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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2강-눅12장54-59(징후)-luk1106019-(이 근호목사)
하나님의 말씀 누가복음 12장 54절에서 59절까지입니다. 신약성경 116페이지입니다.
누가복음 12:54-59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구름이 서에서 일어남을 보면 곧 말하기를 소나기가 오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고 남풍이 붊을 보면 말하기를 심히 더우리라 하나니 과연 그러하니라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또 어찌하여 옳은 것을 스스로 판단치 아니하느냐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에게 넘겨주어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두 가지를 나누어 설명합니다. 하나는 환경을 과학적으로 측정하는 것, 날씨 측정, 이런 것이 하나 있고, 다음에 인간에게는 눈으로 측정할 수 있는 환경이나 날씨 같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재판하는 재판관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현실도 네가 파악할 수 있어야 된다,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두 가지를 오늘 본문에서 다 거론하시는 거예요. 서풍이 불면 소나기가 오고 그리고 남풍이 불면 심히 덥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전부 그 것까지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만 생각해 버리면 세상전부를 알았다고 할 수가 없다는 거예요. 그것은 세상전부에 대해서 다 안다고 주장할 수 없는 것인데 왜냐하면 그 안에서 재판장이 이 시대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그것도 알아야 된다는 거지요.
이 두 가지, 천계, 날씨를 판단하는 것과 우리 가운데 우리를 심판하실 심판주가 함께 있다는 것이 어떻게 엮여지느냐 그 문제입니다. 예수님 믿는다고 해서 날씨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고 이 날씨를 보면서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는 안목을 가졌느냐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어떤 제약회사의 연구원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배아줄기세포를 연구해서 상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러면 사회에서는 그 분이 대단한 사람인데 그분이 천국에 가겠습니까? 뭔가 빠진 것이 있지요. 뭐가 빠졌습니까? 제약회사에서 중요한 약품이 될 것은 발명했는데 자기를 심판하실 예수님이 어떤 기준을 가지고 심판하는가 하는 것은 연구실에서 연구를 통해서 밝혀지지를 않았던 겁니다. 달리 이야기해서 어떤 목사가 개척을 했는데 3년 만에 교인을 한 2백 명 모았다 칩시다.
그래서 사람들이 참 부러워들 하는 거예요. ‘네가 참 재주도 좋다. 어떻게 안정권에 들어간 거야?’ 하는데 문제는 개척교회 성공한 그것이 그 사람을 구원하고 그 사람이 천국가게 할 수 있느냐, 그겁니다.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과학적으로 이런 약을 개발하고 천기를 구분할 줄 알고 사업에 성공한 것을 가지고 그만 그것으로 천국 가는 것으로 때웁시다, 라는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내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니까 그냥 때우자는 거예요. 최 경주 선수가 골프를 잘 치니까 골프 잘 치는 그것으로 그만 때워주세요, 그것으로 그만 넘어갑시다, 그렇게 된다는 말이지요. 수능시험 합격한 것으로 천국 간 것으로 넘어가자는 거지요. 애들 네 명 다섯 명 잘 키운 그것을 천국 간다고 간주해 주자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 하시는 말씀이, 재판할 때 그 재판의 기준이 있어요. 그 기준은 기상통보관이 내놓는 기준과 다릅니다. 골프선수가 골프 할 때의 그 기준하고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심판의 그 기준이 달라요. 그 심판의 기준을 오늘 파악해야 됩니다. 이것 파악 못하면 태풍 메아리가 북상하든 말든 별 소용없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천기, 날씨를 잘 알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력인데 주님께서는 무슨 기준으로 우리를 재판하려고 하시는가? 하나의 예를 들어서 태풍이 온다 하는데 사실은 태풍이라는 것, 태풍 자체가 없어요. 바람이 불어서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물방울이 튀고 큰 폭풍우가 바다로 밀려오면서 파도가 방파제를 넘치는 이 모든 변화를 천기를 따지는 우리 인간들이 보기를 태풍이라고 치자, 라고 한 겁니다.
태풍은 없고 그렇게 여러 가지 변화를 뭉쳐서 태풍이라고 이름 짓는 인간이 있지요. 인간이 이 땅에 살면서 여러 이름을 짓지요. 살구나무라고 하자, 해서 짓고 고양이라고 하자, 이름을 짓는 인간 자신밖에 없어요. 그래서 성경에서 ‘재판관이 이 시대에 너와 함께 있다.’고 하면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느냐, 이 세상에는 우리 밖에 없다는 거예요.
