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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32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사순절 마지막 주일)
십자가 속으로!
사50:4~9; 빌2:5~11; 막15:33~41
우리는 가끔 “상징을 잃어버린 현대인” 혹은 “신화를 잃어버린 현대인”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아마도 이 말은 과학적 사고라는 명목으로 과도한 실증주의로 인해, 우리 삶이 어떤 “깊이”를 잃어버리고, 평면적이 되고 피상적이 되어 버린 것을 가리키는 말일 것입니다. 마르쿠제가 말한 “일차원적 인간”입니다. 눈에 보이고 문자로 읽히는 것이 전부가 되어 버린 겁니다. 이렇게 되면, 가령, 시(詩)는 그 힘을 잃고, 예술도 그 의미를 잃고 맙니다. 이럴 때 어디에도 신비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겠지요. 우리는 어디서도 신비를 발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삶의 신비는 인간이 만든 모든 개념을 넘어가야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상징: 커뮤니케이션(의사전달)인가, 커뮤니온(하나가 되는 친교)인가?”라는 글에서, 상징은 단순히 하나의 기호(sign)라기보다는 현존(presence)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상징이란 단순히 어떤 숨겨진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현실의 내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그 무엇이라는 것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참된 상징은 삶 가운데 지나가는 일련의 사건 중 하나가 아니라, 존재의 바로 그 중심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래서 이 상징에 자신의 온 존재를 가지고 영적으로 공명하지 않는다면(다시 말해, 존재를 걸고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는다면) 상징은 이해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성경 속에 나오는 많은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들은 이런 상징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겉으로 보는 것보다 더 깊은 삶(생명)의 의미층을 담고 있으며, 우리가 여기에 존재를 걸고 진지하게 참여하지 않으면, 그 상징들은 진정한 의미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그런 것 중에는, 가령 “십자가”가 있고 “부활”이 있으며, “성례전”이 있고 “하나님의 자녀 됨”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이런 말들은 어떤 개념이나 지식을 알려주는 정보가 아니라, 거기에 참여하지 않으면, 참여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어떤 심오한 상징들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십자가란 무엇일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는 거기에 교회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상호 표지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합니다. 그래서 도시의 밤을 붉게 밝히는 네온사인 십자가는 세상에서 조롱거리가 된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초대교회의 믿음 속에 살아있던 십자가의 상징은, 바울이 가장 약한 것 속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했던 “십자가의 도”(고전1:18)는 더 이상 우리에게 그런 의미로 다가오지 않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에게도 십자가는 단순한 상호 표지로 바뀌어 버린 지 오래고, 악세사리처럼 치장하는 도구가 되어버린 지 오래입니다. 아니면, 우리에게 십자가는 여전히 고통과 수치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창세기 첫 장에 나오는 창조 이야기는 아주 심오한 의미를 전해주는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창조과학자들이 얘기하듯이, 단지 과학지식을 알려주는 그런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런 면에서 “신화”라는 말을 써도 무방합니다. 오래된 허황된 이야기라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삶의 중요한 상징”이라는 의미에서 말이죠.)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를 만드시고 동산 한 가운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심어 놓으신 후에, 그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뱀은 하와를 유혹하면서, 이렇게 말하지요. “그 열매를 먹어도 너희는 죽지 않는다. 오히려 그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지고, 하나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시고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처럼”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켈로힘>인데, “신들처럼”이라는 복수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태초부터 우리 안에 있는 유혹은 “신들처럼” 되는 것이었습니다. “신들처럼” 된다는 말은, 신들처럼 완벽하고, 존경 받으며, 무한한 힘을 갖으려는 충동을 말합니다. 이런 충동은 곧바로 선악을 판단하는 쪽으로 작동했는데, “신들처럼” 되어,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끊임없이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끈질긴 유혹을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과 평가는 무엇보다도 먼저 나 자신을 향하고, 또 동시에 다른 이들을 향하게 됩니다. 나는 좋은가? ―나는 완전하고 올바르며 강하고 힘이 있는가? 아니면, 나는 나쁜가? - 나는 불완전하고, 틀리고, 약한가? 당신은? 그는/그녀는?
