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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Course in Miracle(기적수업) 2:61 – 2:71
61 It is essential to remember that only the mind can create. Implicit in this is the corollary that correction belongs at the thought level. To repeat an earlier statement and to extend it somewhat, the Soul is already perfect and therefore does not require correction. The body does not really exist except as a learning device for the mind. This learning device is not subject to errors of its own because it was created but is not creating. It should be obvious, then, that correcting the creator or inducing it to give up its miscreations is the only application of creative ability which is truly meaningful.
61 오로지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여기에는, 교정이 생각 수준에 속한다는 당연한 결론이 내포되어 있다. 전에 한 말을 반복하고 다소 확장해보자면, 영혼은 이미 완벽하기에 교정이 필요 없다. 몸은 마음을 위한 학습 도구로 존재한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실제로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이 학습 도구는 창조되기는 했지만 창조하지는 않기에, 그 자체로는 잘못을 범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창조자를 교정하는 것, 즉 창조자가 자신의 그릇된 창조물들을 포기하도록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창조 능력을 진정으로 의미 있게 적용하는 유일한 방법임이 분명하다.
62 Magic is essentially mindless or the miscreative use of the mind. Physical medications are forms of "spells." Those who are afraid to use the mind to heal should not attempt to do so. The very fact that they are afraid has made them vulnerable to miscreation. They are therefore likely to misunderstand any healing they might induce and, because egocentricity and fear usually occur together, may be unable to accept the real Source of the healing. Under these conditions, it is safer for them to rely temporarily on physical healing devices because they cannot misperceive them as their own creations. As long as their sense of vulnerability persists, they should be preserved from even attempting miracles.
62 마법은 근본적으로 마음을 무분별하게mindless, 즉 그릇되게 창조적인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물질로 된 약은 일종의 “주문”이다. 치유하기 위해 마음을 사용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자는 그런 시도를 해서는 안 된다. 그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이 그를 그릇된 창조에 취약하게 만들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이 유발할 수도 있는 모든 치유를 오해할 공산이 높으며, 또한 자기중심성과 두려움은 대개 함께 일어나므로, 치유의 진짜 근원을 받아들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상황에 서는 물질적인 치유 도구에 일시적으로 의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왜냐하면 그것을 그 자신의 창조물로 그릇되게 지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가 계속 취약하다고 느끼는 한, 기적을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
63 We have already said that the miracle is an expression of miracle-mindedness. Miracle-mindedness merely means right-mindedness in the sense that we are now using it. The right-minded neither exalt nor depreciate the mind of the miracle worker or the miracle receiver. However, as a creative act, the miracle need not await the right-mindedness of the receiver. In fact, its purpose is to restore him to his right mind. It is essential, however, that the miracle worker be in his right mind or he will be unable to reestablish right-mindedness in someone else.
63 우리는 이미 기적은 기적심의 표현이라고 말했다. 기적심이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 단지 바른 마음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자는 기적일꾼과 기적을 받는 자의 마음을 추어올리지도 경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창조적인 행위로서의 기적은, 기적을 받는 자가 바른 마음 상태가 될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사실 기적의 목적은 그를 바른 마음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기적 일꾼이 바른 마음 상태에 있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사람 안에 바른 마음 상태를 재확립해 줄 수 없을 것이다.
64 The healer who relies on his own readiness is endangering his understanding. He is perfectly safe as long as he is completely unconcerned about his readiness but maintains a consistent trust in mine. If your miracle working propensities are not functioning properly, it is always because fear has intruded on your right-mindedness and has literally upset it (or turned it upside-down). All forms of not-right-mindedness are the result of refusal to accept the Atonement for yourself. If the miracle worker does accept it, he places himself in a position to recognize that those who need to be healed are simply those who have not realized that right-mindedness is healing.
64 치유사가 자신의 준비되어 있음에 의존하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위험에 빠지게 된다. 그가 자신의 준비되어 있음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나의 준비되어 있음에만 한결같은 신뢰를 유지하는 한, 그는 아주 안전하다. 만약 기적을 행하는 너의 성향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항상 너의 바른 마음 상태로 두려움이 침범해 들어와서 문자 그대로 그 상태를 뒤엎어 놓았기 때문이다. 즉, 위아래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모든 형식의 바르지 않은 마음 상태는 너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한 결과다. 기적일꾼이 속죄를 받아들이게 되면, 치유될 필요가 있는 자란 단지 바른 마음 상태가 곧 치유임을 깨닫지 못한 자임을 인식할 수 있게 된다.
