 멸입니다. 허나 다만 멸이 있다. 거기에 그쳐버리면 결국 불교는 또 불교가 못된단 말입니다. 멸滅에 이르는 영생의 극락,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 수단 이것이 즉 말하자면, 도道란 말입니다. 멸에 이르는 길 이것이 도입니다.
도道 이것은 여러분들이 대체로 들어서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삼학도三學道란 말입니다. 우리가 계율戒律을 지키고, 마음을 모아서 통일定 시키고 말입니다. 또는 지혜智慧를 닦는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 계戒·정定·혜慧라, 계율 닦고 또는 마음을 통일 시키고 또는 지혜를 닦고 말입니다. 삼학도! 더 부연시키면 팔정도八正道 이것이 멸滅에 이르는 행복스런 영생에 이르는 길이란 말입니다. 삼학도 또는 팔정도 말입니다.
지금 이와 같이 우리 인생고와 인생고의 원인과 또는 인생고를 떠나버린 영생 안락의 그런 세계와 거기에 이르는 그런 방법을 말씀한 것, 이것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四諦法門이라. 넉 사四자, 진실한 체諦자, 그래서 '사제'라고도 하고 '사체'라고도 합니다. 따라서 불교는 대승大乘ㆍ소승小乘ㆍ밀교密敎ㆍ현교顯敎 여러 가지 갈래가 많이 있으나 따지고 보면 내내야 결국은 사제법문의 뜻을 이렇게 저렇게 풀이한 것에 지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사제법문을 잘 외워두면 무슨 법문을 보나 '아! 이것은 어디에 해당하구나' 알 수가 있단 말입니다. 인생고苦와 또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과 말입니다. 영생의 행복인 멸滅과 또는 영생의 행복인 그런 해탈의, (인생고를) 멸해버리는 그런 길 이것이 도道고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해야 할 것은 멸을 분명히 보고, 인생이 고라는 것을 인식하고서 그러나 인생의 참다운 목적은 결국 멸이다. 영생의 행복이다. 이것을 분명히 우리가 느끼고서 멸滅에 이르기 위한 그런 흠모추구欽慕追求하는 멸을 그리워하는 그 마음(갈앙심) 밑에서 도를 행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
계율 지키고, 도덕적인 행동을 안 취하면 멸에 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 많이 먹고 또는 싸우기 좋아하고 음탕하고 말입니다. 아무렇게나 그런 문란한 행동을 취했다가는 멸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역시 철저한 도덕적 행동 밑에서 우리가 생활을 해야만 마음이 맑아 온단 말입니다. 함부로 행동하면 그때는 정신이 통일이 안 되는 것입니다. 정신을 딱 모아서 통일을 시켜야만 그때는 그야말로 참 우리 마음의 본 뿌리가 부처인지라 말입니다. 우리 마음의 본 뿌리가 멸滅을 증證하는, 멸과 상응된 영생 극락이 그 자리인지라, 우리 마음을 딱 모아가지고서 우리가 자꾸만 마음 뿌리로 가야 합니다. 마음 저변으로 가야 한다 말입니다.
우리 중생들은 마음의 겉만 보고 삽니다. 마음 뿌리는 부처고, 마음의 겉에는 아까 말한 바 우리 같이 삼독심三毒心 부리는 그런 마음인데 말입니다. 따라서 삼독심 부리는 탐심 부리고 진심 부리는 그 마음을 자꾸만 억제하고 누르고, 억제하고 누르는 것이 행行이 되면 그때는 그것이 도덕적인 행위다 말입니다. 즉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자면서도 오로지 부처님을 흠모欽慕하는 한마음, 화두나 염불이나 또는 주문을 외어서 자꾸만 우리 마음의 저변으로 우리가 가야 한다 말입니다.
그 저변은 내내야 그때는 부처란 말입니다. 그것을 인격화 시키면 부처님인 것이고, 성품性品으로 보면 그때는 불성佛性인 것이고 말입니다. 이와 같이(....녹음 일부 손실.....) 분별시비分別是非해서 체계를 세운 것은 일반 지식인 것이고 말입니다. 참다운 영원 해탈의 길, 해탈의 슬기는 그때는 반야인데 말입니다. 즉, 지혜와 지식을 구분해서 일반 중생이 알아서 분별해서 아는 것은 그것은 지식에 해당하는 것이고, 참다운 해탈의 슬기, 해탈에 이르는 지혜, 이것은 지혜란 말입니다. 지혜인데, 불교 말로 하면 그때는 반야란 말입니다. 반야. 반야심경이란 내내야 해탈의 지혜란 말입니다.