그래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판단하거나 알려는 충동은 모든 일로 퍼져나가서, 우리 자신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그 사람으로 있는가, 다시 말해, “신들과 같은”가 아닌가를 판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우리가 기준 잡아 놓은 그 이미지에 어울리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자신과 계속해서 비교 당하면서 자신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후에, 아담은 (히브리어에서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의 일반명사로 쓰이는 말입니다) 하나님에게 질문을 받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이 대답합니다. “동산에서 당신이 거니시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벗은 몸인 것이 두려워 숨었습니다.” 아담은 알몸이라서 두렵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다음과 같은 말입니다. “벌거벗은 나의 인간성 안에서, 알몸인 나의 피조물성 안에서, 저는 신들과 같지 않음을 알았습니다. 저는 신이 될 수 없고 신과 분리되었습니다. 저는 약하고, 나쁘고, 불완전하고, 잘못되고, 실패작입니다. 저는 ‘마땅히 그래야 할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나는 이것이 두렵고, 두려워서 숨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이 말은 네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네가 나로부터 분리되었다고, 네가 유죄라고 누가 알려주더냐?” 라고 묻는 말입니다.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이 말은 우리 깊이에서 작용하고 있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 “죄 있음”의 수치심과 “벌 받는 것의 두려움”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스스로를 자기처벌로 이끄는 지와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저는 우리는 아무 잘못도, 죄도 없고, 선하고 순수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모든 판단 이전에 우리는 “너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너는 유죄야”라는 끈질기 유혹자의 끊임없는 속삭임이 우리를 수치심과 두려움, 자기처벌로 몰아넣고, 이로 인해(그 결과로) 우리는 실제 수많은 죄와 잘못을 짓게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알몸이라는 두려움과 수치심 ― 다시 말해, 내가 뭔가를 더 갖지 않으면 나는 잘못되었고, 내가 더 인정받지 않으면 나는 나쁘고, 내가 전능한 힘을 갖지 않으면 나는 불완전하다는 이 끊임없는 충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와, 참 좋구나”(<힌네 톱 메옷>) 탄성을 발하신 그 본래의 나로 살지 못하게 하는 근본 요인입니다. 따라서, 동시에 그 두려움과 수치심은 우리를 처절한 자기처벌로 몰아가는 근원이 되기도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근본적으로 이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바로 이 죄의식과 두려움과 수치로부터, 우리가 스스로 가한 처벌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상징이 됩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신들처럼” 되어야 한다는, “마땅히 그래야 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그 망상을 거두고, 그래서 자신을 판단하고 공격하고 거절하고 벌하는 일을 그만두라고 선언합니다.
십자가는 엄청난 역설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이 자기 죄를 뒤집어쓰고 모든 이들 앞에서 벌거벗겨 높이 매달리는 고통과 수치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십자가는 고통과 수치를 벗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여러분이 세상에서 책임져야 하는 “무거운 짐”을 가리키는 사인이 아니라, 우리가 본래의 나로 사는 진정한 자유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진정 우리가 누구인지, 판단 받지 않고 정직한 알몸을 보게 만들었습니다. 십자가는 우리가 알몸임을 알고서도, 그것이 고통과 수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본래의 나(“아, 참 좋다” <힌네 톱 메옷>)라는 것을 보게 했습니다.
물론, 십자가를 지는 것은 여전히 고통스럽습니다. 왜냐하면, 십자가는 그 알몸을 직시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 수치와 “하찮음”을 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어린시절의 미성숙함을 벗어던지고 어른이 될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성숙한 세계는 끊임없는 판단과 처벌이 있긴 하지만, 동시에 책임이 없는 “편안함”이 있는 세계였습니다. 둥지는 안락했습니다. 그런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둥지를 떠날 것을 요구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여전히 고통입니다.
또한 우상처럼 모시고 있는 것들,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을 물리치는 것은 어린아이에게는 죄책감을 갖게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성장 하기를 원하고 자유롭기를 원한다고 하지만, 막상 성장하자, 자유롭게 되자고 하면, “다음에 할께요” 아니면, “틀림없이 무슨 다른 방법이 있을꺼예요.” 말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의 고통, 벌이 아니라 치유의 고통, 침체가 아니라 성장의 고통, 죽음이 아니라 탄생의 고통입니다.
