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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구멍
도계동에는 내가 가끔 들리는 술집이 있다. 이름 하여 단골집이다. 이곳은 내가 창원 이사해 살면서부터 알게 된 곳이다. 당시 마음에 쓰린 상처가 있어 맑은 술로 달랬던 적이었다. 도계동 도랑 가에 '가향실비'라는 이름의 허름한 자리였다. 나는 맥주보다 소주를 즐겨했다. 더러 주변 지기들과 환담을 나누기도 하고 혼자 들러 잔을 비우기도 했다.
그 당시 주인 말씨가 저쪽 목포쯤 짐작 가는 내보다 서너 살 위로 보이는 여자였다. 나는 성씨나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다. 찾아오는 손님들을 참 편안하게 대해 주었고 찌개로 나온 안주도 맛깔스런 솜씨였다. 그런데 이 주인은 가게 세가 올랐는지, 경영이 어려워서인지 영업을 그만두었다. 한참 뒤 들은 이야기로 노래방 도우미로 나간다고 들었다.
그 자리 가게이름을 '마로니에'라고 바꾸어 달고 새로 영업을 시작한 여자가 있었다. 고향이 인근 고성이라 했고 나이는 내 또래 정도 되나 싶었다. 마산 쪽에서 무슨 일을 하다가 창원으로 옮겨왔나 싶었다. 여태 독신이면서 깔끔하고 우아한 품위를 지켜가면서 억척스레 사는 여자였다. 손님도 잘 섬기어 예전보다 가게를 잘 경영하나 싶었다.
이 주인은 나중에 가게 이름을 '청석골'이라는 민속주점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숨은 솜씨를 발휘해 실내장식을 새로 꾸몄다.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켜 멋을 부렸다. 출입구는 자신이 직접 엮은 이엉을 두르고 함지박엔 수련이나 부레옥잠을 띄워 길렀다. 주로 70년대 청바지 통기타 가수의 음악이 흘러나왔다.
나는 이 가게 주인이 두 차례 바뀌어도 가끔 들려 주로 막걸리나 소주를 마셨다. 어떨 때는 지갑이 비어 술값을 달아두기도 했다. 술자리를 하다보면 채운만큼 비워야한다. 이 집의 화장실은 문밖으로 나가 건물 뒤를 돌아가야 했다. 화장실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의 건물 안쪽에 있었다. 비누가 놓여있는 세면대는 깨끗했다.
화장실이 건물 안쪽 이슥한 곳에 있다 보니, 문밖을 나온 주점 손님들은 화장실 가는 계단 두 개를 오르기 귀찮았다. 그래서 문간을 나와 바로 뒤편 화분에다 실례하는 경우가 많았다. 화분은 2층 건물주가 관리하는 것이었다. 남의 눈에 잘 띄는 곳이 아니다보니 취객들은 바지춤 내리고 볼일을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아마 2층 주인은 술집 주인에게 닦달했을 것이다. 손님들보고 제발 화장실에 가서 용무보라고 나무랐을 것이다. 술꾼의 오줌세례로 화분들은 시들어가고 악취가 집안에 퍼졌을 했을 것이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밤마다 반복되는 일에 술집주인도 참 난감했을 것이다. 주인여자는 술꾼 남정네들보고 제발 화장실 가서 볼일 보아주십사고 사정할 처지도 못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술집 주인은 기막힌 아이디어로 바깥의 화분에 오줌 누는 취객들을 화장실 안으로 유인했다. 그 여자는 어디서 구했는지 관능미 넘치는 여자의 엉덩이를 클로즈업시킨 사진액자를 구해 신사용 소변기 벽면에 걸어 두었다. 적당히 취기 오른 술꾼들은 바지춤을 내려놓고 볼일을 보는 사이 그 사진을 보면서 야릇한 생각을 했을 것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멋진 사진을 걸어 놓고 보니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오줌이 마려운 자는 얼굴은 가려 있었지만 그 미끈한 몸매의 여자 엉덩이가 보고 싶어서도 화장실 안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화장실 다녀와 그 사진 이야기를 하지 않은 손님은 바깥 화분에다 볼일 보았음이 분명했다. 술집의 연약한 한 여자가 드센 술꾼 남자 여럿을 이긴 게임이렷다.