더 극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나 밖에 없’어요. 안방에 앉아 있으면 그 안방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자기 홀로 앉아 있는 거예요. 천상천하유아독존이지요. ‘재판을 누가 하는가, 누가 감히 나를 재판하는가?’ 내가 비바람 치는 그것을 두고 태풍이라고 이름 짓는 이유는 그냥 그 바람 부는 그것이 좋아서가 아니라 태풍 이름 지음으로 내가 나를 보호하려고 하는 겁니다.
사람이라 하는 것은 자기한테 이득이 안 되면 도통 다른 것에 관심이 없게 되어 있어요. ‘누가 감히 나를 재판해. 나는 내가 재판한다고, 내가. 내 잘잘못은 내가 알아서 다 내가 판단하는데 누가 감히 날 재판하는데? 내가 제약회사에서 약을 만들어서 많은 사람의 병을 고치고 돈도 벌었다. 이렇게 훌륭한 나를 지옥에 보낸다는 자가 누군데? 감히 나를, 한 평생 이 약을 개발하는데 다 바친 몸인데 이 대견한 나를 누가 심판하는데!’ 이렇게 나올 겁니다.
야구장의 수많은 관중이 모여서 야구를 하는데 전부 다 ‘엘 쥐 이겨라.’ 응원하고 있는데 저 한쪽에서 ‘양 준○이 지옥 간다.’ 해 보세요. 실제로 그런 것이 아니고 만일에 그런다면 기가 찰 겁니다. 올림픽 카메라 이동할 때 보면 꼭 이런 사람이 있어요. 피켓에 ‘JOHN 3:16’ 이라고 해놓았어요. 이게 뭐냐, 요한복음 3장 16절을 써 놓은 거예요.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제 눈에는 그것만 보여요. ‘하나님은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 대목을 붙여 놓은 거예요. 사람들이 이미 자기가 자기를 재판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기를 재판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재판관을 요청하지를 않아요. 여기서 예수님의 이 모든 성경말씀은 예수님의 심정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고 이것을 우리가 지키려고 하면 안돼요. 제가 수천 번을 이야기했습니다. 제발 성경말씀 좀 지키지 말라고. ‘성경말씀 지키지 마라.’ ‘왜?’ ‘성경말씀은 예수님이 지키는데 왜 네가 건방을 떠는가?’ 교만이 다른 것이 아니에요. 자기가 성경말씀 지키겠다고 나서는 그것이 교만덩어리입니다. 성경말씀 지켜서 지금 ‘나’라는 생산물을 만들어낸 거예요.
‘우리 안에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빌립보서에 나오잖아요. 왜 자꾸 자기가 지키려고 합니까? 자기가 성경말씀을 지키려면 자기가 판단을 해야 돼요. 건방지게 예수님의 말씀을 인간이 판단을 해서 자기 좋은 쪽으로 지켰다, 하고 위장을 해요. 지킬 수도 없는 이야기인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재판장이 너와 함께 있다.’ 할 때 우리는 뭘 생각해야 되느냐하면 ‘나는 그동안 그 정도만 하면 인간답게 살았다고 자부를 했는데 그렇다면 우리와 함께 계시는 예수님은 우리한테 무슨 기준을 적용시킬 겁니까? 나는 내 기준 따로 있어서 내 행동 절도 있게……, 이런 행동 하면 짐승이야, 이것은 악한 짓이야, 이런 식으로 자기기준이 있는데 그 기준을 예수님이 동의할 일은 없을 것인데 예수님께서는 무슨 기준을 가지고 우리에게 적용시킬 것인가?’ 하면서 예수님의 그 다음 말에 우리가 유념해야 되겠지요.
그것이 58절부터 나옵니다.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재판장이 너를 관속(법집행공무원)에게 넘겨주어 그 관속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네게 이르노니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갚지 아니하여서는 결단코 저기가 나오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것의 해답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의 날씨를 두고 이야기한 것은 이 세상에 변화가 있다는 겁니다. 쉽게 하겠습니다. 구름의 모양새가 한결같지 않지요. 우리는 구름을 보면서 ‘먹구름이 끼었으니 비가 오겠네.’라고 합니다. 먹구름을 볼 때 나는 고정되어 있고 구름은 변화한다고 보는 겁니다.
