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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20;1-23. 레이와 7년. 어느 때는 나와 사망 사이가 한 걸음!!! 2025. 1. 19.
오늘은 2025년을 시작한지 벌써 3번째 주일입니다. 하지만 레이와 7년을 위해서 1월 한 달을 감사와 축복의 서원 예배로 드립니다. 그 서원은 목표와 비전이었는데 그 목표와 비전을 향하여 한 걸음을 내딛고, 걸어가며 달리고, 뛰며 쫒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달리고 뛰고 쫒아가는 현실과 상황은 매 순간마다 순탄하지만은 않습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그렇고 사업과 직장과 삶의 모든 조건들이 그렇습니다. 달리고 뛰고 쫒아가야 할 상황이 아닐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의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을 받았으나 다윗에게는 여러 가지 시기와 질투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혼자 신음하는 고통 속에서 살았습니다. 다윗의 내일과 미래를 담보할 수 없었습니다. 시편71편으로 고백을 하는데, 시71;1이하에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내가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소서,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시며. 나를 구원하소서. 얼마나 여건과 환경이 좋지 않으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않고, 날마다 공의로 건지시며 구원을 위하여 간청을 했겠습니까? 피할 곳은 세상과 사람이 아니고 피할 바위는 오직 하나님이었습니다. 그런데 피하다는 동사 חָסָה(하사)는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주님을 신뢰하였으니. 보호하시는 견고한 바위와 반석과 요새라고 합니다. 시71;5절 주 여호와는 나의 소망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소망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תִּקְוָה (티카와)는 끈이라는 의미입니다. 고난의 연속과 절망적인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잡을 수 있는 끈으로 생각했습니다. 베푸시는 끈이었고 구원하시는 끈이었고 건저내시는 끈이었습니다. 다윗은 고통을 통하여 위대함을 발견합니다. 전7:14,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셨는데 두 가지는 형통할 때마다 기뻐하고 곤고한 순간마다 뒤돌아보는 것입니다. 이유는 능히 알지 못하는 장래 일 때문이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모든 것이 은혜이고 항상 은혜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목표와 비전과 성취가 은혜로 이루어집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에벤에셀의 은혜이었습니다. 앞으로 살아갈 2025년의 하루하루가 여호와 살롬의 은혜입니다. 오늘과 내일의 필요의 잔이 넘치도록 채우실 여호와 이레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와 살롬이 믿음과 신앙으로 고백되십니까? 그렇다면 새로 시작한 2025년도에 목적과 목표가 이루어지실 것입니다. 장래 일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성취가 되고 열매와 수확으로 안겨 주실 것입니다. 남은 삶의 순간과 시간과 공간을, 그리고 살아내야 하는 순간과 시간과 공간을 살롬과 은혜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은혜라는 찬양가사를 다시 봅니다.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아침 해가 뜨고 저녁의 노을 봄의 꽃향기와 가을의 열매 변하는 계절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 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살고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 은혜, 한없는 은혜, 내 삶에 당연한 건 하나도 없었던 것을~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여러분, 당연한 것이 하나도 없었고 에벤에셀과 여호와 살롬과 여호와 이레였고 은혜이었다면,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레이와 7년에 아름다운 열매를 안겨 주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 내 인생에 숨이 찰 때가 있습니다. 2025년의 과정 속에 아픔이 몰려 올 때가 있습니다. 치밀한 계획과 하나님이 주신 비전을 꼬옥 붙들고 가더라도 탁탁 막히고 절벽 끝 위에 서 있을 때가 있습니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상황에 놓일 때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이 그렇습니다. 그만큼 세상은 나를 향하여 문을 열어 주지 않습니다. 세상의 어두움과 악한 사탄과 마귀의 궤계가 끊임없이 찾아오지만 나의 길을 내시는 하나님을 절대 신뢰하고, 나의 길을 여시는 주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오늘 다윗은 여러 가지 우여곡절을 겪습니다. 인생에 숨이 찼습니다. 아픔이 몰려왔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았고 자신의 생명과 사망 사이가 한걸음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든 것과 관계 속에서 기쁨과 소망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면 본문이 무엇을 말씀하고 내용이 무엇입니까?