그런데 한동안 잘 지켜지던 실내 화장실 사용에 문제가 생겼다. 손님 가운데 한 괴짜손님이 그만 그 사진 액자를 슬쩍 가져가고 말았다. 그 후 예전과 마찬가지로 주인댁 화분은 시들고 악취가 나는 일이 반복되었다. 나는 한동안 그 집을 들릴 때마다 화장실 벽면 걸려있던 액자 자리를 눈 여겨 바라보았다. 바로 그 자리에 조그마한 못 구멍만 빤히 뚫리어 있었다. 04년 9월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
간밤에 바람이 불고 봄비가 촉촉이 내렸다. 나는 바깥에서 한 자리가 있었고 한동안 혼자서 비를 맞고 걸었다. 자고 나니 걸으면서 누구와 통화를 나눈 기억이 희미하다. 서로 가벼운 술만 되면 상대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대는 사이가 있다. 그와 나눈 통화 내용이 무엇이더라. 비가 갠 아침은 이렇게 맑고 산뜻한데.
우리가 눈으로 본 사물은 어떤 마음의 창문이냐에 따라 다르게 비친다. 푸른 안경을 끼고 바라보면 푸르게 보이고, 검은 안경을 끼고 쳐다보면 검게 보인단다. 둥근 안경으로는 세상이 둥글게 보이고, 모난 안경으로는 모나게 보인다는 얘기겠지. 눈이 마음의 창문이라던데 내 눈동자는 남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그 평가가 궁금하고 걱정이 된다.
친구 가운데는 대작대기 가랑이 사이에 끼우고 함께 놀았던 고향 친구가 으뜸이라지. 그런데 나는 아쉽게도 그 죽마고우들과 정분을 자주 나누지 못하고 산다. 그저 명절에 고향걸음 했을 때 울 너머 담 너머 슬쩍 고개 내밀어 인사 나누는 사이랄까. 정말 세상사 고락애환을 그 친구들과 털어놓고 밤새워 지낼만한데 내가 못난 탓인가 보다.
나이 들어 사귄 친구들 가운데 아주 특별난 친구가 있다. 어제 저
녁같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더 간절히 보고 싶은 녀석이다. 이 친구를 처음 만나기는 교육대학에 입학해서다. 이십대 문턱까지 시골을 벗어나지 않은 나에 비해 이 친구는 부산서 태어나서 공부했단다. 대학 재학 중 하사관 후보 교육을 받았는데 그와 나는 늘 고문관이었다. 우리의 동작은 늘 교관으로부터 오시범 모범사례로 지적 받았다. 이것은 고된 훈련 중에 동료에게 웃음을 선사하는 청량제가 되어주었다.
우리가 교육대학을 다닐 때 사백 명 입학생 가운데 남자라고 고작 서른여섯 명뿐이었기에 남학생끼리의 교류는 군사훈련만으로도 끈끈했다. 캠퍼스 근처에서 가끔 돌린 막걸리 잔으로 질곡의 시대를 괴로워했고, 지는 청춘을 아파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서도 이 친구는 나와 성장 환경과 출신 성향이 아주 다름에도 늘 내 주변에 함께 있어주었다. 그 후로 지금의 사십대 중반까지 방학이면 다른 동기생 일곱 가족과 함께 일 년에 두 번은 꼭 만난다.
졸업 후 성적순으로 초등교사로 임용 받아 나갔는데 그는 나보다 먼저 발령 받았다. 그가 덜 방황했는지 더 영리했는지 둘 중 하나이렷다. 그는 내 고향의 벽촌으로 초임 발령을 받아왔다. 이 친구가 그 때 한 말 가운데 지금도 기억나는 말이 있다. 시골 아이들의 순수함은 골짝이 깊으면 깊을수록 더하더란다. 비포장 길에 버스가 지나갈 때면 아이들은 코스모스 꽃길 덤불 속에 파묻혀 보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도 한참동안 손을 흔들더란다. 먼지를 피해 멀찌감치 떨어지지도 않고 말이다.