헌데 이와 같이 그러니까 아까 내가 말한 바와 같이 지금 쭉 여러분들이 제법공諸法空이라는 것을 딱 전제를 두어야 합니다. 제법공 밑에서는 이와 같은 분별심分別心은 없단 말입니다. 잃어버리면 그때는 안 됩니다! 제법공諸法空 안에서는 그야말로 참 이런 것이 모두 없고 또한 동시에
(무지無智라,)
지知도 없단 말입니다. 즉 지식知識도 없단 말입니다. 중생이 따지고 분별하는 그런 일반적인 지식도 없단 말입니다.
(역무득亦無得이라,)
또는 역시 얻음도 없단 말입니다. 얻음도. 얻음 이것은 참다운 지혜, 반야의 영생의 지혜의 얻음이 없다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보통 불교 말로 하면 유위법有爲法이라, 또는 유루법有漏法이라.우리 중생이 보는 가사 권력이 좋아지고 돈이 많아지고 말입니다. 또 몸이 건강해지고 한다는 그런 상대유한적인 얻음이 없단 말입니다.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구하는 사람들이 그런 것이 우리한테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물론 생활에는 필요있다 하더라도 마음 닦는 그 자리에서는 그것이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즉, 따라서 제법공諸法空한 자리에는 모든 법이 다 비어 있다는 그런 실상實相의 지혜智慧로 본다고 할 때는 아까 말마따나 고집멸도苦集滅道란 그것도 사실은 번뇌가 있다고 했을 때에 고가 있고 무엇이 있고 하는 것이지 번뇌가 다 없어져 가지고 텅 비어가지고서 아, 청정무비淸淨無比한 청정한 세계에 가서 무슨 고가 있고 또는 고의 원인이 있고 또 무슨 도道가 있고 그렇게 할 수가 없지요. 또한 따라서 일반적인 우리가 안다는 그런 것도 필요가 없는 것이고, 또한 동시에 우리가 상대유한적인 그런 어떤 얻을 것도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
이와 같이 소득의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예 고故자, 연고 고故자, 까닭 고故자, 이와 같이 상대유한적인 그런 얻음이 없단 말입니다. 오직 순수한 지혜만 더 빛나고 할 뿐이지, 상대유한적인 그런 얻음이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菩提薩埵,
보살 보菩자, 이끌 제提자, 보살 살薩자, 강할 타埵자가 되겠지요. 한문자는 이것은 외일 필요가 없습니다만 하여튼 보리살타 이것은 보살菩薩이라는 뜻입니다. 인도 말로 하면 보디살타(보디삿트바, bodhi-sattva)인데 한문자 음역으로 해서 또 '보리살타'라 하는 것입니다. 인도 말을 제대로 옮기지는 못했지만, 역시 한문투, 즉 말하자면 한문으로 '보리살타'로 할 수 밖에 없단 말입니다. 보리살타 보살은, 이와 같이 이런 것이 모두가 다, 아까도 말한 바와 같이 제법공의 지혜를 여러분들이 염두에 딱 두어야 합니다. 모든 법이 상대유한적인 법이 텅 비었다고 하는 그 자리를 본다고 하면 아까 말씀마따나 안계眼界 눈으로 보는 것도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고집멸도가 없으니까 일반적인 지식도 없고 이와 같은 것들이 다 없기 때문에 따라서 다 몰아서 우리가 그런 얻은 것은 그런 상대유한적인 유루법有漏法의, 유루법 이것은 우리 중생이 느끼는 세계의 모든 법이 유루법입니다. 또는 유위법有爲法이고 말입니다. 이런 것이 없기 때문에 이런 소득所得이 이런 얻은 바가 없기 때문에 보리살타, 보살은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波羅蜜多故,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한 고로' 그렇게 됩니다. 어제 배운 바와 같이 반야바라밀다는 도피안到彼岸의 지혜, 피안彼岸이라는 것은 해탈의 저 언덕이란 말입니다. 차안此岸은 우리가 있는 이런 생사生死하는, 죽고 살고 또는 죄도 짓고 하는 세계가 이것이 이 차此자, 언덕 안岸자, 이쪽이고, 피안彼岸은 저 피彼자, 저쪽 언덕 안岸자, 인생고해人生苦海를 떠나서 저쪽 즉 말하자면 영생永生의 안락安樂스러운 그런 경계境界가 이것이 피안이란 말입니다. 피안. 헌데 이 풀이는 피안에 이르는 즉, 다시 말하면 영생해탈永生解脫에 이르는 다시 바꿔서 말하면 성불成佛하는 지혜智慧, 성불하는 지혜 이것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입니다.