구름이 이걸 보면 웃기는 이야기입니다. ‘너도 변한다. 너도!’ 너도 변하는 거예요. 바람 하고 파도하고 비하고 섞여서 태풍이 된다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말합니다. ‘야, 태풍이 올 때는 바람도 변하고 빗방울도 뿌리고 구름도 변하는구나.’ 라고 하게 되면 듣는 구름, 듣는 바람, 듣는 빗방울이 기분 나빠요. ‘인간 네가 뭔데 우리를 뭉쳐서 한통속인양 태풍이라고 이름 짓고 규정하느냐? 대체 네가 뭐냐?’
그러면 우리는 묻지요. ‘그러면 구름아, 바람아, 너는 누구의 말을 듣는가?’ 그러면 ‘우리는 재판장의 말을 듣지.’ 예수님의 말을 듣는 거예요. 쉽게 한다고 해놓고 어렵게 되었네요. 세상이 변한다는 말을 누가 하느냐, 인간들이 하는데 그런 말을 할 때 전제가 뭐냐, 인간은 안변하고 자기는 고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 해와 달과 별이 또는 해바라기가 인간을 보면 인간은 참 가관이다 그 말이죠. ‘너는 아침 다르고 저녁이 달라. 너는 네 마음도 몰라.’ 아이리스라는 트롯 여자가수가 전 남자 친구에게 60여 군데를 찔려서 죽었다는 거예요. 그 남자친구가 경찰에 잡혔는데 이유를 물으니 욱 하는 성질에 그랬다는 겁니다. 욱, 그것이 본심이에요. 그게 뭐냐, 인간은 언제 어떻게 돌변할지 모른답니다.
지하철에서 어떤 할머니가 자기 애 만졌다고 패트 병으로 할머니를 폭행한 젊은 아줌마가 있었어요. 왜 그렇게 했겠어요. 욱! 하는 성질 때문에 그런 거지요. 우리가 지금 젊잖게 앉아 있지만 누가 건드려 보세요. 욱, 하고 튀어나와버립니다. 이 말은 뭐냐, 아주 고상하게 말해서 사람은 어디로 튈지를 본인이 몰라요. 본인이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괜찮은데 인간이 얼마나 못됐는지 욱 하는 성질을 밑에다 집어넣어놓고는 자기는 고정되어 있다는 겁니다.
또는 고정되도록 노력하고 있는 중이라는 겁니다. ‘욱 하는 성질을 잘 다스리고 있는 나를 제발 건드리지 말라. 나 건드리면 진짜 욱 한다.’ 그렇게 나오지요.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구름 같아서 바람 같아서 상황 따라 달라져요. 오죽 했으면 ‘그대 이름은 바담(바람), 바담, 바담’이라고 했을까요, 오죽했으면.
메아리만 태풍이 아니고 김 태풍, 이 태풍, 전부 다 태풍이에요. 태풍이 들어앉아 있어요. ‘당신 태풍이다.’ 해보세요. 기분 나빠합니다. ‘나는 고정되어 있다. 나는 정신 차리고 있다.’ 합니다. 사람이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면서도, 늘 상 변화하면서도, 어떤 상황이 닥치면 욱, 욱 하는 성질이 나오기 마련인 인간이면서도 그렇게도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 자기는 잘났다, 자기는 의롭대요.
노력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무엇을 위한 노력인데? 자기는 욱, 이 아니고 자기는 신이라고 우기는 그 노력을 하고 있는 중이지요. ‘재판관이 날 재판할 필요 없습니다. 내가 알아서 날 잘 추스르고 있습니다.’ 그런 자아를 지금 만들고 있어요. 변화되는 나를 왜 자꾸 우기는가하면 고정화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애를 쓰는 겁니다.
자기를 고정화시킬 때 동원되는 것이 뭐냐, ‘법’입니다. 법! 그 법을 누가 제정하는가? 본인이 본인의 법을 제정하는 거예요. 1941년 폴란드 남부지방에 아우슈비츠라는 곳이 있었어요. 말 키우는 사육장인데 독일의 헤스라는 사령관이 와서 그곳을 포로수용소로 만듭니다. 폴란드 포로들 먼저 죽이고 러시아포로들 죽이고 그 다음에 독일의 장애자들 죽이고 마지막에 유대인들을 독가스로 학살합니다.