65 The sole responsibility of the miracle worker is to accept the Atonement for himself. This means that he recognizes that mind is the only creative level and that its errors are healed by the Atonement. Once he accepts this, his mind can only heal. By denying his mind any destructive potential and reinstating its purely constructive powers, he has placed himself in a position where he can undo the level confusion of others. The message he then gives to others is the truth that their minds are similarly constructive and that their miscreations cannot hurt them. By affirming this, the miracle worker releases the mind from over-evaluating its own learning device (the body) and restores the mind to its true position as the learner.
65 기적일꾼의 유일한 의무는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마음이 유일하게 창조적인 수준이며, 마음의 잘못은 속죄로 치유된다는 것을 인식한다는 뜻이다. 일단 이것을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의 마음은 오로지 치유할 수만 있다. 그는 자신의 마음에서 모든 파괴적인 잠재력을 부정하고 마음의 순전히 건설적인 힘을 회복시킴으로써, 다른 이의 수준 혼동을 무효화 할 수 있는 위치에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기적일꾼이 다른 이에게 주는 메시지는, 그의 마음도 마찬가지로 건설적이며, 그의 그릇된 창조물들은 그를 해칠 수 없다는 진리이다. 이렇게 확언함으로써, 기적일꾼은 마음을 학습 도구(몸)에 대한 과대평가에서 해방하여 학습자로서의 진정한 위치로 회복시킨다.
66 It should be emphasized again that the body does not learn any more than it creates. As a learning device, it merely follows the learner, but if it is falsely endowed with self-initiative, it becomes a serious obstruction to the very learning it should facilitate. Only the mind is capable of illumination. The Soul is already illuminated, and the body in itself is too dense. The mind, however, can bring its illumination to the body by recognizing that density is the opposite of intelligence and therefore unamenable to independent learning. It is, however, easily brought into alignment with a mind which has learned to look beyond density toward light.
66 몸은 창조하지 않듯이 배우지도 않는다는 사실을 한 번 더 강조하고자 한다. 학습 도구로서 몸은 그저 학습자를 따를 뿐이지만, 자기 주도권을 잘못 부여받으면 자신이 촉진해야 할 바로 그 배움에 심각한 방해물이 된다. 오로지 마음만이 빛을 비출 수 있다. 영혼은 이미 밝게 비추어져 있으며, 몸은 그 자체로 너무 둔하다. 하지만 마음은, 둔함density은 지성intelligence의 반대라서 독립적으로 배우기가 쉽지 않음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빛으로 몸을 비춰줄 수 있다. 몸은 독립적으로 배우기가 쉽지 않지만, 둔함 너머로 빛을 보는 법을 배운 마음은 몸을 쉽사리 자신에게 협력하게 만들 수 있다.
67 Corrective learning always begins with the awakening of the Spiritual eye and the turning away from the belief in physical sight. The reason this so often entails fear is because man is afraid of what his Spiritual eye will see. We said before that the Spiritual eye cannot see error and is capable only of looking beyond it to the defense of Atonement. There is no doubt that the Spiritual eye does produce extreme discomfort by what it sees. Yet what man forgets is that the discomfort is not the final outcome of its perception. When the Spiritual eye is permitted to look upon the defilement of the altar, it also looks immediately toward the Atonement.
67 교정적인 배움은 언제나 영안을 깨우고 육안에 대한 믿음에 등을 돌리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것이 그렇게 자주 두려움을 수반하는 까닭은, 사람이 자신의 영안이 보게 될 바로 그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에 영안은 잘못을 볼 수 없으며, 잘못 너머로 속죄라는 방어기제만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영안이 보는 것이 극심한 불편함을 일으킨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사람은 그런 불편함이 영안의 지각이 가져오는 최종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잊었다. 제단의 오염을 바라보도록 허락받았을 때, 영안은 즉시 눈을 돌려 속죄도 바라본다.
68 Nothing the Spiritual eye perceives can induce fear. Everything that results from accurate spiritual awareness is merely channelized toward correction. Discomfort is aroused only to bring the need for correction forcibly into awareness. What the physical eye sees is not corrective nor can it be corrected by any device which can be seen physically. As long as a man believes in what his physical sight tells him, all his corrective behavior will be misdirected. The real vision is obscured because man cannot endure to see his own defiled altar. But since the altar has been defiled, his state becomes doubly dangerous unless it is perceived.