그 후로 그와 나는 초등교단에 근무하면서 각각 부산과 대구에서 야간강좌의 국문과를 나오게 되었다. 그것도 그 당시 해괴한 졸업정원제 때문에 편입을 받아주지 않아 새로이 학력고사를 거쳐 4년을 고스란히 다녀야 했다. 어찌 흘러 내가 중등으로 먼저 옮기고 친구도 뒤이어 옮겨왔다. 중등으로 옮긴 자리가 나는 통영 가는 길목의 고성 어느 바닷가였고, 이 친구는 건너 큰 섬 거제도의 어느 학교였다.
나는 그런 대로 옮겨간 학교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아니, 초등은 향수로 묻어두고 현실에 발을 디딜 뿐이었다. 신혼을 갓 지날 무렵의 돌이 안 된 큰 아이와 함께였다. 그런데 이 친구는 영 적응을 하지 못했다. 더 하고 싶은 공부가 있어 일반대학원에 적을 두고 있었고 아직 미혼이었다. 초등의 근무 생리와 달리 중등에선 보충수업을 해라, 자율학습 지도를 해라 등으로 몸을 더 학교에 많이 붙들어 두었다. 친구는 이 생활이 체질에 맞지 않았나 보다.
한번은 어느 평일임에도 늦은 밤 나한테 찾아와 학교생활이 힘들다며 밤새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다음날 새벽 그는 통영을 거쳐 먼 거리를 되돌아갔다. 초등에서는 정한 시간 이후면 룰루랄라 학교를 벗어나 자유의 몸이었다. 주말이나 방학이면 아이들과 배낭을 메고 산으로 들로 떠나던 이 친구에겐 중등의 생리가 분명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괴로워하다 초등 교단으로 되돌아갔다. 넘어올 땐 쉽게 넘어오더니만, 초등으로 다시 옮기기는 정말 절차가 복잡하고 어려웠던 것으로 안다.
이 친구는 한때 정을 묻은 울산으로 가 정착했다. 정말 아이들을 좋아하는 것은 타고난 천성이라 고사리 손의 제자들이 무척 많이 따랐다. 표창이나 승진에는 전혀 관심조차 없는 친구다. 지금 이 나이에 학교에서 고작 맡는 거라곤 친목회나 동창회 모임 주선이다. 어찌 초년에 쓴 사랑을 맛보고는 장가도 삼십 중반을 넘겨 우리 모임에서 꼴찌로 갔다. 하나 뿐인 귀여운 딸이 올해 유치원에 다니고 있다.
몇 해 전 여름이었다. 동기 가족 모임을 경주에서 하고 이 친구 집을 지나올 때다. 사는 곳이 경주에서 울산 가는 길의 도시 변두리였다. 그런 집을 빌라라고 하나 다세대주택이라나. 가운데 통로를 두고 여남은 세대가 붙어사는 건물이었다. 주변 나락 논에선 개구리가 울고 밭둑에선 옥수수가 수염을 내밀고 있던 때였다. 그 때 이 친구가 자기 집에서 한 말이 오래 묵혀도 또렷한 기억으로 남는다.