반야般若는 참다운 지혜 아닙니까. 바라밀다波羅蜜多는 도피안到彼岸, 피안에 이른다는 뜻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성불하는, '성불을 성취하는 지혜'라는 뜻,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란 뜻입니다. 즉, 이와 같이 이런 것들이 다 허무하기 때문에 보살이 어떻게 했는가 하면 보살은 다만 이런 상대유한적인 지식은 다 떠나버려서 그런 것은 관심도 없이 다만 이와 같이 성불하는 '피안에 이르는 그런 지혜에 의지하는 고로'
심무괘애心無罣碍(심무가애心無罫碍)라,
거리낄 괘罣자, 거리낄 애碍자 말입니다. 이런 한자는 어렵지만 이 풀이한 것은 나중에 불교를 (공부)할 때 자꾸만 나오니까 외워두면 좋습니다. 거리낄 괘罣자, 괘자 말입니다... <주: 괘罣자, 가罫자 혼용 사용됨> 마음에 거리낌이 없단 말입니다. 무괘애라는 것은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즉 말하자면 좋다 궂다 또는 마음이 껄끄럽고 막힌단 말입니다. 이와 같은 괘애罣碍가 없고,
무괘애고無罣碍故(무가애고無罫碍古)
이런 마음에 거리낌이 없기 때문에
무유공포無有恐怖라.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툭 틔어서 천지 우주와 나하고 하나가 되었는데 어디 가서 무슨 무서움이 있겠습니까. 저 사람이 나를 해친다. 상대가 있고 또 귀신도 있어 가지고서 나를 해꼬지 한다. 이와 같이 이런 둘로 보고 셋으로 보고 말입니다. 이렇게 보는데서 우리 마음이 두려운 것이지 생사生死를 떠나버린 사람, 원래 내 몸뚱아리를 허망한 하나의 거품으로 보거니 이걸 누가 칼로 찌른들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이와 같이 제법공諸法空에서 천지 우주의 유위법은 다 비었다는 것을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때는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마음이 거리낌이 없고, 마음이 거리낌이 있어야 그때는 공포가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너다 나다 좋다 궂다 또는 산다 안 산다. 아프다 안 아프다 하는 그런 마음 때문에, 그런 괘애罣碍 때문에 공포가 있는 것인데, 괘애罣碍가 없기 때문에 그때는 마음에 공포가 없단 말입니다. 공포가 없는지라,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하고,
멀 원遠자, 떠날 리離자, 이마, 자빠질 전顚자, 넘어질 도倒, 꿈 몽夢, 생각 상想 말입니다. 전도몽상, 즉 거꾸로 된 꿈같은 생각을 멀리 떼어버린단 말입니다. 멀리 여읜다는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지금 거꾸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본다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거꾸로 보면서 거꾸로 보는지를 모른단 말입니다. 현명한 사람들은 내가 지금 거꾸로 보는구나. 이것 정도는 느껴야 하는 것인데 우리 중생은 그것도 못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는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바로 못 보고서.