독가스로 죽이기 전에는 구덩이를 파놓고 총알로 쏴서 죽였어요. 그때 포로들 사살하는데 참여했던 독일 병사를 나중에 인터뷰를 했어요. ‘저 죄 없는 유대인 여자나 아이들 죽일 때 그 심정이 어땠습니까?’ 하니까 ‘다른 생각은 나지 않고 조준을 잘 해야 되겠다.’는 생각만 들었다는 거예요.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세월이 지나가서 지금 보니 유대인 죽인 것이 나쁜 짓이라고 여기지만 사람은 지나간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할 것이 뭐냐 그것만 생각하는 것이 인간이에요. 지나오고 난 뒤에 그것은 오해였다, 심했다, 잘못이다, 그렇게 하지만 그것은 후차적으로 판단하는 것이지 지금 나는 어떻게 조준을 잘하면 상관으로부터 잘 죽였다고 법적으로 하자 없는 인간이 되느냐, 그것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아우슈비츠에 갇혔던 정치범들이 히틀러를 그렇게도 미워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 당시에 정치범으로 수용되었던 죄수에게 물었어요. ‘그때 그렇게 잡힌 것이 화가 나지요?’ 하니까 ‘아니요.’ 그러면 뭐가 화가 납니까? ‘나를 잡아 가둔 사람에 대해서는 전혀 화가 나지 않고 자기 빵을 훔쳐 먹은 동료가 더 밉습니다.
사람이 자기를 억압하면 자기를 억압한 그 사람에게 아부를 하게 되어있지 도전하거나 미워하지 않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하는 사람을 두고 두 자로 ‘목사’라고 합니다. 이게 바로 목사에요. 큰 교회 목사입니다. 전두환처럼 조져야 교인들이 말을 들어요. 그것을 두 글자로 ‘목사’라고 하는데 네 글자로 풀어내면 ‘카리스마’라고 합니다.
카리스마, 그 자체가 법이기 때문에 뭐든지 정당해요. 그래서 교회에는 주님이 안 계십니다. 왜냐하면 목사의 법이 주님을 대신하기 때문에 주님이 안 계셔요. 만약에 주님이 계셔버리면 그 목사는 자신이 고정적인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발각 당하게 됩니다. 그것이 무서운 거예요. 그래서 교회는 성령도 없고 주님도 없어요.
고정된 것은 이미 확정적입니다. 그게 무슨 자리인가, 당회장 자리입니다. 그 확정된 자리로서 종료에요. 교회의 종결 자는 목사입니다. 그 안에서 성령이야기하고 주님 이야기하면 그것은 눈치도 없고 코치도 없는 사람이 돼요. 수용소입니다. 아우슈비츠에요. 검투사들이 죽일까 살릴까 하고 쳐다보고 있으면 로마황제가 엄지손가락을 아래로 내리면 죽이고 위로 치켜들면 봐주고 살려주는 것, 이게 조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그리워해요. 왜, 그 조직이 굉장히 고정되어 보이잖아요. 고정되면 안정되잖아요. 안정되면 안정된 집단속에서 나는 더불어 안정되니까. 나는 더 이상 태풍이 아니니까. 드라마에서 재벌 2세나 3세하고 사귄 비천한 아가씨의 신분이 바뀌지요. 그 재벌 3세와 연애해서 회사 인수해서 잘 키운다는 이야기인데, 왜 재벌 2세나 3세를 그렇게도 좋아할까요?
안정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가씨 저와 결혼해 주시겠습니까?’ ‘뭘 보고?’ ‘우리 집 부도났거든요. 빚쟁이에 몰려서 쫓겨나올 판국인데요.’ 이런 식으로 나오면 그 드라마 되지를 않지요. 사람이라 하는 것은 안정된 것을 원하고 안정된 것을 원한다는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미워할 수 없는 존재가 나라는 겁니다.
내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내가 나를 사랑하는 그것을 키워보기 위해서 법들을 전부 배치를 해 놓는 겁니다. 이것은 따로 누가 나를 재판할 필요 없어요. 이미 나는 나를 재판했어요. ‘나는 나를 사랑한다.’ 그것으로 끝나버렸어요. 무슨 재판장이 따로 필요합니까? 나는 사랑받기를 원하고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한 조항들만 주변에 쫙 깔아놓았는데 그것으로 끝이지 무슨 재판장이 또 필요합니까?
교회와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어요. 광주 가서 그런 강의 했지만 주님께서 언제 우리보고 교회 만들라고 성경책 준 적이 있습니까, 신학을 하라고 성경책을 줬습니까, 예수님이 오신 것은 ‘네 죄를 인하여 내가 죽고 네 의를 인하여 내가 살아났다.’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을 믿으라고 주께서 오셨는데 인간들은 예수님의 그 성경책을 가지고 교회를 만들어내요.