비 오는 어느 날에 그냥 비가 맞고 싶어서 3층집에서 내려가 뜰에 한참 멍하니 앉아 있었단다. 신혼의 아내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기는 집에 두고 말이다. 우산도 모자도 쓰지 않고 그렇게 두어 시간 비를 후줄근히 맞았단다. 그렇게 비를 맞으니 세상 시름 잊어지고 후련해지더란다. 창밖을 내려 본 위 층 사람들은 정원에서 혼자 비 맞고 있는 친구를 보고 뭐 심각한 부부 싸움한 뒤로 생각했단다. 아무 일 없던 지극히 평온한 집안을 두고 크게 오해를 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건 감추고 싶은 나만의 비밀인데 내 취미가 달밤에 무작정 걷기이고, 특기는 비 맞으며 하염없이 걷기다. 부부만 닮아 가는 것이 아니라 오래 사귄 친구도 닮아 가는 건지. 제발 내 머리숱이 남들만큼만 되어도, 오염된 산성비만 아니라도 간밤처럼 종종 비를 맞고 걸어볼 텐데. 03년 5월
자연산 친구
내가 남긴 '비가 오면 생각나는 사람' 제목의 글에 나오는 친구가 있다. 그는 예전의 살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아파트로 옮겨서 산다. 행정 구역은 울산이라도 경주에서 가까운 도시 변두리다. 그와 그의 아내는 집 가까운 거리의 서로 다른 학교에 교사로 있다. 그의 하나 뿐인 딸은 이제 초등학교 일학년이다.
교육대학 동기들이 졸업 후부터 지금까지 방학이면 모이는 자리가 있다. 사백 명 입학생 가운데 남자는 고작 서른여섯 명이었다. 그 서른여섯 명 가운데 다시 여덟 명이 우리 구성원들이다. 모임의 이름은 ‘회초리’로 했다. 선생이 아이들한테 드는 회초리가 아니라 교사가 자신에게 보내는 채찍의 의미에 더 무게 중심을 두었다.
근무지는 경남이 네 명이고 세 명은 울산이고 한 명은 대구다. 총각 때 첫 모임은 회원들의 고향 본가에서 돌아가며 모였다. 그 다음부터 자신의 근무 학교에서 모였다. 그 뒤로 지리산 계곡이나 부곡 온천이나 경주에서 주로 모였다. 이제 모두 결혼해서 자녀 가운데 대학 2학년에 다니는 아들도 있고 이제 초등학교 1학년인 딸도 있다. 회원 가운데 늦장가 든 친구가 있어서다.
지난겨울과 이번 여름엔 연거푸 울산에서 모였다. 모이면 1박 2일로 가족들이 모두 만난다. 이제 자녀가 거의 자라 초등학교 학생 아이만 오기에 예전보다 더 단출하다. 이번 여름엔 함양에 있는 친구가 태풍 영향으로 내린 호우주의보로 오지 못했고 나머지는 다 모였다. 나는 창원의 다른 친구와 함께 이틀을 함께 다녀왔다. 제일 먼 곳이 통영에서 온 친구다. 마침 그 친구가 총무여서 하룻밤을 지낸 모든 차림을 준비해야 했다.
우리는 최근 개관한 울산광역시교육청에서 운영하는 울산교육수련원을 이용했다. 방어진 위의 정자에서 멀지 않은 바닷가 신명분교의 폐교 부지에 세운 현대식 건물의 콘도였다. 시설이 웬만한 명성 있는 콘도보다 더 좋았다. 앞에는 동해바다가 넘실거리는 풍광이 아름다운 곳이다. 울산교육청 소속의 교원들에게 스무 평 넘는 콘도 1실 하루 사용에 고작 만 오천 원 시설 이용로만 받는다고 했다.
울산에 근무하는 세 명의 친구 덕으로 우리는 이번 여름에도 아주 편하게 하룻밤을 보냈다. 우리들은 모두 여섯 실을 예약했다. 함양 친구가 날씨 사정으로 못 왔고, 울산의 한 친구는 서울의 국악고에 다니는 딸이 모처럼 열차로 부산 내려오기에 밤늦은 시각 마중을 나가 한 가족이 한 실씩 쓰게 되었다. 늦은 시각까지 세상사는 이야기에 술잔을 서로 주고받았다. 새벽 두세 시가 되어 자리는 대충 정리되었다.
이튿날 아침은 통영에서 간밤 가져온 조개로 해장국을 끓여 속을 풀었다. 열 시 무렵 짐들을 정리하고 오는 겨울 방학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각자 집으로 헤어졌다. 내가 동승해 온 창원 친구와 울산의 한 친구는 함께 하는 시간을 더 가졌다. 아침에 스쳐 지난 태풍의 영향으로 집 채 만 한 파도를 덤으로 구경했다. 같은 바다라도 태풍 이후의 파도는 그 규모가 사뭇 달랐다.