이와 같이 이런 마음의 공포가 없어지면 그때는 마음이 툭 틔어서, 마음이 열려서 결국 우리가 평소에 거꾸로 보는 꿈같은 생각을 그야말로 참 멀리 여읜다 말입니다. 멀리 떠나버린다 말입니다. 멀리 떠나버리고서, 우리가 꿈을 꿀 때는 꿈속에서 보는 것이 그때는 다 진리(진실하고 참된 것) 같습니다. 싸우고 미워하고 먹고 하는 것이 참말로 생각되지만 꿈 깨고 나면 그때는 무엇이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지요. 그와 똑같습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것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꿈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꿈인 줄을! 그래야 불교를 바로 안다 말입니다. 우리가 보는 것은 결국은 꿈을 꾸고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본단 말입니다. 이와 같이 거꾸로 보는 생각을 멀리 여의고서,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이라, 거꾸로 보는 꿈같은 생각을 멀리 멀리 여의고. 리, 떠날 리離자 말입니다. 여의고,
구경열반究竟涅槃이라,
구경 이것은 궁구할 구究자, 마칠 경竟자, 열반을 우리가 성취한다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가 열반에 이른단 말입니다. 열반은 무엇인가? 열반 이것은 이상향理想鄕, 극락極樂, 진리眞理, 도道, 부처 경계, 하여튼 불교의 이상적인 경계, 이것이 열반입니다. 열涅자 이것은 해감(앙금 흙, 개흙) 날涅, 또는 극락 갈 녈涅 그래요. <열반 - 니르바나, nirvāṇa> 보통은 '날'자로 쓰나 또 역시 불교적일 때는 아까 말마따나 극락 갈 녈涅 말입니다. '너' '너'(니은) 하는 녈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잘 알지만 아까 역시도 딴 하나의 술어가 되어 가지고 딴데가 메여 있으면 그때는 '녈'로 쓰는 것입니다. 하나의 이유가 있으니까 그때는 '녈' 그래요. '녈' 말입니다. 열반이라, 반槃 이것은 즐거울 반槃자, 또는 소반 반槃자, 열반 이것은 극락세계란 말입니다. 아까 말마따나 진리眞理나 또는 도道나 또는 법성法性이나 또는 부처나 이와 같이 통용되는 말인 것입니다. 하여튼 불교 이상향理想鄕 말입니다. 열반에 즉, 이른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전도몽상顚倒夢想 때문에 꿈같은 거꾸로 보는 생각 때문에 결국은 열반에 못 간다 말입니다. 허나 우리가 이와 같이 모두를 다 텅 비었다고 보면서 우리 업장이 녹아지면 그때는 우리가 여러 가지 그런 꿈같은 전도몽상 거꾸로 보는 뒤 바뀐 생각을 우리가 떠나서 열반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우리가 극락을 성취한단 말입니다. 부처를 우리가 이룬단 말입니다. 열반을 성취하나니
삼세제불三世諸佛도
석가모니 부처님뿐만 아니라 과거 부처님이나 또는 현재나 미래나 모든 부처님이 삼세제불 아닙니까. 삼세 모든 부처님도 역시, 다만 아까 말한 보살뿐만 아니라, 이와 같이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지혜인 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에 의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삼세 부처님도 또한 똑같이,
의반야바라밀다依般若波羅蜜多고로,
역시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반야에 의지한단 말입니다. 우리가 반야般若에 의지해야 합니다. 반야에! 반야가 무엇인가? 반야는 지금까지 말한 바와 같이 해탈의 지혜, 모든 것을 바로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바로 보는 지혜 이것이 반야입니다. 또한 바꿔서 말하면 모두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이런 현상들이 다 비었다고 보는 지혜란 말입니다. 바로 보면 다 비었다고 보는 것이니까. 마치 전자현미경을 쓰고 보면 전부 전자로만 보이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의 안목 부처님의 눈으로 본다고 하면 그때는 우주가 텅 비어서 부처님의 광명만 가득 찬 것입니다. 그렇게 보는 그것이 참답게 옳은 것입니다. 전자현미경을 쓰고 보면 전자나 또는 원자로만 보이듯이 말입니다. 부처님의 그런 번뇌가 떠난 안목으로 본다고 하면 그때는 천지 우주가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광명으로만 가득 차 있단 말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참답게 바로 보는 것입니다. 삼세三世 모든 부처님도 역시 아까 보살과 마찬가지로,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즉 말하자면 영생에 이르는 피안에 이르는 그러한 반야에 즉 지혜에 의지한 고로
고득아누다라삼먁삼보리(고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故得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
아름다울 아阿자 클 아阿자, 김맬 누耨, 호미 누耨 '누'자인데 지금 모두 '아뇩다라' 해서 합니다만 사실 이 발음은 옳지가 않은 것입니다. 원래 이것이 '누'자입니다. 인도 음도 역시 nu그래서 그것이 누인데 말입니다. 아름다울 아阿, 또 호미 누耨 또는 김맬 누耨, 김맨다고 그래요. 이렇게 일단 한문자로 되어 있습니다. 많을 다多, 비단 라羅, 석 삼三, 이것도 아름다울 막藐, 석 삼三, 또 보살 보菩, 이끌 제提, 보리 말입니다. 이것도 이끌 제인데 인도의 '보디bodhi', 인도 말로 해서 즉, 요약해서 '보디'라고 그래요. 보디라. 보디를 우리는 (부르기) 사나우니까 그냥 '보리'라고 그래요. '보리'라고 발음합니다만 역시 본음 이것은 제提자입니다.