왜 교회를 만드는가, 교회를 만들어내야 그것이 안정되니까, 그런 교회를 다니면 자기가 안정되니까, 그 안에서는 자기가 정당해지고 평소에 생각했던 나의 나 사랑하는 그 성격에 합치되면서 그 안에서 나는 사랑받을만하다, 라고 확인되는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렇게 합니다. ‘너는 바람하고 빗방울하고 똑같은 너 자신이 네가 누군지를 고정할 자격도 없다.’ 는 겁니다. ‘너는 변화된다.’는 거예요.
주님께서 인간들로 하여금 변화를 주시는 이유는 진짜 고정된 분은 이 재판장, 주님만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아무리 태풍을 연구하고 태풍의 진로를 연구하고 기압을 연구해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 태풍이라는 것은 나를 위해서 내가 나 보기 좋도록 하는 관점을 가지고 태풍을 보기에 그렇습니다.
변화하는 그것을 고정화하려고 하니까 거기서는 어떤 해답도 안 나오고 어떤 진리도 안 나오게 되어 있어요. 고슴도치가 자기 새끼보고 예쁘다고 하는 것은 고슴도치가 자기 새끼보고 하는 것이지 가시 많은 그것을 사람들은 예쁘다고 하지 않습니다. 싱크대에서 벌레 나오면 사람들은 놀라지요. 싱크대에서 커다란 벌레가 튀어나와서 제 아내가 무지 놀랬어요.
평소에 잘 안 놀라는데 놀라는 소리가 들려고 가보니까 진짜 벌레가 커다란 것이 나왔어요. 신문지에 주워서 넣었는데 그 벌레를 보고 인간이 놀랠 때 그 벌레가 얼마나 기가 차겠습니까? ‘내가 더 놀랬다. 왜 자꾸 네 입장만 생각하니? 거울 보니 내 모습이 예쁘기만 하구만. 뭐가 그렇게 놀랄 일이냐?’ 그 말이지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예수님의 고정됨을 위해서 다 있는 것인데 자기 좋아라, 하는 식으로 자기 맘대로 다 해석해버리잖아요. 킬라 쳐버리고 쓰레기통에 집어넣어 버리고. 다시 말씀드립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세상의 변화를 준 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는 그 기준을 보여주기 위해서 다 배치된 거예요.
그 심판주가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느냐하면, 이미 인간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들은 헌금을 해도 다 자기 사랑하기 위해서 헌금을 하는데 성경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네가 미워 죽겠을 경우에만 헌금을 하라는 말이지요. 헌금을 하면서 막 미워 죽겠어, 그러면 헌금 하라는 말이지요.
예배 참석할 때는 내가 너무 싫고 미워서 예배 참석하라는 말이지요. 이야기를 하고 보니 말이 안 되는 것 같은 이야기를 하고 말았는데 진짜입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나와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어버릴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하도록 보존하리라.”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할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해서 나에게 영생주기 위해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그 영생이 주입되는 노선 자체에서 이탈되어버렸어요. 내가 이 사회에서 영생을 꼭 가져야 되겠다는 그 자체가 예수님의 기준에서는 엉터리 같은 소리예요. 이미 기준에서 벗어난 겁니다. 차라리 이렇게 해야 돼요. ‘주여!’ ‘왜?’ ‘나는 주님 앞에서 날 사랑하는 내가 너무 미워요.’
딩동! 그게 정답이에요. 무슨 행동을 해도 그저 나 좋으라고 행동하는 내가 나의 구원을 방해합니다. 이런 것은 줄 좀 그어놓으세요. 나의 구원을 누가 방해하느냐, 내가 방해해요. 주님이 구원을 줘도 내가 그것을 바꿔치기 한다니까요. 주님이 주시는 구원을 그냥 받으면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바꿔쳐서 교회 만들기에 나서요.
교회 만들고 우리 가정은 모태신앙이라고, 그것 자랑하고. 그런 것 왜 자랑합니까? 주시는 것을 고스란히 받기에는 나라는 가치가 너무나 무가치하니까. 평소에 악마의 속성대로 하면 나는 나만 사랑해야 되는데 주님 주시는 영생이 거저 들어오니 나는 그 앞에서 쪼다가 되고 무익한 종이 되니까 그런 내가 싫은 거예요.