울산 친구의 아파트 근처에 와서 그가 추천한 음식점에서 세 가족은 주꾸미 구이와 전골로 맛있는 식사를 했다. 회초리 모임 속의 또 다른 작은 모임이다. 지난겨울 우리 세 가족은 경주 남산 언저리 석불과 석탑을 둘러보고 잉어찜을 맛있게 먹은 적이 있었다. 창원으로 돌아갈 우리는 친구가 아쉬워해 그의 아파트에 들러 차를 한 잔 더 나누기로 했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의 맨 꼭대기 층이다.
세 가족은 이런 저런 이야기로 차도 나누고 맥주잔을 기울였다. 나는 맥주를 즐기지 않기에 소주를 마셨다. 돌아올 길도 멀기에 알맞은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서면 싶었다. 그런데 울산 친구는 아쉬워하며 우리를 더 붙잡아 두려했다. 그 자리서 우리가 비운 소주만도 세 병이었다. 맥주야 더 많은 병이다. 창원 친구는 운전을 해야 하기에 잔만 따라야 했다. 서너 시간을 함께 있다가 해거름 되어 일어났다.
울산 친구는 세상을 관조하며 즐기며 살고 있었다. 우리 나이에 누구나 고민하는 승진에도 초연하다. 소위 점수 관리는 전혀 하지 않는다. 본가나 처가 어른들을 섬기면서 전국을 다니면서 역사 고적이나 우리 문화에 대한 넓은 안목과 식견을 갖추고 있다. 학교에서는 친목회 자리나 주선하고 마음에 드는 자리에선 분위기를 살려 주는 역에 충실하다.
나는 이 울산 친구가 무척 부러웠다. 친구의 살림살이나 서가에 꽂힌 책이 부러운 것이 아니었다. 친구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이 부러웠다. 그는 도시에 태어나 자랐다. 나는 농촌에서 태어나서 지금도 주말이면 시골에 가서 농사일도 하고 있다. 이 친구는 그가 사는 아파트의 거실과 베란다를 온통 식물원으로 꾸며 잘 키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름난 화초나 아름다운 꽃이 아니었다.
그가 목공 연장으로 손수 짜서 만든 나무궤짝에다 방수처리까지 하여 흙을 담고 여러 가지 풀들을 키우고 있었다. 한 때는 고추나 토마토를 키웠더니만 잎만 무성하고 열매가 달리지 않아 채소는 가꾸지 않는단다. 자르고 비틀어 모양을 낸 분재는 없었다. 웬만한 꽃집의 우리 꽃 매장을 보는 듯했다. 딱딱한 아파트에서 친구가 가꾸고 있는 싱그러운 풀들로 어디 동화 속 나라에 온 듯 착각을 할 정도였다.
서너 시간 함께 지내면서 친구는 잘 정돈한 공작 공구를 보여주고 가꾸는 풀들한테 적당한 양의 물을 뿌려주었다. 삭막한 도심에서 친구같이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아는 나는 마음 뿌듯했다. 아내가 친구보고 내 허물을 털어놓으며 흉을 보아도 괜찮았다. 악어와 악어새만이 공생 관계가 아니었다. 나무는 사람에게 산소를 주고 사람은 나무에게 이산화탄소를 주지 않은가. 사람과 숲도 공생관계다.
사람이 흙을 가까이 하고 풀을 가까이 하는 것은 그만큼 착하게 산다는 징표다. 요즘 세태 드물게 무욕 무심의 경지에서 세상을 관조하는 사는 친구가 정말 부러웠다. 그는 이 시대 보기 드문 자연인이다. 그가 진정한 우리 토종이며 자연산 친구였다. 친구와 같은 삶의 방식과 생활이 우리 주변으로 퍼져간다면 법이 필요 없고 신앙이 필요 없을 상 싶었다. 04년 8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