그런데 이런 십자가를 뚜벅뚜벅 걸어와 지신 분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자유를 우리에게 보여 주신 분이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심으로 진정 하나님이 되신(켈로힘)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은 우리가 수난절에 여러 번 읽은 글입니다. 이 글을 쓴 사람은 토마스 머튼이 살았던 켄터키 주 게네마니 수도원의 수도승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신들처럼” 되려는 그 끊임없는 충동의 굴레서 벗어나라고, 너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아니, 본디부터 하나님의 자녀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벌하기 위해 있는 분이 아니라, 사랑하기 위해 있는 분이라고,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스스로 만든 망상을 떨쳐버리고, 자유와 기쁨 속에 신나는 삶을 살라고, 본래의 너를 찾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사람이 되시어,
제가 신들처럼 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존재가 되시어,
제가 무한하고 대단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죽음을 면치 못하는 존재가 되시어,
제가 불사의 존재가 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열등한 존재가 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우수한 존재가 될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약한 존재이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강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불완전한 존재이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완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찬성을 받지 못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찬성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틀리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옳을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당신께서 실패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성공할 필요가 없습니다.
당신께서 모든 면에서 가난하시어,
저와 다른 이들이 어떤 면으로든 부자일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 위에 계시는 그리스도님,
당신께서 제가 마땅히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되시어,
제가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되려고
저와 다른 이들을 죽일 필요가 없음에 감사드립니다....
십자가 위에 못 박히신 하느님,
당신께서 제가 제 자신에 대해 경멸하는 모든 것이 되시어,
제가 당신 안에서 저 자신과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었음에 감사드립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제가 자유로울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사랑하는 살림교회 식구 여러분, 우리가 오늘 이 십자가의 신비를 모두 다 이해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십자가가 전하는 그 모든 상징들을 다 알아차릴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평생 이 십자가를 기억하고 바라보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또 다시 “신들처럼” 되려는 허황된 망상과, 자기비난과 자기처벌, 거기서 파생된 수많은 미움과 질시와 적대에 휘말려 들 때마다 우리는 다시 십자가를 기억하고 바라볼 수 있습니다.
오늘 마가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그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서 숨을 거두실 때, 예수님을 마주보고 서 있던 백부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본문에 예수를 마주보고 서 있던 백부장은 예수께서 숨을 거두시는 것을 “봅니다”. “마주보고 서 있다는 것”은 “그 앞에서 현존한다 스탠바이 한다”는 말이며 “본다”(<호라오>)는 말은 “관찰한다, 인식한다, 깨닫는다, 이해한다, 체험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깊이 있게 보고, 예수님을 깨닫고 이해합니다. 그리고 체험합니다. 그런 모습으로 죽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의 눈이 열리고, 십자가의 신비를 깨닫습니다. “참으로 이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이 고백은 단지 교리적인 고백이 아니라, 자신이 그 안에 참여하여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임을 고백하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여인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주목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 또 살로메,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온 여인들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죽음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40절) ‘지켜본다’고 번역된 헬라어는 “테오레오”입니다. 이 말은 “바라보다, 주의 깊게 바라보다”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관상”이라는 말의 ‘테오리아’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여인들은 예수께서 죽으시는 외적인 모습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그 깊은 속을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이런 계속된 바라봄을 통해 이 여인들에게서 예수의 신비가 밝혀질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제일 먼저 목격한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멀리 딴 곳으로 떠밀리 이리저리 헤매다가도 다시 돌아와 예수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 외형이 전하는 정보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십자가가 전하려는 심오한 의미를 바라봅시다. 그리고 그 의미 속으로 들어가 참여하고, 예수님이 누리셨던 하나님의 자녀 됨을 우리도 함께 누립시다. 우리가 이 땅, 지구별에 잠시 들른 온전한 이유, 유일한 이유는 “신들처럼” 되려는 충동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충만함을 맛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사랑의 주 하나님, 우리에게 십자가를 바라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십자가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께서 본래 지으신 우리 자신과 참된 자유를 발견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