그것은 신자가 불신자가 똑같아요. 주님의 기준을 싫어하는 것은 신자나 불신자나 똑같은데 천국 는 사람은 주님의 일을 싫어하는 그 내가 바로 싫어지고 그 내가 바로 죄인이라고 고백되어 진다는 겁니다. 나밖에 모르고 예수님이든 삼위일체든 전부 다 나 좋으라고 가져오고. 이런 바람 같은 인간, 구름 같은 인간인데 주께서 다루시면 아무리 고상을 떨고 점잖을 떨어도, 김 고상, 박 고상, 해도 욱! 하면 그 한 번의 욱 한 것이 여자친구를 60번이나 찔러 죽이잖아요.
그 아가씨도 성질 돌긴 많이 돈 모양이다. 그런데 그렇게 성질 돋우게 하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지금도 구름의 모양을 바꾸시고 태풍을 불게 하시는 주님의 임의로운 사건 유발성에 있는 겁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남녀 간에 좋아할 때는 수천 번 이야기해도 딱 한마디……, 어떤 부부가 냉면집에 갔는데 남편이 먼저 가버렸어요. 왜 그랬나 하니까 냉면 먼저 다 먹어서 먼저 가버렸어요. 아내는 미처 다 못 먹었는데.
그 부부 이혼했습니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나 좋으라고 너를 사랑하니까 너도 내가 좋아하는 것만큼 나를 좋아해 줘, 그 이야기였습니다. 아, 그 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사랑해.’라고 해 버렸네요. 그 길고 긴 이야기를. 사랑, 사랑 해 봐야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너무 길어서 다시 해 봅시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은 너를 사랑하는 내가 나에게 너무 예쁘니까 너도 나를 예뻐하는 일에 동조해줘.’ 동조 안하면 60군데 이상 찌르겠다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실은 신자건 불신자건 인간은 똑같은 거예요. 바로 이 사실, 이런 욱 하는 성질은 죄를 지어서가 아니라 당연한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으로서 십자가 앞에서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동안 욱, 욱 하지 않은 것은 주께서 내 주변에 그런 사태를 안 일으켜서 그렇게 안한 것뿐이에요. 인간은 자기 사랑을 조금도 포기할 의사가 없는 겁니다. 이제 본문에서 남은 문제가 있어요. 심판 이야기를 했는데 그렇게 심판, 심판, 심판, 다 심판해서 무질러 버리면 구원은 어디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참 어렵다, 정말! 주께서는 ‘호리라도 남김없이 다 갚지 않으면 지옥에서 못나온다.’고 하는데, 그런 심판주가 우리와 함께 있다는데 그렇게 심판, 심판 해 버리면 구원 얻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 않는가, 그러면 어디서 구원이 나오는가, 그 문제에요. 이사야 6장에 보면 이사야가 웃시야 죽던 해에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천사들과 만납니다.
그 때 이사야 선지자가 하는 말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 뒤에 중요한 말이 나와요. ‘나는 망하는 백성 중에 한 사람’이라고 한 겁니다. 이 말을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나 이사야는 하나님이 다루시는 하나의 집단속에 소속되어 있다.’ 그 말이에요. 하나님이 다루시는 게 뭐냐, 이스라엘 유다나라는 망하는 백성이어야 한다. 그 망하는 백성중의 한 사람이 누구다? 그 한사람이 바로 본인인 거예요.
그렇다면 거기서 이미 ‘내가 어떻게 구원받겠습니까?’ 하는 문제는 우리 선에서는 해당이 안 되지요. 이미 떠나버렸어요. 왜냐하면 그 집단자체가 하나님이 일을 하시고자 만들어놓은 집단이거든요. 어떤 일? ‘이래서 너는 망해야 마땅해.’ ‘화로다 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을 고백해야 될 집단으로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렇게 해 놓고 그 다음에,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아까 제가 제기했지요, 화로다 망하게 되었다, 해서 다 지옥가야 마땅하고 구원은 입도 떼지 말라 했는데 입 닫아 버리면 구원은 누가 받느냐, 하는 그 문제가 있지요. 어떻게 구원하는가하면 그 다음 작업에 주님께서 ‘내 계속되는 일을 하기 위해서 누가 가지?’ 할 때에 이사야가 나섭니다.