1. 다윗의 호소입니다. 여러분, 대부분의 실패는 환경이 나쁘거나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스스로 한계라고 느끼고 포기했을 때 찾아옵니다. 자주 한계를 느끼는 사람은 일에 대하여 실패했을 때 단순히 일에 실패했다고 느끼지 않고 자신을 실패자나 패배자로 단정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한계를 만들지 말고 언제 어느 때든지 고난과 고통은 지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낮추는 데 익숙해지면 새로운 이미지도 만들 수 없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지면 풀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해도 새로운 시각과 계획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다윗은 사실 한계에 도달을 했습니다. 도망을 다니고 협조를 구하고, 피신하는 것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 라마로 피신을 가고 거기서 다시 요나단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멘토를 찾고 도움을 줄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럼에도 해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한계입니다. 오죽하면 다윗이 나의 생명과 사망사이가 한 걸음이라고 할까요? 사울 왕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 보다 요나단의 손에 죽는 것이 낫다고 합니다. 너의 아버지, 사울 왕의 손에 죽을 것이 무엇이냐고 합니다. 여러분, 산을 넘기도 전에 너무 높다고 주저앉는다면, 달리기도 전에 너무 멀다고 하면서 앉아 있다면, 짐을 들기도 전에 너무 무거워 보인다고 포기한다면 오늘과 내일의 정상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한계 앞에서 도전하는 정신이 신앙이고 믿음입니다. 한계를 넘어 신앙 안에서 한 걸음 더 내딛는 용기가 새 길을 내고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합니다. 다윗은 한계에 도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을 찾았습니다. 본문 1절에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와서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기에 너의 아버지가 내 생명을 찾느뇨?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다윗을 잡으러 오자 다윗이 그곳을 피하여 요나단이 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말이 되고 내용을 들어줄 사람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았습니다. 왜 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3가지를 이야기 하는데 제일 먼저 내가 잘못한 일이 있느냐? 무슨 죄를 지었느냐? 왜 내 생명을 찾느냐? 방법이 없었습니다. 한계상황 앞에서 다윗은 요나단을 찾았고 물었습니다. 사울이 라마 나욧에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를 다윗은 알았습니다. 그래서 요나단에게 호소를 합니다. 여러분, 여기서 진리를 발견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사람일지라도 어려움을 당할 수가 있습니다. 그 어려움 때문에 도망갈 때가 있습니다. 그 때에 영적인 지도자나 멘토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도와주고 이해하고 용기를 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왜요? 영적인 지도자와 멘토는 위기의 상황에서 나를 구하기도하고 피할 길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한계의 상황에서 스스로 한계를 짓지 않았습니다. 당하는 고통이 너무나 무겁고 힘들어도 보다 높이, 보다 멀리, 보다 깊이를 아시는 하나님을 기대했습니다. 그 방법이 요나단을 찾은 것입니다. 여러분, 호소는 왜 합니까? 억울한 한계 앞에 스스로 일어나려는 행동이 아닙니까? 호소 뒤에 숨은 뜻은 일어나려는 의지와 행동입니다. 그런데 이런 호소들과 일어나려고 하는 시도가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고 새로운 길도 내고 도움을 받습니다. 3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너의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라. 이 말에 요나단은 여러 번에 걸쳐서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죽지 않습니다.
2. 요나단의 대응입니다. 다윗의 호소에 대하여 2절에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부친이 대소사를 내게 알게 아니하고는 행함이 없나니 내 부친이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겠는가? 사실 요나단도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는 것을 알았습니다. 19;4-6. 아버지 사울에게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것을 호소했고, 요나단의 말을 들은 사울 왕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두고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맹세까지 했기 때문에 요나단은 그러한 아버지의 맹세를 믿었습니다. 20;2절. 사울이 다윗을 죽이고자 한다면 자신에게 말하지 않을 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마 나욧으로 간 사울의 일을 모르는 요나단으로서는 다윗의 말을 쉽게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신앙인이지만 우리의 상황을 다 파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알 수도 없습니다. 어느 때는 나를 가둬 놓고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습니다. 세상은 나의 처지와 형편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헌 신짝 버리듯이 이익 앞에서 지나칩니다. 이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면 목적과 목표는 제외하더라도 실수와 왜곡된 판단 속에 살아가야만 합니다. 여러분, 아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신뢰하지 않을 수가 있어요? 요나단이 그렇습니다.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아들인 요나단이 슬퍼할 것이기 때문에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일을 숨긴 것이라고 말 하면서 자신의 위기에 대하여 호소를 합니다. 이때 요나단은 아버지가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면 그것을 미리 알아서 다윗을 구하겠다고 하는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왜 이렇게 다윗을 구하려고 할까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신앙의 관점이고 두 번째는 자신의 관점인데 이것은 웬만한 사람은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는 가문의 멸망입니다. 두 가지가 무엇인가요?
