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바라기
눈이 내린다며 따스하고 예쁜 마음을 사진으로 보내주는 사람. 함박눈이 내리는 공원을 영상에 담아서 보내주는 사람. 눈을 보니 갑자기 보고 싶어서 화상전화를 걸어주는 사람. 얼마나 좋을까요? 지치고 힘들고 정신없이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잠시 추억에 잠기기도 하고 마음을 풀어놓고 그리운 사람에게 전화도 하면서 말랑말랑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생각 하면, 눈 보기가 어려운 경산에 살아도 행복해진다. 올해는 첫눈이 아주 잠시 흩날렸던 하루가 기억에 아련하다.
눈이 온다는 예보에 혹시나 하는 기대를 잔뜩 하다가 풀 죽어 실망도 하다가를 며칠째 하고 있다. 이제는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눈이 내릴 확률이 80%라고 할 때는 내심 한 번 기대도 하면서 창가를 들락날락하며 보내기도 했다.
예전에는 강원도 정선으로 진부령으로 한계령으로 눈을 만나러 가기도 했다. 그때는 내 마음이 눈을 못 보면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지나고 보니 참으로 열정적으로 살아낸 것 같다. 이제는 가까운 곳으로 찾으러 다닌다. 간절한 마음은 때로는 기적을 선물한다.
아침에 먼 산에 하얗게 눈이 쌓인 풍경이 보였다. 어디쯤일까? 영천 보현산에 가면 눈을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팔공산에도 하얗게 눈이 덮였다. 그리움이 깊으면 그늘이 지는 법이라고 했다. 순리대로 지내자고 마음을 내려놓고 눈이 귀한 경산에서 살지만, 겨울 끝에서 여기저기 눈이 온다고 하니 마음 깊은 곳에서 참고 참았던 그리움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래, 갑시다, 눈 구경!
보현산을 향해서 달렸다. 가는 길에는 눈이라고는 흔적 하나 없는 정말 말짱한 겨울 숲이다. 헐벗은 몸으로 겨울을 보내는 은행나무와 벚나무의 당당함이 봄을 부르고 있었다. 영천으로 들어서니 먼 산이 희끗희끗하게 새치가 난 중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염색을 몇 살부터 하기 시작했더라? 생각하면서 골골 사이에 쌓인 눈이 마치 나를 부르는 여신처럼 느껴졌다.
횡계 저수지를 지나갔다. 작년 새해 첫날에는 이곳에서 첫눈을 만났다. 운이 좋게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꽁꽁 얼어붙은 횡계 저수지에서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보았다. 하얗게 쌓인 눈밭에서 얼마나 행복해했던가! 아이처럼 말이다. 앞이 보이지 않게 눈이 내렸었다.
횡계 저수지는 물보라를 일으키며 찰랑찰랑 춤을 추고 있다. 작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매력적인 여자를 보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예쁜 저수지이었다. 설원에서 아이처럼 뛰어놀던 시간이 스치고 지나갔다. 올해는 겨울이 따스하다. 보현산 입구에는 우리처럼 눈을 만나러 찾아온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입구에서 자동차는 올라가면 길이 미끄러워 위험하다고 말렸다. 눈이 많이 내린 모양이다. 여기는 딴 세상처럼 하얗게 변해있었다. 순간 감사한 마음에 울컥했다. 내 기도를 들어준 것 같아서다. 힐링 숲으로 가는 길이 눈밭이다. 눈 위에 드러누워 어려서 친구들과 하던‘사진찍기’ 놀이도 했다. 이렇게 좋을까? 내가 생각해도 믿기지 않은 기쁨이다. 겨울 태생인 까닭인가? 눈에 대한 추억이 많아서일까?
한 시간 넘게 걸으면서 눈의 왕국에 온 기분이었다. 간절하면 이뤄진다는 말이 생각났다. 우리처럼 눈을 보러 온 사람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더니 “기분이 좋으신가 봐요?”라고 묻는다. “눈을 보니까 너무 좋아요” 했더니 “다 같은 마음인가 봅니다. 우리도 너무 좋습니다.” 남편은 손가락이 아프도록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는다. 사랑하는 마음이 보여서 나도 그를 카메라에 수시로 담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보여주는 이 남자가 가장 오래된 연인이다. ‘연인 눈사람’을 만들어놓고 내려왔다. 지나가는 사람들 마음에 가장 예쁜 겨울로 남기를 바라본다. - 2024년2월23일 -