아누다라삼먁삼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 이것은 무슨 뜻인고 하면 무상정편도無上正遍道(무상정편지,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라, 없을 무無자, 윗 상上자, 말입니다. <주: 구역舊譯에서 무상정편도로 사용, 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무상정진도無上正眞道 등으로 한역됨> 위가 없고, 정편도正遍道라, 바를 정正, 두루 편遍, 길 도道자 말입니다. 위가 없이 바르고 보편적인 그러한 지혜<무상정변지無上正遍智>, 따라서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란 뜻이지요. 부처님의 참다운 지혜, 다시 비교할 수 없는 다시 위없는 또는 모든 것을 다 포함한 그런 지혜가 이것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무상도無上道, 무상지혜無上智慧, 구체적으로 말하면 방금 말씀마따나 무상정편도無上正遍道(무상정변지) 말입니다. 없을 무無자 윗 상上자, 위가 없고, 정편(정변)이라, 바를 정正자, 두루 편. 변徧자, 바르고 두루해 있단 말입니다. 그런 지혜가 이것이 아누다라삼먁삼보리(아뇩다라삼먁삼보리)입니다. 따라서 아누다라삼먁삼보리를 완전히 증득證得, 체험하면 그때는 부처 아닙니까. 성인聖人 말입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와 같이 얻는다. 고지故知라, 고故로,
삼세제불도 반야바라밀다 즉 피안에 이르는 영생에 이르는 그런 지혜에 의지하는 고故로, 그 지혜가 무엇인가? 이른바 아까 말마따나 제법諸法이 공空한 결국 오온개공五蘊皆空한 지혜란 말입니다. 하여튼 그놈을 머리에 딱 두어야 합니다. 그래야 혼미가 안 온단 말입니다. 제법이 공한 지혜, 또는 제법공상諸法空相 제법이 공한 실상, 그것으로 본다고 생각할 때는 그야말로 참 아까 말마따나 보살도 그런 지혜에 의지한 것이고 삼세제불도 역시 그와 같은 제법이 공한 지혜를 의지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무상도無上道를 성취한단 말입니다. 고故로,
고지故知라,
연고緣故로(그러한 까닭으로) 알지라, 고로 알지라, 즉 말하자면 고로 알아라, 이와 같은 것은, 즉 말하자면 보살이나 부처나 모두가 다 제법이 공한 지혜에 의지해서 무상도리無上道理를 성취했으니까 그대들은 알아라. 어제도 말한 바 이것은 부처님께서 지혜제일智慧第一 지혜가 수승한 사리불舍利弗한테 말한 법문입니다. 지혜가 수승한, 같은 제자도 아무리 신통은 많이 하지만 지혜가 수승 못하면 그때는 이런 법문은 알아먹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역시 지혜가 제일 수승한 사리불존자한테 이런 법문을 했단 말입니다. 고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이와 같이 피안에 이르는, 해탈에 이르는, 성불하는 지혜는 이것은
시대신주是大神呪요.
이것이 바로 그야말로 참 큰 신통스런 하나의 주문呪文이란 말입니다. 주문이라는 것은, 가사 '옴마니반메훔'이나 그것도 주문 아닙니까. 하여튼 우리 인간의 그런 말로 해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부사의神秘不思議한 뜻을 갖춘 짤막한 글 이것이 주문입니다. 보통 이런 말로 해서 뜻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의 그 리듬이나 또는 음으로 해서 즉 말하자면 심수오묘深邃奧妙한 그런 무량의 뜻을 갖추고 있단 말입니다. 그것이 주문인데, 반야심경 즉 말하자면 이와 같이 제법이 공한 자리를 볼 수 있는 이런 지혜가 바로 이것이 큰 그런 모든 신통을 다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주문이고,
시대명주是大明呪요.
이것이 모든 지혜를 밝힌 하나의 주문이며, 명주요.
시무상주是無上呪라.