68 영안이 지각하는 것은 그 무엇도 두려움을 유발할 수 없다. 정확한 영적인 자각에서 발생하는 모든 것은 다만 교정으로 보내질 뿐이다. 불편함은 단지 교정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자각하도록 만들기 위해 일어난다. 육안이 보는 것은 교정하지 않으며, 육안이 볼 수 있는 어떤 도구로도 교정될 수 없다. 육체적 시각이 말해주는 것을 믿는 한, 사람의 모든 교정적인 행동은 잘못 인도될 것이다. 진정한 비전이 가려지는 까닭은, 사람이 자신의 더럽혀진 제단을 보는 것을 견딜 수 없어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단은 이미 더럽혀졌기에, 그것을 지각하지 않는다면 그의 상태는 곱절로 위험해 진다.
69 The fear of healing arises, in the end, from an unwillingness to accept the unequivocal fact that healing is necessary. Man is not willing to look on what he has done to himself. Healing is an ability lent to man after the separation, before which it was completely unnecessary. Like all aspects of the space-time belief, healing ability is temporary. However, as long as time persists, healing is needed as a means for human protection. This is because healing rests on charity, and charity is a way of perceiving the perfection of another even if he cannot perceive it himself.
69 치유에 대한 두려움은 결국 치유가 필요하다는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저항 때문에 일어난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행한 것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저항한다. 치유는 분리 이후에 사람에게 부여된 능력으로서, 그전에는 전혀 필요 없었다. 시공간 믿음의 모든 측면들처럼, 치유하는 능력도 일시적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속되는 한, 치유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필요하다. 그 이유는 치유가 자비에 기초하기 때문인데, 자비는 다른 사람이 자신의 완벽함을 지각할 수 없을지라도 그의 완벽함을 지각하는 방법이다.
70 Most of the loftier concepts of which man is capable now are time-dependent. Charity is really a weaker reflection of a much more powerful love-encompassment which is far beyond any form of charity that man can conceive of as yet. Charity is essential to right-mindedness in the limited sense in which right-mindedness can now be attained. Charity is a way of looking at another as if he had already gone far beyond his actual accomplishments in time. Since his own thinking is faulty, he cannot see the Atonement for himself or he would have no need for charity. The charity which is accorded him is both an acknowledgment that he is weak and a recognition that he could be stronger.
70 사람이 지금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고상한 개념은 시간에 의존한다. 자비는 실제로 훨씬 더 강력한 사랑의 아우름을 희미하게 반영한 것인데, 그러한 사랑의 아우름은 사람이 이제껏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형식의 자비를 훨씬 넘어선 것이다. 바른 마음 상태를 지금 얻을 수 있다는 제한적인 의미에서, 자비는 바른 마음 상태에 꼭 필요하다. 자비는 다른 사람을 그가 실제로 성취한 것보다 시간상으로 이미 훨씬 더 멀리 나아간 듯이 보는 방법이다. 그는 그릇되게 생각하고 있기에 스스로 속죄를 볼 수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비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을 자비롭게 대한다는 것은, 그가 현재는 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앞으로는 더 강해질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71 The way in which both of these perceptions are stated clearly implies their dependence on time, making it quite apparent that charity lies within the human limitations, though toward its higher levels. We said before that only revelation transcends time. The miracle, as an expression of true human charity, can only shorten time at most. It must be understood, however, that whenever a man offers a miracle to another, he is shortening the suffering of both. This introduces a correction into the whole record which corrects retroactively as well as progressively.
71 이런 두 가지 지각이 언급된 방식은 그 지각들이 시간에 의존함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자비가 비록 자신보다 더 높은 수준을 향하고 있을지라도 인간의 한계 안에 있음을 아주 뚜렷이 보여준다. 우리는 앞에서 오로지 계시만이 시간을 초월한다고 말했다. 인간의 진정한 자비의 표현으로서의 기적은 기껏해야 시간을 단축할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는 사람은 두 사람 모두의 고통을 단축한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순방향은 물론 소급적으로도 작용하는 교정 요인을 전체 기록에 들여온다.
[출처] [1월 20일] 텍스트 2:61 – 2:71 (한국 기적수업 공부 모임) | 작성자 도서출판 기적의 향기
첫댓글 오로지 마음만이 창조할 수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기적심이란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의미에서 단지 바른 마음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기적일꾼의 유일한 의무는 스스로 속죄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영안이 지각하는 것은 그 무엇도 두려움을 유발할 수 없다.
다른 사람에게 기적을 베푸는 사람은 두 사람 모두의 고통을 단축한다는 것을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