이사야가 나설 때에 이사야에게 하는 말이 뭐냐, 잘라내기를 해요. 어떻게 잘라내기를 하는가, 이사야 6장 13절에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찌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거룩한 씨가 유다나라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유다백성은 망하는 백성이라고 알려지게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거룩한 씨가 없는 민족, 필리핀이나 그 당시의 이방민족들인 바벨론이나 앗수르같은 민족에게는 거룩한 씨가 없기 때문에 유다민족은 망해야 되는 민족인지 뭔지 그것조차도 모르는 거예요. 주제파악이 안 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그 거룩한 씨를 찾아가는 작업을 해주는데 그 거룩한 씨가 이사야의 자손에게서 태어납니다. 그 분이 네 자로 임마누엘이에요. 이사야가 어떻게 구원받느냐의 문제는 여기에 전혀 나오지를 않습니다. 이사야가 구원받는 문제가 아니라 이사야가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 하는 것을 고백하게 만든 거룩한 씨가 유다백성 속에 들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그 사람이 거룩한 씨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겁니다. 어떻게? ‘화로다 망하게 된’ 자에게 죄 사함이 주어져요. 그 이름이 뭐냐, ‘예수’입니다. 자기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에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건질 자, 예수를 찾지 마세요. 예수라는 기능을 하는 분을 찾으세요. 예수라는 이름은 개나 소나 다 붙일 수가 있어요.
예수님이 하는 기능을 위하여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의 기능을 해야 될 이사야가 예수님오시기 700년 전에 먼저 이 땅에 태어나서 주께서는 그 시대에 잘라내는 작업을 시킨 겁니다.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라는 것은 잘라내는 작업을 하는 거예요. 어릴 때 여러분이 모래위에 나무젓가락을 하나 세워놓고 흙을 살살 파내면서 최후에 그 젓가락을 넘어뜨리는 자가 탈락하는 게임을 해 봤을 거예요. 요즘 애들이야 그런 것 할 시간도 없지만.
그 게임하는데 아슬아슬 하지요. 마지막 남은, 마지막 남은, 그 마지막 남은 자를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갈 때 마지막 남은 자와 관계없는 것은 다 떼어내 버려야 돼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 다 분리시켜서 내 쫓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말하기를 ‘나는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죽으심 외에는 알지 않기를 원한다.’ 하는 그 복음, 어리석은 그 십자가만이 예수 그리스도, 이 세상에 함께 있는 재판장이 누구냐를 찾아내는 하나의 경로가 되는 거예요.
이것은 시간이 좀 가도 이야기를 해야 되겠어요. 고린도전서 6장 2절에서 5절에 보면 교회끼리 재판하니까 사도바울이 하는 말이, 성도 간에 재판하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하는 말이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의 판단을 받겠거든(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의 재판장이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치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일이랴.”
‘심지어 천사도 우리한테 재판을 받아야 하는데 어떻게 너희들이 시시한 돈 문제가 가지고 세상의 판사들 앞에, 지옥갈 판사들 앞에 왜 서느냐?’ 이것인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 법이 아니고 주께서 잘라내는 법이 따로 있다는 겁니다. 주께서 잘라내는 법이 뭐냐 하면, ‘화로다 망하게 되었구나.’의 고백을 하는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불쌍히 여겨주는, 사랑으로서 건지는 그 기준, 그 기준으로 주께서는 잘라내는, 쓸데없는 지옥 갈 것들을 잘라내는 그 작업이 재판입니다.
모든 율법은 사랑인데 그 사랑은 우리가 알 수 없어요. 우리는 우리 사랑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에. 고정된 사랑이기 때문에 한번 준 사랑은 영원합니다. 우리의 사랑은 백날 해 봐야 나중에 한 번 욱, 하면 끝나버려요. 왜, 우리는 고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것은 말이 그렇게 되고 싶다는 것이지 자기 몸이 아프고 심신이 피곤하면 모든 것이 짜증나는데 그 짜증나는 입장에서 누굴 사랑한다는 말입니까?
사랑하려고 애쓰겠지요. 그러나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남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는 어떤 것도 성경말씀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왜, 그 성경말씀은 자기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이미 출발부터 잘못되었기에 그 말씀을 지켰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자기 사랑한 것밖에는 안돼요.
태풍에서 예수님이 안 나오듯이 성경말씀 지키면서 아무리 봐도 자기사랑이 나오지 예수님 사랑이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러면 언제 나오는가, 성경말씀 보니 ‘화로다 망하게 되었군요. 말씀 지키는 주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데 구지 그 말씀을 내 법칙 따라 지키려고 하는 내가 이렇게 못됐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순간이 바로 예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순간이고 그게 바로 사랑의 관계로 엮여지는 관계입니다.