이것이 또한 역시 무상無上이라, 위가 없는 주문이란 말입니다. 그야말로 참 뭐(무슨) 다라니가 많이 있고 여러 가지 별별 복잡한 주문이 많이 있지만 그런 주문 가운데서 '제법諸法이 공空했다' 하는 '오온五蘊이 공空했다 하는 지혜같이 결국 좋은 그런 주문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은 위없는 주문이며,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며,
이것은 무등등無等等이라, 없을 무無, 무등 말입니다. 같을 등等, 그럽니다. 무등등無等等이라, 같음이 없는 주문이란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동등한 그런 것이 없단 말입니다. 이것이 최상이기 때문에 동등한 그런 이와 버금할 수 있는, 이와 맞먹는 그런 주문이 없단 말입니다. 무등등은 이와 동등한 그런 주문이 없단 말입니다. 없으며,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라,
능할 능能, 제할 제除, 한 일一, 끊을 체切, 괴로울 고苦자, 일체의 그런 고통을 다 제거한단 말입니다. 내 몸이 귀중하다 또는 네가 귀중하다, 내 자식이다, 누구다, 뭐다, 재산이 좋다, 이런 것 때문에 결국은 고통이 있는 것인데 말입니다. 이 몸뚱아리 이것이 다 비었다고 생각할 때는 고통이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사실은 그렇게 없는 것이고 말입니다. 중생은 아까 말한 바와 같이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전도몽상顚倒夢想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능히 일체의 인생고를 다 제거하는지라, 따라서
진실불허眞實不虛라,
이것이 참되고 이것이 헛되지 않는단 말입니다.오온五蘊이 개공皆空한 지혜智慧가 이것이 참되고 헛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다운 지혜지 말입니다. 진실불허라.
고설반야바라밀다주故說般若波羅蜜多呪,
고로 반야바라밀다 즉 말하자면 피안에 이르는 성불하는 지혜의 주문을, 주문을 압축해서 이렇게 지금 말한다고 하면 그 뜻입니다. 즉 말하자면 지금까지 우리가 배워 온 반야심경의 진리를 말입니다. 하나로 딱 뭉쳐서 주문으로 표현한단 말입니다. 반야심경의 그런 이와 같이 많은 진리를 다 모아서 하나의 주문으로 압축해서 표현한다고 하면
즉설주왈卽說呪曰,
곧 지금 말하는데, 곧 주문을 예를 들어서 이르기를
아제아제揭帝揭帝 바라아제波羅揭帝 바라승아제波羅僧揭帝 보디사바하菩提娑婆訶,
이것은 들 게揭자인데 들 '걸'이라고도 합니다. 이것도 역시 인도 말을 그대로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뜻을 한문자로 한 것이고, 같은 음도 한문 투로 하는 것과 우리가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와 같이 모두 딱 안 맞아버렸지만 하여튼 지금 우리가 여기서 들먹이면 가늠인지라,
아제아제揭帝揭帝, 아제 이것은 들 게揭 또는 들 걸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들 게揭 임금 제帝, 또는 노파란 말입니다. 할머니(할미) 파婆, 할머니 '파'인데 '바'라고 이것을 발음합니다. 반야바라밀般若波羅密도 역시 '파'자인데 말입니다. '바'라고 하듯이 이와 같이 이렇게 음편音便되어서 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할머니 파波 비단 라羅, 중 승僧 (바라승) 들 게揭, 임금 제帝(아제) 보리, 보살 보菩, 끌 제提, 보디 또는 디라고 해야 하겠지요.(보디) 또, 세상 사娑, 사바세계라고 할 때는 우리가 사는 번뇌에 때묻은 세계를 사바세계라고 합니다. 세상 사娑, 할머니 파婆, 꾸짖을 가訶(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보디사바하! 반야심경의 전부 뜻을 하나의 주문으로 압축하면 결국은 이렇게 표현한단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교에서 오종불번五種不飜 그래서, 짤막한 말에 의미가 함축성이 많아가지고 말입니다. 다섯 가지 종류의 것은 우리가 번역을 말라는 그런 하나의 법칙이 있습니다. 가사 인도에만 있고 중국에는 없는 것이라든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아주 심수오묘해서 간단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주문은 그때는 번역을 말라는 법칙이 있단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번역을 않습니다. 않으나, 사람들이 하도 호기심이 있어 놔서 말입니다. 번역을 또 억지로 시도를 많이 했단 말입니다. 어떻든 또 여러 가지 한 그런 종류가 있으나 아제아제는 '돌아가세 돌아가세' 돌아간다는 것은 내내야 즉 말하자면 진리의 바다가 되겠지요. 진리의 고향 말입니다. 아제아제 즉, '돌아가세 돌아가세' (바라아제는) 어디로 가는가 하면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말입니다. 바라승아제 이것은 '모두 다 함께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보디(모지) ' 이것은 '도' '진리' 아닙니까. '사바하' 이것은 어떤 주문이나 보통은 많이 붙어 있습니다. '도를 성취한다.'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돌아가세 돌아가세,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모두 함께 가세.' 그렇게 해서 무상대도無上大道를, 무상대도가 사바하인데 말입니다. 사바하고 또는 보리인데 말입니다. 무상대도인 보리를 성취하세, 이렇게 풀이가 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저는 이것저것 많이 보고서 그 가운데서 제가 느껴서 제일 좋은 대목을, 즉 말하자면 한 것이니까 꼭 이것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만 여러분들이 나중에 호기심으로 해서 사고 싶으면 참고로 하시면 됩니다. '돌아가세 돌아가세, 영생의 고향으로 가세, 다 함께 가세, 위없는 진리를 성취하세!' 한글로 이렇게 되겠습니다.
