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전성시(門前成市)
대문 앞이 저자를 이룬다는 뜻으로, 세도가나 부잣집 문 앞이 방문객으로 저자를 이루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이다.
門 : 문 문(門/0)
前 : 앞 전(刂/7)
成 : 이룰 성(戈/3)
市 : 저자 시(巾/2)
(유의어)
문전약시(門前若市)
문정약시(門庭若市)
문정여시(門庭如市)
(상대어)
문외가설작라(門外可設雀羅)
문전작라(門前雀羅)
출전 : 한서(漢書) 정숭전(鄭崇傳)
아주 쉬운 글자로 이루어진 이 성어는 문 앞(門前)에 시장을 이룰(成市) 정도로 사람이 많이 찾는다는 뜻이다.
권세가 많은 세력가의 집이나 부자가 된 집에 방문객들이 몰린다. 평시에 잘 보이려고, 또 명절이나 인사철에 상급자의 집에 뇌물을 갖다 바치는 것을 뜻했다.
오늘날 인사가 점차 맑아져 이면으로는 어떨지 몰라도 겉으로는 이런 청탁자의 문전성시(門前成市)는 사라졌다.
그러다가 시장에서 어떠한 물건이 입소문을 타고 유명해져 손님들이 꽉 차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자연스럽게 됐다.
설을 앞두고 백화점이나 재래시장 등은 제수용품을 사고파는 일로 요즘이 바로 그렇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더불어 중국의 양대 사서로 불리는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 이같은 내용이 처음 실렸다.
정숭손보전(鄭崇孫寶傳)의 이야기에 따르면 전한(前漢) 말기 애제(哀帝) 때의 정숭은 충신으로서 이름이 높았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즉위한 왕은 외척들이 조정을 쥐락펴락하는데도 아랑곳없이 미소년 동현(董賢)과의 동성애에 빠져 헤어 나올 줄 몰랐다.
정숭은 거듭 미소년을 멀리 하라고 간했으나 왕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이내 왕의 미움만 사게 되었다. 이때 아첨배 조창(趙昌)이 나서 정숭을 종친과 내통한다고 무고했다.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경의 문전이 시장과 같다고 하던데(君門如市人/ 군문여시인) 그러면서도 나로 하여금 하지 말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 하고 캐물었다.
정숭은 “신의 집 문 앞이 저자와 같을지라도 신의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臣門如市 臣心如水/ 신문여시 신심여수)‘ 하며 공정한 조사를 원했지만 옥에 갇히고 말았다. 손보가 억울함을 상소했지만 자신도 쫓겨나고 정숭은 옥사했다.
아첨배의 말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인지 음습한 뜻이 내포된 문전성시(門前成市)와 달리 비슷한 뜻의 문정약시(門庭若市)는 간언하러 모여드는 사람들로 인해 궁전의 문과 뜰은 시장과 같았다는 긍정적인 성어다.
반면 흥청이던 집에 인적이 끊긴 경우는 문 앞에 참새가 집을 짓는다는 뜻의 문전작라(門前雀羅)라 한다.
⏹ 문전성시(門前成市)
문전(門前)은 ‘문 앞’의 뜻이고, 성시(成市)는 ‘장이 섬’의 뜻이다. 그러므로 문 앞이 시장을 이룬다는 뜻으로,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 집 문앞이 시장을 이루다시피 함을 이르는 말이다.
한서(漢書) 정숭전(鄭崇傳), 손보전(孫寶傳)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전한(前漢) 말기 애제(哀帝) 때, 조정의 실권은 외척의 손에 넘어가고 황제는 동현(董賢)이라는 미소년에 빠져 정치는 돌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상서복야(尙書僕射)로 있던 정숭(鄭崇)은 황제의 인척으로, 이름난 학자 포선(飽宣), 중신인 왕선(王善) 등과 함께 매번 외척들의 횡포와 부패를 황제에게 직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황제의 눈에 난 것은 물론 아첨배들로 부터는 경원(敬遠)의 대상이 되었다.
그 무렵 상서령(尙書令)으로 있던 조창(趙昌)은 정숭(鄭崇)을 시기하여 모함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어느 날 애제에게 정숭이 종친과 내통하여 왕래가 잦다고 무고하였다.
애제는 즉시 정숭을 불러 “경의 문전이 저자와 같다고 하던데(君門如市人) 그러면서도 나로 하여금 하지 말라, 끊으라는 말을 할 수 있는가?”하고 물었다.
정숭은 “신의 집 문앞이 저자와 같을지라도 신의 마음은 물과 같습니다(臣門如市臣心如水). 황공하오나 한번 더 조사해 주십시오.”하였다.
이 말을 들은 애제는 황제의 말에 대꾸를 하였다며 노발대발하여 평소 눈엣가시였던 정숭을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사예(司隸)인 손보(孫寶)가 상소하여 조창의 참언을 공박하고 정숭을 변호했지만 애제는 오히려 손보마저 삭탈관직하고 서인으로 강등시켜 내쳤다. 정숭은 그 후 옥사하였다.
또 다른 고사로 전국시대(戰國時代) 제(齊)나라에 추기(鄒忌)라는 호남자(好男子)가 있었다.