바로 그 사랑만이 우리가 이 세상을 심판할 수 있는 재판장으로서 이 어두운 시대를 살고 있는 거예요. 그 재판장의 기능을 하고 있고. 우리는 외쳐야 돼요. ‘그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외쳐야 돼요. ‘그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신학은 신학도 아닙니다. 그것도 아니에요. 제약회사가 신약 개발했다고 그것으로 구원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목회 성공했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이 아닙니다.’ 자꾸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야 돼요.
‘그럼 너는 뭔데? 너는 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 건데?’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입니다. 아무도 그분을 사랑한 적 없기 때문에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중간에 훼손하거나 그것을 취소시킬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우리가 주님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판명난 입장이에요. 이미 판명 난 입장, 아무리 해도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 기정사실화된 그 인간을 일방적으로 예수님이 사랑했기 때문에 그 일방적인 사랑을 우리가 취소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어요.
이것이 바로 주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사람은 자기가 기준이 되어서 말씀 지켜서 어쨌든 간에 자기가 의롭고 자기는 사랑받을 만하다, 이렇게 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사랑하는데 너무 관심이 크고 거기에 몰두하다 보니까 예수님은 뒷전이라.
그것이 주님의 재판 앞에서, 주님이 주신 사랑 앞에서 얼마나 더러운 것인지 완전히 발각되어서 ‘망해도 내가 망한 놈입니다. 내가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나쁜 놈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그 자체가 주님의 사랑의 능력입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효과가 그렇게 나타나는 겁니다. 어떤 말씀도 지키지 마세요. 이제 이것은 막살라는 말보다 더 심한 말을 하고 있어요.
어떤 말씀도 지키지 마세요. 주의 사랑이 여러분과 함께 있으면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을 통해서 여러분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미워, 미워, 미워, 내가 미워.’ 그 주님의 사랑을 방해하는 것도 나요, 주님의 사랑을 내 영광으로 돌리는 것도 나요, 주님의 피로 다 용서했는데 주님의 말씀을 가지고 남보다 더 착하다고 우기는 것도 나요, 그래서 무가치한 인간 안 되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것도 나요, 비 내리는 것도 태풍 오는 것도 다 주님 말 듣고 하는데 ‘지금쯤 태풍이 와야 될 것인데 역시 내 기도는 효과가 있어.’ 이렇게 까불거리고 촐랑거리는 그것도 나요. 뭐든지 내 중심이고 나밖에 모르는 그런 모습. 그것은 이 세상에 나만 홀로 있지 않다는 겁니다.
이제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누가복음 12장 58절에 보면 “네가 너를 고소할 자와 함께 법관에게 갈 때에 길에서 화해하기를 힘쓰라 저가 너를 재판장에게 끌어가고.” 여기에 길이라는 말이 나오지요. 참, 하나님께서 저주받을 자를 그냥 저주해도 되는데 아직도 길을 주셨습니다. 길, 마지막 심판 앞에서 기회를 주셨어요. 이 말은 지금도 구원중이라는 뜻이에요.
지금도 우리를 꾸준하게 구원하십니다. 끝없이 구원하시는데 그 구원이 뭐냐 하면, 우리의 변화를 통해서 구원하십니다. 많은 변화를 겪으세요. 오늘 설교는 이렇게 끝납니다. 욱! 하세요. 망치를 들고 다니든지 하여튼 욱! 하세요. 그것을 통해서 내 인생 내가 책임질 자가 아니라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세요. 나는 어디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존재인 것을 매일같이 솔직하게 인정하십시다. 그리고 맡깁시다.
‘주여, 저 저 안 믿어요. 저 예수 십자가의 피 믿습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성령 받을 때 비로소 예수 믿는 사람 되는 거예요.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사랑 죽을 때까지 변하지 않는 것인데 남이야 죽든 말든 예수야 어떻든 말든 관심도 없고 내 것 잘 있으면 그것을 행복이라고 느끼는, 내 가치 유지되면 그것을 성공이라고 보는, 단지 그것, 단지 그것밖에 생각할 줄 모르는 꽁생원 같은 우리들 주께서 이미 십자가 지시고 그것이 바로 너밖에 모르고 너만 살아 있는 엉터리 같은 세상인 것을 깨우쳐주시니 감사합니다. 이 십자가 하나님의 죽으심이 그 안에서 책망으로 나온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랑으로 증거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