2-1. 요나단이 다윗의 호소 앞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을 보았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우정의 차원이 아니고 이렇게 하신 믿음의 차원입니다. 여러분, 요나단이 다윗을 만난 시간은 길지 않습니다. 죽마고우도 아니고 목적도 다릅니다. 만들어 질 앞으로의 미래도 정해졌습니다. 그런데도 요나단은 아버지를 배신하면서 다윗을 도와줍니다. 다윗을 돕는 것은 배신행위 아닙니까? 그런데 15절에 요나단은 자신의 집을 다윗의 대적이라고 말하고, 하나님이 다윗의 대적인 자신의 집을 지면에서 끊어버리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아무리 우정이 돈독하고 좋아도 친구 앞에서 멸망당할 가문으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요나단은 하나님으로 부터 끊어질 가문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신앙의 관점이었습니다. 사실 요나단은 사울의 아들로서 후계자입니다. 왕위를 물려받을 위치입니다. 그렇다면 요나단도 사울을 도와서 다윗을 제거하는 일에 앞장을 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의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다윗을 도와줍니다. 왜요? 왕이라는 지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요나단에게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고, 베냐민지파의 믿음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도 신앙 안에서 문제를 보면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있고, 메이지가 않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친구를 원하십니까? 한국의 조선시대에 쌍벽을 이루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신숙주와 한명회이었는데 그들은 절친 이었습니다. 하지만 서로 자란 환경도 다르고 성격도 달랐지만 사돈까지 맺으며 오랜 시간을 가까이 지냈습니다. 하루는 세조 임금이 두 사람을 불러 연회를 열었습니다. 세조 임금은 연회의 즐거움에 취하여 신숙주에게 장난을 쳤는데 평소 농담을 할 줄 모르는 신숙주의 팔을 꺾으며, 자신의 팔도 꺾어 보라며 팔씨름을 하자고 했습니다. 당시 임금의 몸에 함부로 손을 대는 것은 큰 죄이었기 때문에 거절했지만 세조 왕은 더욱 집요하게 부탁했습니다. 결국 신숙주는 세조의 팔을 살짝 비틀었는데, 연회가 끝나고 아무 일도 없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한명회는 신숙주의 하인을 부르더니 집으로 돌아가거든 주인에게 꼭 방에 불을 끄고 일찍 잠을 자라는 말을 전했습니다. 그날 밤 세조는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신숙주 행동이 괘씸했기 때문입니다. 임금이 부탁을 하고 시켰지만 감히 왕의 팔을 비틀다니~~ 세조 임금은 신숙주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신숙주의 집으로 내시를 보냈습니다. 잠시 후 신숙주의 집을 살피고 온 내시는 방에 불이 꺼져 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늦은 밤까지 책을 보는 신숙주가 잠을 자다니 아까는 취했던 것이 분명 하구나!!! 세조 임금은 그제야 언짢은 마음을 풀며 잠이 들었습니다. 사실 신숙주는 그날 밤도 불을 켜고 책을 읽으려고 했는데 그 모습을 본 하인이 달려와서 한명회의 말을 전해 급히 불을 껐고 다행히 그 뒤에 내시가 다녀간 것이었습니다. 누구보다 왕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한명회 덕분에 신숙주는 위기를 넘겼습니다. 신숙주의 관직과 목숨을 친구이자 사돈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친구라는 말은 한자로 새겨보면, 친할 친(親)자와 옛 구, 친구 구(舊) 인데, 친할 親은 설립(立)과 나무 목(木)과 볼 견(見)이 합쳐진 한문입니다. 親의 뜻은 나무를 세우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옛 舊자는 풀초(草)와 새추 절구 구(臼)의 합성어입니다. 舊의 뜻은 새가 풀을 모아서 둥우리를 오래전부터 지었고 새가 깃들여 있는 짚으로 만든 둥우리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친구가 되고 싶으십니까? 목숨을 함께 나누는 친구인 라프(Life friend)가 있습니다. 말 그대로 최고의 친구인 베프(Best friend)가 있습니다. 매일 안부를 묻고 인사하는 헬프(Hello friend)인 친구가 있습니다. 서로 비밀을 갖고 있는 시프(Secret friend)인 친구가 있습니다. 표현 그대로 사랑하는 친구인 러프(Love friend)가 있습니다. Normal friend인 보통 친구가 있습니다. 장점과 웃음을 찾아 주는 smile friend가 있습니다. 요나단은 나무를 세우는 것을 보고 풀과 가지를 물어다가 다윗을 위하여 울타리를 만들었습니다. 누구를 위해서요? 다윗을 위해서. 왜요?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을 향한 신앙과 믿음을 보았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어떻게 합니까요? 다윗이 고백하기를 시118:6-7. 여호와는 내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 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겠는가? 여호와께서 내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 중에 계시니 그러므로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서 보응하시는 것을 내가 보리로다. 두 눈으로 돕는 사람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요나단은 다윗으로 하여금 예비 되고 작정하신 길을 가도록 도와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힘이 드십니까? 문제 앞에 두렵고 고민이 많습니까? 2025년의 인생길에 드려진 먹구름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을 돕는 그 사람 편에 있습니다. 진정한 친구를 통해서도 달리고 뛰고 쫒아가서 목적과 목표를 이루시는 2025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다윗에 대한 아버지의 행동을 생각하면서 가문의 멸망을 보았습니다. 14-16절,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로 죽지 않게 할뿐 아니라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라고 합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집이 하나님에게 멸망을 받을 때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다윗의 집과 언약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 편에 서서 다윗을 돕는 이유였습니다. 그러면 요나단이 왜 굳이 다윗과 언약을 맺습니까? 자신의 집안을 멸망시킬 것을 알았다면 요나단이 직접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면 되지 않습니까? 