여러분들 지금 이렇게 공양 시간이 되어서 공양 들으셔야지요.
반야의 지혜 아까 말씀마따나 오온개공五蘊皆空의 지혜 말입니다. 우리 중생이 보는 이것은 거꾸로 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지혜 이것은 오온五蘊이 비어 있는, 오온(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은 정신과 물질 아닙니까. 정신과 물질 이것은 다 비어 있는 것입니다. 참말로 있는 것은 무엇인가? 비어 있지만 다만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청정미묘淸淨微妙한 자비나 지혜나 또는 행복이나 그런 것이 가득 찬, 온(온전히)가득 찬 그 자리가 즉 말하자면 불성이란 말입니다. 불성! 텅 비어 있지만 사실은 불성佛性이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불성이 말입니다.
우주에는 불성뿐만 있는 것입니다. 중생은 그걸 못 보는데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런 것을 많이 외인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그냥 외이기만 해서는 별로 공덕功德이 없습니다. 우리 관념상觀念上 천지 우주는 텅 비어 있는데 다만 불성만이 충만充滿해 있구나! 이와 같이 느끼면서 관세음보살님이나 아미타불이나 말입니다. 그렇게 외셔야 합니다.
참말로 있는 실상實相은 방금 말마따나 텅 비어서, 우리가 보는 것은 비어 있는 것인데 다만 이렇게 허무虛無하게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그 실상 이것은 청정미묘淸淨微妙한 부처님의 광명光明이란 말입니다. 그런 우주에 충만한, 내 몸 가운데나 어디에나 우주에 충만한 부처님의 미묘한 광명, 그 가운데는 지혜도 행복도 다 들어 있습니다. 그 무한의 광명光明을 이렇게 이미지image로 생각하면서 부처님의 명호나 또는 화두도 하고 또는 염불도 하고 주문도 외인단 말입니다.
이렇게 해야만이 그때는, 참말로 그때는 우리가 그런 광명光明, 부처님의 그런 불성佛性과 하나가 된단 말입니다. 이것이 가장 속 빠른 공부 방법인 것이고, 그렇게 한다고 그러면 그때는 자기 스스로도 머리도 맑아지고 말입니다. 몸도 가벼워지고, 더 예뻐지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陀佛 나무석가모니불南無釋迦牟尼佛 나무마하반야바라밀南無摩訶般若波羅蜜)
- 19870217 청화淸華 대선사 반야심경般若心經 설법 (태안사 법문 복원본)
- 영상법문 주소 : https://www.youtube.com/watch?v=-xcxb8OTri0

첫댓글 1987.2 태안사 반야심경 설법은 큰스님의 중요한 법문입니다만 우리가 기존에 읽고 있는 반야심경 설법 텍스트가 큰스님의 원래의 정확한 말씀이 아닙니다.
원본 녹음파일을 복원하여 본정거사님과 주안거사님이 작업하셨던 기존텍스트의 누락, 의역,오타를 확인하고, 큰스님 말씀을 확인하여 말씀 그대로 정리하였습니다.
두분의 작업과 본연스님의 마음의 고향 편집본이 있어서 이번 작업을 완료할 수가 있었습니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위의 텍스트의 단락은 마음의 고향 4권 스타일로 나누었습니다.
영상법문은 일요일 아침에 업로드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석가모니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근념하시였습니다 참고하여 교정 보겠습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_()_
나무아미타불...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