어느 날 추기는 거울을 보고 생각했다. “나는 미남자로 유명한 서공(徐公)에는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아내에게 물었다. “나와 서공과 어느 쪽이 미남자인가?”
아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틀림없이 당신쪽이 더 잘 생겼습니다.”
아내의 말은 신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 추기는 첩에게도 꼭같이 물었다. 첩은 “물론 당신이 더 잘 생겼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다음날 친구가 찾아왔기에 추기는 친구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했다. 추기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서 온 그 친구가 대답했다. “서공 따위는 자네에게 미치지 못하네. 정말이네!”
친구의 칭찬의 말에도 추기는 납득할 수 없었다. 그 다음날 서공이 추기의 집을 방문했다. 추기는 서공을 이리저리 자세히 살펴보고, 또 뚫어지도록 서공을 보며 생각했다. “역시 내 쪽이 떨어진다.”
서공이 돌아간 후에 추기는 자신과 서공과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려고 거울을 들여다 보았다. 보면 볼수록 자신이 서공보다 못생겼다고 생각되었다
그 날 밤 그는 생각했다. “왜 모두 내가 더 잘생겼다고 말하는 걸까?” 곰곰이 생각한 끝에 추기는 깨달았다. “아내는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고, 첩은 나를 두려워하기 때문이고, 친구는 나에게 부탁할 것이 있어서 였다.”라고.
자신이 이 지경이라면, 왕은 더 많은 아부의 소리에 둘러싸여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추기는 위왕(威王)을 알현하여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했다. 칭찬하는 말보다 비판하고 충고하는 말이야말로 들을 가치가 있다고 진언했다.
위왕은 그 말을 옳게 여기어 즉시 공포했다. “관리와 백성을 막론하고 나에게 직간하는 자에게는 상등(上等)의 상서(上書)하여 간하는 자에게는 중등(中等)의 마을에서 비판하는 자에게는 하등(下等)의 상을 준다.”
예상대로, 왕에게 간언하려고 온 자가 줄을 이었기 때문에, 왕궁의 뜰은 저자처럼 사람으로 가득차게 되었다. 물론 상서(上書)도 쇄도하였고, 마을에서도 왕을 비판하는 소리로 떠들썩하게 되었다. 왕은 그들의 비판을 받아들여서 정치를 개혁해 갔다.
수 개월이 지났다. 비판자는 두드러지게 줄어들었고, 1년후에는 비판하는 자가 없게 되었다. 비판의 씨앗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위왕은 이런 노력으로 제(齊)나라의 힘을 강하게 하였다. 주위의 여러나라들이 모 두 제나라를 존경하여 사자를 파견했다. 역사가는 이것을 논평하여 말했다. “위왕은 군사를 사용하지 않고 승리를 얻었다.”
문정여시(門廷如市), 문정약시(門廷若市)와 같은 말로, 후일 고위 관직자가 사람을 끌어들여 뇌물을 받거나 패거리를 만드는 행위를 경계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자고로 동양사회에서는 문 앞의 상황으로 집 주인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경우가 있었다.
문 앞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들어 저잣거리 같은 소란함이 생겨나는 경우는 문전성시(門前成市)다.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의 대문 앞에는 권세가를 이용하려는 사람들이 들끓게 마련이다.
이들이 타고 온 수레와 말들이 그 집 대문 앞에 몰리는 모습에는 거수마룡(車水馬龍)이라는 성어를 사용했다. 수레는 물같이 이어지고, 말은 용처럼 길게 늘어선다는 뜻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권세라는 것은 거품과 같은 것이어서 오르다가 곧 꺼지는 일이 늘 벌어지기 때문이다. 역시 문 앞의 상황에 대한 묘사로 권세가의 몰락을 표현한다.
문 앞이 쓸쓸하기 짝이 없다는 뜻의 문전냉락(門前冷落)이다. 문 앞에 모여들던 수레와 말들이 끊겨가는 상황은 문전냉락거마희(門前冷落車馬稀)라고 표현했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司馬遷)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강직한 발언으로 황제의 신임을 샀던 두 고관이 황제의 미움을 사 자리에서 내려왔을 때를 사마천은 이렇게 그렸다. “문 앞에는 참새 잡는 그물을 놓을 정도였다(門外可設雀羅).”
권력을 앞에 두고 벌이는 사람들의 저울질, 나아가 그 세태의 덧없음이 진하게 우러나는 형용이다.
제 자신의 문전(門前)을 잘 관리하는 게 관료된 자가 지녀야 할 미덕이다. 권세에 빌붙기 위해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부로 엉기다가는 낭패를 본다.
사적인 인연 맺기를 자제하고 스스로를 사욕과 부정에 물들지 않게 다스리는 것은 문의 관리에서 시작된다.
세상이 많이 변했다고는 하지만 고위직 관료의 부정직한 행위는 늘 이어진다. 공(公)과 사(私)를 엄격히 구분하고 정실(情實)에 얽매이지 않는 관료가 나라의 동량(棟梁)이다.
새로 자리에 오른 고위직의 공무원들은 모쪼록 문전 처리 미숙의 고질병에서 벗어났으면 좋겠다.
책임은 무겁고, 갈 길은 멀다(任重而道遠)는 공자(孔子)의 말을 어려운 국가 상황에서 자리에 오른 새 관료들이 새겨 봄 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