중요한 것은 요나단이 가문의 끊어짐과 멸망을 보았던 이유는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 때문입니다. 19:5. 요나단이 사울에게 다윗에 대하여 말하면서 여호와께서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큰 구원을 이루셨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때의 일입니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사건에서 여호와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골리앗 앞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윗을 세우셨음을 보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단에게 있어서 다윗은 그냥 다윗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하여 세운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다윗을 죽이는 것은 곧 하나님의 구원을 훼방하는 대적의 모습이며, 따라서 멸망에서 건짐 받을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택하신 다윗과 언약을 맺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2025년이 복되시고 시온의 대로이시기를 원하십니까? 요나단을 보면서 우리의 신앙에 대하여 생각해야 합니다. 과연 나는 2025년에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하는가? 2025년에 무엇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며 살아야하는가? 깊은 통찰이 있어야 합니다. 요나단은 자신의 집을 멸망의 집으로 보았습니다. 때문에 요나단에게 중요한 것은 멸망에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다윗에게 여호와의 인자를 구했습니다. 왜요? 다윗이 하나님이 세운 사람인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사울은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합니다. 다윗 때문에 자신의 왕위가 위협을 받는다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이 택한 다윗이었음을 보지 못했습니다.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의 관심은 오직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과 참된 믿음은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을 합니다. 나의 모습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 이유는 비전과 목표와 목적을 헛된 것으로 돌려 버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요나단이 다윗을 바라보는 시각으로 내 자신의 삶을 보고 요나단과 같은 시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 오직 예수님이 주시는 은혜위에 서서 힘 있게 열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의 집안은 여호와께 끊어짐을 받는데, 죽지 않고 끊어지지 않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인자는 다윗을 통하여 베풀어졌습니다. 이것을 잊어버리면 살아 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게 됩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세상을 살아가는 문제입니까? 세상과 사람입니까? 물질입니까? 내 모습을 보고 마지막을 보는 것입니다. 요나단은 멸망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이 요나단에게 너의 집안을 멸망시키겠다고 특별한 계시를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다윗이 골리앗을 물리친 사건에서 다윗이 누구인가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다윗을 대적하는 것이 곧 멸망 받을 모습임을 알았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을 세워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끊어짐을 무시한 채 살아갑니다. 자신을 보면서도 그것이 곧 멸망의 모습임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 바라보십니까? 나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천사장의 나팔소리와 함께 천군천사 호위하면서 강림하신다는 종말론적 신앙이 보이십니까? 사단은 내 자신의 멸망을 보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여호와의 인자를 구하는 것입니다. 멸망에서 구하고 살리는 것은 오직 여호와의 인자하심입니다. 인자이신 주님만 바라보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그 때에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라는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요나단의 믿음이었습니다. 자신의 가문의 멸망을 보게 되었을 때 다윗이 곧 자신의 생명임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자기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영원한 생명인 예수그리스도 아닙니까? 죽었던 저주와 심판에서 나를 구하는 것은 여호와의 인자하심 아닙니까? 이것을 외면하고 어떻게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곧 나의 생명이라는 것이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요나단이 자신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께 직접 기도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오직 택한 사람, 다윗을 세워서 일하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단의 미래는 다윗이 중심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가장 귀하고 가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 말을 남긴다면 무슨 말을 남기시겠습니까? 마지막 부탁을 한다면 무슨 부탁을 하시겠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살라는 것 아닙니까? 신앙생활을 하지만 2025년의 세상의 어두움 앞에서 어느 때는 구름처럼 바람처럼 인내하면서 2025년을 살다보면 하나님께서 구름은 이동시키고 바람은 동남풍으로 모든 근심 걱정을 떠나게 하시고 결국에는 레이와 7년의 꿈과 비전을 이루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먼저는 요나단처럼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보시고 그리고 그 속에서 또한 나의 아픔을 보시고 거기에 답을 찾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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